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7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28>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12, 개역한글)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고전15:24-25,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5장을 함께 묵상하고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선 잘아시는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마음으로 믿는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것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시고 죽으실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모여 이번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의 죽으심을 담대히 외치며 기꺼이 순교할수 있었던 이유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단은 복음을 공격합니다. 그 공격이 어디에 있냐면, 바로 부활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2, 개역한글)
고린도교회의 어떤 이들은 죽은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믿겠습니다.
복음에는 반드시 부활이 포함됩니다. 이를 믿지 않는자는 구원받은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습니다.
이 당시 고린도교회는 아테네, 헬라지역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와 아테네는 같은나라 같은민족이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17: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복음을 들고 아테네에 들어갔을때 있었던 반응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말도 안되고 이해할수도 없고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때 주님의 몸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17:32, 개역한글)
아테네사람들은 주님의 몸의 부활을 듣고 이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1. 조롱했습니다. 2. 연기했습니다.
아테네에는 복음을 믿겠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 사도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왔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아테네와 달리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2:17-18, 개역한글)
디모데 전후서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 있을때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유럽에 있는고린도와 아시아에 있는 에베소에서 동일한 주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부활을 부인합니다.
부활을 부인하는것은 부활자체를 부인하는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몸의 부활은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영적인 부활은 있으나 몸의 부활은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왜 이러한 주장이 나왔을까요?
자기들이 사는 사회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헬라 철학은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며 몸에 묶이면 그것은 고통스러운것으로 보았습니다. 헬라철학은 물직은 악한것이며 영은 선한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었을때에 아테네 사람들은 복음을 조롱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 세상의 생각을 내려놓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래놓고 그들은 주님의 부활은 인정하지만 부활이 지나갔다, 주님의 부활이 끝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당시 세상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이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생각이 교회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믿지 않는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이 일어난것을 설명하는 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도도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이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 후에 부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났으며, 엠마오로 가는 제자 둘에게 나타나셨으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고 5번 나타나십니다.
이후 40일간 이땅에 계시면서 5번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총 10번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날 5번 나타나시고 부활하시기까지 5번 더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것은 5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 교회가 증거입니다.
2. 성경이 증거입니다.
3. 목격자가 증거입니다.
4. 사도바울이 직접 주님을 보았습니다.
5. 공통된 복음의 내용이 그 증거입니다.
교회를 세워야 하는 12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도망갔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합니다. 이사람들이 나중에 목숨을 걸고 대부분 순교합니다.
그래서 생겨난것이 교회입니다. 이 순교가 없었다면 교회는 성립될수 없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12제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세워진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1, 개역한글)
알게 한다는것은 필수적으로 알아야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 받은 것이요 >
복음을 받을때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것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영접하는자 / 요1:12 >
내 생각을 내려놓고 이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 그 가운데 선것이라 >
말씀을 받고 핍박이 오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계속적으로 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들을때는 기뻐하지만 금방 돌아서고 부인하는것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13:19-23, 개역한글)
여기서 나오는 4가지 중 구원받은자는 열매를 맺은 좋은땅에 뿌리운 씨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구원받지 못한자입니다.
복음이라 하는것은 너희가 받은것이요, 그가운데 선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전15:2, 개역한글)
성경은 항상 모순되지만 두가지를 다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노력이 약화되는것은 아닙니다. 믿은것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구원받게 하시려고 작정하셨냐면 영원전에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약하게 하사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받은 믿음을 의롭다 하십니다. 너는 의인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것입니다. 그런데 과거형으로 쓰였습니다.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먹은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주님보다 강한자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마음이 변하시는 분인가요? 둘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면 우리는 이미 영화롭게 된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구절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하신다는것과 동일하게 사람이 주님의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
어떤 사람이 복음집회에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주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천국에서 볼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함께 못하는 성도인가요?
아닙니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2:23, 개역한글)
이는 주님의 공생애 초기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표적은 특히 기적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기적입니다.
그와같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닌 다른단어로 쓰기 어려움으로 성령께서 믿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같은 믿음을 신뢰치 않았습니다. 그믿음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그 마음의 속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6-68, 개역한글)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있던 일입니다. 오병이어는 수많은 사람이 이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남자만 5천명이므로 여인과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1만5천명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 개역한글)
여기보면 믿은 유대인들입니다. 믿은자는 주님의 말씀에 계속 거해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8:44, 개역한글)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사단의 자식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은 주님의 대속과 죽으심, 살아나심을 말합니다.
구원받으면, 믿기로 하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에 열매를 맺고 주님을 계속 믿는것이 구원받은것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이 구원은 헛된 것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9-11, 개역한글)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구원받기 전에 심각하게 죄인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가운데 강도짓하고 남색하고, 성적인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기전에 엉망인 삶을 살았지만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할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러한 변화된 삶을 살수 있습니까?
오직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교회가 존재한다는것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교회가 있을수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그 종교의 창시자가 부활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만이 주님이 부활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변화시켜갑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두번째 성경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는 주님의 죽으심을 실망합니다. 주변에서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럴리 없다고 생각핬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사 구약성경을 예로 들으시며 말씀으로 부활을 설명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개역한글)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혜택을 600전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53:9, 개역한글)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아리마대 요셉, 부자의 무덤에 안치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53:10, 개역한글)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후, 주님께서는 그 씨를 보게 될것입니다.
주님을 믿는자들이 나오게 될것입니다.
이후에 주님께서는 다시 이세상에 오사 이땅을 통치하실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이사야는 53장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말했을 뿐만아니라 주님의 부활하심을 말합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다 말해 놓으셨습니다. 성경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26:2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헤롯가문인 아그립바 왕이 선지자를 믿는지 안다고 합니다.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것 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26:22-23,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선지자들이 한말이 무엇인지 증거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것입니다.
성경이 주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번째, 목격자들이 증인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15:5, 개역한글)
주님께서 부활하신후 남자에게 제일먼저 보인사람은 첫번째가 게바이며 두번째가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였습니다.
여기서는 첫번째 베드로가 나옵니다. 그리고 열두제자가 있습니다(도마가 없을때 입니다)
그리고 오백명의 형제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첫번째 나타나신 것일까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주님을 부인함으로 인해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용하기 위하여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않고 한번 부른 베드로를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 나타나신것입니다.
두번째, 열두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가라고 죽기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세번째,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신것은 갈릴리에서 보이신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을 본 사람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주님을 본 사람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를 쓰던 시간에도 수많은사람들이 살아 있엇습니다. 이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네번째, 야고보에게 보이십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닙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생애에서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활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사 그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가족중에서 주님을 믿는자가 나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들은 전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하고 변화되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주님의 증인이었습니다.
또한 특별한 증인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그는 불신자였으며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사 교회를 세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은 자격이 없는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그를 끌어가십니다.
주님의 주권을 볼수 있습니다.
서양에 어떤 전도자들 멜트롯토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 였습니다. 딸이 하나 있었지만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살된 딸이 영양실조로 죽습니다.
그는 딸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술을 귾을것을 굳게 결심합니다. 그래놓고 장례식을 하면서도 술생각이 난것입니다.
그는 딸의 겉옷을 벗겨 팔아서 술을 사먹습니다.
그런 그가구원을 받고 그가 전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놀라운 변화를 시키십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15:11, 개역한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번째 증거입니다.
그들이 서로 입을 맞춘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부름받았을때에 혈육과 의논하려 하지 않습니다. 먼저 말하려 할뿐입니다.
그런데도 모든전도자의 복음의 내용이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1. 교회가 증거합니다. 2. 성경이 증거합니다. 3.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4. 사도바울의 변화가 증거합니다. 5. 모든 하나님의 일군들이 공통된말을 증거합니다.
사도바울쪽에 서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8-10, 개역한글)
<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이며 자격없는 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 , < 하나님의 은혜로라 >
우리는 우리가 자격없는 자라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로서는 주님을 섬길수 있는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부르사 나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꼐획이 무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저를 왜 이세상에 두셨으며 왜 저를 교회에 두셨나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받고 교회에 넣으셨는데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된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는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이 수고합니다.
< 그 이후로는 나중이니 >
나중이라는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때라고 해석할수 있을것입니다.
서양의 역사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세워지고 중요한 사건이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안디옥에서 사람들이 와서 구원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때 은혜가 율법을 이깁니다.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의 수양회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후 교회가 300년간 핍박속에서 삽니다. 그후 로마콘스탄틴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발표합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암흑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로마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황이 세워지고 성경은 라틴어로만 번역이 되고 모든사람이 읽지 못하게 됩니다. 카톨릭이 세워집니다.
그후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게 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됨을 밝힙니다.
종교개혁 이후 산업혁명과 함께 개인의 가치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후 1차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많은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발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은 "과학은 발달하고 세상은 좋아지지만, 사람의 마음은 짐승과 같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갑니다.
그래서 권위에 대해서 냉소적입니다. 대통령을 냉소적으로 보며, 선생님을 무시합니다.
이것이 시대가 흐르며 변화된 사상과 흐름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목적은 왕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주님께서 오셔야 합니다. 부활하셨으니 오실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오시면 인간의 통치가 끝날것입니다. 주님께서 통치하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계속 주님께서 통치하실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통치 하시기 위해서는 동망에서 2억의 군대가 와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동방에서 2억의 군대가 올정도로 중국이 발전되고 있습니다.
저희 시대에 이러한 준비가 거의 완성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오실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에 사람들은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가 되고 냉소적이 됩니다.
이때에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세가지를 줍니다.
1. 우리를 절망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를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라 생각한 주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슬픔이나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경험을 했어도 우리는 부활을 본 자들입니다.
2. 우리는 무능력에 대한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어찌되었든 죄가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다, 연약하다, 해낼수 없다는 감각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긴다는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포기는 없습니다.
3. 우리는 운명이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며 불가능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왕으로 오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한, 믿는자들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란에서 술탄이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그는 11세기때 있었던 이란을 부흥시켰던 왕입니다.
그는 죽을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내가 전쟁이 있을때에 다시 돌아와서 나라를 위해서 싸우리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기에 다시 돌아올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셔서 백마를 타고 오사 우리를 위해서 싸울것입니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은 시체로 차있는 무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무덤은 3일만에 비어버린 무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글픈 인생을 살면서, 힘든 모임생활을 하면서 절망과 무능력과 어쩔수 없는 한계를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게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1. 내가 적합한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위해 수고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더욱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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