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1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후서 강해 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4:1-2, 개역한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6, 개역한글)
고린도 후서는 구원을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고 이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자마다 영생을 받는 것이니라>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율법을 준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닮아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님을 보고 구원을 받고 주님을 보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주님을 볼 것입니다.
이와같은 현상이 어떻게 사도바울의 삶에서 나타났으며 사도바울은 왜 이런말을 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저희들처럼 육체를 입고 이땅에 살아가고 계신 예수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곧 주님의 영광을 본것입니다.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3-4,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살아가면서구원간증을 몇번 합니다. 그 구원간증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 주님은 해보다 밝은 빛이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주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햇빛을 직접볼수 있나요? 해를 직접보면 눈이 멉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빛을 보고 그 육체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성경에서 <거울로>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막에서 보통 거울을 어떻게 썼냐면 여인들이 화장할때 썼던것이 거울입니다. 즉, <거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보는 말씀입니다.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구원간증할때 저희들도 이런면을 점검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주님의 영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7, 개역한글)
아나니아는 사도바울을 형제로 인정합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셨고 그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자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9:26-27, 개역한글)
바나바가 사도바울이 형제라고 말하는것의 근거는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기준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의 구원받은 간증은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보았는지를 말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하실수 있겠습니까?"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22:14, 개역한글)
<저 의인> 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인물로써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사 다메섹 도상에 나타나신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것이 사도바울의 구원입니다.
우리 또한 전도자들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것이 구원입니다.
그럼 구원받은사람은 구원의 목표에 어떻게 이를수 있을까요? 모든것은 주님의 영광을 볼때 이를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아는사람이 구원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자가 주님을 닮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개역한글)
<저와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나 이 영광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는것은 점진적입니다. 한번에 되지 않고 시간이 걸립니다.
<주의 영> 많은 형제님들이 이 주의 영을 우리 주님으로 보시고 성령님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저는 성령님으로 이해하고 말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생애 중에서 한번도 시선을 다른곳에 돌린적이 없습니다.
1. 사도바울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2.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3. 성령의 사역이 그의 심령에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때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하나님은 방주를 노아로 예비하게 하시고 무지개로 그 약속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출19:9,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이 구름은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라고 합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때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접근할수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 되었을때도 하나님의 임재의구름이 성전을 가득 매웠습니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19:16, 개역한글)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출19:18, 개역한글)
주님의 임재는 구약의 백성들에게도 여러가지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19:19, 개역한글)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구약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것입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출34:29-35, 개역한글)
여기 보시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같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시 갔을때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볼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화할때는 그 수건을 벗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인용합니다.
구약에서는 수건으로 영광을 가렸기에 그 영광을 온전히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 앞으로 갈때 수건을 벗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앞에 가면 수건이 벗어집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거울을 보는것같이 보는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대면하여 보는것은 하늘에서 일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것을 문맥적으로 살피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1:3, 개역한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5, 개역한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자기의 힘으로는 견딜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은걸로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려고 주신 고난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시지 않을 고난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감당할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4, 개역한글)
사도바울에게는 환란이 있었고 그 마음에 애통함이 있었습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6:4-5, 개역한글)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3-28, 개역한글)
고린도후서 11장에 와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고난을 받고 있었는가 말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표현합니다.
산다는 것은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이것을 잘 압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행하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인생의 모든 삶은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고통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으면 이 인생의 고통은 가중됩니다. 더욱 주님께 헌신적으로 살려고 할수록 핍박이 심해집니다.
외부의 핍박은 무시한다 쳐도 내 속에있는 변하지 않는 육체가 고통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마음을 열고 자기 속을 드러내고 있는 서신입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고후6:1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괭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형제들끼리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특별한 애정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12:11, 개역한글)
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후12:14-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영적인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속의 말과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교회에는 하지 않은 말입니다.
인생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이고 믿으면 그 고통이 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 당했을 때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권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쉽게하면 안가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말고도 신경써야 할 교회가 많습니다.
헌신과 사랑을 쏟았음에도 사도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다 낙심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낙심하지 않을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주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성도님들께서 모임생활을 하시면서 제일 괴로운것은 형제들이 상처 줄때입니다. 교회의 일꾼이 상처를 줄때입니다.
마음같아서는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갈만한 세상의 모임이 없나요?
그럼에도 모임을 떠나지 않는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가장 큰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상처를 이겨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영광중에 주님의 십자가를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중 하나가 "다 이루었다"
주님은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움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광입니다.
< 다 이루었다 >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배반과 이런 소리를 듣고도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위험천만하게 자기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주님을 떠날수 없습니다.
모임때문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모임에서 선도 봐주지 않는다하더라도 모임을 떠날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모임은 < 주의 영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4, 개역한글)
저희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사랑이 우리로 이렇게 생각하게 합니다.
< 한사람이 모든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우리 주님은 죽을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이를 나에게 적용하면 나도 죽은것이라고 적용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개역한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뿐인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만 못한것을 우리에게 안주실리가 없습니다. 만일 안주신다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는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거둘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의 죄를 다루며 고린도후서는 교리를 다룹니다. 이것을 다룰때 고린도 교회의 반응과 그들의 태도를 생각하며 사도바울의 마음은 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열매 맺을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시 그때의 사건을 돌이키면서 사도바울을 영적인 아비로 따를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3:13, 개역한글)
환란이 영광이기에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환란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놀라운 의도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낙심 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2. 주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주신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영광으로 변해져 갑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4:2, 개역한글)
<숨은 부끄러움의 일> 은 이중적인 삶입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을 보면 버리게 됩니다.
< 궤휼가운데 행하는것 > 속임수를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포기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주신것으로 만족할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우리 복음만 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가 변화합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변화된 사람이 사도바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후 자기의 생애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22:8, 개역한글)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22: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구원받을때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 주여 뉘시오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구원에 이 두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 은혜를 받고 이제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들을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행26:1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후 그 생애를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변화의 삶으로 그는 신약성경중 13개의 서신을 서신을 쓰며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기가 달려갈 길을 마친것을 압니다.
이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했다>
이제 사도바울의 소원은 변화된 몸을 가지고 주님께서 나타나셨을때 주님이 있는곳에 가서 주님을 보는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본 이후로부터 다른곳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변화된 것입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3-14, 개역한글)
< 오직 한가지> 사도바울이 생애 어중 추구한 한가지 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좇아간것 한가지만 한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한가지만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것이 다윗의 생애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여러 전쟁에 나가고 그 전쟁에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것이 다윗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것이 다윗의 목표였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를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주님께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주게 할것을 요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한가지만 할찌라도> 마리아는 이 좋은것을 택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어떻습니까? "율법을 다 지켰나이다" 주님께서는 < 네게 부족한것이 단 한가지 있으니>
부자청년은 우상으로 재산을 사랑했습니다.
<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사도바울은 세상의 지식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몇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외부적인 율법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볼때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간증을 하나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분이 구원받고 담배를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내 몸이 성전이다"라는 말씀을 보고서 내가 담배를 피는것은 성전에서 연기를 피는것과 같다는것을 깨닳은 순간 담배를 필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간증입니까?
끊지 못하는 악습이 있다면 이것을 주님앞에서 변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주님과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의 비결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내 생애 주님이 가장 귀한분입니까?
주님과 비견되지는 않지만 내삶에서 주님과 비슷하게 내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숨은 부끄러운 일이 있고 궤휼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마음에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귀한것이 있는가? 혹은 이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삶으로 안움직이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개역한글)
목표는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몸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1, 개역한글)
주님은 먼저 교회의 인도자들을 주셨습니다. 인도자들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합니다. 온전이라는 단어는 성숙을 이야기 합니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말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인도자들을 보고 그대로 닮아가며 일하게 됩니다.
모든 지체된 성도들이 은사를 사용하여 일할때 교회는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룹니다. 교회전체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그것이 주님을 닮는것입니다.
우리가 인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가,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내가 변화되고 있는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봉사하면 이 봉사가 교만하게 되고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봉사를 하면 할수록 모임은 어려워 집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9:1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육체의 눈은 멀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여주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5, 개역한글)
그릇은 질그릇입니다. 그릇 자체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릇이 무엇을 담고 있는냐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보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시하는데 그 인생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17, 개역한글)
세번째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케 해서는 안됩니다. 곧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죄를지어도 곧 자백하고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때에 성령충만할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행9:19, 개역한글)
네번째, 형제들과 교제하기 시작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9:20, 개역한글)
또한 주님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것은 은사 있는 사람이 하는것이 아닙니다. 전도란 증인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하는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지 않고 우리가 본것을 온유한 심정으로 소망의 이유를 대는 것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9:23, 개역한글)
이렇게 하였을때 고난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위로하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주의 영광을 본 후에 섬기며 주의 영광을 말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것이 구원이며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을 살피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개역한글)
<죄에 대하여>
성령께서 믿지 않는사람들에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도 스스로 지옥갈 죄인임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의에 대하여>
주님께서 의인이십니다. 주님은 인간이셨으나 점도 없고 흠도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입니다.
<심판에 대하여>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번죄하였을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고 뱀이 여자의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다> 이것이 삽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로 모든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믿지않는 사람에 알게 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5, 개역한글)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령은 1.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의지하고 친밀하게 할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개역한글)
성령께서는 2. 성경을 읽을때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행15:28, 개역한글)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장로들이 모여서 결론을 낸것입니다.
< 성령과 우리는 >
성령께서는 성동들 사이에서 의견이 다양할때 하나되게 하십니다. 만일 하나되지 않는다면 어느 한쪽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개역한글)
성령의 네번째 사역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도하심으로 <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는결과가 나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세번이나 기도합니다. 내용은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기도한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네가 약할때 네 능력이 온전하여 짐이라>
우리는 기도할바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면 우리는 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영광을 볼때 시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사람은 1.고통이 있을때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약의 원리 입니다. 3.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어떻게 주님을 계속해서 볼수 있었는가는 내일 살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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