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조나단 블락 형제님

디모데후서 4장

박이레 2022. 8. 3. 16:45

< 디모데후서 4장 > 2017년 / 조나단 블락 형제님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디모데후서 4장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딤후 4:1-22).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1장을 돌아볼때에 그리스도인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의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2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싸움에 있어서 여기에 나와있는 여러가지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을 균형있게 갖는것이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군사의 강한 인내로부터 시작해서 그 온유한 종까지 그런 모든 성품들을 균형있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해야 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이 중요하며 그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을 하나님이 목표로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4장, 오늘 이 시간 다룰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토요일날 이 집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이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메세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도서가 비록 디모데후서 다음에 있기는 하지만 시간적으로 봤을때 디모데후서가 사도바울의 마지막 저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후서에서도 또한 4장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성경의 각 장들을 나누는 것은 영감받은 것이 아니지만 이제 그 분류에 따라서 오늘 이 시간 사도바울의 마지막 기록의 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12피트나 되는 깊은 지하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죽기 전에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이 이 마지막 장에, 마지막 메세지를 보게 될 때에 놀라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마지막 장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것은 사도바울의 마지막 메세지일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임을 또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이 4장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메세지가 사도바울의 인격과 그 펜을 따라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말을 남긴 그 메세지를 보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그들의 마지막 메세지를 보게 될 때에, 그런 말들이 굉장히 암울하고 어두운 것으로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몇몇 유명한 사람들의 그 마지막 말들을 이렇게 조사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윈스턴 처칠'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성공적이고 또한 흥미로웠으며 아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지막 남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이제 모든것이 다 흥미를 잃었다." 그는 그 인생의 모든 흥미로운 순간에서도 그는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남긴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나쁘고 또한 너무나 늦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가 너무나 늦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때에 그는 이제 다음 세상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가 남긴 말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단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녀가 가진 모든 커다란 재산에 대해서는 가치를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신자들의 마지막 말은 항상 소망없는 그런 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과 대조적으로 전도자 'DL.무디'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제 땅은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자기가 이제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명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그의 마지막 말이 이러하였습니다.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나의 구속자이고 오직 진리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말입니다." 바로 그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그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작사자인 '아이작 와트'가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 큰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더이상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이 오후에, 그 두려운 죽음의 순간에 오직 나는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서 내 머리를 누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흥미로운 사도바울의 마지막 메세지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메세지이며 또한 저도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주님께서 우리가 살아 생전에 공중에 오신다면 우리의 마지막 말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되는 그 하늘은 우리의 무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말을 사도바울의 첫번째 말과 비교해 보았을때,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사도바울은 이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그 빛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는 맨 처음에, "주여 당신이 누구시오니까"라고 물었으나 이제 마지막에서는 그는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마지막 말은 이 영적인 한 사람의 인격과 그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에서 네가지 것을 특별히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5절까지는 우리가 증거해야 되는 그 메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 예수께서 그 명령을 하신 것처럼 이제 사도바울도 디모데에게 그 마지막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8절까지는 부어진 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의 삶을 어떻게 마쳤는지를 이 구절들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그가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라는 말을 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로는 사도바울이 꼭 필요했던 책인 그 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13절에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책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 이런 책을 구한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14절부터 22절까지는 마지막 네번째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행한 그 일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처해있는 그런 심각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처음인 1-5절까지 그 마지막 명령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4장 1절에 "명하노니" 이 '명하다'는 단어는 1장에 있는 내용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1장부터 이 복음에 대해서 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서 이 "명하노니"라는 단어는 이제 디모데가 받게되는 심각한 사역에 대해서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하라'고 조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어로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반드시 해야되는 일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저는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것이 좋은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조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이 말씀을 전파해야 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명령에 대해서 여러가지 그런 힘이 여기 같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무엇 때문에, 어떤 근거로 이것을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하는 이유는 이 증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떠나기 전에 디모데에게 이 법정으로, 이 증인들에게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하나님이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라는 것은 '이 증인들의 눈 앞에서'라는 것을 헬라어 원어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그 날을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 여기서 그의 나타나실 것은 그분의 재림이며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믿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두가지 이중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그 심판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판인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우리는 이 4장을 계속해서 보게 될 때에, 그 상급에 대해서, 면류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두번째로 또한 죄인들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기 위해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이 그 심판 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입니다.
이제 2절에서는 그 명령 자체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바로 그 명령은 "말씀을 전파하라" 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서 그 처음과 끝에 강조가 있다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전파하라"에 강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에도 강조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 명령에서 "말씀을" 또한 "전파하라" 이 둘다를 강조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전파하라" 라는 단어에 대해서 네가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어는 '카타안젤로'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우리가 주의 만찬을 주의 오실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라는 거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두번째는 '랄레오'라는 단어이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단어는 '디아아제로'라는 단어이고 그것은 이제 넓은 공간에서 집회 가운데서, 또한 시장에서, 그런 장소에서 말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다음 단어로는 '유젤레오'라는 단어이고 그것은 '좋은 소식' 그 내용에 대해서 말해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로 이 단어에서 복음 전파, 복음 전도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나와있는 "전파하라"라는 단어는 '케루소'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전파하다', '전령이 소식을 전하다'는 단어입니다. 이제 전령은 그 왕의 명령을 가지고 어떤 한 마을에 가서 왕의 명령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어떤 메세지를 전하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가 받은 어떤 메세지를 단지 전할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사도바울은 그 전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장 3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도바울이 전한 것은 그가 만들어낸 자신의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가 받은 것을 전파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동일한 내용을 이제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이와같은 말씀을 공적으로 전파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제 교제 가운데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와같은 복음 전도를 이 모임에서 하고 계시고 또한 계속해서 공적으로 복음 전도를 하시기를 부탁을 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먼저 전파해서 구원받은 영혼이 없다면 누구를 대상으로 그것을 가르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 큰 명령을 주실때에 "복음을 전파하고 내가 가르친 모든것을 또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오늘날은 이 복음 전도가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냥 연극으로써, 복음 전파가 아닌 다른 것으로써, 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영화로서 복음전파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화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이 말씀을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본 대로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잠깐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화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 젊은 분들은 특별히 이러한 영화나 또한 DVD 같은 것들을 보기를, 그런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는 합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그것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과 관련되서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바로 십계명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영화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상으로 만드는 그런 죄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누구도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바로 그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죄가 되어 심판을 받으실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암흑으로 덮어 그 장면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그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영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그 영화 제작자들은 이러한 영광을 나타낼 수 없으며 오직 그들의 감정에만 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조나단 형제님, 저는 그러한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서든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런 방법이 옳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오직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지, 그가 어떤 형상화 된, 텔레비전에 나와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구원받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복음주의적 기독교계에서 지금 유행하고 있는것은 성경교육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 과정 가운데서 계속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런데 그 8주간의 성경 교육과정 후에는 사람들이 해답을 갖는것이 아니라 더욱 성경에 대한 의문만 잔뜩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어떻게 그런 의문 가운데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사역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그 죄된 가운데 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도록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아래 앉아있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아래 앉아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가운데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확신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서 복음을 들어야 될지 성경을 통해서 바라봐야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의 친구에게, 또한 여러분의 가족들에게도 좋은 해답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그런 그리스도인들도 그와같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백만달러가 드는 그런 비싼 지폐를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것이 법으로 공개적인 복음집회를 갖는것이 금지된 나라도 있습니다. 또한 영국에서조차도 이런 복음집회를 여는것이 점점 법적으로 어려워지는 그런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강조해서 말한 것처럼, 저는 또한 여러분에게 강조해서 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그러한 말씀을 전파할때, 상황은 어떤지를 보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저는 이것은 저에게 참으로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기회가 있을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나아와서 "이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때 복음 전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기회가 없을때에 복음 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 지금 복음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그런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살핀적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이제 기회를 찾지 못하고 그냥 기회가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그분께서는 바로 그 기회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이제 우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런 기회가 그 장소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내게 물을 좀 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단순한 그 대화의 말을 통해 그 기회를 얻어내셨던 것입니다. 그 장벽을 다 허물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사 우리에게 말씀을 전파하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를 얻어내는 그런 능력을 주시기를 또한 원합니다. 그리고 또한 분명하게 보이는 기회가 없을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저는 말하고 대화하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작은 전도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단지 공개적으로 여러분이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서 주는 것 또한, 아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호주의 시드니에 사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별칭은 '영생씨'였습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내용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드니에 살고있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는 인도에다가 '영생'이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분필을 사용해서, 그는 아침 일찍, 새벽같이 일어나서 인도에다가 분필로 '영생'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그 글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에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이제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2000년이 되는 순간에 이제 불꽃놀이가 시드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오페라 하우스에 있는 전광판에 크게 '영생'이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호주는 밀레니엄을 겪는 시간상 첫번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천년이 되는 순간에 세상이 보게 되는 첫번째 단어는 바로 영생이라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이 말씀을 전파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확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경책이 될 수도 있으며 , 이 경책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죄된 상태를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경계를 받아야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복음집회에서 항상 죄인들에 향하여 정직하게 말해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필요가 바로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는 구속자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권하는 것을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할때에 이 두가지 것들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이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동정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그와같은 상태에 있었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잃어버린 상태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3장 16절에 '교훈'이라고 되어있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 일곱 중의 명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명령이 필요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3-4절에서는 이 말세의 사람들의 경향은 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사욕을 좇는 스승을 좇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이켜서, 허구에,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을 찾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바로 영화에 대해서,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된 것이 들어있는 것을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것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어린이들은 이런 허구적인 소설과 허구적인 게임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가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고 참된 현실에 대해서는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은 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죽음에 대해서는 점점 둔감해 지고 그것은 생각하기조차도 싫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오직 그런 허상을 깨뜨리며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진실인지를 밝혀드립니다. 우리는 그 과학의, 또 진화론의 여러가지 환상적인 것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것을 믿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복음은 그 모든 허상을 깨뜨리며 오직 창조주의 능력만을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그 삶의 것들을 여전히 축하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계속 무시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두번째로 사도바울의 마친 사역에 대해서 두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디모데에게 그렇게 엄중한 명령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그 자신이 그와같은 삶을 산 사람인 것을 우리는 두번째 단락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수천마일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끝에 순교를 앞두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사람이 디모데에게 "이것을 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에 "전도인의 일을 하라" 우리는 은사 중에 전도의 은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이 복음의 은사가 어떤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디모데가 그 복음 전도자라는 은사를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하든지 사도바울은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디모데가 전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전도인의 일은 우리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자매님들은 공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이 복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또 여전히 자매님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이 복음 전하는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살아있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매님들의 그 따뜻한 선행이 어떤 한 사람의 마음을 열고 복음이 들어아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도인의 일이라는 것은 어떤 누구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해야되는 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그 일을 잘 마쳤습니다.
이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사도바울의 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그 삶을 통해서 그가 완성한 사역에 대해서 세가지 면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가 "관제와 같이 이미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를 통해서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7절을 통해서 그가 그의 모든 군대 복무를 마치고 보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6절에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다"는 말의 뜻은 첫번째로 이 말의 뜻은 그가 이제 목이 잘려 죽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볼 때에 거기서는 자기 자신의 몸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때는 그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이 표현,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는 독특하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레위기를 참조하면서 전제와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다섯가지 주요 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 전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전제에 대해서 첫번째 나와있는 것은 창세기에 나와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왔을때에 그는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두렵도다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돌 기둥을 세워서 거기에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서 한참 후에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브니엘에서부터 벧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벧엘로 도랑왔을때 다시 이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제 그 기둥에 기름을 붓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전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첫번째 벧엘에서 드린것과 두번째 벧엘에서 드린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제 두번째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첫번째 전제를 드릴때에 번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어드리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더 깊게 이해한 표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생가갛게 될때, 그것은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더 이해하는 과정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때, 이 시점에는 조금 부어드리고 또 다른 시점에서 조금 부어드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우리가 전부를 우리 삶을 통해서 부어드리는 삶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도바울은 그가 예전에 했던 것보다 색다른 다른것을 말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부어드리는 그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위대하고 놀랄만한 일을 하기를 바라는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계속해서 일관되게 동일하게 부어드리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위해서 아주 먼 세상에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자리에서 이 목포 중부 모임에서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동일하게 부어드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 여기에 있는 어머니들은 또한 그 가정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동일하게 부어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가정에서 여러분께서 하고 계씨는 그 일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부어드리는 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 사도바울은 그가 믿음을 지켰음을 자신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장래를 바라보며 자신을 항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이와같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미래를 전망하고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저희 가족이 한국에 오는 것을 계획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을 고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와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와같은 고대하고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최고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한 보상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다섯가지의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고린도전서 9장 24절을 본다면 그 첫번째 면류고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이 썩지않는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리가 얼마나 합당하게 행했느냐, 그것에 대해서 받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절제하는 것이 우리가 이 면류관을 얻는데 필요한 덕목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우리가 자기 절제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헬라문명권에서는 면류관이라고 말할때에 주로 말하는 것이 왕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승리자가 얻는 승리의 표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헬라인에게 보상이라는 것을 말할때에 그것은 어떤 권위자로부터 받은 인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면류관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여기는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늘나라에 가서 그가 받게 될 영광은 무엇입니까?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자리에 있는것을 함께 보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그 영혼을 얻은 그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임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다닌 자에게 주는 보상임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한 사람들은 이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어려워보입니다. 참으로 이 하늘나라에 가서 여러분이 받게 될 면류관은 어떤것이 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그 영생씨는 이러한 분명한 자랑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 때문에 많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그의 사역에 대해서 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1장을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이것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그것은 환난 가운데서 그것을 인내한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여러분은 핍박 가운데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남편, 또는 여러분의 아내가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지금 어려움을 인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에게 이와같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오래참음을 알고 계십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2-5).

이것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인도함을 잘 감당했던 사람들에게 주는 보상인 것입니다. 이 중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책임있는 위치를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형제님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분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과 그런 책임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서 이러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또한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따라서 이 가운데 있는 젊은 성도님들은 장로의 일을 사모하는 것이 또한 선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여러분의 삶의 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한 일이고 그것에 대한 상급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디모데후서 4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사도바울은 그러한 상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이것은 충성된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것은 충성된 종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은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들을 다 공의롭게 평가해서 주시는 분이 의로운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 그러한 상급입니다. 참으로 성경은 분명하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그 일의 충성됨에 따라서 다른 보상이 있을 것을, 그 보상의 정도가 다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의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게만 아니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 단락인 사도바울의 첫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책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급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그 모든 사람, 맨 첫번째로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합니다. 슬프게도 데마와 같은 같은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습니다. 그리고 11절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구절에 복음서를 기록한 두명의 저자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감동하심으로 그분의 복음서를 기록하게 한 두명의 저자가 여기 나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사도바울은 이러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겉옷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은 춥고 축축한 지하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겉옷을 달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디모데에게 새옷을 사가지고 오라고 부탁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남겨둔, 그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바울이 급히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놔두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여러분도 그와같은 상황에 있다면 그 겉옷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또한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책'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두루마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되어 있는 그 파피루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저작을 기록하는 노트북으로도, 공책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책인 것입니다. 그 짐승의 가죽을 얇게 만들어서 거기에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제가 가죽 종이에 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쓴 저작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그리고 이와같은 시기에, 이것외에 보다 더 가치있는 책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그 세상적인 어떤 책을 읽고자 하지는 당연히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굉장히 귀한 내용을 담고있는 책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가죽으로 그 두루마기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다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저는 이 종이를 여기에 놔두겠습니다. 이 글은 '윌리엄 틴데일'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그 번역자의 글입니다. 그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한 유명한 성경학자인 것입니다. 그 문서에는 그가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하감옥에 사도바울처럼 갇혀 있었습니다. 그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일하게 그의 몸을 덮힐 옷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등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겉옷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요구한 이유는 그는 성경번역하는 일을 다 끝마치기 위해서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제 앞에 이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참으로 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버린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나 귀한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 모두도 역시 이 책 없이는 살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배와 같이 여기며 매일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책은 이것 없이는 살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락에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염두해 둔 사도바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긴 여러 사람들의 명단을 보게 될 때에, 사도바울이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슬프게도 이제 사도바울과 더이상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4절에 알렉산더에 대해서 저를 주의하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에 18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가운데 그 모든 이름보다 가장 귀한 이름이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입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셨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19절에서는 또 다른 유명한 한 부부에 대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보게 됩니다. 이 유명한 부부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신의 목이라고 내 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전히 2017년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경건한 부부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참 복음을 위하여 그 가정을 개방하고 또한 전도자를 돕는 부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에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보내는 그 안부를 전할때에 여러분은 이 이름들 가운데 내 이름도 여기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들의 이름은 여기넣고 어떤 사람들의 이름은 여기 빼놓지 않았을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의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참으로 이 표현을 보게 될 때에 사도바울은 어떤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 각각에 하고 있는 기회에 대해서 가치있게 생각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제 이 놀라운 사역을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자신에게 향하여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고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가도록 마지막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은 사도바울의 모든 것이 된 분입니다. 참으로 이때는 사도바울이 그 다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자신을 버린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참으로 그 믿는 자들이 자신을 향하여 등을 돌린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영광스러운 한 분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가 말한 것처럼 주와 함께 있는 일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을 그는 실제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 일이 가장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데모데후서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그 마지막 말들을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용기가 필요함을 보았습니다. 그 싸움에 있는 군사로서 이제 우리는 어떤 성품들을 균형잡히게 개발해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계속적으로 거해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마지막 큰 명령을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목포 중부 모임에 있는 성도님들께 드리는 저의 마지막 말씀도 이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사도바울이 말한 그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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