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8일 수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21>
고린도서는 교회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전10:14-22, 개역한글)
이 대목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질문이 8장 1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에대한 답을 하는중 이제는 그 적용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읽어드린 14절부터 22절까지는 구체적인 적용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수 있다고 견해를 보입니다. 이를 발전시켜서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신전에서 먹을수 있다고 고린도교회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에대한 사도바울의 대답은 안된다 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10:25, 개역한글)
두번째 견해에 대한 대답입니다.
제우스 신에게 드린 고기의 일부가 시장에 판매됩니다. 성도들이 시장을 볼때 고기의 출처를 알수 없습니다.
이에대해 사도바울은 출처를 뭍지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10:27-28, 개역한글)
세번째 견해에 대한 대답이 이와같습니다.
불신자에게 초대를 받았을때 상에 차려진 음식이 제사후 나온 음식이든지 아니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뭍지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하는사람이 있다면 그사람과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수 있느냐는 질문에 관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룹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손 없는날이라는 이유로 이사날짜를 자유롭게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이 자유롭게 이사날짜를 잡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놀라운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부분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사용할때 이것을 염려하라고 합니다.
<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다른성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
이에대해 사도바울은 9장에서 자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역하고 개척한 교회에서 자기의 필요를 채울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정하신 권리였으나 사도바울은 이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많은 종교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다른 종교처럼 뭍힐까봐 자비량 한것입니다.
두번째로 염려해야 할것은 내가 너무 남용하지 않는가 입니다.
< 너무 남용하여 범죄에 이르지 않는가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 졌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고린도교회에 제시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할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수 있는 자유를 얻은것입니다. 이부분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죄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한번 욕심이 생기면 그는 그 욕구를 채우지 않으면 못견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죄를 거절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순종하는데, 주님을 따라가는데 사용합니다.
육신에 속한자는 이것을 하고자 하여도 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대한 고린도전서의 설명입니다.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1-12, 개역한글)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실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유의하며 깨어 살아가야 합니다 (12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개역한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어떠한 경우라도 통과할수 있습니다 (13절)
14절은 결론을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내 사랑하는 자들아 >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1년 6개월간 장막을 만들면서 수고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자유를 남용하며 무질서하게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럼에도 산 성도였습니다.
15절에서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지혜롭다, 강하다 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신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수 없는 세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1. 우리가 드리는 만찬예배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16절-18절)
2. 이방신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중에 이방신전에 가서 제사음식을 먹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5:11, 개역한글)
우상숭배는 이방신전에서 드려지는 고기를 먹는행동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안된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만찬예배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만찬예배에 참여하면서 그들이 드리는 숭배에 참여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잔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떡을 데면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다른주인을 섬길수 없습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마26:26-30, 개역한글)
이 부분은 최후의 만찬 유월절을 잡수시며 만찬제정을 하시며 감란산으로 가는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잔을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잔이 원래는 유월정 식사의 잔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할때 유대인들은 잔을 4번 돌립니다.
잔은 붉은 포도주, 어린양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가장이 잔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쓴나물을 먹습니다. 쓴나물을 먹으면서 가장이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113편과 114편을 찬송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잔이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유월절 예식입니다.
첫번째 잔이 끝나면 두번째 잔을 가장이 돌립니다.
두번째 잔이 돌아가고 먹는것이 유월절 본식사 입니다. 무교병과 어린양의 고기를 먹습니다.
아버지가 기도를하면서 두번째 잔이 끝납니다.
그후 세번째 잔이 돌아오는데 이것이 소위 축복의 잔입니다.
이것이 돌아오면서 이스라엘은 찬양합니다. 시편 115편부터 118편입니다.
이 내용중에 유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 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들고 주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
라는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세번째 잔을 돌리시면서 이 세번째 잔을 만찬으로 바꾸십니다.
이제는 출애굽을 한것을 기념하지 않고, 주님의 구속사역을 말하십니다.
<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마지막으로 네번째 잔을 돌립니다.
네번째 잔이 돌아가는것은 유월절 의식이 끝났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네번째 잔을 마시면서 메시아가 왕위에 앉아 통치하실 그나라를 소망합니다.
그중에서 세번째 잔이 축복의 잔이고 이 잔을 주님께서 만찬예식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전10:16, 개역한글)
<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예 참여한 것입니다 >
떡은 떡입니다. 물질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떡은 떡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포도주를 포도주라고 하지 않고 잔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잔일까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잔이라고 하는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신, 십자가에서 흘려진 피를 받은 잔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이잔은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것, 내형벌을 대신받으셨다는것을 말합니다.
떡은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세상에 오신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셨지만 주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떡입니다.
이 만찬 예배에 대해서 알수 있는것은 1.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찬예배를 드리지 않는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이방신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하는것입니다.
만일 예배드리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일수 없는 것입니다.
떡과잔은 상징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이는 내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직 계십니다. 죽지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2. 그러나 이것은 상징 이상입니다.
떡과잔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상징 이상의 것입니다.
조금 무리한 비유일수 있습니다만,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고인의 사진을 올려놓고 장례식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엄숙하게 참여합니다.
고인에 대해서 그 고인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영정사진입니다.
떡과잔은 상징이지만 상징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고인의 사진을 보고 고인이 살아 있을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우리는 떡과 잔을 먹으며 주님을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통해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죽은 것입니다.
이제 떡은, 내가 주와 하나가 된것입니다.
이 떡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이 내안에 계십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10:17, 개역한글)
우리가 한떡을 떼는것은 떡을떼는 모든성도가 다 한지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찬에 참여할때마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만찬을 할때에는 영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과 이로인해 내가 하나가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찬에 참예한 모든 성도가 하나라는 영적인 실체를 맞보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통해 말합니다.
몇몇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참예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중심으로 참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만찬예배를 할때 그 가운데 몸이 참여해놓고 마음으로 전혀 동조하지 않는 일은 없는것처럼, 이방신전에 제사를 드릴때 참예했다는것은 몸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조금의 동조를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할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와 연합해 있습니다.
예배는 이 사실을 영적으로 분명히 확인하고 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방제사에 참여할수 없고, 몸만이 가서 제사의 음식을 먹는다는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경에 지정된 음식만을 먹어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까다롭습니다.
왜이렇게 까다롭나요? 이 까다로움으로 인해 이방인과 식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방인의 식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나요?
이방인의 집에는 이방신이 대부분 있고 이방신의 가치대로 식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식사했습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유대인 성도 몇몇이 왔을때 안디옥의 이방성도들과 식사하지 않은척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공개적으로 꾸짖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답게 살려면 이방인들과 식사를 할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신전의 우상에 참여할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심지어 18절은 이스라엘의 예를 듭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전10:18, 개역한글)
이스라엘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도, 형식적으로만 참여하고 마음은 딴데있다라고 할수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고전10:19, 개역한글)
둘째로, 이방신전에 갈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이방신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고전8:4, 개역한글)
< 아무것도 아니며 >
영어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Nothing 입니다.
<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는줄 아노라 >
식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상이 있습니다. 제우스는 가공의 신입니다. 없는 신입니다.
가령 없는 제우스를 위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도 고기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없는것 앞에 드려진 고기는 그냥 고기일뿐이다. 이것이 기본원리입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0, 개역한글)
< 이방인의 제사하는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기본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놓고 그앞에 제우스 신에게 빌고 찬양을 하면 이는 귀신에게 제사드리는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요즘은 점들을 많이 칩니다. 요즘 타로점이 유행입니다.
점이라는 것이 있나요? 점이라는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사람이 복채를 두둑이 내고 점을 봅니다. 이는 귀신에게 점보는 것입니다.
점이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지만 우상이 없다고 해서 우상에게 섬기는 행위가 옳은것이 아닙니다.
왜 점을 보나요? 가끔은 사단이 역사하여 맞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점치는것의 배후에 사단이 교묘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위앞에 가서 365일 빕니다. 그 바위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사람들이 바위앞에서 절할때 가끔 그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사담이 바위의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제사를 드리는 것이 귀신에게 예배하는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것은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입니다. 이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으로 가면 고린도 성도가운데 잠자는 자가 있었습니다. 병든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게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우상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무슨 조각품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그런 우상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현대인에게 우상은 우리속에 있습니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5:5, 개역한글)
탐하는자가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개역한글)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것으로 만족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사람과 상대적으로 많건, 적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것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탐심입니다.
어떤사람을 하나님은 부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부한사람을 보고 부해지고 싶다고 하고 그렇게 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일수 있습니다.
다른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게서 내게 어떤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영적으로 부요한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것 이상의 것을 하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우리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고린도교회는 또한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또 말합니다. 참된 자유는 죄의 경제선까지 가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것이 아니다.
참된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것이 자유이다.
달리기 하는자가 많을지라도 우승하는자는 한명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자는 두명입니다.
이방신전에 참예하면서 나는 만찬을 한다고 하는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이방신전에서 벌어지고 있는것은 실제로 귀신에게 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우리는 말씀보다 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꼼꼼히 살피며 하나님의 말씀안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상받는 기준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느냐가 아니라, 말씀대로 한 자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길게 쓰신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우리의 경외심이 필요하며, 우리의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배려의 장치입니다.
사도바울은 우상숭배하는일을 피하라라고 합니다.
피하라는 것은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언제요? 항상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대결해서 이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을 감당하는것만도 우리에게는 벅찹니다.
우리 스스로 유혹되어 죄의길, 시험의 길로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시간에는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말을 보게 될것입니다.
우리에게 우상의 제물이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심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되신 주님앞에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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