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조나단 블락 형제님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

박이레 2022. 9. 17. 12:51

<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 > 2017년 / 조나단 블락 형제님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7-20).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살전 5:23-28).

제가 오늘밤 교제 말씀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이것과 관련되서 두가지 제목을 제 마음속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제목을 말씀드리자면 2장 19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제목은 아마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어서 여러분이 아실듯한데요. 그것은 영국의 작가인 찰스디킨스라는 작가의 글로부터 인용한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학창시절에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을 배우고는 하는데요. 그 글의 제목은 '위대한 기대(유산)'입니다. 그것이 소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때에 그 안에 이러한 기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기대에 대해서 다룬 책의 곳곳을 볼때에 이제 사람들은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성공과 또한 그들의 결혼과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삶 가운데서 이러한 소망가운데 사는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또한 매주간에서 이렇게 다른 것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기대가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의 경력과 관련되서 이 큰 기대가 있는것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병을 고치는 방법을 찾아내는 그런 연구분야에서도 이러한 큰 기대가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러한 연구결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거라는 그런 큰 기대를 갖고 하게 됩니다. 또한 이 자리에 계신 여러 부모님들은 또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큰 기대가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시간에 우리가 특별히 생각해 보고자 하는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저는 어떠한 기대를 자녀에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리스도인 직장인으로서 일하는 직장 가운데 나는 어떠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그리스도인 부모로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구원받는 것이 가장 큰 기대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드리고자 하는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한 그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주 강력한 그의 질문을 보았습니다. 그 사도바울의 말은 제가 오늘밤 다루고자 하는 이 주제를 아주 잘 요약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대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록 구원은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큰 불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기대가 없이 살고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이 미래에 대해서 전망하고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 이후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이나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간에 말씀교제를 통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제 눈을 높이 들어서, 멀리봐서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 미래를 소망하지 않는 가장 큰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기쁨을 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것을 누리게 될거라는 그 기대를 하고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가 보내는 여러 서신서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쉽지않은 시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핍박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핍박의 시대를 살고있는 성도들에게 이제 미래에 대해서 전망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은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다시오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있었지만 그는 더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사는것은 그리스도니 죽는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은 그 앞에 있는것이 훨씬 더 나은 것임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오늘밤의 주제는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기쁨으로 채울만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앞에 놓인 이것들에 대해서 참으로 기쁨을 누리는데 너무나 느린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제 막 구원받은, 회심한 분에 있어서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멀리 믿음에서 침체되어 있는 분에게도 이것은 회복의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체되어있고 우울해 있는 믿는자들에 있어서도 큰 기쁨이 되는 소식입니다. 또한 이 가운데 병과 아픔을 겪고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에게도 역시 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바로 그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서 이 소망에 대한 정의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그래서 여기서 분명하게 보게 되듯이 이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다음주에 있는 어떤 시험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제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시험을 보고나서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때 그것 자체에는 더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 소망이 실현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에게 소망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통해서 우리가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도 없던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을때 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경이 또한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우리는 여기서 믿는자들의 소망의 근거가 바로 복음인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통해서 소망의 하나님을 통해서 소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안위로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아직 얻지 못한 이 세상은 이 소망을 얻지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그들은 여전히 소망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할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을때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할때 그것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아픈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말씀으로 격려할때에 참으로 그들이 이 하나님의 소망 가운데서 누리고 있는것을 볼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게 될때에 1장 3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그들이 이 소망을 누리고 있음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기대는 아주 좋은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죽은자들에 대해서 염려하고 그들이 부활에 참여하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같은 부활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 소망과 관련된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다섯가지 측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로 다시 오시는 한분에 대한 놀라운 기대라는 것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그분의 임재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그 빛으로 우리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섬기게 되는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주님의 다시오심을 비추어 보면서 서로에 대해서 위로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그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보존하시는 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먼저 사도바울은 1장 3절에서 읽은 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기도와 관련된 다섯가지에 대한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번째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것이라고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이라도 당장 오실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 곧 오신다는 말과 즉시, 언제라도 오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의 차이점을 설명하기가 어려울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거라고 말씀을 드릴때에 '곧'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어떠한 시간적인 갭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즉시 오신다고 말씀을 드릴때에 주님께서는 언제라도 오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기다린다, 라고 했을때에 그것은 기다리는 것에 합당하게 살고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로 어린 자녀들이 9시가 되면 잠자리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에게 아버지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10시까지 깨어서 기다리라고 말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소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 아버지가 즉시, 언제라도 올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릴때에 갖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에 저는 그렇게 안됐던 것을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여러분이 아침의 그 침대에서 일어나게 될때에 바로 그 순간에 주님께서 오실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집회에 앉으셨을때에 9시가 되기전에 주님께서 오실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내용입니다. 아직 어떤것이 일어나지 않았을때에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그냥 놓여지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때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는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이와같은 소망으로 다시 우리를 채워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특별히 10절에 "아들을 기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하늘로부터 오신다고,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에서 아름다운 그 약속을 하신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아버지 집에, 아들이 다시 오시는 것을 생각할때 참으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아버지 아들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죽은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주님의 부활이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그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도들의 부활을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가 이생 후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다고 하는것은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참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예수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때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지 않습니까? 참으로 예수라 불리신 그분, 죄인들의 구세주를 우리가 눈으로 보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 옆에 선 여인들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와같이 십자가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주님을 보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10절에서 예수라는 그 이름은 모든일을 마치시고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또한 다른 여러군데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여기 "장래의 노하심"이라는 표현을 사도바울은 특별히 언급한 것을 생각하게 될때에 그는 불신자들이, 그리고 믿지 않는 이 세상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게 될거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이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여 이와같은 공격에 대해서 잘 방어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왜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일곱가지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화난에 대해서 성경이 언급할때 거기는 교회가 언급되어 있지 않는것을 먼저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그 환난을 다루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교회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요한계시록 3장의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 화난을 면하게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특별히 약속하시기를 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이제 교회는 진노를 받게 예비된 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서는 이 순종하지 않는자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장차 오는 진노를 면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네번째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정결한 신부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과 같이 정경하고 흠이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로 데살로니가 그 성도들 자신들이 주님의 임재가 다시오심이 언제라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이에 이 환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여섯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7절에서 성령께서 먼저 올리우심을 받아야지 그 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제 들려 올라가실때에 교회가 성령님과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휴거가 화난의 중간에 있거나 환난 후에 있을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임재가, 다시오심이 즉시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휴거가 환난의 중간에 있어야 한다면 그것이 성경에 예언된 7년 환난기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화난기간이, 7년의 기간이 시작된다면 3년 반이 지나야지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을 통해서 주의 날이 밤에 도적과 같이 이른다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제 어덟번째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분들이 이 교회가 환난을 통과한다고 말씀을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성도들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성도들과 함께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성도들과 함께 오시기 위해서는 교회는 먼저 들림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와같은 놀라운 기대를 우리 마음속에 가질수가 있습니다. 아들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아들께서 다시 오심을 우리도 이와같이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참으로 그러실 것입니다. 디도서에서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 그리고 크신 하나님, 그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서 나타나실 것을 우리가 기다리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두번째로 주님의 다시오심의 그 임재를 기대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말씀드린 이 기대에 대한것과 두번째 말씀드린 이 전망에 대해서 큰 차이를 못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기대에 대해서 말할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망에 대해서 말할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과 함께하는 임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집을 특별한 시간에 방문하는 것을 기대한다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여러분이 저의 집에 오셔서 저와 함께 교제를 나누고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을 전망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은 단순히 신약적인 이론이 아니고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참으로 느끼고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바라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광의 면류관일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수고했던 그런 자들에게 주는 상급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실제와 같은 그런 소망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것을 그는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사건만 기대하고 있는것에 그칠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건과 관련되서 두가지 일이 있는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은 이제 하늘에서 어떤일이 일어나게 되며 또한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자세하게 다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하늘에서 어떤일이 이렁나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보게 될때 이것은 큰 도전이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은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의 죄가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관련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모든 심판을 다받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께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관련해서 세가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각자 직고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일을 통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번째로 우리 몸으로 행한것을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을 이용해서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어떻게 섬겼는지를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한 몸을 여러분은 받으셨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몸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번째입니다. 두번째로는 지역모임에서 우리가 어떤재료로 세웠는지를 이제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사도바울은 "왜 너희가 서로 판단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평가받게 될 것이고 이제 그것을 상급으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우리가 그와함께 고난을 받았으면 그와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큰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자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바울의 육체를 본다면 그분의 육체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몸이 볼품이 없는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성도님들이 바로 그 몸으로 행한 일로 상급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급을 전망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2장 말씀을 보게 될때에 우리가 그 나라에서 주님을 알아볼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집회기간 동안에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이 서로 알아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상급의 면류관을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단지 우리의 머리에 씌여질 그 면류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승리자들이 그 목에 매는 승리의 표식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이러한 진리가 저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오실때에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상급을 주신다는 것을 알때에 왜 우리가 이땅의 많은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쏟게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많은 것들을 놓고 간다는 것을 생각할때에 왜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많은 가치를 두고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계속 오지 않으실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는 이 땅을 그냥 살고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다시오심을 생각하게 될때에 우리의 마음속의 동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도에 대해서 서로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 평가받는다는 것을 생각할때에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3장 12절에서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 말씀을 보게 될때에 우리가 몸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별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와 함께, 주님과 함께 강림하는 것을 생각할때에 우리는 이 교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때 바로 그 단어에서 성도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게 될때에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빛 가운데서 어떻게 되야 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과 관련되서 중요한 한 단어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을 나타내는 성경의 네가지 단어에 대해서 성경을 연구하실때에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첫번째로 우리가 주님의 다시오심을 말할때에 '휴거'를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단어가 4장에서 "끌어올려"라는 단어에서 나온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새들은, 독수리같은 새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새들은 그들의 먹잇감을 아주 빠르게 잡아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2장 19절에서는 이제 또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강림하실 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임재와 주님과 함께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는 그 한 사건만을 말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오셔서 이제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계속해서 있으며 이제 주님께서 함께 성도와 땅으로 오는 모든 임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있는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는 7절에 "나타나실 때"라는 또 다른 단어를 보게 됩니다. 이 단어는 제시되는, 드러나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했을때에 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또 다른 단어는 밝히 나타내다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시야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4장 말씀을 보게 될때에 이 소망의 네번째 측면을 보게 됩니다. 이 4장 말씀을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위로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그 진리를 성도들이 기뻐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질문을 여러분 스스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오늘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정직하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나는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신다는 그 진리의 빛 가운데서 이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이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빛가운데서 살아가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게서 즉시 오신다는 것을 참으로 진실로 믿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수의 성도님들이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빛가운데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한 이유는 우리가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미처 생각해 볼 겨를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주 예수께서 내일 아침 8시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전에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바일 폰이 중요한 것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바라고 있는 직장에서의 승진이 큰 가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주님이 오늘밤 12시에 오신다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남은시간에 다른 일을 할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드러나게 될 일에 대해서 2017년 8월 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더 다른 어떤것도 더 할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주님께서 내일 오신다고 할때에 제가 생각할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시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가? 오늘밤에 이 마포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휴거되서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왜 그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지 않았던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참으로 그런 후회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러한 내용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구원과 관련되서 협박하고 겁주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이 놀라운 사건은 참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게 하는 큰 동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제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도우셔서 여러분의 마음속을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4장을 통해서 위로하고 있는 그런 말씀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다섯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는 자들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서 자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성경의 표현이 아닙니까? 이것은 그 영혼이 잠자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몸이 자고있는 것입니다. 이 잔다고 표현한 것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사람은 반드시 깨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있는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제 침대로 가서 잘 자고 있는지 자기전에 다시한번 확인을 할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는 자녀에 대해서는 더이상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신 분이 계십니까? 저 자신은 아직 그러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말씀을 통해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슬픔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같은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단지 자고있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그들이 다시 깨어날 날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의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잃은 그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죽음의 그 실체를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복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죽음 이후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순서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또 한번 14절에서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그것이 우리의 근거가 되는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죽은자들의 몸과 그들의 영혼을 다시 합치실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변화된 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 다음 구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것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주의 강림을 말하고 있고 또한 주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또한 강림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놀랍고 아름다운 그러한 부분이 아닙니까? 주님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주님을 기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눈으로 볼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자신께서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이나 천사장을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강림하십니다. 여기 세가지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하시며 천사장의 소리가 있으며 하나님의 나팔이 있습니다. 이 호령이라는 것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이 나팔이라는 것은 로마의 군대를 모으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 모두를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이제 한 집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중에서 참으로 큰 그 집회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 몇주간에 거쳐서 한국에서의 그 집회를 참으로 즐겁게 교제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가 또한 다른 지역모임에 광고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집회로 광고하고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이 집회는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다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들도 끌어올려져서 모이게 됩니다. 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과 또 살아남아 있는 모든 자들이 하나가 되서 끌어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공중으로,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건을 고대하게 될때에 몇가지 것을 말씀을 드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후로 남겨놓게 되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남겨놓아서 미안할것도 없는 그러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만나게 되는 이 집회를 기대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을 만나는 집회입니다. 이 주님이라는 단어는 가장 탁월하신 분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소유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땅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주로 인정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분량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한번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강조죄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한 관점에서 이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공중입니다. 사단에 대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공중이라는 것은 사단이 권세를 잡고있는 영역입니다. 그 사단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 모든 성도들과 주님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자리는 바로 주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엇을 했는지 감사드리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그 떡과 잔을 나누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믿음이 진짜 보는 곳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만찬시간에 '우리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이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참으로 그 찬송가에 나와있는 주님의 머리와 주님의 손과 발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러한 찬송가가 필요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손과 발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던 그 이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와같을 줄을 아는것은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변화산에서도 제자들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참으로 그 제자들은 아직 영광의 몸을 입지 않고 육체 가운데서 그 주님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때는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더이상 이 죄가 있는 육체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우리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그분을 이해하고 온전하게 알수 없었던 그러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때는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몸으로 그분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다른 한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참으로 주님을 보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저는 주님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이 오늘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왜 그럴까?' 라고 분명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없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여러분을 보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전체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를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 룻은 모든 추수의 일이 끝났을때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그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입술에서 그 구속의 약속이 나왔습니다. 그 룻을 자신의 아내로 취하기까지 쉬지 않으리라고 그는 약속했던 것입니다. 17절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이 특별히 "주와 함께"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내가 있는곳에 너희도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것을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저희를 주님의 임재에 함께 있기를 원하셨는지 그것을 생각해 볼때에 참으로 제 마음에 감동이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주님께 그 상급을 받는것도 저는 그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있을때에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더욱 누리는 것을 저는 또한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휴거'라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어떠한 임팩을 가져올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끌려 올림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중동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는 덜 그러한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슬람의 어두운 권세의 영향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 있었는지를 보게 될때에 놀라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것입니다. 화난기간 동안에도 또한 구원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은혜의 시대 동안에 복음을 들은 자들이, 그리고 거절한 자들이 그 화난시대에 두번째 기회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들었을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제 5장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보존에 관한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23절에서는 이것과 관련된 열가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16절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항상 기뻐하라"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기뻐하며 또한 우리 앞에 있는 소망을 볼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는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망을 이기신 승리자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이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라운 것이 될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공허한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 사람들은 기도로 특징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이 사람들은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치 말고" 참으로 슬프게도 오늘날에는 우리 주님의 다시오신다는 그 진리의 말씀을 읽을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범사에 헤아려" 이것은 우리가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증거하는 그런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것을 취하라" 우리가 무엇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이것에 항상 통제가 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우리 외모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신경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고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의 증인'이 여러분에게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낼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것에 대해서 참으로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과 혼과 몸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휴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에녹은 그가 선한 증거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그가보인 선한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다시오심을 생각하게 될때에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에녹과 같이 이러한 선한 증거를 얻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때 그분의 임재를 우리는 고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 주님의 임재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일의 동기가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4장에서 주님의 다시오심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고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히 보존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