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고린도전서 강해 <18>

박이레 2022. 7. 12. 21:29

2015년 6월 24일 수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18>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13,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은 회색지대를 어떻게 통과할것인가 하는 주제입니다.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것은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건, 되지 않건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모든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또한 성경에서 명백하게 금한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이 두가지만 있는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이 영역을 우리는 쉽게 회색지대라고 부릅니다.  그 자체가 선도 아니며, 악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고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신약에서는 그 수건이 벗겨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자유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신 자유입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타인이 빼앗지 못하도록 지키고 이 자유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개역한글)

 

우리의 자유는 주님의 피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여진 자유 입니다. 누군가가 이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는 싸워서 지켜내야 합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갈2:4-5, 개역한글)

 

분명히 도덕적으로 선한것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 있습니다. 선악이 아닌 영역가운데서 어떤사람이 우리를 종삼고자 하면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할례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디도에게는 절대로 할례를 행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선택할수 있는 넓은 영역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이영역 가운데서 우리를 종삼으려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유에서 어떤 원리로 이것을 선택할까요?

 

먼저 생각해야 할것은 1. 다른 연약한 성도가 넘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고린도전서 9장에 다루고 있습니다.

 

2. 우리가 자유롭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것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이내용이 고린도전서 10장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성도들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 고린도사회(그리스)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은 단순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닌 사회활동의 일부였습니다. 결혼식과 축제와 여러가지가 신전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는 신전에서 팔고있는 고기를 먹을것인가에 때해, 어떻게 할것인지 선택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행하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할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내가 신전에 들어가서 고기를 먹는 것을 연약한 형제가 보고 마음에 걸리는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사람이 오해하지 않도록 스스로 천막을 짖는 일을 하여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입니다.

 

나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나는 지식이 있다. 나는 은사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신전에 들어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사도바울은 뭍습니다 
"정말로 그 위험한 영역을 안전하게 통과할 자신이 있느냐?"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를 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권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남용함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13절까지 읽었는데 오늘은 6절까지 다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오늘읽은 말씀의 중심은 12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개역한글)

 

우리는 서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정말로 서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조자도 넘어지고 실패 했다.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0장의 문맥입니다.

 

이제 한절한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전 9장말씀 후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9:24-2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선수의 삶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은 상을 얻기위해서 경기합니다. 선수들은 상을 얻기위해서 절제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도 간증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내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

 

우리가 구원받은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이 자유로운 영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영역에서 다른이에게 영향을 줄수 있는지, 또한 내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청년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mt에 놀러가고 술을 안마시고 노래방가서 찬송가만 부르고 나온다고 말한다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정말 그렇게 할 자신이 있느냐? 이스라엘도 하지 못했다 >

 

그리스도인은 상을 위해서 달려 갑니다. 그렇다면 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해서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상입니다.
이 상을 얻어야 합니다. 이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절제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상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가지 목표입니다.

 

10장 1절부터 이제 살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10:1, 개역한글)

 

<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라는것은 절대로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인 이방인에게 말하고 있지만 영적인 조상인 아브라함을 얘기했듯이 고린도교회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때는 마른땅을 건넜습니다. 그 사이 하나님의 구름이 애굽군대를 막으사 이스라엘을 쫒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으로 해방된 하나의 민족이 된 이스라엘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자기 정체성이 없습니다. 평생을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종된 이스라엘을 홍해를 통해서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교회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존재만으로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복된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고전10:2,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홍해를 건넌것을 침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침례는 물 침례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침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3, 개역한글)

 

침례는 항상 몸에 넣는것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더해진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스라엘에 속하게 됩니다. 곧 모세에 속한다 하여 모세가 그들의 머리가 됩니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되어 주님을 따라갑니다.

 

2절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3-4, 개역한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물을 마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하나의 독특한 문구를 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반석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반석이 이스라엘을 따랐다'고 나와 있습니다. 문자대로 반석이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항상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항상 주님께서 임재해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1절에서 자유를 얻었고, 2절에서는 모세가 그들의 머리가 되었고, 3절에서는 공급받았으며, 4절에서는 주님께서 항상 같이 계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 우리와 같은 그런 이스라엘도 실패 했으므로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10:5, 개역한글)

 

보통, 계산하기를 장정만 60만명이었으므로 전체 인구만 200만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이는 단 2명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는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것은 상을 얻는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우리도 저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겨야 겠다고 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도 주님을 잘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두가지 목표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버립니다.

 

왜인가요? 
그들이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두가지를 말합니다. 1.우리는 자유를 꼭붙들어야 합니다  2.타인이 이자유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두명을 빼놓고 나머지를 사용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세대를 사용하셨습니다.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개역한글)

 

주님은 어떤 그릇을 쓰시나요?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귀한 그릇이 아닌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죄와의 경계선까지 자유를 누립니다. 그들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까지 들어가 버립니다.
사도바울이 그몸을 복종시키는 것은 구원을 잃을까봐 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용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죽은것은 그들이 자유를 남용해 죄를 범함으로 그들을 쓰실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6, 개역한글)

 

< 저희가 악을 즐겨한것 같이 >
자유를 즐길때에 이스라엘은 악을 즐거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를 즐겁게 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민11:4-6, 개역한글)

 

이스라엘이 고기를 원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가끔 이런말을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가마 곁에 있을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가냐면, 애굽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교회로 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구원받기 전에 즐기던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쓸때 감당할수 없는 것까지 써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없어서 우리의 몸이 약해졌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는 먹기 싫다.

 

만나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만나에는 꿀이 있습니다. 꿀은 가나안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애굽으로 마음이 가버렸습니다.

 

27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 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같은 나는 새라
28 그 진 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도다
29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
30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31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시78:27-31, 개역한글)

 

이스라엘은 죄를 즐겨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기가 그들의 이빨가운데 있을때에 하나님은 탐욕을 부려서 살찐자들을 죽이십니다.
여기서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들을 사용할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있지 아니합니다.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11:29-30, 개역한글)

 

잠자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고린도교회 가운데 징계로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여 이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일꾼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4:17, 개역한글)

 

복음을 순종치 않은자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벌하기 전에 먼저 집과 교회를 징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를 쓸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문해 봐야 합니다.
< 정말로 우리는 이렇게 할수 있을만큼 강한가? >

 

이스라엘은 할수 없으면서도 쓰다가 망했습니다.

 

< 선줄로 생각한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우리는 첫번째로 생각해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
우리는 자신감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29:23, 개역한글)

 

교만하면 낮아지게 됩니다.

 

에스더에 보면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교만해 집니다. 왕이 자기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그는 계속해서 왕의 신임을 얻자 교만해 져서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기 위해서 왕에게 갑니다. 왕은 왕의 역대기를 읽고 "왕이 존귀히 여기는 자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고 뭍습니다. 왕은 그 존귀케하려는 자를 자기라고 생각하고 "왕의 옷을 입히고 나귀에 태워 왕이 존귀케 여기는 자는 이렇게 할지어다"라고 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그렇게 하게하라고 시켰습니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산헤립이이 북 이스라엘을 멸망 시켰습니다. 남유다도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앞에서 굴복하지 않은 왕이 있었느냐? 내가 정복한 나라에도 많은 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신이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하물며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한 천사가 앗수르 군사 13만을 다 죽입니다. 그는 나라로 돌아가 자식들의 손에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어떻게 치셨습니까.

 

성경은 그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느부가넷살왕은 유다를 물리치고 공중정원을 만든후에 그곳을 거닐면서 "이 위대한 나라는 내가 내힘으로 지은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만한 자격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신상중에 그를 금으로 된 머리로 인정하셨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생각을 할때 그는 인간세상에 쫒겨납니다.

 

오바댜를 보면 오바댜라는 선지자는 에돔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보지 않았습니다. 페트라는 성이 있습니다. 그성은 절벽에 세워져 있으며 그 문은 단 한명만이 통과할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그래서 페트라는 자신했습니다. 우리는 정복당하지 않는 성이다. 수백만의 군대가 와도 여기를 공격하려면 한명식 와야 한다. 우리를 칠자를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페트라는 동물들만이 사는 황량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의 교만이 그를 속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약으로 오셔서 대표적인 교만중에 하나가 베드로입니다.
"주님 다른사람은 몰라도 저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을 세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중 하나가 바로 자신감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주님을 위하여 죽을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서 그는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하지 못하면 자신감으로 인해 실패할수 있습니다.

 

또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수님이 밖에 계신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밖에 계신 교회가 교회입니까?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서 우리는 1. 과신은 금물이다 라는 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신감은 꼭 넘어지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9:2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자유로운 자이지만, 조심하고 조심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근심합니다.

 

왜인가요? 
혹, 남용했다가 하나님께서 쓰실수 없는 그릇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6, 개역한글)

 

우리들이 잊지말아야 할것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고 물주는것은 사람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생명을 발하여 싹을 틔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게 하시는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전적인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하시겠지 뭐" 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안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습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개역한글)

 

12절은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가 구원을 이뤄야 합니다.
13절은 이것은 우리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것만으로는 구원을 이룰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셔야 합니다.

 

물주는것도, 심는것도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을 아는자는 자기몸을 쳐 복종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를 정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과신은 넘어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두번째,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두가지를 말 합니다.
1.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2. 우리 스스로 우리몸을 절제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는 날을 바라고 있습니다.
준님을 만나게 되면 제일먼저 하는 것이 무었입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때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모이게 될것입니다.
어떻게 모이나요? 주님앞에 모든 무릎을 끓고 모든입으로 주를 주라 시인하게 하실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는 그때에 과거, 주님을 위해서 좀더 섬길걸, 주님을 위하여 좀더 헌신할걸 이라는 후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날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일이있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 우리의 인생이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적합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빼고는 다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했습니다. 버림이 된다는 것은 적합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즐기지만, 남용했을때 오는 부작용은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지만 힘이 없을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성령으로 역사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봉사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징계에 의한 죽음입니다.
이것이 '버림'의 세가지 형태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사는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제한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때에 주님앞에 회개하고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유용한 그릇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10:6, 개역한글)

 

이것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에게 겁을 주거나 어려움을 주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닌 가르침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버림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자랑할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세상에 구원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부름받았으며, 이것을 위해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것이 '지나침 자신감'입니다.
나는 세상풍파에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자신해서는 안됩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유롭습니다. 운동선수만 아이스크림을 먹을 자유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운동선수는 먹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고 가치있는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