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 고린도후서 강해 3 >

박이레 2022. 7. 12. 21:41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후서 강해 3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6, 개역한글)

 

예수님의 얼굴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때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어두움에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것을 알때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 계속 주님의 영광을 볼때에 우리가 변화됩니다. 구원의 완성 또한, 주님의 얼굴을 보는것으로 완성할수 있습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17:1-9, 개역한글)

 

이는 변화산에서 있던 이야기 입니다. 주님은 산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산에서 주님의 얼굴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영광을 감추시자 다시 친숙한 인간의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 본것> 이것은 베드로가 직접 본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1:16-19, 개역한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잊을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베드로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성경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는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을 볼수 있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땅바닥에 꺼구러 집니다.
사도요한도 이와같은 경험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을 보았을때 사도요한 죽은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 주님의 영광을 감당할수 없기 때문에 죽은자와 같이 거꾸러 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더 확실하게 볼수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것 같이>
이는 구약 성도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잘났다는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니> <영광으로 영광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며 영광스럽게 변해갑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님께서 점진적으로 우리를 변하게 하십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1:2-3, 개역한글)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살던당시 이스라엘을 바라볼때 그 마음에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변화되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이스라엘은 오늘날 부패한 한국사회와 비슷했습니다.
온갖 죄악이 사회에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이 기도를 오래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드디어 응답하셨습니다.

 

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8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합1:5-10,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이스라엘을 징계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당시 민족 중 가장 잔인하고 거친 민족을 세워 이스라엘을 정복하게 하실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난처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 합당하게 서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의 대답은 정 반대 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여러가지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앞에 합당하게 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를 원합니다."
라고 오랫동안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들으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의 기도와는 반대로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이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때 이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합1:12, 개역한글)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계시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께 달려갑니다.

 

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저의 이 이스라엘을 향한 기도는 역사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역사보다 세계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는 자기가 겪게될 사건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는 만세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나 영원히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고 설것을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도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3:16-19, 개역한글)

 

다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그 미래를 생각하자 하박국 선지자의 창자가 흔들렸습니다. 곧, 그가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농업국가 입니다. 나무가 하나가 없고 소출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치면 모든 직장이 망하고 가게에 가도 쌀을 살수 없고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고 밖에 나가면 버스를 탈수 없는 전쟁이 나서 이 나라가 완전히 폐허가 될찌라도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 할찌로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도들이 해결한 딜레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우리 하나님인것을 일점 흔들리지 않고 지킬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번도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만난적이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빛보다 강한 주님을 보았을때 사도바울의 육체의 눈이 멉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눈으로 주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마음의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본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마음의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생애 가운데 괴로움이 있었고 풀리지 않는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1, 개역한글)

 

1. 주님을 바라본다는것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을때 낙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핍박함으로 사도라고 부름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사도라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낙심할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에 있을찌라도 이겨낼 힘이 생깁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4:2, 개역한글)

 

2. 숨은 부끄러움을 버립니다. 또한 진리를 사랑합니다.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것은 그것으로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직업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것으로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진리를 조금만 알고 그것으로 만족해하는것은 진리를 나타내는것이 아닙니다.
천국가는것으모 만족하고 그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개역한글)

 

3. 자기는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항상 겸손합니다. 자신이 무가치한 자인것을 실감합니다. 자기가 이것을 알 자격이 없고 그 조건을 누릴 자격이 없었는데 은혜를 받은 것을 압니다.
여러 다른 성경에 질그릇에대한 표현이 나와있습니다. (로마서, 예레미야) 질그릇은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그릇중에서 토기가 가장깨지기 쉽고 가장 싼것입니다. 그리고 부서지기 쉬워 1회용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경고합니다.
< 그릇이 자기를 만든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뇨>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질그릇을 만든 목적에 반대하면 안됩니다.

 

질그릇은 그 자체에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질그릇이 가치있고 영광스럽게 사용되는것은 하나님의 용도로 사용될때 입니다.
다만 어떤사람이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되는것은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때 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 주여 뉘시오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사도바울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피박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사 그를 용서하셨으며 은혜로 부르셨고 그에게 목적을 두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생애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순종하는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항상 기억합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개역한글)

 

4. 그는 어떤 경우에도 정복당하지 않으며 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구절들은 전쟁이나 사냥할때 쓰는 용어 입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답답한일을 당하여도> 포위되고 추적당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사냥감을 쫓아가 마침내 일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권투로 치면 ko당하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쳐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이 일을 사도바울이 당합니다. 이일은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사도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뻔한 일이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도바울을 자기힘으로 절대 죽일수 없습니다.

 

그들이 승리자이며 공격자 인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승리는 항상 사도바울에게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보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개역한글)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개역한글)

 

세상이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때에 그리스도인으로써 고난당하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개역한글)

 

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이것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있습니다. 왜인가요?
이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이 사도바울을 그렇게까지 미워한 이유는 사도바울이 주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소망의 날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고난은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남은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고난>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세상에서 떠나신 후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이세상에는 주님의 몸, 교회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직접 볼수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만 주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주님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이 사도바울을 공격한것은 그가 빛을 발하며 몸인 교회로써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공격을 기꺼이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그대로 받으셨을 고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 것입니다.

 

그가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걷고 주님이 행하신 일을 할때 그것이 다만 핍박과 죽음의 위협으로 끝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일을 보고 영혼들이 우리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난을 받는것은 고난이 즐거워서가 아닙니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로인한 결과, 열매, 구원,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사람은 자신이 무가치 한것을 압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사람은 핍박의 길을 걷지만 그는 정복 당하지 않습니다.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4:13, 개역한글)

 

주의 영광을 본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핍박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그가 바라보는것은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5. 믿는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한 것만, 믿는것만 말합니다. 거짓으로 말을 지어내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시116:10, 개역한글)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116:12-15, 개역한글)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116:1-2, 개역한글)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시116:4-5, 개역한글)

 

시편기자가 죽음의 위협앞에 서있습니다. 그는 죽을지 모릅니다.
아마 다른사람들의 거짓말에 속하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는 두가지 일을 합니다.

 

첫번째는, 과거에 나를 도우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합니다. 그는 아직 자기가 처한 위험에서 구출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것이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갖혀 있을때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신, 구약의 성도들이 동일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아직 구원해 주지 않으셨는데 왜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것을 기억하며, 이 일을 해결해 주실것을 믿기 때문에 찬양합니다"
이것이 믿는고로 아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속에서 루터가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보통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아닙니다.
사실 일어난 것은 정치적인 사건입니다. 루터를 지지한 사람도 정치적인 이유로 지지한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 교황의 어마어마한 권력앞에 홀로 반대합니다. 면죄부를 반대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을수 있다는것을 주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를 말리면서 타협하자고 할때 루터는 이말을 했습니다. <내가 믿는대로 말한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방법을 가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4: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자기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환영합니다. 사도바울은 한번도 자기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내 동족 유대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이것이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의 삶입니다.

 

그는 왜이렇게까지 교회를 세우려 할까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것은 이런 것입니다.

 

계시록에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엎드리고 찬양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그 음성에 한사람의 음성이 더해지기를 하나님께 더 강력한 창양이 드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본사람의 특징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12:3, 개역한글)

 

많은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빛날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본사람의 고백 입니다.

 

이 모든것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개역한글)

 

주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와같이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해야하며 말씀을 봐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변화되며, 겸손하며, 정복당하지 않으며, 믿음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사람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6.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 개역한글)
(계2:1-7, 개역한글)

 

에베소 교회를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많은 칭찬거리가 있었습니다.
1. 행위가 있었고 2. 수고했고 3.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4. 악한자지만 사도라고 칭하는 자들을 걸러냈습니다.
여러가지 잘한 것 중 잘못한것 한가지는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뜻대로 섬기는 것은 전부 주님을 사랑할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자꾸 우리 눈에서 주님 아닌것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만 보다가 다른것으로 시선이 약간 벗어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것은 주님을 보는것입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사도바울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했습니다.
변화된 몸으로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는것을 소망하고 사모했습니다. 이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에게서 눈을 돌린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 이유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잠시 다른것에 시선을 둘때가 있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주님을 보다가 언제부터 다른것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선이 옮겨진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시선을 주님께로만 돌려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보고 영광의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의 우리의 말씀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옮겨진 시선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는것에 필요한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해를 의인과 똑같이 비춰주시며 악인의 논에도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곧, 차별없는 사랑을 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닭이 그 새끼들을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일이 몇번이더뇨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예루살렘에 일어날 끔찍한 학살을 내다보시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길을 가는 사람을 보고 울고 있습니까?

 

3.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경고하십니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19:11, 개역한글)

 

이는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계속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듣지 않을찌라도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경고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4. 주님은 각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십니다.

 

주님은 복음을 끝까지 제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을 믿는자들과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미워하지 않았지만 야곱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면 에서를 미워한것과 같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야곱과 같이 사랑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모임안에 있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야곱을 사랑함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께서 이사랑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발을 씻기는것은 가장 낮은 종이 하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온몸이 깨끗한 사람은 발 밖에 씻을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의 죄로 더러워진 발을 사랑으로 씻겨야 합니다.
내가 씻겨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너희도 나처럼 행하기 하기 위하여 내가 본을 보였노라 >

 

목욕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이 더러워진 성도들을 위하여 가장 낮은 종이되어서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5-27, 개역한글)

 

25절은 주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희생적이었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많은 오해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모욕중에 '너는 귀신이 들렸다' '너는 미쳤다' '너는 사마리아인이다' 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말씀으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낮추지 않고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흠이없는 교회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간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6, 개역한글)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징계를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징게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부터 먼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것같이 세상을 사랑해야 하며
자녀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5:20, 개역한글)

 

이 사랑의 특징은 다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보고 다 아는것입니다.
이 사랑을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 사랑을 우리가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거룩과 영광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수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알려주시는것을 다 배우고자 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마지막 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으로 오사 같이 생활하신 주님인지도 몰라봤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자 그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볼수 있습니다.

 

<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조금의 오차없이 하나님을 그대로 표현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2:19-22, 개역한글)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 초기와 맨 마지막에 성전을 깨끗게 하십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십니다.
이것은 말라기서에 예언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주님께서 홀연히 성전에 나타나실것이며 주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이를보고 "당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나타내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성전 옆에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셨습니다. 이말을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전이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
(요12:14-16, 개역한글)

 

이와같은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알수 있는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다니엘이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임하신후) 주님께서 메시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침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11:15-17, 개역한글)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은 이방인을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차별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중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할수없이 침례를 주고 예루살렘 교회에 더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는 이일을 설명합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 물로 침례를 받았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이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하신것을 사람이 막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행20:35, 개역한글)

 

이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중에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도바울은 육체를 입으신 주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 주는것이 받는것보다 복되다 > 라는 말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지만 복음서에서는 안나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말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합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은 이 말을 안것일까요?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3:3-4,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계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타나내셨습니다. 교회릐 머리시고 지역모임의 주인이신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바울에게 특별히 알리신것이 교회진리 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것을 나타내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교회의 진리를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은 구속을 완성하시고 다시 영광중에 오실것입니다. 교회를 맞이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가 어떠한지 알고 영광을 누리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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