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11장 : 주의 만찬 > 2017년 / 조나단 블락 형제님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1-22).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고전 11:17-34).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을 통해서 교제와 관련된 진리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교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먼저 그 가운데 있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전반부에서 머리됨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교제와 관련되서는 우리의 관계에, 우리가 함께 참예하는 관계를 생각했다면 우리는 머리됨과 관련되서는 우리의 역할,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교제와 관련되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 것을 생각해 보았으며 우리는 머리됨과 관련되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11장 후반부에서는 주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되심과 관련되서는 우리가 그분의 소유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제와 관련되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참예한 자가 된 것을 생각했고 머리됨과 관련되서는 우리가 그분의 권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되심과 관련되서는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 후반부에서는 '주'라는 단어가 많이 강조되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이 주의 만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상고해보게 될때에 '주'라고 나와있는 단어가 일곱번 언급된 그 부분들을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과 관련되서 떡과 잔을 나누는 그 집회가 언급되어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누면서 우리가 하고있는 그 집회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만찬이라는 또다른 표현을 보게될때에 우리는 그 집회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해서 또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만찬, 또는 그리스도의 만찬이라고 불리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만찬"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법적으로 그 표현을 살펴보게 될때에 주의 만찬이라는 것은 주님께 속한 만찬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만찬의 성격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 문법적인 용내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만찬의 진정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1419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화가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것은 어떤 한 성당에 벽화로 그려진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 만찬을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제자들은 누가 주를 배반할 것인지를 서로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그림이 끝나고나서 얼마되지 않아서 그 그림이 곧 훼손되게 됩니다. 그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그 그림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서 불만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가룟유다의 모델이 될 사람을 아직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계속 재촉을 멈추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얼굴로 가룟유다의 모델로 삼겠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이제 여러번에 거쳐서 다시 복원되었기 때문에 그 원래의 그림은 우리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고린도성도들이 하고있는 주님의 만찬에 그 원래의 성격도 고린도교회에서는 빠르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오직 30년밖에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그 만찬의 참된 의미가 이제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잃어버린 만찬'이라고 부를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만찬의 의미가 얼마나 빠르게 훼손될 수 있는가. 저는 오늘 아침에 여러분이 떡과 잔을 나눌때에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행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것은 주님의 만찬이라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까? 이 신약시대에 '주'라는 단어의 의미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점점 발전된 의미를 주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이제 그들 가운데 성령이 내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주'라는 단어는 탁월하신, 더 우월하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주라는 단어는 소유하고 계신 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땅이나 어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시며 뛰어난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주님께서 바로 그들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제자들에게 있는 가장 큰 의문은 그들이 주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참으로 그와같이 죽으시고 이제 다시 부활하셨을때 '주'라는 의미는 제자들에게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라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토록 주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항상 주님은 그러한 위치에 계셨지만 이제 주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때 이제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그리스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이름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들이 영광의 주를 알았더라면 이세상 관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볼때에 전체적으로 주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중요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점점 전파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에서 그 빌립보 간수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뭍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믿는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칠때에 그분의 명칭에 대해서 중요하게 말해야 되는것을 또한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그분의 온전한 이름인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불러야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잭 헌트'라는 분이 이 두가지 이름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될때에 그분께서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지만 이제 고난을 받으시고 지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지금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은 한때는 이 땅 가운데 사람으로 계셨던 예수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여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옆에 섰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복음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이상 지금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지금은 하늘에 계신 바로 그분에 대해서 말할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가 어떤 것을 그분에게 요구했으며 이제 그것을 모두 완성하신 그분은 우리의 주라는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든 주님에 대한 용내를 살펴보게 될때에 주님의 만찬이라는 것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의미를 담고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고린도전서 11장 17절에 나와있는 말씀을 보게 될때에 '주의 만찬'이라는 것은 우리가 집합적으로 모여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모였습니다. 모인것은 좋은일이지만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모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만찬이라는 것은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모였을때 해야되는 어떤 일임을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주의 상"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렸을때 이 10장에 나와있는 이 '상'이라는 것은 떡과 잔이 놓여있는 그 나무로 만든 테이블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상이라고 하는것은 그 물질적인 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함게 참여하게 된,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여하게 된 그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으로부터 나오는 많은 축복들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지역교회의 그 교제 가운데서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의 상에 앉게 된 특권 중의 하나가 바로 떡과 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은 분명히 지역교회가 모였을때에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따로 행하는 그런 실행이 아닌 것입니다. 최근에 이웃 중에 한명이 아파서 이제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한 교단의 목사는 이제 그들의 그 만찬의 떡과 잔을 그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로 가져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만찬에 나올때에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물론 이 장에서 말하고있는 것은 우리가 모일때에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제 신약성경에 나와있는 교회들은 각 가정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꼭 항상 그래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주님의 만찬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그런것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교제라는 것은 항상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 사회적인 그런 교제를 또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모일때마다 그런 사회적인 교류를 즐기며 나누게 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함께 모일때에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을 분명하게 우선순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듯이 이 모임의 특징은 하나님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에 서로간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분쟁에 대해서 '주님의 만찬'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전에 많은 분량에 거쳐 다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23절에 또한 주님에 대한 그 표현이 다시한번 나오게 됩니다. "너희에게 전한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여기서 주님의 권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만찬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임에서 하는 어떤 전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것이라는 것을 이 말씀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전서 11장이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기록된 첫번째 명령과 가르침이라는 것을 볼때에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 기록하였고 또한 사도행전에서 그 실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르침과 관련되서 첫번째 이 부분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그 권위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실행의 본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사도바울은 그 다락방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데려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라고 분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주 예수께서" 라고 되어있는 것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 예수'라는 두가지 이름이 같이있는 것을 볼때에 그분의 우리의 주인되심과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같이 말하고 있는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우리에게 이 명령을 주셨으며 그리고 언제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말합니다. 바로 그분이 배반 당하고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이 배반 당하셨다는 표현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헬라어로 그 뜻을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할 것입니다. 그 배반당하다는 것은 이제 넘겨짐을 당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넘겨짐을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가룟유다에 의해서 넘겨짐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이"라고 되어 있는데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잡히시던 밤이라는 표현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일을 행하셨는지 여러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네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분께서 권위를 분명하게 내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첫번째가 이 주님의 만찬의 시작은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었고 만약 다른 분이 여러분에게 "주일 아침에 만찬을 나누는 것을 왜 그렇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행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그 순서였습니다. 그분께서 떡을 가지시고 그리고 축사하시고 그리고 떼어서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만찬과 관련되서 행하는 그 질서와 순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떡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잔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떡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모인 성도들의 무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떡과 잔이라는 것은 항상 집회 마지막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찬송을 부르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할애하고 그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감사 기도와 찬송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행하면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단지 그냥 감사 기도를 드리고 그 빵을 취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이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먹을때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할때마다 주님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할때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2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날에 밖에 나가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은 슬프게도 주님께서 주신 이 상징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떡과 잔은 단지 상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 떡과 잔 자체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단 한 희생제사가 주님께서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했을때, 이 '전하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한다'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떡과 잔을 나눌때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며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지금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모든 내용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그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하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단지 죽으실뿐만 아니라 또한 살아나실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권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그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미래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다시 오실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휴거입니다. 그리고 바로 주님 자신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는 것을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세주로 만날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때에 그것을 잃어버렸을때 주님께서 오신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슬픈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라는 표현이 나온 27절 말씀을 또한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고린도 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의 참된 의미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 두가지 것을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이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첫번째로 우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들이 합당한 그런 상태에서 참여해야 되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에도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내용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만찬에 여러분이 함부로 빠지지 않는다고 제가 믿고 있습니다. 오직 믿는 자들이 어쩔수 없는 경우에만 간혹 빠질수 있다고 또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항상 성경적인 가르침은 매주의 첫날에 우리가 모여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임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 자신도 이 주님의 만찬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문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참여할때에 올바른 상태 가운데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에게도 중요한 것이고 또한 자매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매들이 비록 공적으로 일어나서 감사 기도를 드릴수는 없지만 자매들도 주님에게 동일한 감사를 드릴수 있습니다. 자매들도 그 떡과 잔을 떼면서 주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 주님의 만찬에 합당한 상태로 참여하고 있는가, 자문해 봐야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누구 하나도 나는 상관없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살피고 이제 거기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고 살피고 이것에 참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몸을 살피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루고 있는 그것과 전혀 모순적인 상태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몸과 그리고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흘리신 피의 전혀 합당치 않게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몸은 우리의 죄를 지신 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부도덕한 그런 죄를 범하면서, 그런 상태 가운데서 그 몸과 피를 다룬다면 그들의 그의 상태들은 이 주님의 만찬의 성격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임재 앞에 나올때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게 될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볼때에 우리는 경외함과 또 조용함과 또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돌아보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감사 기도는 항상 경외 가운데서 드려져야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초점이 집중되야 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님들은 특별히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을 준비해서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그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우리는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서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만찬에 나오기 전에 그 일주간 동안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먼저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은 "내가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또한 자매님들은 "내가 어떻게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까?"라고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모였을때 어떻게 찬송을 선택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주님의 만찬에 나오기 전에 일주간 동안 우리는 이 예배에 대해서 미리 준비해야 됩니다. 주님에 대하여 여러가지 묵상한 것들을 계속적으로 모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 주님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다 더 엄중한 그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32절에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볼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친히 징계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보다 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의 만찬과 관련되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무릎을 꿇고 순종치 않는다면 이제 주님께서는 징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심지어 죽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많은 자가 자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역교회를 이와같이 다루기 시작할때는 굉장히 무서운 일인 것입니다. 그랴서 우리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주의깊게 살펴야 됩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도덕한 그 음행의 범죄를 한 성도에게 징계하지 않는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이런 모든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적으로 징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내려지게 될때에 이 지역교회가 그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들이 그것을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다룬 이 주제를 마치면서 교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주의 상에 참여하는 그 특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주님의 머리되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또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주되심에 대한 것을 중요성을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기억하게 될때에 우리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치면서 여러분이 저에게 질문했던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왜 이 모임에서는 너울을 쓰는것, 그리고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여러가지 많은 다른 주제가 있는데 왜 모임에서는 이 너울을 쓰는것과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말하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고린도전서 11장 34절에 있습니다.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고전 11:34).
참으로 고린도 교회에 있는 다른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은 사도바울이 올때까지 기다릴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 두가지 문제는 사도바울이 즉시 다뤄야 했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고린도전서를 지금 가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그 내용들이라면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그런 문제들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 문제와 관련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역모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인정하는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주님을 공중에서 다시 만날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는 그분을 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는 그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신다면 우리는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영원토록 있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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