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고린도전서 강해 <22>

박이레 2022. 7. 12. 21:31

2015년 7월 15일 수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22>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1-3, 개역한글)

 
 

12장은 교회에서의 은사사용의 원리가 나와있습니다. 12장은 기본원칙이며 13장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에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14장은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역모임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은사의 중요성입니다.

 

2장에서는 은사는 반드시 분별되어야 한다. 3장에서는 그 분별의 기준은 반드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최초로 언급된것은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주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하셨습니다. 교회는 영원하며, 사망이 교회를 건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1.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2. 구성원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특징적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영적인 활동입니다. 눈에 보이지않는 하나님앞에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것입니다. 거듭난 영으로 진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 하나는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간조직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라질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이 그러하나 교회는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설명할때 여러가지 비유를 말하는데 신약성경에만 있는비유가, <그리스도의 몸 > 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3, 개역한글)

 

예수님이 머리라면 교회는 몸입니다. 몸은 머리가 지시하는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머리가 보이지 않는 생각, 물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면 몸은 그것을 보이도록 드러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개역한글)

 

여기서도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므로 예수님을 핍박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신하여 몸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위해서 핍박을 받습니다. 그 핍박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은 이세상을 떠나셨지만 이세상의 남은 영혼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위하여 남겨두신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이땅에서 그리스도를 보일수 있을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개역한글)

 

이는 그리스도를 부족함없이 드러내는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온전한 모습을, 완벽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내는것이 이세상에 교회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를 두가지로 비유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개역한글)

 

우리는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만드신바라, 는 걸작품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무엇에 비교하시나요? 자연과 교회를 비교하시는 것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개역한글)

 

에베소서는 교회를 두번째로 사람과 비교합니다.
한 새사람을 말했습니다. 헌 사람은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이 아담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첫번째는 자연과 비교하며, 두번째는 아담과 비교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개역한글)

 

<온전한 사람>

 

온전하다는것은 완벽하다는것이 아니라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성인이 되었을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누군가를 이세상에서 드러냅니다. 
주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드러내며, 주님께서 얼마나 희생하셨는지 드러냅니다.

 

교회를 통해서 세상은 주님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대로 주님을 드러내려면 교회가 교회답게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장치를 보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1, 개역한글)

 

1. 은사자들을 교회레 주십니다.
5명의 은사자들은 말씀과 연관된 인도자들입니다. 이 교회는 물론 우주적인 교회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현재 없습니다. 목사는 양들을 돌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교사들을 세우십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합니다.

 

그들은 구원받게 만들고 성도들을 성장하게 합니다.
성장한 성도들은 봉사의 일, 은사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모든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은사가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그 은사를 알게 하시고 그 은사를 쓰게 하십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2, 개역한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실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5가지의 은사자들을 교회에 보내사 성도들을 성장하게 합니다.
성장한 성도들은 자기 은사를 쓰게 됩니다.
모든 지체가 은사를 사용할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것이 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들이 자기의 은사를 은사의 원리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교회의 인도자들이 각성도의 은사를 세우지 못하면 교회는 일어나지 못할것입니다.

 

이래야만 하늘의 주님의 영광대로 이땅에서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부분에서 끔찍하게 실패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1:7, 개역한글)

 

고린도교회에는 부족함이 없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은사를 사용하면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고 고린도 사회가 살아계신 주님을 뵙고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을 것입니다.

 

왜 실패했나요?

 

1. 성도들이 원리대로 은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인도자들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3, 개역한글)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기준으로 말합니다. "미친거다"

 

온 성도들이 다각각 동시에 방언을 하면 상식적으로 봐도 미친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신 은사가 세상사람들이 볼때에 손가락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극이 저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영광이 나타나지 않고 세상사람들이 봐도 비난할 일이 나타나나요?
이는 은사 사용에 실패하고, 은사를 일으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실패한것에대한 원인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1, 개역한글)

 

고린도교회가 은사를 세우지 못한데 쓰지 못한 이유 첫번째는 그들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17:5, 개역한글)

 

음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정결한 처녀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항상 모방합니다. 그것이 바로 음녀이며, 대표적으로 바벨론, 바벨탑입니다.
그리스도가 있고 적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것마다 카피합니다.

 

사단의 모방의 대표적인것이 바벨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알신 같은 것은 모두 가짜이면서 복사해 놓은것입니다.

 

바알은 처녀의 몸에서 났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이름을 바꿔가면서 주님을 모방합니다.
바알은 처녀의 몸에서 태양신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신입니다. 사단은 이처럼 하나님의 것을 모방하여 가짜를 만듭니다.

 

이처럼 사단은 가짜은사를 만듭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와 사단이 복사한 가짜를 어떻게 구분할수 있을까요

 

고린도교회는 충분한 은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나타내는데 실패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12:1, 개역한글)

 

<신령한 것>
이것을 영적인 은사라고 이해하겠습니다. 영적인 이유는 성령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1, 개역한글)

 

신령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특별히 예언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것은 은사로 보겠습니다.

 

<알지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언어는 관용어로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4:13, 개역한글)

 

여기서도 유사한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말씀은 휴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휴거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5, 개역한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비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동일시 하면 혼란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교회시대와 이스라엘의 경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위로 돌아가 <알지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는 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은사의 중요성을 모르면 사람들은 은사를 무시하고 은사를 남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계획은 은사를 통해서 세우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같은 곳에서는 은사에대해서 모르는게 많으니 그냥 막아버립니다.
사도바울은 은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령한것에 대하여는>

 

~대하여는 이라는것은 여러번 표현된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여러편으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습니다.

 

글로에의 편과, 고린도교회에서 세명의 성도들이 방문합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질문쪽지를 통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전12:2,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이말을 왜 하나요?

 

예를들어 방언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방언은 기독교에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불교에도 있습니다.
예언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합니다.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을때 그것은 꼭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 아닙니다. 사단으로부터 온것도 있습니다.
너희들이 말못하는 우상에게 끌려갔을때에도 그때에도 이와같은 일이 있지 않았느냐 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방인, 교회, 이스라엘 세분류를 다룹니다.
이방인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상에 의해서 습격당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신을 받아야 하는 무속인이 되어야 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에게 귀신이 들었습니다. 신을 받아야 합니다. 그녀는 신을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귀신이 가족들을 다치게 하므로 가족을 위해서 신을 받으러울면서 갑니다.

 

이건 명백한 경우입니다만, 현대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신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자기가 자기신을 선택한다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속받아야 하는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그사람이야말로 죄의 종으로써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종교를 골라서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끌려가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집회와, 우상에게 장악되어 끌려가는 집회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우상집회는 주체하지 못하고 끌려갑니다.

 

성령의 집회는 어떠합니까?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0-32, 개역한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40, 개역한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집회는 통제력이 있습니다.
다른사람에게 말씀이 주어지면 자기는 그칠수 있습니다. 질서 있는 것입니다.

 

이방신의 집회는 자기 스스로 통제력이 없이 뭔가에 잡혀서 끝날때까지 해야 합니다.
타인이 보기엔 미친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무슨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사람의 건전한 인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을때 두가지의 근원이 있습니다. 사단이 한것일수 있고 하나님이 하신것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것은 통제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개역한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

 

심지어는 어떠한 사람들이 나왔나요? "예수는 저주받은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건 그가 한말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통해서 그가 한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용납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꾸짖는것입니다.
성령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시라 해야만 참된 성령이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사람이 아무리 뭔가에 사로잡혔다 할지라도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 말의 내용이 예수님을 주라하지 않는다면 성령과는 반대되는 일이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것은 모든 은사가 사용될때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는가, 은사를 사용한 사람이 영광을 받았는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 은사의 사용의 결과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는지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 사용자가 성경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세번째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세우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이 세가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감동스럽고 능력있어도 예수님으로부터 온것이 아닙니다.

 

19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24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25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6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28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찐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찌어다 하니라
(왕상22:19-28, 개역한글)

 

북이스라엘의 왕이 아합왕입니다. 여호사밧은 유다의 선한 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닙니다.

 

여호사밧은 그렇게 행하고자 하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 전쟁을 축복할때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의 진실을 말합니다.

 

아합왕이나 여호사밧왕 입장에서 모든 선지자들이 동일한 음성으로 하나님께 받았다고 하면서 치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셨습니다.
내용이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기로 작정한 왕입니다.
악한자와 연합하여 길르앗라못을 치는것은 하나님의 뜻이 될수 없습니다. 이적과 기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아닌것입니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13:1-3, 개역한글)

 

만약 우리가운데 누군가가 놀라운 기적을 행할지라도 그가 "다른신을 섬기자"라고 말한다면 그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기적이 우선이 아니라 내용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꾸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이방에 있을때 한 짓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며 귀신을 쫒아내지 아니하였나이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결론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왜 예수를 저주할자고 말하는 내용이 나왔을까요?

 

이 성경이 쓰여질 당시 영지주의라고 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육체를 악하다 하고 영을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육체를 입고 있는 예수님께서 악하다고 했고, 성령을 입었을때는 선해지셨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성령이 떠나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할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개역한글)

 

이러한 가르침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문제들이 있었습니다.

 

1. 분열이 있었습니다.
2. 성적인 타락이 있었습니다.
3. 성도들 사이에 세상법정에 고소했습니다.
4. 우상의 제물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5. 마찬예배에 무질서 했습니다.
6. 그들은 너울에 대해서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7. 은사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저주받은자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나요?
이 문맥으로 이해하면, 구원받기전의 것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분열이 있었던 이유는, 세상은 유명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편으로 나뉘는것을 교회로 들여왔습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왜 성적인 문제가 있었나요? 고린도교회가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았어도 옛습관을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일도 그당시 사회적인 영향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고린도사회에 익숙해져 늘상하던대로 법정소송을 했습니다.
구원받기전 세상이 쓰던것을 교회가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내 자유를 자유롭게 쓰겠다고 하는 다른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분방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한다고 하면서 즐길려고 했습니다.
너울에 대해서도 고린도에서는 여자들이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일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자에게 너울을 씌우고, 잠잠하게 하는것입니다.
너울을 거부하는것이 사회풍조로부터 온것입니다.

 

은사 사용에 대한 잘못된 사용은 주변 우상집회에서 초자연적인 일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모임에서 하는일이 세상에서 하는일을 걸러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좋은방식이 교회를 운영하는데 사용하지 않나요?
세상의 교육방법이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요?

 

이대로 하는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사단은 항상 두가지를 씁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안에 있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씁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12, 개역한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단이 항상 모임을 흔들때, 교회안에 구원받지 않은 성도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를통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잘못된 교회의 인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높이고 사도바울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고후11:18, 개역한글)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11:20, 개역한글)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고후11:23, 개역한글)

 

우리가 주님앞에서 배워야 할것 첫번째는 은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한개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은사가 은사자들을 통해서 개발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항상 우리주님을 드러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1, 개역한글)

 

말씀을 전할때에 사실 말씀을 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분중 최고입니다.
주님만큼 봉사를 잘하시는 분은 없습니다.

 

모든 은사자들은 주님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주님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앞선 은사자들을 보고 우리모두가 따라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드러내고 개발되고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사를 무시하거나 은사를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 하나님 저의 은사는 무엇인가요? 저의 은사를 쓰고싶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쓰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은사를 통해서 이러한 일을 세상에 해나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