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솔로몬의 생애

< 솔로몬의 생애 03_다윗의 당부 >

박이레 2021. 7. 19. 20:53

< 솔로몬의 생애 03_다윗의 당부 > / 정형모 형제님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왕상 2:1-3).

다윗이 세상을 떠날때가 대단히 가까운 때에 자기 아들에게 죽기전에 개인적으로 당부를 했습니다. "내가 세상 모든사람들이 가는길로 가는데, 너는 대장부가 되고 말씀을 지키라." 첫번째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이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의 유언이라기보다는 아들에게 개인적으로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구함으로서, 그를 대신해서 왕이 된 새 왕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대장부가 되라. 대장부가 되라고 할때는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끝내면서 이제 성도들에게 당부할때에 "남자답게 미래를 생각할찌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대장부가 되라, 남자답다는 말은 특별히 책임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요, 형제는 가장이 되고 남편이 되고요. 안는 돕는 배필이 되죠. 아내는 가장의 결정과 행하는 모든 일에 옆에서 돕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가장으로서 가진 모든 재반사를 분별하고 또 결정하고 모든일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내에게, 자매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책임은 총체적인 면에서 방향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가정 안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때 가장이 모든일을 다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자기가 직접적이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남자답게라고 할때, 그것은 모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임의 모든 재반사의 일에 있어서 형제님들의 위치와 역할이 있지요. 자매님의 위치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의 위치, 또 책임, 역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어깨에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이제 솔로몬이 왕이 됬습니다. 아들이 이제 왕이 됬어요. 아들이 어릴때, 태어났을때부터, 조그만 아기였을때, 이제 성인이 되어서 왕이 된다고 할때 특별히 우리는 1장에서 아도니야가 어떻게 반역을 하고 왕이 되고자 시도했고 또 솔로몬을 죽이려고 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했던 일을 다윗은 잘 알고 있죠. 또 이와같은 위기의 때에 그가 왕이 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의 어깨에 있습니까? 그래서 대장부가 되라.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다 이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형제 자매님들, 이 말씀이 얼마나 수도없이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배우고 이해하고 순종하라고 하는 명령을 지키라. 이 말씀은 귀가 따갑게 우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더이상 또 들어야 할까? 라는 생각을 갖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은 항상 새롭게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될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익과 또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이 새로 된, 자기를 대신해서 보좌에 오른 왕에게 네가지를 당부하고 있는데요. 말씀을 지키라고 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그냥 말씀을 지키라."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법률과 계명과 율례과 증거를 지키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깨서 시편 119편을 읽어보면 스물두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물두개의 단락은요, 각 단락마다 첫번째 단락, 두번째 단락, 마지막 스물 두번째 단락까지 이 단락마다 말씀이 여덜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 여덜구절로 되어있는 말씀에 구절의 시작은 제일 첫번째는, 히브리 알파벳의 제일 첫번째 알파벳인 알렉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스물두번째는 첫번째 시작한 그 단락 여덜구절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히브리 아이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게 될때 그들은 알파벳으로 암기 합니다. 그리고 176절로 되어 있는 이 시편은 시편에서 가장 긴 장이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긴 장입니다. 이 장의 수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각 구절마다 몇구절을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 말씀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즉,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런데 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고 율례, 법도, 계명, 증거, 이런거 아홉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다윗이 네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바라볼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이쪽 각도에서 보는것과 저쪽에서 사진을 찍게될때 모양과 반대편, 각 방향이 다 다를때마다 모양이 달라지죠. 그래서 똑같은 피아노인데 사진을 찍는 각도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마어마한 많은 것들이 거기에 담겨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는 각도가 다른데서 이 말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첫번째 여기서는 다윗 솔로몬에게 법률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법률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요,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권위로 선포되는 것이다. 권위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이다. 권위를 가지고 지정한 것이다. 그것이 맞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만약에 내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내 마음대로 요리할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입니다. 정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달리 받아들일수 없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법률 입니다. 두번째는요, "너는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이라고도 말씀 하는데요. 이 계명이라고 할때 하나님의 말씀은 확립된 것이다. 어떤때는, 확립이 안됬을때는요, 아직 다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모든 체제가 견고한 것이 아닙니다. 확립되었다고 하는말은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변경할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이 테이블에 올려다 놓고 협상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협상해서요, 이제 어느정도 까고 붙이고 협상하게 될때는요. 물건을 가지고 지분을 놓고 팔고 사는 사람들이 협상 하지요. 그래서 사는 사람은 싸게 사려고 하고 파는 사람은 비싸게 팔려고 하잖아요? 그것이 협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려 협상을 하면 그 중간 어느정도까지 오게 됩니다. 그래서요, 파는사람 사는 사람은 얼만큼 자기가 원하는 가격까지 끌어오느냐? 라고 하는것이 협상입니다. 그래서 협상을 잘하는 사람은 그렇게해서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끌어 당기는 사람이 협상가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협상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만큼 자르고 붙이고 이렇게 할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이 곧대로 하나님 말씀하셨으면 우리가 더 이상 말할수 없고요. "주님 말씀하셨으니 듣겠습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이 이야기하게 될때 종이 주인의 명령에 대해서 토를 달수 있죠. 주인이 말하면 "말씀하셨으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계명이라고 하는것은 확립된 것이고 협상할수가 없는 것이고 변론하거나 토의할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것으로 대해야 합니다. 세번째로요. 율례라고 말씀 했습니다. 율례라고 하는것은 다른말로 하면요, 여러군데서 판단이라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이라고 말할때 그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인간 관계를 규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잘 살펴보게 될때 사람과 사람 사이, 인격과 인격 사이에 관계를 어떻게하면 가장 적절하고 아름답고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들수 있을까 라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판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이제 관계에 있어서요. 공평, 인간관계에서 있어서는 ■■에 있어서는 공평해야 합니다.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바르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판단이라는 말은 사실은 법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법정에서 어떤 시시비비가 있을때에 원고가 피고가 있죠. 거기 재판장이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시시비비가 있지만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말고, 법이라고 하는것은 상징적으로 말하면 저울을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상징, 다시 말해서 형평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쪽에 기울어져서는 안되고 재판이라고 하는것은 사실상 잠언 말씀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재판을 하게 될때 어떤사람은 얼굴을 봐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원직대로 살고 있습니까? 억울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될때 항상 그것을 마음에 둘 것입니다. 특별히 왕이 되었어요. 솔로몬은 왕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될때 한 두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문제로 인해서 그들은 다투고 싸우고 판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한 나라의 왕이, 보좌가 잘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바로 솔로몬 자신이 잠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의가 성립이 되야 보좌가 견고하다" 그 말은 모든 문제를 판단하게 될때 기울어지지 아니하고 편법되지 않고 편견을 가지고 뭔가를 판단하지 않고 의롭게 분별하고 결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두 창기가 아이 문제를 라지고 왔을때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판단하게 될때 공평하게 판단 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율례, 판단 입니다. 창기는 둘다 자기 아이라고 했는데, 자녀가 바뀌었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왔지요. 둘다 엄마인데 한 엄마는 참된 엄마고, 다른 엄마는 거짓 엄마 입니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잘라서 반씩 주겠다고 이야기 하죠. 그것은 그가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공평하고 억울하지 않도록, 의롭게 하기 위해서 한 일이죠. 참된 엄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이를 그냥 주라고 했습니다. 거짓 엄마, 진짜 엄마가 아닌 엄마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반씩 갖자고 이야기 했죠.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솔로몬의 지혜 였지만 재판이라고 하는것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고 누가봐도 사실, 하나님께서 보실때 의롭다 하는 것입니다. 이 율례를 지키라, 판단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네가 왕이 되면반드시 이 하나님의 말씀, 그 중에 판단을 네 마음속에 두라. 네번째 증거 입니다. 증거라고 하는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반복해서 어떤 것들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알려주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진리와 이 모든것을 반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증거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증거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를 특별히 말씀하면서요, 율법을 따라서 이것을 지키라고 말씀 했습니다. 솔로몬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때, 이 나라의 국사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째, 국내를 다스려야 합니다. 외국에서 원수들이 오게될때, 또 다른 나라와 외교에 있어서 수많은 문제를 다루게 될때,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그가 지키게 될때 순종하고 그 법대으로 그가 행하게 될때 그의 나라가 영원히 거한다. 영원히 지속된다, 견고하다는 말입니다. 왕으로서요, 나라가 견고해야 하는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요셉이 애굽에 끌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아직까지 수상이 되기전에 바로가 꿈을 꾸었죠. 왜 꿈을 꾸었습니까? 바로가 항상 국사때문에, 나라 때문에 염려하기 때문에 그 꿈을 꾼거고, 하나님은 머리속에 꿈을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마찬가지죠. 꿈을 꾸었습니다. 애굽의 요셉도 그런 기회를 통해서, 다니엘도 그런 기회를 통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 있는, 그것은 하나님이 해 주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왕이, 바로도 느부갓네살도 모두 다 나라를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면 어떨까, 외적이 침입해서 나라가 망하면 어떡할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다윗에게 그 부왕에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나에게 전을 지어 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네가 아니라 네 아들대에 가서 전을 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 집을 영원토록 견고하게 할것이다."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할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그것을 해주신다면요. 솔로몬이나 다윗이나 그 후의 모든 왕들은 어떻습니까? 시편 127편 말씀에요, 여호와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고 여호와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우리가 집을 짓는것도 다 허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집이라고 하는것은 다윗의 집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왕좌 입니다. 왕국이 계속해서 보존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지으셔야 합니다.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지으시니까, 솔로몬은 그냥 왕으로서 자기 원하는것만 하면 된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다고 하는말은 하나님이 짓게될때 우리는 그 말씀을 순종하며 가야 한다고 하는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에게 대장부가 되라. 너는 책임을 통감하라는 말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게 될때, 그 나라를 다스리는 국사에 대해서 모든 면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이행하는 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얻으라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개인이지만, 직장에 가면 직원, 학교에 가면 학생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남편이든지 아내든, 또는 자식이든 우리는 각 위치가 있습니다. 한사람에게 수많은 다른 위치가 있습니다. 이와같은 위치는 모두가 다 책임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우리가 이행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순종해야 하는것입니다. 그것은 왕도 마찬가지고요.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걸어가게 될때, 그들에게는 번영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에는 순종하게 될때 어떤 복이 있을까? 불신하게 어떤 저주가 있는가? 이것은 모세오경 마지막 신명기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율법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만, 명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게될때마다 항상 사람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율법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시대에 살고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대행해 주신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은혜의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위대한 말씀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뭔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일을 우리는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기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우리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에게 그 나라가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양 위에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책임은 구원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처음에는 포행자요, 핍박자요, 또한 훼방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능히 능하게 하시고 세우시고 자기에게 하나님의 뜻을 맡기셨다고 말씀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맡고있는 청지기 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청지기 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나라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해앻야 할까, 그 국민들을 향해서 어떤일을 해야할까, 그리고 그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까라는 문제를 그는 왕이 되면서부터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이제 그것을 그에게 얘기 했지요. 그렇게 순종하고 말씀을 지키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 이 말씀은요, 옛날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모세는 떠나고 이제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 옆에서 보좌하고 있었던 여호수아가 그의 삶을 통해서 배웠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그가 인도자가 되게 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담대하라. 용기를 가지라. 주님을 의지하라.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 너를 인도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두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 이것은 언제나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그것이 우리를 살리고 그것이 우리를 바른길로 가게 하고요. 합당하게 우리가 책임을 이행할수 있는 힘을,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윗은 솔로몬에게 4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4).

네 후계자들이, 후계 왕들이 꼐속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의 책을보면 시작은 이제 솔로몬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번영의 때부터 시작하는데 나중에 가서 완전히 멸망해 버리죠. 외국으로 포로되어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말씀에 대해서 후대 왕들을 소홀히 생각했고 오히려 외국의 이방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도입했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계속해서 따라가지 않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당부하고 난 다음에 그가 죽기전에 또 당부를 했습니다. 무엇을 당부 했냐면 자기가 생애 동안에 다 행해야 했었는데 다 행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 아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요압에 관한 문제 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7절 말씀에, 바르실래 사람에 관한 말씀 입니다. 세번째는 8-9절 말씀에서 시므이에 대한 일에 대해서, 자기는 떠나지만 솔로몬이 자기 대신해서 행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윗은 생애를 통해서, 사실 다윗과 요압 사이의 관계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이 관계는 참으로 미묘하고도 묘한 관계 입니다. 다윗에게 요압이 그렇게 필요로 하는데 다윗은 요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거예요. 이와같은 관계가 있습니까, 참으로 필요하지 않았다면 자기 옆에 있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자기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래요. 그 사람에 대해서 그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 다윗은 왕이고 요압은 조카 입니다. 먼저 친척입니다. 또한 자기의 둘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행사할때 꼭 자기 뜻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그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고 하는 것, 그게 다윗의 일생을 통해서 후회하고 있고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그런 일로 인도됬다고 생각합니다. 이 요압에 대해서 생각할때요, 요압은 요압의 우상은 자기 입니다. 요압의 불치병도 자기 입니다. 요압은요, 원칙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중심이고요. 자기가 법입니다. 세상에 이와같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와같은 종류의 사람은, 아도니야처럼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훈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훈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요. 대단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성품이나 그 사람의 신뢰관계이 있어서는 절대 그 사람을 믿을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은사가 있을수 있습니다. 뭘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착각 합니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가 행하는 일들은 사실상 국익에 합당하지 않고요. 다윗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수많은 고민과 근심을 안겨다 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요압같이, 요압처럼 섬긴다면 주님이 우리를 참 싫어할 겁니다. 구원받고 난 성도가 구원받았으니까 하늘나라 가지요. 그런데 언제나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행하게 될때,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왕왕 얘기를 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아버지와 같은 사랑, 그것은 착각입니다. 요압은 착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언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를 1인자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경쟁 상대를 용납할수 없기 때문에 경쟁 상대가 생긴다면 그는 공평하게 그 일을 경쟁하는것이 아니고요. 그는 상대를 죽여버렸습니다. 아브넬도 죽이고 아마사도 죽였지요. 아브넬은 사울의 군장이었고요, 아마사는 다윗의 군장이었습니다. 원래 압살롬의 군장이었고요, 그 다음에 압살롬이 죽고 난 다음에 다윗이 그를 군장으로 등용했을때, 요압이 견디지 못하고 그를 죽였죠. 이 요압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왕상 2:5-6).

솔로몬도 이 사실을 알죠.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일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요, 이 사람이 아도니야 편을 들었잖아요? 아도니야를 추대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일들을 생각할때, 다윗은 솔로몬에게 당부 했습니다. 요압이 만일 살아있다면 그는 왕궁의 커다란 해가 될 것이다. 나 때보다도 너의 때는 더욱더 커다란 해가 될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요. 그를 반드시 처단하라고 말했죠. 이제 두번째는 바르실래 입니다. 이 바르실래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하게 되었을때, 어드로 갑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마하나임으로 가지요. 마하나임은 원래 다윗이 헤브론의 왕의 되었을때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여서 거기를 수도로 삼고 한동안 다윗을 경쟁하고 대적했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그 마하나임으로 입성하게 될때, 그때 바르실래가 나와서요. 많은것을 가지고 나왔지요. 다윗은 도망 오느라요, 물론 왕이라 부족한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도망가게 될때, 군대들도 먹을것이 필요하고요. 쉴곳이 필요했습니다. 그 여러가지 가지고 온 아이템들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 침상 입니다. 도주할적에는 피곤해서 견딜수 없는 상황이죠.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다윗 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거절당한 왕위에 대해서 그는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왕의 필요를 따라서 와서 선행을 했습니다. 다윗은 일생 죽을때까지 그것을 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그는 물론 다윗이 바르실래가 환궁하게 될때 나왔을때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이야기 하죠. 그런데 "왕이시여 저는 노인이라 왕께 가면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조상의 묘에 눕겠습니다."라고 말하죠. 그때 그의 옆에 있는 김함을 보내죠. 다위은 그것을 기억합니다. 바르실래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가 남긴 선행, 필요할때 그가 베풀었던 모든 아름다운 일들은 다윗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윗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요, 다윗이 요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자기 아들에게 그를 죽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다윗은 얼마든지 죽일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럴수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다윗이 요압에 관한 문제를 솔로몬에게 물려주게 될때, 그는 사실상 마음속에 부끄러웠을 겁니다. 사실상 이것은 아버지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아들에게 지금 넘겨준 것입니다. 한 세대에서 우리가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다 하지 못하면 우리 자식들에게 빚으로 남겨줄수 있습니다. 내가 행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 자식들이 처리해야 하는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나에게 주신 책임에 대해서 온전히 이행하고 갈까. 이것을 골몰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맏겨주신 영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난 다음에 내 자신이 거룩하게 사는 삶,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어떻게하면 온전히, 거룩하게 살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완전하게 할수 없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과 계속 교제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해서 세련되게, 영적으로 세련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자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가정이 바로서기 위해서 아름답게 세워지기 위해서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통해서 간증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 모든 책임에 대해서 남편과 아내가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양육받고 살아가게 될때 자녀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점점 커가면서 그와같은 간증의 책임을 아이들도 느낀다면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것입니다. 그것을 부모는 심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모가, 남편과 아내가, 그 일을 하게될때 얼마나 많은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까?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될 책임 입니다. 모임 안에서요.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요, 토대로 해서요, 세워져야 합니다. 모임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 교회의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나? 또 모든 실행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건전하게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성도들은 유익을 얻고 또한 마음속에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있고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나,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고 또한 집합적인 간증이 외부로 나가는가? 이것은 우리의 책임 입니다. 만일 이것을 못한다면요, 우리 자식들이 이 일에 대해서 일해야되고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주님이 우리에게 맏겨주신 내 개인의 삶과 가정의 삶과 모임의 삶속에서요.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신 책임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책임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행할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이죠. 다윗은 그가 나라를 세우게 될때에 이제 시작하기도 전에요, 시작하기도 전에 사울때문에 억울했죠. 그 다음에 그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대적을 정복하고 그리고 그들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그일을 분투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수많은 일들을 그는 마음속에 두고 그 일을 행하게 될때 많은날 눈물을 흘렸습니다. 왕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왕국이 견고하기 위해서 그는 무엇을 이루어야 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특별히 그가 유언을 하게 될때 제일 첫번째 당부한 것은 "너는 말씀을 지키라" 두번째는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 몇가지를 해야 한다"라는 것을 넘겨주고 있죠. 사실은 이것은 다윗의 빕이었습니다. 자식에게 빚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요압이 만일 살아있다면 그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다윗이 요압을 감정적으로 밉기 때문에 그를 처단해야 된다고 하는것이 아니라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요압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솔로몬의 왕국은 대단히 위태롭다고 하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을 처다나라고 하는 문제는 개인 감정이 아니고요. 국가의 안보를 놓고 지금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어떻습니까? 바르실래는자기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선행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르실래는 떠나갔고요. 바르실래는 만날수가 없습니다. 이제 자기도 세상을 떠날 겁니다.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 는 반드시 선대하라. 우리가 세월을 지나면서 이 세상을 살때에 나에게 선행을 해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그것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육간에 많은것을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그와같은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우리에게 주고있는 좋은 본 입니다. 바르실래가 자기에게 행한 일들에 대해서 그는 절대로 잊고있지 않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너희는 이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했죠, 떡과 잔을 놓고 나를 기억하라.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것에 대해서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요,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선을 우리에게 끼쳐 주셨습니까? 폴리갑이 자기를 체포하러 온 군인들이 이제 곧 체포하려고 할때 그들이 자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네가 믿는바 예수를 거절하라. 부인하라. 그러면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때 그가 한 말이 있죠. "나는 86년동안 주님을 섬겨 왔습니다. 86년동안 주님은 단한번도 나에게 악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내가 어떻게 부인합니까?" 그는 체포되서 순교 당했죠. 주님은 우리에게 선을 행해줬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선을 행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은혜 입니다. 그분은 구원과 함께 수많은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요, 만일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받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감사하고요. 마음속에 담아두고 기억하고 그것을 표현하고 그러고 사는것인가라는 것이죠. 그것은 저희들의 아름다운 덕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복을 또한 안겨주고요, 인간 관계에서 아름다움을 항상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8절에 시므이가 있습니다. 시므이, "그가 독한말로 나를 저주하였다." 그는 사울의 집에 있는 사람이었죠. 그는 압살롬에 의해서 다윗이 도망갈때, "봐라, 네가 사울을 향해서 얼마나 악한일을 했는가?" 다윗은 사울가문을 향해서 악한일을 행한적이 없어요. 사울 가문에서 어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까? 사울 가문에 대해서 오히려 핍박을 받고 사울에게 쫓겨다녔어요. 그러나 그는 사울 가문을 향해서 선대 했어요. 그러나 그가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갈때 사실 그것은 자기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쫓겨가게 될때 그는 시므이로부터 근거없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때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할때요, 그때도 물론 자기 군장이 가서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수르야의 아들아 절대 그렇게 하지말라. 그가 나를 저주하는것은 하나님꼐서 보내신 사자라. 내가 범죄 했으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 그런 목적으로 그를 사용하고 계시니 그를 건드리지 말라." 그의 저주는 사실, 다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저주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남다른, 탁월한 은혜 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생각할때 온유를 생각하죠. 아브라함을 생각할때 한마디로 믿음이예요. 욥이라는 인물을 생각할때 즉각 우리는 인내를 같이 생각합니다. 요셉을 생각할때 고난과 영광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생각하면 어떤 말이 생각납니까? 다윗을 생각할때 떠오르는 말은 은혜 입니다. 다윗은요, 여러가지 은혜, 그것을 그의 생애 속에서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생각할때요,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받았고요. 심지어 그가 범죄했을때, 시므이가 와서 막 저주할때도 그는 은혜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솔로몬을 향해서는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그를 절대로 남겨두면 안됩니다." 아까 요압의 케이스도 그랬지만 요압을 그는 괘씸하게 생각하고요, 마음속 불쾌한 감정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것을 누르고 있었죠. 그런데 그가 죽기전에 요압을 처단하라고 할때, 이미 말씀드린대로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왕국의 안보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므이가 물고있는 문제들은, 다윗이 시므이로부터 저주를 받을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떠납니다. 더이상 그는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시므이가 자기를 향해서 저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므이는 나중에 다윗이 환궁할때 자기가 잘못했다고 얘기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제 그를 처단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와서 그의 마음이 변했습니까. 이제와서 괘씸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서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다윗의 생애에서 그는 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생각할때 즉각 떠오르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는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보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왕국안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믿을수 없는 없는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반드시 솔로몬에게 악한일을 행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은 여기 분별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그가 백발에 피를 흘려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할때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므이를 볼때 하나님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는 그때 보존이 되었지만은 이제 그는 떠나지만 솔로몬의 왕국에 해가될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제 당부하고 있지요. 우리는 이런 가르침을 역사를 볼때 교훈적으로 이런것을 받습니다. 다윗이 떠나기전에 자기가 했어야할 일을 아들에게 전달해주게 될때 재거하는 것입니다. 왕국에 해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모임안에 교제에 있어서 , 모임의 교제란 영적인 교제 입니다. 모임의 교제는 책임과 특권입니다. 이 교제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제일 첫번째 우리가 말할수 있는것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정규집회에 우리가 참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이제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이 아니고요. 우리는 모임의 정규집회를 참석, 우리는 예배시간이나 기도시간이나 말씀시간이나 모든 집회를 참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에 계속해서 참여하게 될때 주님이 나를 위해서 마련한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하게 될때, 내가 집회에 참여하게 될때 가져야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준비하는 자세, 기대하는 자세, 또한 집회마다 하나님께서 오늘은 무엇을 행하실 것인가하는 것에대한 마음의 전율하는 그런 마음, 그것을 가지고 이곳에 온다면요. 우리 모임의 커다란 도움이 되고 내가 은사가 많든, 은사가 없든, 은사 없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내가 최근에 은사를 발견하고 이 은사를 내가 사용하는 형제 자매님들이 있습니다. 그 은사는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은사는 각각 다 다양한 것입니다만, 그 은사를 사용하게 될때 우리는 이 은사를 통해서 모임에 내가 도움이 될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은사를 발굴하지도 아니하고 교제를 정상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은사가 무엇인지 깨달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내가 사용할수 없습니다. 은사를 사용한다고 하는것은 다른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를 생각하게 될때 '나는 은사가 없고 어떤 형제 자매님에게 특별한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어요. 내가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날때 은사를 주셨어요. 그 은사를 내가 모임의 집회에 참여하고 교제함으로써 은사가 무엇인지 내가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점점 활용하고 사용함으로 인해서 내 자신이 주님 안에서 은사가 성장하고요. 성도들이 덕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임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의 집회에 참석하게 될때 나는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나는 장애가 되는가? 이 두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모임에 장애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요, 우리는 마음속에 모임에 도움이 되고자 힘써야 할 겁니다. 요압이나 시므이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왜 다윗은 떠나기 전에 이 두사람을 처단하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왕궁에 해가되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너의 통치의 위험 존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우리가 받는 교훈은 모임안에서 나는 도움이 되어야 겠다. 모임 안에서 나는 장애가 되면 안된다라고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장애가 되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고요. 좀더 적극적인 생각은 모임에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에게 유익이고요. 모임에 유익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수 있는 길을 토대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성장할수 있도록 그런 토양을 그는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모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해야 되겠습니까? 모임에 참석하게 될때 우리는 마음속에 기도하게 준비해야 됩니다. 모임 참석할때 오늘 예배시간에는 예배를 위해서 내 마음속에 주님을 묵상하고요, 아름다운 주님을, 그의 인격과 사역을 내 마음속에 담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기뻐하는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갈때 우리가 주님을 발견하고요. 주님을 감탄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그것을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와서 주님앞에 드려야합니다. 여러분 아트워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든지, 눈에 이것참 예쁘다라고 하는 어떤 아이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화점에 가든지, 아니면 재래시장에 가든지, 어느 오케이 존에서도요, 항상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살피죠. 그래서 맘에드는것이 있으면 빼지않고 그것을 구입해서 모아 둡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바라볼때 마음속에 기쁜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취미지만 우리는 구원받고 난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냐라고 하는것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아름다운 인격과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대해서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는 것이면 ■■이고요. 또한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그것을 주님앞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분은 모임의 예배시간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배는 만찬시간에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기억하는데, 어떤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 죽으신 주님, 뿐만 아니라 다시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시고 다시오실 주님, 그런데 예배시간이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너무나 침울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다른것을 가지고 기쁜시간이 되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의 생활속의 여러가지 기쁜것과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기뻐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요, 만찬시간에는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 만일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얘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와서 즐겁기 위해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우리가 경험한 어떤것을 많이 이야기하면요, 예배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그 아들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우리를 얘기한다면 그것은 예배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오게될때 주님의 거룩함과 은혜와 또한 놀라운 사랑과 그것을 기억하게 될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우리는 기억할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게 될때 우리는 장례식 같은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고 뿐만 아니라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고 영광 가운데 올라가셨고 다시오실 분이기 때문에 그 죽음속에 있는 주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게 될때 우리는 가슴이 아픕니다.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것은 주님께서 그와같은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래서 우리 가슴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서 아픈 마음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셨고 동시에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슬픔과 함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릴때 주님의 죽음을 기억한다고 하는것은 장례식과같은 분위기가 되지 않습니다.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는, 그것때문에 우는것이 아닙니다. 장례식과 분위기가 예배시간에 오는것은 우리가 주님앞에 나오게 될때 내가 저지른 잘못이나 실패나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앞에 정리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하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자백하고 이 모든것을 정리하고 와서 주님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우리가 기억함으로 우리가 장례식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우리는 그렇게 준비해와야 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 주님의 인격과 사역의 아름다움을 내 마음속에 담고 주님앞에 와서 말씀 드려야 합니다. 또한 기도시간에 우리가 이곳에 올때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우리 모임이 지금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장로 일을 하시는 형제님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요한 몇 사람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다 우리 모임의 어떤 영혼이 구원받아야 하며, 우리 모임의 실제 재정적인 문제는 어떤 것이며, 또한 우리 모임안에 있는 여러 성도들간의 어려움은 무엇이고 이런 모든일들이 우리가 알때 주님앞에 기도할 제목을 안고 오는 것입니다. 기도할 제목이 없이 모임의 기도집회에 참석한다고 할때, 우리는 지루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빨리 끝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우리가 할때, 함께 기도하고 함게 아멘하고요. 그래서 그 기도가 일제히 한 마음으로 집합적으로 하나님께 올라가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적절한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죠. 그래서 온 모임이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것에 대한 기대와 또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회가 지루한것이 아니고요. 기도회를 우리의 전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공급하실 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드리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요, 모임은 위대한 것을 항상 기대하고 있죠. 그리고 주님의 응답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기대하고 그것에 대해서, 항상 응답하시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감격과 감사와 이것은 또다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때, 기도집회 시간에 우리는 우리 모임의 기도제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프린트물에 의해서, 벽에 걸어놓는것에 의해서,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요. 그것이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자매님들이 기도하지 않을때, 또 어떤 형제는 기도함으로 인해서 다른 형제님이 잠잠할때도 그 형제님이 대표해서 기도하게 될때, 그 모든 기도의 주제들이 주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셔야 되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하게 될때,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대해서 공감하고요. 거기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 앞에 아멘 하게 될 겁니다. 만일 우리가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라고 하는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공감하고 아멘할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겁니다. 만약 우리 거의 대부분의 성도가요, 기도집회에 참석하지만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우리 모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리고 기도한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요. 주님께서는 그와같은 기도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하실까, 그런 생각을 우리는 해야하는 것입니다. 모임에 도움이 되는가, 모임에 장애가 되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모임안에 세속적인 물이 들어오도록 허락하는것, 이것은 장애가 되는 것이죠. 모임 안에서 육적인 활동이 용납이 될수 있다고 하는것, 이것 장애가 되는 것이죠. 모임 안에서 신령한 것과 말씀에 관한 관심과 말씀에 관한 추구,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하는것은 우리 모임에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요압이 계속해서 솔로몬 시대에 산다면 그는 반드시 왕궁을 멸망시킬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후에 보면 아도니야가 살긴 살았지요. 그런데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계속해서 왕이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마 그를 조종했을 겁니다. 요압과 아비아달 같은 사람이 조종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비삭을 달라고 말합니다. 아비삭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아비삭과 결혼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고대시대에요, 전의 왕이 죽고 새 왕이 되면, 이방 나라에서는 전 왕의 하렘에 있는 여성들을 다 그 후대의 왕이 취했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범죄 했을때, "네가 뭐가 그리 부족해서 이와같은 일을 하는가? 네가 부족했다면 더 많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너에게 사울의 모든 처첩들을 너에게 주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다윗도 이방 왕들이 행하던 일들을 다윗도 했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때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가 뭐라고 얘기 했습니까? 압살롬이 반역할때 다윗이 도주 했지요. 후궁 열명을 예루살렘에 두고 가버렸어요. 그때 아히도벨이 이야기하기를 후궁 열명을 공개적으로 범하라고 얘기했죠. 이런 모든 일들은 언제나 전 왕의 후궁들, 처첩들에 대해서 그를 요구한다고 하는것은 자기가 왕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아비삭은 물론 다윗과 동침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녀로서 와서 왕을 봉양했기 때문에 그를 요구한다는 것은, 아비삭을 요구한다는 말은 아도니야가 아직도 나는 왕이 되겠다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뒤에서 지원해 줬을까? 요압과 아비아달과 같은 제사장이 지원했을 것이라 그 말입니다. 다윗이 염려하는것은 바로 이와같은 문제 입니다. 나라가 견고하지 않은것, 나라에 장애를 끼치는 요인들, 우리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임의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모임의 모든 형제 자매님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임이 성장 합니다. 모임의 장애가 되는것이 무엇이냐 하는것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모르면 내가 장애가 될수 있습니다. 모임에 은사를 사용하게 될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자기 자랑하는 걸로 썼어요. 그래서 모두가 다 방언을 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지 말고 예언을 하려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게 될때는 반드시 사랑 가운데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은 은사를 사용하게 될때 다른 성도들에게 덕이 세워지는가라고 하는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은사를 활용한다 그 말입니다. 그렇지않으면 은사가 많아도 그 은사가 오히려 해가 될때가 있어요. 우리에게 은사가 적절히 사용되고 우리 모임이 성장하고요, 덕세움을 입는다면 얼마나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또 주님이 여기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 이것은 모임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하는것을 내가 알게되는 것입니다. 디모데 3장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지체하면 네게 말하겠다.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것을 네가 알아야 한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처신한다고 하는것은 여기 주님이 계시다고 하는것을 내가 의식하게될때 나는 주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나는 함부로 행동할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내가 처신하겠죠. 그것은 모임에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모임의 위대한 간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바여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감탄하는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본 수많은 것들중에 왕의 신하들이요,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 왕 앞에 서있는 종들은 준비되 있는 것입니다. 섬기기를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자세, 그것은 무엇입니까? 왕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왕의 지고함과 왕의 엄위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왕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수 없고 왕을 전심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것은 사실입니다. 지역교회는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이름을 따라 여기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중심 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중심으로 위대한 능력을 중심으로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고요. 어떤 사람과 영향력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우리 은사가 많던 없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중심으로해서 모이고요.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저희들이 주님의 임재를 우리 마음속에 항상 의식할때, 여기 주님이 계시다. 주님은 안보입니다. 그러나 여기 주님이 계시다고 하는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요. 믿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보고 처신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꼐서 저희들에게 복을 주시죠. 모임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역사하게 될때 거기에 반발하는 그와같은 어떤 행동, 그것은 모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압과 시므이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게 될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정말로 하나님 앞에 아멘하고 감사하고 또한 말씀을 전하는 형제님들, 또한 봉사하는 자매님들, 무엇이든 섬기는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격려하는 마음으로 행한다고 하는것은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에 우리가 부흥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서 성도와의 예절을 우리가 지키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성도가 일하게 될때, 그것에 대해서 시큰둥하거나 아니면 거기에 대해서요, 부정하는 그와같은 이상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가운데 역사할수 없습니다. 성령을 불로 끄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죠. 모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우리는 성도들의 연약도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위해서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협동하고 또한 그것을 감사하고 이와같은 것들은 모두 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예배시간 되기전에 처음으로 여기 나오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주님 앞에서의 잘못된 일들,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일들을 주님앞에 자백하고 정리하고 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 하는 일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요, 우리는 모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예배가 합당하게 드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와같은 문제가 만성적으로 가게될때 여러가지 문제들이 그 다음에 생길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그때 주님 앞에서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무슨일이 있을대 에베소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해가지기 전에 분을 다 끄고 정리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그리고 넘어가라 말씀했죠.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가정 안에서 문제가 있다해도 문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문제가 아니고요. 하루 단위로 해서 계속해서 분을 가지고 간다면 가정에 대단히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죠. 부부관계에 어려움이 있고요. 부자관계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대로 우리는 기억하고 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 때문에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 말씀을 네가 지키라 그러면 이 왕국이 견고할 것이다라고 말씀 했지요. 우리는 이제 모임의 교제 안에서요.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위대한 주신 특권, 이것을 우리가 잘 누리고 모임의 안녕과 또한 모임의 질서와 모임의 복을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세워가고 이루어 가야할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이요, 아도니야의 행사를 잠깐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왕상 2:21).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와서 "아비삭을 나에게 아내로 달라, 나는 결혼하고 싶다. 그러니 당신이 힘을 좀 써달라."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밧세바가 솔로몬 아들에게 찾아가서 그런 요청을 하지요. 그런데 여기 좀 미묘한 것이 있습니다.

"가로되 청컨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왕상 2:17).

이 이야기를 하게 될때요.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어떤 궤계를 가지고 지금 이야기하는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당신이 가서 이야기하면 솔로몬이 당신의 말을 아마 들을것이다. 라는 이야기에 상당히 마음속에 고무가 됩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찾아와서요. 우리의 어떤 영향력을 가하게 될때 쓰는 여러가지 방식중의 하나가 아첨 입니다. 그것은 물건으로 말하면 뇌물이고요. 말로 이야기하면 아첨 입니다. 여기 아첨을 하고 있어요. 아도니야가 여자에게 찾아와서 ■■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아요. 에덴동산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마귀가 뱀 뒤에 숨어서요, 어떻게 왔습니까? 여자에게 찾아왔지요. 밧세바가 타겟이 됬어요. 아도니야가 와서 "솔로몬에게 말씀해 주시면 이와같은 요청에 대해서 들어줄 겁니다." 라는 뉘앙스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 마음속이 상당히 고무 됬어요. 그래서 내가 들어주겠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가서 이야기 하겠다. 그런데 22절 말씀을 보십시요.

"솔로몬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왕상 2:22).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이와같은 요청속에 있는 간계를 그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사건, 또한 대화, 또한 겉모양, 이것으로 모든것이 판단되는것이 아니고요. 그 안에 있는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것을 봐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수있는 눈이 분별력 입니다. 이때, 슬픈 것은요, 밧세바는 그것을 못봤어요. 때로는 뇌물은요, 우리의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아첨은요, 우리의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별력을 무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밧세바는 자기 아들에게 가서 이 얘기를 그대로 전하지요. 그러나 솔로몬은 격분 합니다. "왜 아도니야를 위해서 아비삭을 구하는 일에 어머니께서는 속에 있는 간계를 보지 못합니까?" 라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기 아도니야를 위해서만 구하지 말고 솔로몬이 이런말도 했어요. 이 사건에는 요압과 아비아달도 관계가 있다고 하는것을 그는 내다봤어요. 이것이 분별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소원하시는 바요, 그것이 바로 다윗이요, 솔로몬에게 죽기전에 당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10절에 보면 다윗이 열조와 함께 누워 잤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40년을 치리했지요. 이 다윗이 드디어 죽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전쟁의 사람이고 한번도 져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한국에 이순신 장군, 패하지 않았다고 흔히 말합니다. 다윗은요, 전혀 패해본적이 없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는 전쟁의 사람으로 대단히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시인입니다. 감미로운 시인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를 주옥같은 시편을 그는 기록했습니까? 그는 또 예배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짓고자 그렇게 안타깝게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들이 짓는다." 라고 할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의 위치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것을 짓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짓도록 그는 전쟁에 나가서 힘서 싸워서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오고 그것을 준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성전의 식양을 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사람이 죽었어요. 주님께로 갔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후대의 모든 왕들은요, 하나님께서 평가할때, 이것이 다윗의 영예인데요. 다윗의 후예중에 어떤 왕이 죽으면요. 그 일에 대해서 역사, 성령님꼐서 기록하실때, 그가 다윗의 길로 갔느냐 안갔느냐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다윗은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그가 간 길이 그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표준이 된 것입니다. 이것 참 놀라운 영광스러운 주님의 상급이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요, 우리 후배들이 그 형제님처럼, 자매님처럼 걸어갔느냐라고 말할수 있다면 얼마나 영예로운 길을 걸어간 것이 되겠습니까? 여기 다윗이 그렇게 걸어갔습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범죄한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불완전한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은혜 가운데 그를 표준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40년 통치에서요, 그는 이제 떠나갔어요. 그런데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열왕기상에서나 또는 역대기에서 다윗의 죽음을 우리가 볼때, 수많은 왕들이 죽었을때 애곡했다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울이 죽었을때도 다윗이 애곡했잔아요? 그런데 다윗이 죽었을때는 애곡했다는 말이 전혀 없어요. 그럼 사람들이 애곡하지 않았겠어요? 성령께서 기록한 역사는 바로 이런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모든 일들을 세세히 순서대로 연대대로 다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는 어떤것은 기록하고 어떤것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죽었을때, 아무도 애곡하지 않았다. 그는 물론 죽었고요. 우리는 다윗이 죽었을때 엄청난 애곡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우리 주님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영원한 분을 지금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죽으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죽지 않으셨어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묘사해야 하기 때문에 성령은 일부러 애곡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왕상 2:26).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지요. 다윗때의 제사장이었어요. 다윗과 함께 어려움도 겪었어요. 다윗이 어려울때 도움도 주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도 요압 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그도 변절한 사람입니다. 이 다윗의 말년에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것을 제사장으로 알고 있으면서 그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판을 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요,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되면 나에게 많이 유익하리라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바로 이와같은 것들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엄청난 장애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때 계산하고 섬깁니까? 내가 이렇게하면 나에게 유익이 올것이다라고 해서 섬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섬깁니까? 때로는 이렇게 하면 반드시 해가 올것이다라고 하는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 아비아달은요, 바로 이와같은 이유 때문에 그는 아마 아도니야 배후에서 아비삭을 취하라고 하는 이와같은 일로 그는 조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솔로몬은 아비아달에게 "너는 마땅히 죽을 사람인데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많은 고생을 했고 고통 가운데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그가 행한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고요. 그의 고향으로 파직시키고 쫓아버렸습니다. 28절에 아비아달이 파직했다는 소식이 들리니까요, 요압이 도망했어요. 그래서 전에 아도니야가 도망할때, 제단뿔을 잡았지요. 그도 가서 제단뿔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군대장관 브나야를 보내서 즉각 처단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브나야는요, 제단에 갔을때, 그를 거기서 처단할수 없었습니다. 주저했어요. 왜냐하면 그는 물론 왕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살인한다면, 거기서 처형을 한다면 피가 흐를 것이고 그것이 제단을 더럽히지 않을까, 그는 두려워 했어요. 다시 말해서 브나야는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그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자기 뜻대로 처단 안하겠다 결정한 것이 아니고 왕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왕이 다시 말했어요. "그를 처단하라." 그는 처단 합니다. 요압은 이제 죽었어요. 36절 말씀을 이제 보십시요. 시므이가 있습니다. 시므이를 우리는 잘 알지요.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때에 도주할때 저주했지요. 그런데 왕이 시므이에게 조건부로 그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를 당장 죽이지 않고요. "너는 예루살렘 가까이 집을 짓고 나의 가까이에 살면서 나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리고 만일 예루살렘 지경 밖으로 나가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다시 말해서 이제 시므이는 솔로몬 시대에 들어와서 가택 연금이 아니고요. 도시연금 입니다. 예루살렘 시 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3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시므이의 두 종이 도망했어요. 블레셋으로 도망했습니다. 아기스로 도망 했을때 이 시므이가 왕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지켰어야 되는데요. 그의 약속이라고 하는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이리라 생각했고요. 두 종을 쫓아가서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켰어요. 사람이 솔로몬에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차여차해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서 종들을 잡아왔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그에게 말합니다. "너는 분명히 내가 뭐라고 이야기 한것과 또 그 이야기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순종할 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가?" 그는 결국 죽습니다. 여기서 약속에 관한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는요, 약속하지만, 약속할때 그 약속이 별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솔로몬과의 약속을 지켰다면요. 다시 말해서 솔로몬과 약속할때 그것은 왕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것이라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 생명을 살렸을 것입니다. 그의 여러가지 다윗과의 우호적이지 못한 관계에 있어서도요. 그가 만일 이 약속만 지켰어도 그는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약속을 그는 우습게 알았어요.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 있어요.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될때요. 우리는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주님으로 따라 갑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일을 해 주셨다고 하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주님에게 신뢰 했습니다. 주님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마음속에 지키고 있는지, 또한 그것을 우리가 안다면 다른사람과의 약속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일치되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삽니다. 이런것을 공헌했다가 그 원칙과는 전혀 다른곳으로 걸어가고 때에따라서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이와같은 사람을 우리는 믿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 입니다. 사람을 믿을수 있는가, 없는가. 첫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을 믿었어요. 나는 하나님에게 신뢰를 두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신뢰를 둘수 있을까? 라고 하는것은 또 다른 문제 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엄청난 은혜로 구원해 주셨고요. 그 약속의 말씀으로, 이 약속을 주님은 지키십니다. 내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주님께서 신뢰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요. 나는 신뢰할수 있도록 살고 있는가? 그분이 나를 향해서 기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지키고 있는가? 만일 지키지 못했다면 주님앞에 죄송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자백하고 돌이키는가, 아니면 그와같은것에 대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걸어가는가? 시므이는요, 왕과의 약속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죠. 그렇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도 주님 앞에서 신뢰 받을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할 겁니다. 만일 그와같은 사람이 된다면 나는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요, 약속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겁니다. 약속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그와같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믿을수 없는 사회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모두가 다 성도들이 교제하고 살아가게 될때 우리는 성도 각인이 피차간에 믿을수 있는 사람인가, 신뢰할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이것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시므이의 이 케이스를 우리가 볼때 그는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약속을 저버리지 말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제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요. 우리는 첫째 주님 앞에서 우리의 신뢰를 보여 드리고, 어떻게 신뢰를 보여드리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약속을 귀히 여기게 될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그 신뢰를 보게될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특권은 누리지만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말로 하면 "나는 주님 믿었으니까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확정된 것이니까,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살때는 적당히 살아도 된다."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신뢰할수 있는, 다른말로 하면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는 그런 성도는 아니겠죠. 하늘나라는 가기는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우리는 고린도후서 6장 말씀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 끝에 가서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어떤 아들은 정말로 내가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아들이 있는데, 어떤 아들은 불쾌한 아들이 있다. 그런 말씀을 합니다. 아들과 부모와의 관계는 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이 있고요. 기뻐하지 않는 아들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때 우리가 기뻐하는 아들인가, 아니면 기뻐하지 않는 아들인가?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의식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우리는 합당하게 처신해야 될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나의 의지와 나의 결심이 아니고요. 주님의 사랑의 강권을 받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은혜 가운데 나 자신을 드리고 주님의 도우심 가운데 나도 주님의 신뢰를 받을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요, 열왕기서 상, 2장 말씀에서요. 이제 다윗이 세상을 떠나고요. 아들에게 당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 갔지만 그의 왕국이 계속해서 번영하고 그의 아들의 나라가 번영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을 모임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모임이 계속해서 번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될까? 우리는 2장에서 두가지를 크게 발견합니다. 첫째, 다윗이 당부한 것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순종하라. 그리하면 왕국이 견고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우리 모임이 견고할 겁니다. 둘째, 왕궁의 해가되는것을 제거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모임의 덕이 되는것을, 유익이 되는것을 우리가 행하고 모임에 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회피한다. 이 두가지, 커다란 교훈을 우리는 2장에서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