< 덕언 : 가상칠언 세번째, 주님의 인성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23절부터 요한복음 19장 몇 절 읽겠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3-27).
제가 주님 십자가에서 7번 말씀하신, 이제 그 말씀들을 쭉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의 배경은 주님 십자가에 이렇게 달리셨는데 등장하는 사람이 4명의 군인과 4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4명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집행한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 자기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 피 흘리고 계신 주님을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자기 이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옷을 가져가고, 이제 주님은 완전히 벌거벗긴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주님을 수치스럽게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로 이제 아버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도해 주셨습니다.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이제 이와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는 믿지 않은 사람이 주님 십자가 옆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 4명의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여자들입니다. 이 여자들은 주님이 죽으시는 이 광경 앞에 와 있는데요. 왜 와 있냐 그러면 사랑이 두려움을 쫓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광경입니다. 끔찍한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제 이제 8명, 4명씩 4명씩, 이제 사람이 와 있는 이 배경을 놓고 이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제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입니다." 주님이 아들이 아니고 사도 요한이 아들입니다,라고 사도 요한에게 "네 어머니다." 이제 이렇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 저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죽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순간이 언제냐 그러면 죽을 때입니다. 이제 자기가 죽을 때입니다. 언제 사람은 자기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느냐 하면 고통스러울 때입니다. 저희들이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다가도 자기가 아프거나 자기가 죽게 생기면 일단 자기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쓰고 계신 분, 유일하신 주님입니다. 주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게 주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하신 말씀, 회개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일곱마디를 하시지만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이 세 번째까지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고 계십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만이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어머니를 보시고, 마리아를 보시고, 마리아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이 마리아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있었을지를 누가복음 2장에 시므온이 예언했었습니다. 이제 주님 할례받기 위해서 이제 성전에 왔을 때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이, 이게 두 증인입니다. 두 증인이 이 아이가 구세주인 것을 증거합니다. 시므온은 어떻게 증거했냐면, 시므온에게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제 그가 평안하게 죽을 수 있게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통의 경우는 아이를 안고 아이를 축복합니다. 아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이 아이가 자라는 그가 살아가야 될 인생에 대해서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주님한테는 그렇게 안 합니다. 못합니다. 누구를 이야기했죠? 오히려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축복한 게 아니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이제 마리아가 주님 십자가 앞에 있을 것 내다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을 것이다." 이게 시므온이 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언된 말씀을 따라 지금 어떤 심정 가운데 있는지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리아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소서 아들입니다." 내가 당신 아들이 아니고 "여자여" 이렇게 하시죠. 공생애 처음에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공생의 마지막에 주님은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십니다. 분명하게 하신 거죠.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심으로써 주님이 사람으로 사셨지만,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어느 사람도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십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인성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 사람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현재 책임을 다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가장입니다. 이제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죠. 그런데 하여간 장남입니다. 그 집을 이끌어야 되는 가장입니다. 이제 가장으로서 어머니가 제 자신 없이 홀로, 이제 요셉은 일찍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마는, 그래서 주님이 이 가정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마리아 혼자 남아야 합니다. 이것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홀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네 어머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주님이 이제 12살 때 이렇게 소년으로 율법을 준행하시고, 그다음에 이제 이제 요셉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가정을 책임집니다. 무슨 일로 이 가정을 먹여 살렸느냐?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마는 주님께서 목수 일을 성실하게 하셔서 많은 필요한 돈들을 미리 저축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30세에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제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이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역을 하십니다. 그랬을 때 이 마리아와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자녀들, 이제 어떻게 살아가죠? 그래서 주님이 목수 일을 하시면서 충분한 돈을 저축하셔서 본인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남은 가족들이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와 같은 분별에 동의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십니다. 이제 마리아를 홀로 두고 주님은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아버지께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돼서 이제 영광스러운 십자가 십자가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그리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이 지상의 관계는 이 놀라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있었던 관계에 책임을 지고 계신 주님, 이게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입니다."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이제 사도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다." 이렇게 하고 있죠. 그런데 잠깐 사도요한을 살펴보면, 사도 요한은 방금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갔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제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제자들은 다 도망갑니다. 도망가다가 사도 요한이 아마 잠깐 정신이 든것 같아요. '내가 왜 도망가지?' 그래가지고 주님 뒤를 따라서 주님이 이제 제사장 가야바 안나스에서 신문을 받는 그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베드로도 다시 주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이 대제사장의 집에 못 들어갑니다. "당신이 누군데 여기 오려고 그러냐?" 대제사장 집입니다. 아무나 접근 가능한 집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요한이 나와서 베드로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뜰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은 이제 십자가 지는 데로 이렇게 따라온 건데요. 그래서 이제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다시 물어보십니다.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셨어요. 베드로가 대답하죠.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렇게 이제 된 거죠. 그다음에 그러면 요한한테는요, 요한도 도망간 사람입니다. 요한한테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대신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네 어머니다." 이게 요한에게는 뭘 의미하냐면 자기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었던 것, 그리고 그렇지만 다시 돌이켜서 십자가 옆에 와 있는 것, 이걸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리고 왜 도망갔냐?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물어보시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다."라고 하는 말로서 그를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도망갔어도 나는 네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그리고 나의 사랑을 아는 네가 내 명령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묻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도 자기 어머니가 있습니다. 자기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또 모셔야 합니다. "혹시 되겠느냐? 부담이 안 되냐? 가능하냐?"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어머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래서 이제 세 번째입니다. 주님이 사도 요한을 이렇게 다루어 가시는 방법을 보면 주님은 사람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합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다시 사랑 관계로 확인하고 "내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요한에게도 그가 비록 도망갔어도 주님은 그의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이 있음을 아시고 "네 어머니다."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세 번째 말씀을 통해서 첫 번째로 주님은 죽는 순간에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두 번째, 주님은 죽으시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십자가가 끔찍한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주님은 영광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실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이렇게 외치시죠.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다 이루실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주님이 맺으셨던 인간으로서의 관계에 책임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변함없는 신뢰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책임을 다하였다. 사람들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이루어내셨다. 그게 이 세 번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저희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으로 가시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4절, 우선 5절 6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냐 그러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두 자매가 일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지만 모임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길을 뒤따라가야 된다라고 말하십니다. 그게 이제 5절에 있는 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 마음이다." 행동을 어떻게 고쳐라라고 하지 않고 다투지 말고 서로 용납해라. 이렇게 하지 않고, 주님 마음을 품어야 된다. 그리고 6절에 주님은 어떤 마음을 품으셨느냐?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러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종이 되셨다. 그다음에 자기를 낮추셨다." 어디까지? "십자가의 죽음까지 낮추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죠. 이 마음을 품어야 되는 것이 이제 빌립보서의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이제 주님 십자가에서 말씀과 연관돼서 4절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책임지고 일해야 합니다. 지역 모임에서 주님이 주신 직분, 은사를 따라 주어진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형제님들이 오늘도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의 예배를,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각각 맡은 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할 뿐만 아니라, 이거 해야죠. 그다음에 "또한 각각" 한 가지 더 요구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작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그 관계에도 책임있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이 길 가운데 있는 우리도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그때 사도 바울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던 것, 교회를 세웠던 것, 그로 인해서 많은 핍박과 지금은 감옥에 갇혀야 했던 모든 고난을 상쇄하는 기쁨으로 사도바울은 주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힘든 일들이 있을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래서 다른 성도들의 연약과 아픔을 기억하며 돌보고,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찾아가고, 이와 같은 일들이 저희 모임 가운데 있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임이 되기를, 주님이 하늘에서 영광과 찬양을 취하시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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