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솔로몬의 생애

< 솔로몬의 생애 02_솔로몬의 즉위 >

박이레 2021. 7. 19. 20:52

< 솔로몬의 생애 02_솔로몬의 즉위 > / 정형모 형제님

 

"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됨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다윗왕 앞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할 때에 나도 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리이다"(왕상 1:11-14).

 

아도니야가 자신이 왕이라고 자천하고 소위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물론 초청받지 못한 나단이나 브나야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 알게 됬지요. 특별히 선지자 나단이 이 사건을 알고서는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찾아가서 귓띔 해줍니다. 어찌 이 사실을 다윗 왕이 알지 못하는가 하는것을 이야기 합니다. 만일 이 일에 대해서 적절한 조취를 취하지 못하게 될때, 솔로몬도 또 심지어는 다윗 왕까지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나단은 전에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때, 압살롬이 반역하던때에 그가 왕도 살해할 준비가 되있다는 것을 나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왕이된다면 심지어는 밧세바도 왕도, 솔로몬도 처형하고 죽일수 있다는 점을 지금 시사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미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예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 그 나라 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대상 22:9-10).

 

오래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고 또 전을 건축할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솔로몬이 왕이 된다고 하는것은 그가 전을 건축한다고 하는 점을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고 그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그것은 밧세바에게 이미 오래전에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가 이제 이 말을 듣고, 나단이 밧세바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얼마전에 압살롬이 그의 형 암논을 죽이고, 그는 그의 형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죠. 그렇다면 다윗왕은 그를 처형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처형 할수가 없었죠. 그는 그술로 도망갔습니다. 그가 그술로 도망을 갔을때 요압이 압살롬을 다시 데려오려고 하는 시도를 합니다. 요압이 그런일을 하려고 했을때 어떻게 시도를 했습니까? 드고아의 여인, 소위 슬기롭다고 하는 드고아의 여인의 입에 자기의 꾀를 넣어주었고요, 비유를 베풀어서 결국은 다윗왕을 설득을 했습니다. 요압은 드고아 여인의 입에다가 그의 간계를 넣어주었는데, 오늘 저희들이 열왕기상 이 말씀에서 보면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의 입에다 한 말씀, 다윗에게 가서 전할 말씀을 넣어 주었다. 요압은 간교한 사람이고 악한 말을 넣어 주어서 다윗의 분별력이 흐릴때에 그로 하여금 압살롬을 데려오는 일에 압장섰습니다. 왜 요압이 압살롬을 데려오려 했을까요? 그는 다윗의 전체적인 유익와 왕국의 전체적인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이었습니다. 자신의 승진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위치, 이것이 그에게는 최우선이었죠. 그래서 그는 말을 드고아의 입에 넣어주었고 결국에는 압살롬이 그술로부터 돌아옴으로 인해서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게 되지요. 이런 슬픈일을 저희들이 기억하게 되는데 나단은 간계를 준비하여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단은 왕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이 분명히 서야 할 것에 대해서 그는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밧세바에게 찾아가서 반드시 되어져야 할 일에 대해서 밧세바가 왕에게 가서 마땅히 청해야 할 말을 지금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사건을 잘 비교해보게 될때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카운슬을 하게될때 요압이 드고아 여인에게 카운슬을 했습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이 밧세바에게 가서 그의 조언을 전해주게 될때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마땅히 되어져야 할 일이냐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주님을 섬기게 될때 무엇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높이는 일에, 나 자신의 증진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하는 것이냐? 이 두가지는 서로 다른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구로부터 조언을 듣지요. 또 조언을 잘 얻기 위해서 찾아 갑니다. 그런데 조언을 듣기 위해서는요. 마땅히 합당한 말씀으로 바른 조언을 해줄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 조언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가 원하는 조언을 듣기를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듣기 좋은 얘기를 해주기를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듣기 좋은 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갑니까? 또 악한 조언과 악한 카운슬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전체적인 유익이 아니고요. 그 사람 마음속에 원하는 것을 말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에게 두 모사가 있었죠. 하나는 노인 카운슬이 있었고 하나는 청년 카운슬이 있었습니다. 노인 카운슬은 르호보암 마음속에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가 만일 왕이 되어서 왕복을 입게 된다면 백성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것이냐 하는 점을 진실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교도는 어떻게 이야기 했습니까? 르호보암의 교만, 르호보암이 가지고 있는 자긍심, 이런 것들을 잘 추켜주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 마음에는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솔로몬때부터 백성들에게 수많은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던 이상으로 더 세금을 부과했고 결국 나라는 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단은 선지자 입니다. 전에 다윗왕이 성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때에 그 성전을 어떻게 건설을 할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 조언을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밤에 다윗은 성전을 지을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때 그것을 받아들였고요. 다윗왕에게 가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요.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궤는 휘장속에 있다. 그래서 내가 전을 건축해 주기를 원한다. 선한 뜻 아닙니까? 그 선한 뜻을 들었을때요. 나단은 동의를 했지만 그날 밤에 하나님과 대화를 했을때요. 하나님은 "아니다. 다윗은 나를 위해서 전을 지을수 없다." 이 메세지를 왕에게 가지고 간다고 하는것은 배신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바로 몇시간 전에 다윗왕이 자기의 소원을 얘기했고요. 자기도 동의를 했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선한 뜻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윗에게 찾아가서 아니라고 얘기해라고 하는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단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가 왕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이 전해주신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는것은 나단의 책임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있는 그대로 우리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변절시키는것, 변칙으로 만드는것, 그것을 비틀고, 또한 그것을 부인하거나 일구 부인하거나 또한 무엇인가 더하거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있는 특권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죠. 나단은 11절에서요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금 아도니야가 왕이 되어서 대관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봤을때,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내용, 성전건축과 그것을 건축하는 사람은 솔로몬이다. 또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왕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에 역행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나단은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지요. "당신이 왕에게 찾아가서 이 모든 사실을 직언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도 솔로몬도 다 죽을수 있다는 이야기죠. 밧세바가 이제 왕에게 가서 전하죠. 밧세바가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왕상 1:18).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는데 왕은 그것은 알지 못하고 방안에 그냥 드러누워 있다. 물론 노쇄했지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더라.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죠. 특별히 다윗은 이제 그의 건강이 나빠서 얼마 있으면 세상을 떠날텐데 그의 후계자에 관해서 하나님으로부터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그것을 백성들 가운데 왕국안에 고한적이 없다는 거죠.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취약점이었습니다. 모임의 인도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임은 누가 인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인도하실까만은 성령님은 인도자를 세우십니다. 신령한 장로들을 세우셔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실때, 그것에 대해서 모든 성도들은 합당하다고 인정하고 또 성령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이와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인도력이 계속해서 보존되지 않을때, 이것은 커다란 인도력의 공백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력의 공백을 가져올때 사단은 모임 안에서 이제 역사하는 겁니다. 사실상 사단은 인도력의 공백을 유도하기 위해서 많은일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도들 가운데 인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한 뜻을 가진 사랍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형제들 중에서 모임의 성도들의 안녕과 영적인 질서와 또한 영적인 유익을 깊이 생각하는 형제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 가운데 이와같은 일을 사모하고 일하려고 하게될때 그것을 방해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죠. 그와같은 모든 것들은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도니야가 왕이 될까, 열왕기상 1장 말씀은요, 아도니야가 왕이 되든지 아니면 솔로몬이 왕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 입니다. 우리는 이미 보았지요. 아도니야는 훈련을 받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왕실에서요. 왕자로서 특권을 누리고, 좋은거, 그가 왕자로서 어떤 태로를 취하고 어떠한 처신을 해야하는건지, 왕자로서 합당한 생활이 무엇이지에 대해서는 그는 별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왕자이기 때문에 그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즐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되겠다고 하는것은 왕권을 그는 즐기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권만 즐기고요, 그의 책임과 그가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나라에서는 어떤일이 벌어지겠는가. 수많은 폭군들은 백성들의 안위와 안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폭군들이 원하는것은 자기들의  이거와 자기들의 교만과 자기들의 권리의 특권, 그것을 백성들을 희생하면서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왕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왕이 되기전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왜 왕자가 징계를 듣고 꾸지람을 듣고 또한 체벌도 받고 또 수많은 훈련을 통해서 그가 자기의 자질을 준비하고 또 그가 왕이 되기전에 그가 준비해야 될 수많은 것들을 그가 훈련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왕이 되고난 다음에 백성들을 공의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좌는 공의로만 서게 되어 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는 사람이 의를 행치 못하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 분별이 없고 또는 언제나 분별이 구부러지도록 하는것이 무엇입니까? 이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간에 문제가 생기게 될때 그는 판단을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별력의 공백, 분별력의 약함, 이것은 저희들 가운데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분별력이 없다면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수많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것을 선택하게 될때 내게 바른 가치관이 있을때 바로 선택할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없다면,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원한 가치관,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수가 없습니다. 때로 옳은것을 그르다고 합니다. 그른것을 옳다고 이야기 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또는 전에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못된 것을 올핟고 이야기하고 그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영향력을 가지고요. 대단히 악한 영향력을 성도들에게 끼칠수 있는 것이죠.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와같은 일이 왕왕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것을 현실적으로 눈으로 보게될때 대단히 슬픈 것이죠. 왜냐하면 분별력이 잘못되게 될때 한 사람의 분별력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일생이 손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분별력을 잘못 하고요. 그것을 잘못할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악영향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선지자 입니다. 그는 성전 문제로 다윗이 고민 가운데 있을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바른말씀을 했습니다. 두번째 다윗이 범죄 했을때 나단은 계속해서 그것을 보고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애 가운데 두번째 나단이 찾아간 것은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에 그를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책망하지요. 나단이 책망했습니다. 여러분 유다 왕국, 이스라엘 왕국안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왕에게 가서 책망했을때 많은 경우에는 그 책망을 받은 왕이 그 선지자를 옥에 가두거나 또는 그를 피하거나 그를 쫓아내거나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을 받았을때 그는 그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다윗은 여러가지 그의 생애를 바라볼때에 우리가 실망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캐나다에 갔을때 모임 안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일주일에 한 두번, 저녁때에 합니다. 한번은 그곳에 참석했을때요. 몇 나라 학생들이 거기 모였는데, 다 아직 구원받지 않은 학생들입니다.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가 다윗이 범죄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사실을 불신자들이 들었을때,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다윗의 그런 역사를 듣고서는 멕시코에서 온 학생이 "아니 세상에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느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위대한 왕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간증이 몇년입니까? 주님 오실때까지 천년이고요. 이천년이고, 그때로부터 삼천년이 지났습니다. 삼천년이 지난후에 멕시코에서 온 한 학생이요, 처음으로 성경에서 다윗이 그런일을 했다고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느냐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다윗의 간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실수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라고 하고 그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을때요, 그 말씀앞에 그냥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그런데 책망을 그냥 들었습니다. 잠언 말씀에서 수많은 말씀속에 책망에 관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바른 말씀으로 권면하게 될때, 그것을 내가 마음에 기쁘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 있는가? 받아들일수 없는가? 책망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책망을 받게되면 산다고 말했고요. 우리는 책망을 받을수 있는가? 다윗의 생애 속에서요? 성전 문제에 대해서 나단이 간 적이 있었고 두번째는 범죄 때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요, 아도니야가 왕이 되느냐, 아니면 솔로몬이 왕이 되느냐, 이 문제를 놓고 나단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 줍니까? 아도니야는요,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요압을 모았고, 아비아달 제사장을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요, 분명한 근거가 없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지지해 주느냐에 의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얼마나 지지하느냐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가, 안하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나단은 솔로몬이냐, 아도니야라는 이슈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었는가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그의 촞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성전을 지을것이라다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래서 그 나단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느편을 드느냐 하는것에 있어서 그의 태도를 취한것이 아니고 그가 지금 취하고 있는 입장은 하나님께서 전에 다윗을 통해서 후계자는 솔로몬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성전을 지을것이다라고 하는 점을 말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도니야에게 훈계나 훈련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도니야가 왕이 된다면 성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전에 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왕이 된다면 다윗이 온 생애를 통해서 소년시절부터 언약궤의 거처에 대해서 염려했죠. 이제 그는 성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아들에게 부탁하게 될때 솔로몬에게 부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가 만일 왕이 된다면 솔로몬, 그가 왕이 되어서 성전을 짓게될때 아버지가 물려준 엄청난 재물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을 위해서 그가 전을 짓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이겼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패배했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하셨고요. 그 많은 전쟁에서 전리품들을 가져왔을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전리품들은 성전의 재료가 될것이라고 생각했죠. 만약 아도니야가 왕이 된다면 그 많은 재물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때 그는 성전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요. 그는 자기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서 그 모든 재물을 썼을것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이 특별히 성전과 관련해서요. 나단은 염려하고 있었다고 하는것, 그리고 밧세바에게 가서 직언을 하라. 왕에게 가서 고하라 라고 얘기했습니다. 밧세바가 드디어 왕에게 갔죠.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왕상 1:18).

 

이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요. 왕이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십니까? 라고 지금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다윗의 생애, 아니면 사사시대의 사사들의 역사, 또한 이후의 열왕들의 역사를 우리가 보게 될때요, 이것은, 이 이야기는 구약시대의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왕국에 관한 이야기고요, 왕의통치, 아니면 사사의 다스림,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런것이 오늘날 교회 시대와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요. 그들이 어떻게 다스렸느냐 하는 점을 생각할때, 이것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인도자들이, 장로들이 모임 안에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다스릴 것인가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펴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기쁘고 확신을 가지고 은혜 가운데, 믿음 가운데, 주님을 순종함으로, 말씀을 순종함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수 있게 한다면, 인도자는 바른일을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된다고 하는것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전을 짓는다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밧세바가 왕에게 가서 "아도니야가 왕이 된것을 왜 모르십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세요. 장로가 모임안에 되어지는 이런저런 일에 대해서 모른다면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문제가 되겠죠. 다윗은 지금 나이많아 늙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 왕으로서 솔로몬을 지정하셨고요, 성전을 그를 통해서 짓겠다 하는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한 선포가 있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이와같은 공백을 틈타서 이제 그는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위협을 환영해 드렸던 일이었죠. 그래서 왕은 왜 이것을 모르십니까?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왕은 아는바가 없습니까? 밧세바가 안타까워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와같이 될때에 자기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과 다윗왕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에 대해서 역설 했지요. 그런데 밧세바가 이 이야기를 하게될때 나단이 들어왔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왕에게 이야기 했지요. 밧세바에게 왕에게 메세지를 전하라고 이야기 하고요. 자기도 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22절 말씀을 보면 밧세바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단이 들어오게 될때, 그때 밧세바는 나갔습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나중에 다윗이 밧세바보고 다시 들어오라고 요청을 하는것을 보면 나단이 들어올때 밧세바는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고요. 밧세바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나단이 왕에게 엎드려 절하고 왕에게 말씀합니다.

 

"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왕상 1:24).

 

나단은요, 솔로몬이 왕이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 왕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왕은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해서 허락을 하셨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 왕은 알고 있습니까?" "이 일을 왕이 인준한 일입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만 모르는 것입니까라는 말이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국사 입니다. 선지자가, 특히 왕과 친구인, 그리고 왕의 모사이고 왕에게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해주고요. 왕과 하나님 사이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이 사람이, 이렇게 준비한 일에 대해서 모른다면 이것은 말이 되겠습니까? 하는 이야기죠.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성전을 짓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무너지느냐, 아니냐라고 하는 기로에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와같은 기로를 여러차례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모세가 태어났을때 바로가 모든 남아를 하수에 던지라고 이야기 했고 모든 남아들이 하수속에 물에 빠져 죽는 순간에 대단히 위태로운 때였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떻게 거기서 구원해 내셨는가 라고 하는것이 이스라엘의 대단히 놀라운 역사중의 하나 입니다. 또 페르시아 시대때에 하만이 이스라엘 모든사람을 다 전멸 시키고 다 학살 하겠다고 벼루고 있을때에 그때 에스더가 기이하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나타나죠. 그래서 왕에게 찾아가서 이 일의 모든 전모를 이야기 합니다. 왕이 부르지 않으면 에스더는 결코 왕 앞에 나갈수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왕이 기뻐하지 않는데, 여왕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나갔다가는 죽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서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이제 왕 앞에 나가게 될때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와같은 결단을 통해서 나갔을대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에스더의 결단된 행동,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렸지요. 이제 우리는 열왕기상 1장에서요. 여기 대단히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입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 성전의 계획이라고 하는것은 다 사라져버릴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땅에 떨어질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단이 개입했던것을 정치적인 어떤 유익을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개입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성전이 건축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서야 된다는 점에서, 다윗에게 가서 이야기 하죠. "왕은 어떻게 아도니야가 왕이 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이고요. 밧세바와 솔로몬에게 했던 약속 자체도 파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을 우리가 지킨다고 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죠. 약속을 파기하는 사람은 신뢰할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사람들입니다. 약속을 하게될때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하게될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하게 될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었지요, 그래서 이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냈지요. 그래서 썩은 곰팡이난 빵과 또 다 해진 옷을 입고와서 "우리는 멀리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약을 맺읍시다." 라고 할때 그때 여호수아가 실수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들의 그럴듯한 태도와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요, 그 조약을 맺었을때 하나님 앞에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맺은 조약은 결코 파기할수가 없다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묻지 않은것에 대한 실책에 대해서 통감 했어도 일단 맺은 조약에 대해서는 번복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때 와서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다 전멸하고 죽이려고 했지요. 사울은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전멸하라고 했을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요. 기브온 사람들을 향해서는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기하고 그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지요. 죽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다윗때에 삼년동안 연속적으로 기근이 들었죠. 하나님께서 메세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 후손들 7명이 그때 목메어 죽임 당합니다. 다시 말해서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라고 하는것은 그것은 심지어 실수로 했다해도 그것은 파기할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통해서 말씀하신 솔로몬이 왕이 되고 그가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이 위대한 일이 지금과 같은 정치적인 상황을 통해서 변화될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나단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를 왕이 되도록 인정해 주셨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사실상 나단은 물론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왕에게 이와같이 확인하면서요, 왕이 이제 행동에 옮길수 있도록 왕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 것입니다.

 

"다윗왕이 명하여 가로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저가 왕의 앞으로 들어와 그 앞에 서는지라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내 주 다윗왕은 만세 수를 하옵소서 하니라"(왕상 1:28-31).

 

밧세바를 들어오라 그러고 왕은요, 자기의 약속을 지키겠다. 이제 드디어 그 뜻을 천명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는 기쁨 가운데 나갔고요. 그 다음에 다윗왕은 세 사람을 불렀습니다. 첫째 제사장 사독, 그리고 두번째는 선지자 나단, 세번째는 군대장관 브나야. 세 사람을 불러서요. 솔로몬을 자신의 노새, 왕의 노새에 태우고 기온으로 인도해 내리고가서 거기서 대관식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온이라고 하는곳은 아마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 있는 그런 광장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으고 이스라엘 왕을 삼고 양각을 불러서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고 저를 따라올라오게 합니다. 그곳에 가서 큰 소리로요, 왕의 만세를 외치게 하고 기름을 붓고 그리고 돌아와서 다윗의 보좌에 앉게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대신해서 솔로몬이 이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이 노쇄했어도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대관식이 있고 난 이후에, 그가 기름부음을 받고난 다음에 그는 왕이 되지요. 놀라운 순간입니다. 드디어 이제 다윗의 시대는 고하고 솔로몬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그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이냐라고 이 기간은, 이 전환기는 대단히 위태로운 때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공격하기 위해서 삼백명과 함께 그들을 공격할때 어느때를 공격했는지 아십니까? 미디안 군대가 보초를 서다가 다른 보조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이와같은 서로 릴레이 해주는 때는 때 입니다. 경주로 말하자면 바톤을 건네주는 그런 때 입니다. 이때가 가장 위태로운 때입니다. 달리기 할때도요, 한 사람이 막 뛰다가 다른사람에게 바톤을 건네주게 될때 그때가 가장 위험하죠. 바톤을 잘 건네주는가 하면 바톤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바톤이 떨어지면 그만큼 시간을 지체해버리기 때문에 지는 것이죠. 전환기는 대단히 위태로운 때입니다. 솔로몬이 이제 왕이 되어가는 이 전환점에서 이미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서 반기를 든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속해서 잘 보존이 되고 가기 위해서는요, 인도력이 계속해서 보존이 되야되고 그와같은 인도력이 보존되기 위해서 다음세대의 인도력들이 이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도력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한일을 사모하는 일에 대해서 형제님들 가운데서 깊은 생각을 갖고 주님앞에 기도하고 그와같이 주님앞에 합당히 행할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임의 장래를 생각하는 성도가 있어요. 또한 모임의 성도들의 영적인 안보와 또한 안녕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모임은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형제님들이 마음속에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께서  합당한 사람들을 세우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요, 이 일을 드디어 감행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죠.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왕상 1:39).

 

이 기름은 어디서 가져옵니까? 기름은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은 다른데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성막에서 가져왔습니다. 성막에 있는 기름, 다시 말해서요. 그가 기름부을때에 아무나 기름붓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입니다. 오래전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때에 사무엘이 양각 기름을 채워와서 베들레헴에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죠. 이제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게 될때 제사장 사독이 이 일을 했습니다. 첫째, 다윗왕이 인정했습니다. 원래 다윗왕은 인정했고 약속했고 하는것을 지금 집행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제사장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이 이 일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죠. 그리고 백성들이 이 일을 위해서요, 만세를 외쳤습니다. 왕이 인정했죠. 선지자가 인정했죠. 나단 선지자 뿐만 아니라 제사장 사독이 이 일을 했지요.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환호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가만히 보게될때요, 솔로몬은요,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고 캠페인을 벌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포섭하고 이런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어떻게 보면 피동적인 그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이미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런일을 해야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어떻습니까? 아도니야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천한 사람입니다. 자천한 사람은 언제나 어떻게 합니니까? 그는 분주히 다니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할때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했지요.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캠페인을 벌인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없어요. 그러나 자기의 뜻을 가지고 사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것이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표를 얻느냐? 오늘날 성도들의 마음속에 민주주의 사상이 가득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표를 많이 얻으면 뭔가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게 될때 하나님은 어떤 정부 형태였습니까? 신정이었습니다. 신정,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때에 신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사사 시대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사 시대를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 생각에는요, 왕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왕이 없었으므로, 왕이 없지 않았어요. 왕이 계셨어요. 그런데 왕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누가 왕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기 때문에 어두운 사사 시대가 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이민족이 침략해 왔을때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셨죠. 슬픈것은요, 사사 시대에도 여전히 왕이 다스리고 있었어요. 사사가 있었습니다만 왕이 다스리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율법 말씀에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왕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제도가 있죠. 그래서 왕이 되면, 신명기에 아내를 많이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쌓지말고 그리고 말을 많이 두지 말라. 사실 나중에 솔로몬은 이 모든것을 다 어겼어요. 하나님은요, 신정으로부터 사람이 왕이되는 때를 두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다윗이 왕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참지 못하고 몇년 못참았습니까? 사십년 못참았어요. 그 오랜 세월을 오다가 사십년 못참아서 사울이 왕입니다. 그가 우리가 선택한 왕입니다 라고해서 이스라엘은 대단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서 이스라엘을 잘 통치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대로 전쟁이 나면 사울이 앞장서서 나갔습니까? 아녀요. 골리앗이 왔을때 사울은 벌벌떨며 두려워 했지요. 다윗이 나가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왕이되는 때가 옵니다. 인간이 왕이되는 때가 오지만 인간이 왕이 될때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은 인정했습니다. 어떻게요? 다윗 눈에는 사울이 왕같이 보이지 않았죠. 사실상 많은 악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버리셨다는것도 그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사무엘이 자기에게 와서 기름을 붓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알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부음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그 사람을 해할수 없다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가 계속해서 통치하게 될때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힘은 하나님이 다스린다고하는 점에 대해서 그는 왕이라 할찌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도니야는 그와같은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솔로몬은 왜 피동적으로 가만히 있는가? 하나님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내정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캠페인을 벌이고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자기에게 표를 달라고 얙하고 이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다윗왕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이야기 해줬죠. 밧세바에게도 재확인해 주었죠. 그리고 이제는 누가 나가서 일합니까? 이 일을 위해서 나단이 나가고요. 브나야가 나가고, 그 다음에 사독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모든일을 그들이 주선해서, 그는 왕의 나귀를 타고 그곳에 가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솔로몬이 열왕기상 3장에 가면요. 그가 왕이 되고 난 이후에 기브온에 올라가서,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얼 줄까?" 솔로몬은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때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까 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고요.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나른 어린아이라, 이 사람들을 다스릴수 없습니다. 인도자는 이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그들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따라서 만족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들이 번성하고 또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나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위대한 간증,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위대한 선포, 이와같은 책임을 온전히 할수 있겠는가 라고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아도니야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은 다스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치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하는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은 어머니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요, 백성을 통치하는 일에 대해서 대단히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을 볼때에 그는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이제 돌아오지요. 성중에서 소리가 났을때요. 41절에 요압이 놀랐습니다. 요압은 이 점에 대해서 대단히 귀를 귀울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단히 정치적인 사람이죠, 상황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온에서 소리가 난 것을 보고 뭔가 깨달았어요. 그래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43절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와서 이야기 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됬습니다. 백성들이 외쳤습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 현장에 가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비아달은요, 제사장으로 다윗과 오래 함께 한 사람인데 이 일에 있어서는 요압과 함께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를 지원해 줬어요. 그런데 그 아들 요나단은 다윗에게 전에 메세지를 전해 준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는 아도니야로부터 초정을 받지 못했한것 같습니다. 그냥 거기가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또 그는 이제 솔로몬의 대관식에 가서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가서 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들었을때, 49절을 보십시요.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제단뿔을 잡았습니다. 아도니야는 이제 이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구나. 왕이라고 그렇게 소리지른 사람이 한순간에 그냥 도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제단뿔을 잡았습니다.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출 21:13-14).

 

이 말씀에 의거해서요. 단으로 가서 제단뿔을 잡으면 안전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도니야가 도망해서 제단뿔을 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가서 고했어요. 아도니야가 제단에 가서 제단뿔을 잡고있다. 솔로몬이 그에게 한가지 조건으로 생명을 구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선한 사람이 된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사람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착한일을 행하고 자선 사업을 하고 이런 사람이 아니고요.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것은 아도니야에게 있어서는 그가 만일 더이상 왕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그는 자기의 위치에서 평범하게 산다면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더이상 왕의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생명은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다음장에 가보면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가 왕이 되고자하는 그와같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장에 나타나는데, 선한사람으로 입증할수 있다면 살려주겠다고 해서 솔로몬이 조건부로 그를 살려주죠. 이것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아량이었습니다. 보통 왕같으면요, 다윗도 그랬지요. 므비보셋, 원수의 자식이었는데요. 다른 왕 같으면 다 사울의 가문을 완전히 다 쓸어버립니다. 그 친척까지도 다 없애 버립니다. 왜냐하면 후한이 두려워서요. 고대시대의 왕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고요. 솔로몬도요. 아도니야가 이와같은 일을 했을때, 그를 살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선한 뜻을 가지고 있다면 살려 주겠다. 이것이 보통 왕과는 다른 것이죠. 솔로몬은 평화의 사람이라 평화를 사랑했습니다. 그 이름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그를 그렇게 살려주고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요, 1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 그 약속의 말씀, 솔로몬이 왕이 되고 성전이 지어져야 한다는 이 엄연한 말씀, 그것이 보존되느냐 아니냐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저희듯이 촛점을 두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솔로몬이 왕이되고 성전을 짓는다라고 하는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셨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오늘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셨고요. 구원받고 난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것, 이제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것과 개인으로는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할것과 모임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 오실때까지 섬길것이냐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잘 보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역행한다면요. 이 말씀을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또는 그 말씀을 변경한다면 우리의 인간의 생각을 가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않고 우리는 실제로 많은 손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될때 그것은 뭔가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될때 반드시 우리에게는 크고작은 손실이 오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값을 치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하거나 경외하지 않는 그와같은 태도를 취할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희들에게 열왕기상 1장 말씀에서 다윗과 그의 후계자가 어떻게 왕이 되었느냐는 관계에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저희들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