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생애 01_아도니야의 반역> / 정형모 형제님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1:1-4).
저히들이 지난번에 마포모임에서 사무엘하를 통해서 다윗의 생애를 보았습니다. 사실상 다윗의 생애는 사무엘하 24장에서 끝나지 않고 사무엘하 이후에 전개되는 열왕기서에서 그의 생애가 마쳐지는데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저희들이 다윗의 생애와 이어지는 솔로몬의 즉위와 왕의 통치를 저희들이 볼수가 있겠습니다. 열왕기상과 하는 원래 하나로 되어 있던 책이죠. 마찬가지로 사무엘상하도 원래 하나로 되있었던 책인데 두루마리 책의 볼륨에 맞게 일반적으로 그것이 둘로 나뉘어져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사실 솔로몬의 통치로 시작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은 이스라엘의 왕국은 분얄해 버렸고 또 그 북방 왕국은 먼저 멸망해서 앗수르로 포로되어 가고 또 남방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성전은 불타고 모든 예루살렘에 있었던 보화는 외국으로 옮겨지는 그런 불행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슬픈 역사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저희들에게 기록해 주셨고 물론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가 아닙다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저희들이 보면 열왕의 역사, 특별히 솔로몬의 행적을 저희들이 보게 될때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귀한 교훈들이 있고 오늘날 이와같은 교훈들을 저희들이 마음속에 두고 저희들은 교회 시대에 살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섬기게 될때 저희들 마음속에 많은 지침과 안내와 경고와 또한 교훈과 격려와 저희들 마음속에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을 읽게 될때 이 말씀속에 담긴, 성령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시게 될때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역사입니다만 역사를 세상사람들이 역사를 쓰게될때, 순서적으로 있는대로 그대로 쓰겠죠. 그러나 성경 말씀속에 나타난 역사는 그것은 물론 역사입니다만, 성령님께서 주권적인 뜻 가운데 하나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또 이 말씀속에서 저희들의 신령한 교훈과 또한 가르침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 역사의 수많은 부분을 재단해서, 재단한다고 하는것은 어떤 부분은 더욱 더 자세하게, 어떤 부분은 생략하고, 어떤부분은 대단히 짧게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역사를 전혀 외곡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만, 그 역사는 성령님께서 역사를 조명하시는 분량이나 강도가 때에따라 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에게 주님을 소개해주고 있고 또한 저희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번영하는 왕국, 솔로몬이 이제 다윗 왕으로부터 위대한 왕국을 받았습니다. 그는 참 복된 사람이죠. 밧세바를 통해서 엄청난 번죄와 또한 살인과 그로 인해서 수많은 고통을 다윗은 왕으로서, 또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겪어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많은 교훈과 경고를 받았고 또한 주의 말씀의 두려움 가운데 저희 자신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정결하게 살 것인가 라는 것에대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저희들이 탐구 합니다. 이 위대한 왕국을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로서, 물론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에게 수많은 아내들이 있었지만 밧세바라고 하는 이 여인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 솔로몬에게, 그것도 밧세바가 제일 처음에 다윗으로부터 낳았던 아들 다음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요. 여러 형들이 있고 그 다음에 솔로몬입니다. 왜 솔로몬을 선택하셨는지 우리는 설명할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선택하셨습니다. 솔로몬 이외에 다윗에게는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태어난 아들들이 있었고요. 그 아들중에 암논과 압살롬은 이미 죽었습니다. 또 아비가일의 아들인 다니엘, 그에 대해서는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많은 학자들은 그가 아주 어릴때에 세상을 떠나가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1장에 와 보면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왕자들 중에 아도니야가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습니다. 그는 서열로 보면 솔로몬보다 훨씬 위고 따라서 자기자신이 왕이 될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이제 이 나라가 시작되게 될때 술렁이고 요동하는 모양이, 솔로몬이 왕권을 얻고 왕위에 오를때까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쫒겨 다니다가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 왕국이 세워질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왕국, 그 왕국은 참으로 찬란한 왕국이었습니다. 모든 부가 그 나라에 가득히 차 있었고 또한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왕과 여왕들이 솔로몬에게 찾아와서 그 지혜를 알아보고 감탄했던 모습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보화가 너무 많아서요, 은이 돌보다 더 흔했다고 할 정도로 모든 세상의 부가 이 나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광입니다. 이스라엘의, 야곱의 후예인 이 나라, 이 나라가 전무후무하게 이렇게 놀라운 영광과 명예가 있었습니다. 온 세상의 왕들이 이 나라의 와 보고자 발길을 끊지 않았다라고 하는것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이와같은 것을 보면 이 구약의 왕국과 왕과 그 통치와 또한 그의 백성들의 행실과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의 나라를 이루고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이 모든것을 저희들이 살펴볼때, 이것은 이스라엘이요, 우리의 경륜과 다른시대의 사건입니다만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교회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인도되느냐, 장로들은 어떻게 치리 하는가, 또한 성도들은 어떻게 인도를 따라 모임을 건설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우리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고 이 구약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와같은 일을 위해서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성도들 마음속에 말로 할수없는 위대한 통찰력을 저희들에게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저희들이 살펴볼때에 말씀속에 담긴 주님의 마음과 또한 의도를 저희들이 오늘 교회 시대에 사는 저희들이 모임 안에서, 또는 어떤때는 가정 안에서, 또는 어떤때는 우리의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고 하는것을 살펴보는것은 저희들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고 믿고 또한 이 말씀을 통해서 얻는 유익을 통해, 저희들이 저희들 개인과 가정과 또한 저희들이 주님안에서 사랑하는 모임을 어떻게 세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주님앞에서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왕국, 또 다윗으로부터 받은 번영한 왕국, 또 온 세상의 위대한 영예와 명예가 있었던 왕국, 그 왕국이 이제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 가는가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는것은 저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관찰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번영하던 나라가 어떻게 쇠태했는가, 왜 쇠태했는가,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라고하는것을 우리가 잘 살펴볼때에 우리는 역사를 배우게 될때, 이와같은 실패가 우리 가운데 재현되지 아니하고 우리는 이와같은 역사를 통해서 통찰력과 지혜를 얻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수준을 따라서 그것을 이룰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저희들의 가정은, 저희들은 모임은, 즉 하나님의 사람의 집과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세워지고 견고히 세워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도록 저희들은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열왕기서를 통해서 번영한 왕국이 어떻게 멸망하고 또한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외국으로 끌려가고 또한 거기에 가득했던 수많은 보화가 외국으로 반출됬던 것을 저희들이 살펴볼때에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주시는 경고가 있고요. 이와같은 슬픈 역사는 단순히 슬픈 역사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많은 지혜를 전해주고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와같지 아니하고 번영하는 왕국이었다면, 더욱더 번영하는 왕국으로, 저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형통케하는 모임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임이라면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들 가운데 견고히 서서 첫 세대가 이루었던 위대한 주님의 일들이 다음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에 더욱 더 번창하는 모임으로, 또한 가정으로 이루어지기를 저희들은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이 1장 1절에 제일 첫번째 열왕기상을 펴보면 제일 첫번째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것은 다윗왕의 연약함입니다. 그는 쇠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의 나이가 첫째, 많아서 늙었습니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 누구나 노인이 되면 자연히 이와같이 된다고 이렇게 읽고 넘어갈수 있겠죠. 건강이 나빠져서요, 따뜻하지 않고 이불을 덮어도 춥고 우리는 이와같은 모습을 가만히 살펴 볼때 우리의 개인의 영적인 상태, 그것이 냉냉하지는 않는가 하는것을 살펴보십시요. 우리 가정의 삶에 있어서 가정의 식구들이 돈독하고 사랑을 나누고 또한 뜨거움 가운데 서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무관심 속에 냉랭함 속에 살고 있는가? 가정이 그런것을 우리는 흔히 하숙집이라고 말하죠. 식구들이 왔다갔다 할때에, 와서 밥을 먹고 가지만 서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집은 그냥 하숙집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집은 이와같이 이불을 덮어도 추운 그런 집일 겁니다. 모임은 어떻습니까? 모임의 성도들은, 집회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때, 모임의 각 지체들이 각 정규집회가 우리에게는 다시는 오지않는 유일한 집회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주일날 모이는 집회, 수요일날 모이는 집회, 이제 각 정기 집회는 우리 일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집회는 반복됩니다만, 우리는 다시오지 않는 집회다고 생각할때, 오늘 주님께서 이 독특한 집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준비하셨는가, 이 집회에 모이게 될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모여야 하는가, 어떤것을 준비하고 모일까, 라는 생각을 우리는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집회에 모이게 될때 저희들의 마음은 기대속에서 전율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집회라고 하는것은 그냥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러한 집회, 그래서 많은 경우에는 성도들이 모여서요, 오늘도 또 똑같은 만찬상, 똑같은 성도들, 그래서 항상 똑같은 비슷한 기도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이고, 저희들이 고등학교때 선생님들이 항상 진취적이 아니고요. 숙제도 안해오는 학생들에게 무말랭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다 나가빠져서요, 아무것도 없는, 눌러봐도 탄력도 없고 그냥 빡빡한것, 이와같은 영적인 상태로요, 우리가 주님앞에 모이게 될때, 우리 모임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아니하고 아무도 우리 모임의 교제에 환력을 넣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우리 모임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열왕기서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이스라엘 왕국, 통일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에 이것이 분열되 버리고 남북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남북은 이제 서로 경쟁이나 하고 서로 우상 숭배에 돌입하게 되고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제 하나님께 불쾌감을 오랫동안 드렸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고 또 다시 보내고 또 다시 보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자기길로 걸어갔고 이와같이 영적인 탄력성이 없는 무말랭이같은 민족이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들은 먼 외국으로 노예가 되서 끌려가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명성이라고 하는것은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사람들의 발에 밟힐것이다라고 말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왕국과 북방 이스라엘 왕국은 사람들의 치소와 멸시와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그들은 왕국이 문을 닫게 되 버리죠. 우리는 이와같은 엄연한 역사를 생각할때에 우리 마음속에 이 말씀을 펴서 읽게 될때에 저희들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이와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고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전개 되었고 무엇이 그들 가운데 문제였는가 하는것을 우리는 예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나이가 늙고 추워서 동녀를 구해오죠. 이 당시에, 물론 고대 시대에 참 슬픈 역사 입니다. 한 처녀가 이제 왕의 신하들이 왕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데려오죠. 그 여자 아비삭은 왕이 죽을때까지만 왕과 함께 하고 있다가 물론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왕이 죽지요. 주님께로 갑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아비삭은 하렘으로 들어가서 누구하고도 정상적으로 결혼해서 살수없는 여자가 되 버리고 만다. 그래서 대단히 슬픈 고대 시대의 역사 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가 있고 난 다음에 아도니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도니야는 학깃의 아들입니다. 암논과 그리고 압살롬, 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고 어떻게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범했고 또한 압살롬은 2년동안 묵묵히 기회를 보고 있다가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않고 있다가 때를 잡아서 드디어 암논을 살해하죠. 그리고나서 아버지를 대항하고 또 반역하고 왕국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와 전쟁하지요. 둘다 죽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볼때 전쟁의 결과요, 또한 미움의 결과요, 범죄의 결과입니다만, 사실은 다윗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에 칼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두려운 말씀이 그대로 응해졌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알고 있죠. 우리는 이와같은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명예와 우리의 이름과 뗄레야 뗄수 없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매 순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런 은혜를 저희들에게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 개인의 간증이며 가정의 간증이고요. 모임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아도니야는 아직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5절 말씀에 보면 스스로 높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항상 문제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처신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게 될때, 우리는 높아지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우리는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높인다고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도니야가 주님으로부터 배워본적이 없는 지혜 입니다. 그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높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는 겁니다. 나중에 수많은 왕들이 외국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왔을때, 열왕기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합니다. 수많은 왕들이 찾아왔을때 여호와로 인해서 얻은 명예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이름이 명예가 있다면 여호와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질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으로 인해서 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가, 주님과 어떻게 동행하는가, 주님 말씀을 어떻게 내가 이해하고 순종하는가, 이런 모든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섬기고 어떤 마음, 활동을 하고 이런 모든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명예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우리 자신이 낮아지고요. 겸손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신약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종으로서 주님앞에 일하고 난다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하루종일 일하고나서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앞에 뭔가 요구하거나 흥정하거나 할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 뿐입니다. 이 모든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은 그분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야망이 많았습니다. 청년들에게 장점은 힘입니다. 잠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약점은 야망입니다. 정욕입니다. 그래서 시험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요, 스스로 높였습니다. 그는 야망이 많았습니다. 왕이되는것은요, 이미 하나님은 오래전에 사무엘하 7장 말씀에서요. 다윗이 "하나님의 궤는 휘장속에 있고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을때 하나님은 거절했죠.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은 나답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나에게 전을 지어주는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집을 세우겠다." 하나님이 그의 집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요, 그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의 집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다하지 않는, 천년왕국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통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을 통해서 전해주신 이 그의 집을 세우겠다고 하는 이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다윗은요,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전을 지어준다고 얘기했지만 너는 지을수가 없다. 다만 네 몸에서 나오는 네 아들이 그 전을 지을것이고 그를 통해서 이제 보좌가 이어질 것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기전에, 오래전에 하나님은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정한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권적인 선택을 하시는지, 모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은사를 세우시는지, 모임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성령님을 통해서 장로들을 세우시는지, 집사들을 인도하시는지, 또한 성도들이 교제하게될때 성령님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예배를 드리게될때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지, 이 모든것을 만일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우리는 무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적인 은혜와 또한 하나님의 변할수 없는 뜻을 그는 아는바가 없었고요. 그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플랜과 자기 에이젠다를 통해서요,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야망을 지금 실편해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하는 것에 대해서 절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임안의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이와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안에 많은 무질서와 또한 부조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성도들은 가슴을 앓게되고 고통스러워하고 인도자들은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같은 일로 그와같은 부담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사람을 향해서 시선을 두고 계실까 라고하는것을 우리는 알게되죠.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였습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 아도니야는 내가 왕이 된다고 말했고요, 하나님은 솔로몬이 왕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를 내가 대적할 것이고 겸손한 자에게 내가 은혜를 줄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어떤 인생도 이길수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이길수 없어요. 따라서 교만이라고 하는것은 우리 생애 가운데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슬프고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되겠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인을 예비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할때 그는 그의 전에 자기 형으로부터 배운바가 있습니다. 그의 형 압살롬이 이제 왕을, 아버지 부왕을 대적하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할때, 그는 어떤일을 했습니까? 그는 그술로부터 겨우 돌아와서요, 왕이 처음에는 그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압을 꼬드려서 그는 이제 드디어 왕을 만나도록 조정을 하고 그리고나서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서 전배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왕이 하는 것입니다. 왕이 행차하게 될때 그 앞에 군대들이 가는 것입니다. 이 전배가 간다고 하는것은, 그것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 아닌 사람이 이렇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높여서 이제 모든 왕의 모양을 그는 취하고 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북방왕국에서 수많은 구데타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볼때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가 금방 보좌에 오를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구데타가 있었습니다. 남방왕국에서는 아달랴 외에는 그런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북방과 남방의 차이라면 차이 입니다. 왕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하는것은, 하나님은 권위에 샘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권위를 원천 권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인간의 제도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셔서 인간이 범죄하기전에 결혼을 제정하셨고요. 가정이라고 하는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셨고, 거기에 가장과 돕는 배필이 있습니다. 가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에게 대행권위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래 가지고 계신 원천 권위와 원천권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이 이루신 제도중에 가정 안에서, 가장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권위,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순종하고 돕는 배필이 옆에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하니님이 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요, 원천권위로부터 대행권위를 받았을때, 그 대행권위는 가정을 위해서 아내와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서, 또한 웰빙을 위해서, 그들의 만족과 그리고 모든 즐거움을 위해서, 그리고 안전과 안보를 위해서 그 대행권위는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 대행권위를 자기의 만족과 또한 다른사람을 학대하는데 쓰고 있습니까? 그것은 죄로부터 온 것이죠. 이 원천권위와 대행권위 사이의 관계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같은 것에대한 아는바가 별로 없고요.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만일 힘이 있다면 저것을 무너뜨리고 내가 얻을수 있다고 하는것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부모를 향한 권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부모가 잘하면 우리가 허락을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능력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들에게 이와같은 대행권위를 사용하게 될때 하나님 앞에서 잘 사용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장은 그것을 잘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고요. 가장으로서 그와같은 권위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가서 이제 질문을 받게될때 답변해야 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다른 제도는 정부 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위정자가 있고 백성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대행권위를 허락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교회의 장로들과 성도들이 있습니다.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행권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들이 원천권위를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고 대행권위를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대행권위에 대해서 성도들은 인정하고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원칙은 성경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것이 잘 운영이 되게될때 저희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정부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고 많은 비리가 있고, 얼마나 많은 국가들이 비리로, 부패로 항상 문제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가장이 하나님께서 주신 대행권위를 사용하고, 또한 자식들이 아내가 이 권위에 대해서 순복하고 걸어가게 될때 하나님의 사람의 집은 위대한 간증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이제 아도니야는 자기 형이 했던 반역, 그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전대를 두고 사람들 앞에 시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행권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대행권위가 있는것처럼 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외적인 모양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전배를 두고요,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는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강력한 힘이 있는것처럼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현실을 허락하시게 될때, 우리가 주님의 말씀 순종하고 영적으로 살아가게 될때, 우리에게는 영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적인 활동 속에서요,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있고 사람들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타가 공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때 그것에 대해서 내가 변명하거나 그것을 입증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입니다. 그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요,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외적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현실이 없을때요, 겉모양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때 많은 어려움들이 생기죠. 그러나 얼마나 이스라엘이 타락했을때 사람들이 외모를 바라보고 이제 따라갔습니까? 물론 아도니야는 외모도 잘생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게될때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이제 우리 자신을 호소하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신령함 가운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보이지 않는것 속에 있는 현실입니다. 그와같은 것이 우리속에 드러나게 될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요. 그것은 실제로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난 사람이지요. 그리고 채용이 심히 준수한 자다. 이 말씀을 성령님께서 자주 하세요. 압살롬도 대단히 핸섬한 왕자였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타락하게 될때 백성들 가운데 판단력이 흐려지고 가치가 흐려지기 때문에 외모로만 판단하는, 외모가 출중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모만을 가지고 어필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와같은 진리와 교훈을 주신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대로 신령한 것, 영적인 삶, 그리고 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영적인 현실, 그것을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또 한가지 아도니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그 부친이 어떻게 그를 길렀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아도니야를 어떻게 양육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한번도 섭섭하게 말한 적이 없다. 한번도 꾸중한 적이 없고 한번도 책망한 적이 없다. 아도니야는 성인입니까? 아도니야는 완전한 아들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요, 아도니야가 왜 이와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라고 하는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번도 꾸중을 들어본적이 없고요. 한번도 책망을 받아본적이 없고 한번을 체벌을 받아본적이 없다. 이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것은 얼마나 부모의 무책임한 일이었습니까? 그 아이가 받을수 있는 수많은 복을요, 그는 상실해 버리고 살았다. 그는 아마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미소짖고요. 항상 그에게 잘했다고 얘기하거나 아니면 잘못해도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거나 이와같이,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무관심을 말하는 거죠.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게 될때,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양육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거나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범죄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요,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다 죄인이고 우리 모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미련한 것이 얽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얽혀진 미련한 것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얽혀진 것을 계속해서 끼고 그가 성장하고 10대가 되고 또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중년이 되고 노년까지 간다면 그와같은 미련하고 얽혀있는 그것이 그의 생애를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끌고 갈겁니다. 우리 잠깐 잠언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기에 참된 교육이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치라" 오늘의 교육은 지식의 교육입니다. 저희들 어릴때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학교에 가면 담임 선생님이 아침에 조회, 끝날때 종례, 그때 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우리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적어도 삶에 대해서 어떤것이 바른것이고 어떻게 하면 안되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듣기 싫었고요. 그 시간은 대단히 지루한 시간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조회와 종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미국에서는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절대로 그런것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학선생은 수핛을 가르치고 과학선생은 과학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들이 무슨일을 하든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건드리는 분이 있다면 교장 선생님 뿐입니다. 교장 선생님이 사방을 다니면서 문제가 있는 학생을 부르거나 그들에게 꾸중을 하거나 처벌을 하거나 그럴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선생님들은 전혀 관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계했다간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정 안에서 우리 자식들을 기르게 될때 양육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 말씀에 그렇게 말씀했습니까? 자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라. 자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에게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사람으로서요. 인간으로서, 한 인격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에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해서 인간관계는 무엇이고 또한 그들이 선과 악은 무엇이고 사실 우리 자녀들이 집안에서 태어나서 살게될때 그들이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들은 이미 교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틀별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부모들이 믿는 사람이라면 그 자식들은 대단히 특권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날때부터 엄마 아빠가 행하고 있는 일, 말하고 있는 대화내용, 그리고 그 대화내용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가정안에 분위기, 이 모든일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이라고 하는것을 반드시 알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치라고 할때,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들은요. 아이들이 제일먼저 행해야 될 일들은 구원받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한 아이가 구원받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구원받는것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기 전에 그들이 알아야 하는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구원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토양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게 될때 아이들은 곧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것은 말을하기전에 분위기 속에서 그들에게 피부로 전달하는 것이고 말을 하게될때는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 함으로 그들이 이제 더 나이가 들기전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교육입니다.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과학을 가르치고, 이렇게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고요. 이것은 훈련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떠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각처에 가서 복음을 증거해서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훈련이라고 하는것은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이라고 하는것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쳐 지키게 한다고 하는것은 그것은 더욱더 노력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많은 수고와 많은 노력이 있어야만 아이들을 가르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했을때 그것을 지적하고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실전할수 있도록 계속해서 훈련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하게 될떄 늙어서도 떠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세상에 한국을 가르켜서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인데 그들에게 엄청난 자원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어떤 자원입니까? 인적 자원입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인구가 있는데, 지하자원이나 다른 자원이 없지만 인적 자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가장 고귀한 자원은 인적 자원입니다. 한 사람을 훈련해서 한 사람을 가치있도록 만드는 과정은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실상 미국이나 여러 나라들이 이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수많은 교육비를 들이지 않고 다 배우고 난 다음에 그와같은 두뇌가 다른 나라로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나라에서 그 두뇌를 받아들이는 것, 돈 없이 투자하지않고 받아들인다라고도 말을 합니다. 어째든 인적 자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요. 대단히 값비싼 것인데요. 그냥 지식적인 인적자원, 기술적인 인적자원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을 아는사람, 이와같은 사람은 어디서 찾아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쓸모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사람이 있는가 찾아보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많아도 오늘 저희들이 조금전에 말씀을 나눈 것처럼 제자의 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더 적고, 더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사람은 더욱 더 적다고하는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와같이 하게될때 그는 가치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가치를 안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그에게 섭섭하게 한적이 없다. 이것은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저는 어릴때 어려가지 방종원씨가 쓴 글이나, 어릴때에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선물받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 책들 가운데 인도에 있는 한 아이가 나중에 커서 자기 아버지에게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왜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때려주지 않았어요?" 저는 어릴때 그 이야기를 읽을때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는 왜 때려달라고 이야기 했을까?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때려주지 않은것에 대해서 나중에 후회하고요. 왜 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느냐는 말이죠. 성경 말씀은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을 온전히 훈육을 한다. 또 가르친다. 마땅히 행할길을 가르치도록 한다고 말씀하고 있죠. 왜냐하면요, 잠언 22장 15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이것은 단순히 채찍만, 채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는요, 칭찬이 있고 또한 징꼐는 꾸중이 있습니다. 체벌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징계가 있고요. 부정적인 징계라고 기술적으로 말할수 있겠습니다. 징계라고 하는것은, 훈련이라고 하는것은 항상 꾸지람과 책망만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훈련이라고 하는것은 칭찬이 포함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게 될때 부모들의 칭찬이라고 하는것은 그것은 그들에게 대환영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대단히 고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잘못했을때에 부모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게 될때 말을 못한다 해도요. 그와같은 표정을 보고 그와같은 분위기를 보게될때 이것은 이렇게하면 안되겠구나하는 것을 아이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할때에는 엄마 아빠가 너무나 기뻐하는구나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알아듣기 전에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을 하게될때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게 될때 자신들이 미련한 것에 대해서 얽혀있다고 하는것을 이미 깨닫고 있고요. 그것에 대한 구원이 필요하다고 하는것을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통해서 말씀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모임에서 주일학교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 이전에 가정에서 복음의 말씀이 이와같은 형식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같이 전해지게 될때 주일학교는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일학교에만 의존하고 있고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해서 이와같은 사랑과 관심과 수고와 노동과 쫓아다니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려하지 않을때에, 그때 우리가 거둬들여야하는 수많은 슬픔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잠언은 어린 아이에게 미련한 것이 얽혀있기 때문에 징계가, 여기 채찍이라고 하는것은 채벌만이 아니라, 징계가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칭찬과 꾸중, 체벌을 포함한 꾸중, 그 모든것을 통해서 그 미련한 것을 쫒아낼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여기 이중 부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부정이라고 하는것은 대단히 강한 강조 입니다. 아이를 징계하라는 말을 대단히 강조하기 위해서 아이를 징계치 아니치 말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또 달리 이용해서 아이를 학대 했습니다. 그건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현대 성향은 교육적 성향은 아이들에게 체벌이라고 하는것은 야만적인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실행은 오늘날 편만합니다. 따라서 수많은 아이들은 부모들은 체벌하지 않습니다. 체벌이라고 하는것은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고요. 아이들에게 부모의 메세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메세지를 전해주되 그것은 아예 몸을 상하게 하는것이 아니고요. 피부에 메세지를 전해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체벌을하게 될때 체벌 이전에,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두려워하는것은 매를맞는 체벌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못했을때 잘못을 지적하고요. 왜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매가 필요하다면 왜 매를 맞아야하는 것에 대해서 매를 맞을 때까지, 잘못을 이야기하고 매를 맞을때까지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이 아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체벌 자체보다도요.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아이들을 교육한다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부모의 권위와 또한 부모의 성의와 부모의 사랑과 부모의 간섭과 부모의 관여함과 이 모든것에 대해서 아이들이 매를 맞아도 고맙게 생각한다. 또한 아이들이 매를 맞아도 두려움 가운데 그와같은 것을 달게 받을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것은 무엇입니까? 잘못을 지적하게 될때, 그들과 논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무엇이 잘못됬다고 하는것을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매를 들게될때까지 그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은 사실상 매를 맞게 될때 오히려 그 마음속에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체벌을 하게될때 아이들이 체벌하는 나를 미워하면 어떡할까 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는 아이들에게 합당한 길로, 훈련을 시키거나 마땅히 행할길로 인도할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체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체벌은 학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체벌은 부모의 사랑의 메세지 입니다. 또한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통해서 그들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사자 입니다. 아이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아이들을 선물로 주셨고 그 선물로 주신 아이를 부모에게 맏기셨습니다. 따라서 부모가 그 아이를 기르게 될때,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1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청지기 입니다. 하나님의 보화 입니다. 그 보화를 가르치고 또한 그 보화가 유용한 인물이 되어서 주님의 쓰임을 받고 나중에 복음 전도자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위ㅐ하게 펼치는 사람이 되면, 또한 그런 사람을 옆에서 돕는 배필이 되는 이와같은 사람들로 만들어주는 위대한 기회 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채찍을 때린다해도 그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채찍으로 때리면 그를 음부에서 구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 입니까? 우리는 징꼐가 없으면 구원도 받을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징계를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선악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수 없다. 첫째로 그들이 부모를 두려워 하거나 부모의 권위에 언제든 순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로 순종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때리면 오히려 그들을 음부에서 사망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그들을 구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채찍으로 학대하면 우리는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위대한 메세지가 무엇인지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지혜 안에서 행하게 될때 주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징계를 통해서 구원하실것이라는 것입니다. 징계 자체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을수 있도록, 기반을, 토양을 만들어 놓는다고 하는것을 우리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서는 마음속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증거되게 될때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겁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부모를 통해서 이제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사람들을 부르죠. 이것은 압살롬이 했던 일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 가서 왕이라고 선언하게 될때, 그를 따라간 수많은 사람들이 사기가 어떤것인지 알지 못하고 따라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할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사실상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전례가 얼마나 중요한가라고 하는것을 보게 됩니다. 좋은 전례가 있으면 그 전례를 통해서 그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악한 전례를 남겨 놓으면 그 악한 전례를 이제 전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의미없이, 또한 분명히 확신없이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유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의 유전이 있고요. 사도바울이 너희들이 내가 전해준 유전을 지켜서 칭찬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두가지 유전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생각이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계속해서 따라하게 될때 그것은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만들어 놓은것은 그것은 한번 만들어진것이지만 그것을 다른사람들이 계속해서 따라하면 그것이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인간의 유전, 장로의 유전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확립된 말씀앞에 순종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전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유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하나님의 유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립된 위대한 하나님의 패턴이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세대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어서 순종해야 하는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만잔을 제정하고 난 이후에 신실하고 신령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천년이 지나면서 이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것은 하나님의 유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와같은 유전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유전, 장로의 유전, 이것은 우리가 배격하는 것입니다. 이제 요압과 아비아달, 이 두사람, 한 사람은 군대장관이고요. 아비아달은 제사장입니다. 이 두사람을 불렀어요. 요압은 항상 다윗에게 도움을 주긴 하지만 자기 뜻대로 행하는 괘씸한 사람이었죠. 다윗은요, 일생을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마음속에 항상 고민 가운데 괘씸해 하면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저희가 만일 요압같이 주님을 섬긴다면 주님을 돕기는 돕지만 주님의 뜻에 대해서 순종을 하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에이젠다를 따라서요,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걸어간다면 요압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대단히 괘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구원받은 성도라 할찌라도 하나님은 참 괘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늘나라 간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불쾌감을 부인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요압과 같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분별하고 우리가 그대로 순종함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 우리 주님이 사실상 참된 다윗이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누굽니까?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 시작될때 하늘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기쁨을 드린 분이셨습니다. 왜? 아버지의 모든뜻이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압, 그런 사람입니다. 아비아달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비아달은 엘리의 후손으로서 그는 다윗이 어려울때, 고통 당할때 함께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해할수 없는 것이 다윗과 함께 그렇게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통과하고 또 다윗에게 많은 유익을 끼쳤던 사람, 다윗이 어려울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사장으로서 분별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이 위대한 사람이 어떻게 이와같은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제 아도니야가 행하는 일에 그는 가담했을까? 우리는 이와같은 역사를 보게될때 과거에 주님을 따라갔던 모든 일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요, 우리가 오늘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 서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순간에 가서 주님을 배반할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과 같이 만나를 거둘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서 만나를 일주일치 거둬서 오면 일주일을 절대로 먹을수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만나는 딱 하루치밖에, 그 이상이면 다 석어버리고 벌레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해주고 있는 만나의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만나를 거둔다고 하는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될때 우리가 매일과 같이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읽어야 하는가? 만나는 새벽에 내렸습니다. 어두울때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가서 거두었어요. 만나는 햇빛이 찌우면요, 다 사그러져 버렸어요. 그래서 아침에 가서 거두지 않으면 거둬올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요, 우리의 생각이 선명하고 우리의 기억력이 대단히 뚜렸하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대단히 생동감을 느끼는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부터 주님과 교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은 어느날 그는 길을 잘못 걸어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는 자기의 뜻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계산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상황을 따라서요. 계산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 때문에 계산해서 이리로 가면은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합니까?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사람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것이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로만 가는 것입니까? 아비아달은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언제나 기회주의적인 사람에 대해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가 손해보고 그가 잃어버리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고 하는것을 시회주의자적인 사람은 못깨닳는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겠죠. 여기 이제 요압과 아비아달, 이 두사람을 저희들이 생각할때요. 이 사람은 아도니야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그럴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도니야가 불렀겠지요. 그리고 그는 거기에 화답했겠죠. 우리는 어떤 사람을 내가 사귀느냐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편 기자는요, 주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나의 동료다라고 말씀했어요. 그런사람이 나의 친구인가? 아니면 반은 세상적이고 반은 하나님 말씀도 좀 하면서 그러면서 양다리 걸치고 걸어가는 사람과 내가 친구인가? 아니면 아예 세속적인 사람이 나의 친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친구인가? 그것은 내가 어떤사람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그런 바로미터가 아닙니까? 그래서요. 여기 요압과 아비아달이 어떤사람인가? 그가 지지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것을 보면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스포일된 아들, 아도니야를 지지했습니다. 왜 자녀들이 교육을, 마땅히 행할것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인도자가 될수 없습니다. 자기가 훈련을 안받았는데, 인도자는 다른사람을 훈련시키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훈련을 안받았는데 어떻게 다른사람을 훈련시키겠습니까? 그 사람이 왕이 되겠다고 하는 자체가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 자신이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야 같은 사람은 어떤것을 원하는가? 자기 주변의 많은 사람이 지지해주면 그것이 자기의 능력이요, 자기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값싼 생각이 아닙니까? 아도니야는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요, 모임의 지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어떤 기준을 요구하시는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분량 이상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요, 다윗이 왕이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훈련을 시켰습니까?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일을 그가 통과하도록 했습니까? 심지어는 사울 앞에서 죽일수도 있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테스트 하셨지요. 과연 다윗이 죽이는지 안 죽이는지를 보셨지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다윗은 대단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원천 권위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울과 같은 악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받은자라고 하는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신 대행권세 입니다. 그것을 쫓아내고 그를 거두고 하는것은 모두가 다 주님의 손에 달렸지 다윗의 손에 달린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할때 가장 고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 안에서 이와같이 대행권세에 대해서 또한 하나님의 원천권세에 대해서 대행권세는 원천권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한다고 하는것은 우리의 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세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때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제 아도니야는 그것과 역행하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자기의 뜻에 맞는 사람들을 불렀죠.
"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됨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당신은 다윗왕 앞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할 때에 나도 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리이다"(왕상 1:11-14).
여기 나단이 이제 개입합니다. 다윗의 생애 속에서 나단이 개입했던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얘기했을때, 그때 나단이 함께 있었죠. 그런데 나단도 왕이 그렇게 기뻐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나 그날밤에 하나님께서 나단과 대화하시게 될때 다윗은 그것을 지을수 없다고 이야기 한 내용을, 그는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다윗에게 전했죠. 첫째, 성전과 관련해서 나단은 다윗과 관련 있습니다. 둘째, 다윗은요.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암몬과의 전쟁이 일어났을때 그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죠. 그는 계속해서 잠자고 안락 가운데, 편한함 가운데 있다가 그는 잠에서 일어나서 밧세바를 범하죠.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그는 회개하지 아니하고 은폐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아를 죽이죠. 세월이 얼마동안 지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엄중히 책망하십니다. 비유를 베풀었죠. 다윗은 그 비유에서 마치 의로운 사람처럼 그 악한 사람 부자는 네배나 갚아야 된다고 얘기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네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의 아들 넷이 이제 죽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책망합니다. 다윗에게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이제 다윗은 나단앞에 엎드려서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이제 세번째, 다윗이 죽기 직전에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왕권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슬픈것은 다윗은 1절 말씀에서 보았죠. 그는 몸이 찼습니다. 몸이 너무나 쇠약했습니다. 그래서 아비삭이 와서 그를 도와야만 했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년이 되게 될때, 육체는 쇠약해 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노쇠하면서요. 겉사람은 후패하지요. 그런데 겉사람이 후패하기 때문에, 육체가 쇠약해지기 때문에 우리의 영도, 우리의 속 사람도 함께 연약해져서는 안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오히려 날로 새롭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그런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요, 백이십세가 되었을때 주님께로 갑니다. 그는 이 땅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날까지 그의 눈은 흐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눈이 또렸했고 그의 영적인 분별력도 또렸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간다해도 비록 겉사람은 후패한다해도 속사람은 절대로 후패해서는 안된다라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씁입니다. 갈렙은 어떻습니까?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갈렙은요, 85세가 되었을때, 거인을 상대로 해서 전쟁을 하게 될때, "나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와같은 힘을 주시고 계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이 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인을 상대로 할만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하신 약속의 땅을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떄문에 내가 얻어야 한다고 하는 분명한 확신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노년이 되어서도 그의 육체는 젊었을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영적인 활동에서 대단히 왕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은 노년이 되어서 그의 눈이 희미해졌습니다. 별미를 좋아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야곱에게 축복을 해야 하는데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그 집안에 문제가 그것으로 생기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가장으로서 세우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아내와 또 아내가 사랑하는 아들과 합작해서요, 거짓말을 해야하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는거죠. 노년이 되었을때, 영적인 분별력, 이것은 주님이 저희들을 보존해주시기를 바라고요. 우리가 주님앞에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과 긴밀히 대화하고 접촉하고 읽고 묵상하고 우리는 우리 삶을 그렇게해서 보존하고 가꿔가야 되겠습니다. 안나는 어떻습니까? 시므온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노령이 되었을때요.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우리 주님의 초림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잠자고 있을때에 이 사람들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이제는 주께서 이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메시아를 보고자 했는데 드디어 주님께서 이분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아기를 안고요. 메시아를 그가 봤다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노령의 안나,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사벳, 스가랴, 제사장 가정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시 92:12-15).
늙어도요, 빛이 청청합니다. 잎이 청청해요. 그리고 진액이 풍부합니다. 열매가 가득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그렇게 이야기 했고요. 늙어서 우리는 이제 후대에 하나님의 능력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연약,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연약이라고 하는것은 정욕과 야망과 그래서 시험에 빠질수 있는 가망성 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분별력 가운데 이와같은것을 막을수 있다면, 도와줄수 있다면 그리고 카운슬 할수있다면, 그리고 기도할수 있다면, 그리고 청년의 장점이 있습니다. 힘입니다. 에너지 입니다. 그리고 청년이 가지고 있는 이상주의 입니다. 청년은 이상주의 속에 살고 있고요. 중년은 현실주의 속에 살고 있고, 그런데 슬프게도 노년은 때로, 비관주의 속에 살고 있어요. 이 모든것 속에서 노년이 이제 저희들이 조금전에 읽은 것처럼 빛이 청청하고 진액이 풍성하고 그리고 열매가 가득한 삶을 삶으로 인해서 청년들에게 필요로하는 것들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 힘과 이상주의와 순수하려고 하는것, 그래서 청년들은 순수하죠. 그러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힘 그 자체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유익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청년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자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것은 아닙니다. 청년이 가지고 있는 이상주의나 기타 비전이나 이 모든것들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년이 가져다주는 장점을, 노년이, 주님이 주신 위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점이 장점으로 나타날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약점이 보완될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행실을 깨끗게 하리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리로다.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청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속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중년도 마찬가지고 노년도 하나님의 말씀속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력을 우리는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단은 이제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찾아와서요. 이제 귓띔을 해주죠. 도대체 왕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왕은 궁전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저 뒷방에 가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그는 그냥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게될때 무엇을 알수 있습니까? 우리는 인도자가 모임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이죠. 모임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고요. 그 문제가 무엇인지 판단할수 있고, 분별할수 있고, 그 문제 해결은 무엇인지 주님앞에 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다윗은 이와같은 일로 인해서 그는 노쇠했고 노쇠한 상태에서 이 일들을 처리할수 없을때, 다행인 것은 나단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같은 연약이 있을때, 이와같은 친구가 있는가, 우리에게 바른말을 해줄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 진실을 전해줄수 있는 사람이 내곁에 있을까, 라고 하는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절멍서부터 이와같은 진실한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면 모임 안에서 정말로 경건을 추구하는 성도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형제 자매들과 우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노년에 가서도, 또한 중년에 가서도, 다른 시대에 갔을때도 이와같은 도움을 우리는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모임의 거룩한 성도들과 또한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귀히 여기십시요. 또한 그들과 함께 사귀십시요. 주님 말씀 안에서 교제하십시요. 그리고 함께가게될때 이와같이 필요할때 도움을 받으세요. 그리고 필요할때 도움을 드리세요. 주님께서 우리 모임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이 위대한 소원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루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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