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8일 금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후서 강해 1 >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6, 개역한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1-4, 개역한글)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7-10, 개역한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개역한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 개역한글)
삼일간에 걸쳐 이 말씀을 살피고자 합니다. 특히 3장 18절은 개인적으로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다시 뵈올때는 우리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해 있을것입니다.
이 목표를 어떻게 성령 하나님은 이루어 가실까요?
성령님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닮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볼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해져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아는것이 핵심입니다.
오늘은 첫시간이기에 전제적인 문맥을 살피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두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신약의 영광을 말합니다. 두번째는 이 영광스러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는 질그릇속에 담는다는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맡은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말합니다.
그리고 이 보배를 하나님께서는 질그릇속에 담아 두십니다. 사도바울처럼 악했던 사람에게, 자격없는 사람에게 담아두십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는것은 그 배경에 사도바울에 대한 비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사도임을 입증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설명하는데 1.신약의 일꾼 2.보배를 질그릇속에 담으신다 라고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을 파송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의 세번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의역사가 일어나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저희가 성경을 보고 있는 지금은 사도바울이 분명한 사도임을 확신할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데에 그와 비견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 당대에는 사도바울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잘못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문책했습니다.
2. 사도바울은 너무 여러지역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 하고 감옥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3. 사도바울은 동료 일꾼들과 불화했습니다. (바나바와 싸웠고 마가를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4.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비난받을수 있습니다. (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을 사도바울이 교회에서 출교합니다.)
5. 사도바울은 말씀을 너무 길게 전했습니다. (유두고가 죽을정도로 말씀을 길게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비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에대해 인정하며 그에대해 답변합니다.
이 시대에서도 모임에서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의 특징과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 영광을 질그릇속에 담아두시는가를 보게 될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비판하여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공격하는것은 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많은 교회가 세워집니다.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해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때에 율법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율법으로 구원받게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이러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신약을 알아야 합니다.
지역모임의 장로들 중에 과거에 교파교회나 성당에 다니던 사람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구원받고 모임에 더해졌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 성당이나 교파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로 나타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기와 구약, 신약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갈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율법을 따라 행하면 좋지 않은가?" "11조는 어떠한가? 그래도 11조는 해야지"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사도바울과 스데반이 비난받는이유가 율법을 훼방하고 율법을 무시했다고 비난받고 죽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무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광의 내용을 말합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6, 개역한글)
새 언약은 복음입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3:7-8, 개역한글)
이 구절들을 읽으실때 사도바울이 구약을 무시했다, 구약을 어기고 있다는 말에 대한 대답임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민법이 있습니다.
시민법입니다. 예를 들어 소를 매놨는데 소가 이웃집 작물을 먹어버렸을때 처리할 법입니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것은 안식년 제도 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를 한번도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순종해야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민법을 주신 이유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분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이방에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떠합니까?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독특한 민법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2. 의식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사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폐해 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식법은 우리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온 이상 그림자를 행해서는 안됩니다.
3. 도덕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대부분의 계명을 이루고 있습니다.(안식일 제외)
이 법은 세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이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2) 하나님이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3) (..밑에)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6, 개역한글)>
율법을 주신 첫번째 이유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죽이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7:7, 개역한글)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8-9, 개역한글)
사람들은 자기가 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곧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죽이고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내가 절망적인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죄를 내힘으로 해결할수 없다는 것을 깨닳아야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0, 개역한글)
율법은 항상 요구합니다. 죽을때까지 한계명만 어겨도 지옥갑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내가 지옥에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율법이 확인 시킵니다.
세번째는, 율법은 예수님께 가라고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개역한글)
율법은 이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율법은 이 기능을 합니다. 신약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코스를 밟아옵니다.
우리가 율법을 볼때 우리는 도덕법과 관련됩니다. 말씀을 보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였지만 형제를 미워해서 '멍청이'라 말해도 지옥에 가는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키지 못하여서 앞으로는 지키고자 한다해도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킬수 없습니다.
율법의 세번째 기능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을 가르키는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스스로 죄를 어떻게 할수 없다는것을 깨닳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이것을 세리가 하였습니다. 차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이 죄인을 용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이 세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바리세인은 어떻습니까? 그는 의식법으로 가서 양을 잡고 피를 흘리고 "내가 의인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의식법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속의 그림자 입니다.
유대인들은 의식법을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오해 한 것입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2:27, 개역한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9, 개역한글)
의문이란 문자라는 뜻입니다. 곧 율법을(특별히 의식법을) 오해한것을 의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율법이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음을 깨닳으면 이것이 영입니다.
저희들이 한가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의식 몇개가 있습니다. 만찬과 친례와 너울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합당하게 나아갈 수단이 아닙니다.
침례 받았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이 침례를 공개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침례의 의미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찬예배에 참석하면 하늘나라에 가나요?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너울은 자매를 가리는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사람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의식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을 가리키는 상징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집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집회에 참석했다고 해서 그의 영적인 상태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교회의 모든 형식은 영적인 것을 가르키는 상징이 되어야지 영적인것을 얻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4:2-3, 개역한글)
이것은 전부 사도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과 교회진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의식으로도 우리를 구원받게도 거룩하게도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다음 사도바울의 비난중에 하나를 보겠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10:10, 개역한글)
저희는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편지가 힘이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해서 보면 말을 못했습니다. 말쟁이었지만 말이 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육체적으로 별다른 매력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배보를 질그릇 속에 쓰신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 가운데 지혜있고 문벌좋은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올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장막만드는 자로 왔습니다.
예수님또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4:2, 개역한글)
사도바울에 대한 비난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숨은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해서 감옥에 넣은것이라고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2. 궤휼가운데 행했다.
사도바울은 돈을 원하지만 돈을 받지않고 다른방법으로 자기가 원하는것을 얻어냈다고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16 하여간 어떤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고후12:16-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직접 일을하며 생활했습니다. 이것을 고린도 교회는 비난했습니다. "교묘하게 내라고 한다" "직접 받지 않았어도 다른방법으로 받고있다" 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나와 동역하는 자들 중 누가 다르게 행하더냐 라고 말합니다.
3. 말씀을 단순하게 전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살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4:2-3,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다른지역에 복음을 전할때 먼저 회당에 들어갑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면 소수가 믿고 대부분이 반대합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똑같이 전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분노하고 여러사람들을 모아서 사도바울을 잡으려 합니다. 사도바울은 도망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른도시에 가서 똑같이 합니다. 이전 도시에서 핍박을 받은 전철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해서 "그는 단순한 메세지를 너무 과격하게 전한다" 라고 사도바울을 비난합니다.
사도바울의 확실한 복음이 담긴 강한 메세지는 듣는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우회적으로, 듣는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는 방법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비판했습니다.
이에대해 사도바울은 양심에 맞게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변명합니다.
듣지 않는 사람은 "이세상 신이 그들을 어둡게 했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전도자는 진리를 사람들의 선한 양심에 전하는 자입니다.
전도자는 복음과 교회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듣는사람들이 상처받고 분노하는것은 사도바울의 몫이 아닙니다.
복음을 장사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려는 사람이 물건을 사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물건을 살수 있도록 말을 예쁘게 하는것이 상술입니다. 복음이 상술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마음의 거부감이 있는 상태에서 듣는 사람은 그 거부감을 극복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전도자는 듣는사람의 마음을 염두해 두면서 복음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많은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공격적으로, 노골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거절했습니다.
세상의 외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는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성령님께서는 구원해 주십니다.
거부감없는 복음과 세련된 말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6:4-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가감없는 복음을 전한 대가로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열매 맺을때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는 환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신약교회의 일꾼들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고통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무 느슨하게 가고 있는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9, 개역한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매울 죽음속에 있는것 같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또한 징계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은 진리를 양심에 호소합니다.
사람들의 양심은 대체적으로 타락해서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심을 대신해 자존심이 그를 꽉 채웁니다.
그런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사람이 40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도바울을 잡아서 죽일수 있을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바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천부장이 와서 사도바울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 말대로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질그릇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능력과 부와 지혜가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했으나 그 누구도 죽이지 못했습니다.
왜인가요? 사도바울을 죽이려면 주님을 이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을 조작하지 않고 그의 선한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사도바울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약할때 하나님의 도움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을때가 제일 강할때 입니다.
결런적으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영광스러운 신약의 일꾼임을 말합니다.
구약은 죽이는 것이나 신약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므로 어려운 삶을 삽니다.
그렇다면 사도이면서 주님을 닮았으면서 왜 어려운 삶을 사는 건가요? 그의 선한 양심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두가지만 살피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6, 개역한글)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해져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이는 전도서 12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몸이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말을 했다면 동년배보다도 훨씬 몸이 안좋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새롭도다>
적용하겠습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지 얼마 안되거나 혹은 오래된 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지 오래 됐다는것은 그 자체가 자랑이 될수 없습니다.
구원받은지 20년이 되었다면 속사람도 20살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모임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또래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또래가 없어서 모임에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대차이라는것은 없습니다.
두번째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어떤 모임에 갔더니 노인밖에 없어, 그 모임이 힘이없다" 입니다.
노인만이 있기에 더욱 더 강건한 모임입니다.
노인만이 있기에 육체에 힘이 없을수 있으나 지혜와 영적 성숙은 매우 강건한 모임인 것입니다.
신약의 영광을 질그릇속에 표현하는 것은 노인들만이할수 있는 일입니다.
구원받은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 햇수만큼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셨습니까?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2, 개역한글)
다윗처럼 <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입의 송이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고 고백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의 음식보다 더 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음식보다 더 좋은것으로 여기고 시작합니다. 지금도 더욱 그러합니까?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3:16, 개역한글)
성령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할뿐 아니라 내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모임을 사랑하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수 있는 힘이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 개역한글)
우리는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있는가요?
지금 하늘에 계셔 우리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에게 뜻을 가지시고 우리의 달려가는길을 응원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의 생활과 가치를 보고 있나요?
우리는 구원받은 햇수만큼 속사람이 성장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자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 서신 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고 자기 마음이 어떤지 정직하게 표현한 서신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이 어떻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수 있습니다.
< 나를 본받는자 되라 >
예화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있습니다. 백조인데 알이 오리둥지에 들어가서 오리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리들 사이를 빠져나아와 농장으로 갔지만 역시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백조를 보았습니다. 백조를 보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미운오리새끼는 왜 자신이 백조를 보고 마음이 끌렸는지 몰랐습니다.
이후 한해가 지나 백조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호숫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미운오리새끼는 향해 백조는 말합니다 "나와 함께 가자"
이것이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세상과 우리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우리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연모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로 주님을 닮게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변화됩니다. 성령께서 진리를 사용해서 우리의 선한 양심에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을 깨닳을때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시간에 매일 사람에서 깨닳은 주님의 조각들을 가지고 나와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합당하게 예배를 드릴때에 우리는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쌓여서 우리의 육체는 계속 후패해 갈찌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강건하여 집니다.
혹 주님앞에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찌라도 우리 주님을 기다리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2:17, 개역한글)
여기보면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젊은이들이 꿈을 꿉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사람들의 이야기 합니다.
구원받은 늙은 성도들은 주님에 대한 꿈을 꿉니다. 주님과 교제할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계속 인도하셔서 신약의 영광과 신약 성도들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알고 착념하고 이것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질그릇속에 담겨 있습니다.
'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 > 한봉래 형제님(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린도후서 강해 3 > (0) | 2022.07.12 |
---|---|
< 고린도후서 강해 2> (0) | 2022.07.12 |
고린도전서 강해 <29> (0) | 2022.07.12 |
고린도전서 강해 <28> (0) | 2022.07.12 |
고린도전서 강해 27 (0) | 2022.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