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복음말씀_바디매오 >

박이레 2021. 7. 25. 21:49

2019년 7월 22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월요일 / 정형모 형제님

< 복음말씀_바디매오 >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46-52).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읽은 말씀에 나온 주인공은 소경 바디메오이죠. 여리고 길가에 앉아서 매일과 같이 구걸하는 소경거지 입니다. 복음서 말씀안에 수많은 병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병자죠. 이 수많은 병자들을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고치셨는데 병자가 고침을 받는 과정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잘 그림과 같이 잘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은 소경, 어떤 사람은 마비된 사람, 어떤 사람은 중풍병자, 어떤 사람은 문둥병자, 수많은 종류의 환자들이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바디매오, 이 사람은 소경입니다. 그런데 소경이기에 흔히 거지가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소경인데도 혹간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볼수 있습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그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또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그래서 바디매오는 길에 앉아서 구걸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소경이었는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 모습을 볼때 참 오랜세월을 보낸듯합니다. 그가 만일 어릴때부터 소경이었다 해도 어릴때는 어쩌면 부모님이 그를 도와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청년이 되어서부터는 더욱 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지게 되었겠죠. 우리가 이 모습을 보게될때, 바디매오, 그는 소경 거지다. 비참한 모습이 두가지로 합쳐져 있다. 이중적인 비참함입니다. 소경, 그리고 가난, 이 두가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죄인인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비참한 상태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경이라고 하는것을 생각할때 볼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볼수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 칼라를 볼수 있다는 것은, 모든것을 볼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와같은 것을 처음부터 즐기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비참함,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 되었다고 하는것을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죄인이죠.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것이 무엇이냐 하는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어떤것을 우리가 즐길수 있습니까? 어떤것을 우리가 누릴수 있고, 어떤 행복을 우리가 구가할수 있는가 하는것을 사실상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죠. 이 소경이라고 하는 말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죄인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첫째, 자기가 얼마나 잃어버려져 있는 상태에 있는가, 라는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대해서 우리는 느낌조차 없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것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고 따라서 죄를 짓고 사는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삶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어떠한 심판하에 있는지, 어떠한 슬픔과, 그 죄로 인해서 어떠한 비극적인 결과를 갖고 있는지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소경을 보게 될때, 소경은 첫째로 자기 자신의 잃어버려진 상태를 보지 못하고 살고있다고 하는점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을때, 만약에 "내가 잃어버려진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그는 이제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사실은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또한 구원받지도 않죠. 이 소경은 또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가 얼마나 더러운가,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죄가 얼마나 엄청난 두려운 결과를 가지고 오는가, 하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와같은 비극속에서 살고 있고, 그런데 그 비극이 비극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주의적으로 살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모순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기주의 적인 것은, 거꾸로, 죄인들은 이기주의적인 삶을 사는것은 상당히 효과있는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주의적이라야 나를 사랑하고 나의 유익을 구할수 있고, 나를 보호할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슬픈것인가, 그것이 얼마나 이 세상을 살게될때, 수많은 사람과 함께 살게될때, 엄청난 불행을 가지고 오는가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모습의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회 생활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사람과 함께 사는데, 이기주의적인 삶이라고 하는것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슬픔 삶이라고 하는것을 영적인 소경은, 영적인 소경은 모르고 있다. 죄인은요, 영적인 소경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경쟁, 시기, 미움, 이런 모든것들이 다 죄인데, 그 죄가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지, 죄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당연시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첫째, 영적인 소경은 죄인인데, 그 죄인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서 멀리 떠나가 있는 일어버려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죄가 가지고 있는 더러움과 죄가 안고 있는 비참함과 슬픔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살고 있다. 여러분께서요, 돼지가 살고있는데 가서, 꿀꿀거리는 돼지가 거기에 똥을 싸고, 또 거기서 밥도 먹고, 거기서 뒹굴고, 거기서 잠도 자고, 그 더러운 냄새 속에서 호흡을 하고 이와같은 것을 돼지 우리에 우리가 가게 될때 정상적인 인간은 돼지우리를 가게될때, 대단히 불쾌합니다. 그리고 거기가서 살라고 하면 절대로 우리는 살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물론, 농업이 발달되서, 축산이 발달되서 돼지를 다른 방식으로 기르는 곳도 있어요. 그러나 전통적인 돼지우리는 그렇습니다. 그 돼지우리를 생각하게 될때, 돼지는 거기서 나와서 다른데에 산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될때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속한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인가? 정결하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이 모든것이 무엇인지를 그때 처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일때, 우리가 잃어버려진 상태, 알지 못하고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경 죄인은, 죄로 인해서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것이 전부인줄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무엇이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다. 무지 가운데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소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 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죄 가운데서 죽는다면, 죄 가운데서 심판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꼐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영적인 소경은,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다. 따라서 죄인은 희희낙락하며 살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5분후에 10분후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개미는 바로 앞에 있는 불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 앞에 절벽이 있는데, 기차가 막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춤추고 희희낙락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교제하고 노래하고, 무엇이든지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 때문에 떨어질때까지 전혀 모르고 기차는 정상적으로 달려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그것은 장차 임할 심판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이 인생을 하나님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깨닳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났을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의 이 위대한, 고귀한 기회에 사실상 우리가 구원받을수 있는 시간이다. 그 말입니다. 인생은 구원받을수 있는 시간입니다. 구원받을수 있는 기회다 그말입니다. 인생, 어떤 사람은 70, 어떤 사람은 80, 어떤 사람은 너무나 짧게도 다섯살도 안되서 죽었습니다. 이 다양한 인간의 삶의, 서로다른 기간,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다 구원받을수 있는 기회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회를 인간이 사용하기를 원하신다.영적인 소경,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가 보지 못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본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영적인 소경,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볼수가 없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은 욕입니다. 이 세상에서요, 거룩한 것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욕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살아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멸시하고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여기는 이와같은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에서 ㅇ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주신다. 그분의 보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모든 죄에서 우리를 용서 하신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아름다움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분이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전에 언약을 맺기를 인간이 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그 보혈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로부터 이 땅까지 허리를 굽히신, 낮아지심, 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 베들레헴의 탄생,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 위대함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본 뜻과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열정적인 사랑, 그것을 죄인은 볼수 없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지만,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인지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찾아 오셨는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을 받으셨는지, 그것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셨는지, 면류관을, 가시 면류관을 쓰셨는지, 그것을 저는 볼수 없었습니다. 만약 구원받게 될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영혼이 그 아름다움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저희들은 바디매오, 이 세상에 적지 않은 숫자의 소경이 있었겠지만 여기 바디매오는 소경으로부터 눈뜨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날이 있었다. 바디매오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구걸하게 될때, 바디매오는 어떤 삶을 살았어요? 그가 자기 자신은 소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죄인은 자기가 영적인 소경인것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기가 소경이라고 하는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속 깇이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그와같은 처지로부터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라는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경이라는 것을 깨닳았을때 얼마나 좌절했을까요? 그는 얼마나 주변의 사람들이, 그가 볼수 없죠. 그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는 말하는것, 이야기 하는것을 들었을까요. 그를 거지 취급했을때, 그는 그런 이야기를 적지않게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일상적인 생활이었고 그와같은 삶 속에서 그는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었을까? 누구에게 그것을 호소 했으며, 누가 그것에 위로를 주었을까? 누가 감히 그것을 위로할수 있을까? 그는 매일과 같지 소경으로서, 거지로서, 거지, 그것은 대단히 불편합니다. 맛있는것을 먹을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 받습니다. 모든 불편함을 몸 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제 어디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리고에서 그는 밖으로 나와서 항상 앉아있는 그 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거기까지 왔는지, 더듬어서 왔는지, 거기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루종일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일도 할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할수 있는, 자기 스스로 일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해서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그와같은 특권을 누릴수 없는 거지였다. 자기가 소경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거지로서 비참하게, 가난하게 사는 그와같은 삶, 그리고 멸시받는 삶을 살게 될때, 그는 얼마나 좌절되고, 그의 생애를 얼마나 저주 했을까? 그는 그와같은 삶을 살다가 이제 매일과 같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소리는 들었을 것입니다. 욕하는 소리, 저주하는 소리, 멸시하는 소리도 들었을거고,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라는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사람이 중풍병자를 고쳤다" 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사람이 문둥병자도 고쳤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절뚝발이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렸다. 귀신들린 사람도 고쳤다는 소문을 그는 종종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도대체 어떤분인가? 그는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는요, 우리 눈뜨고 사는 사람처럼, 그는 생각하다가도, 다른 무슨 사건이 있으면, 거기에 몰두를 하거나 사람 사람과 이야기 하거나 활동을 하거나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던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루종일 그저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자리를 펴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멸시와 저주와 조롱하는 소리, 참 잔인한 사람들이죠. 가난한 사람을 지나가다가 바라보고 욕을 하거나, 생각없이 그러고 가요. 그러나 그 사람은 가슴속 깊이 고통 가운데 그냥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분께서 눈 먼사람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자만이 아닙니다. 또한 팔, 마비된 사람을 고쳤다. 중풍병자를 고쳤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은 자기와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가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분께서, 예수라는 분께서 눈먼 사람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때, 그는 그 마음속에 놀라운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바디매오 마음속에 놀라운 음악과 같은 이야기 였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죄인이 비참한 것이고, 이 죄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것을 마음속에 느끼게 될때, 그 두려움과 그 공포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할때, 우리는 이제 거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존 뉴턴이 지은 노래가 있지요. 우리나라 말로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 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이 찬송가 2절에요, 우리나라 가사는 정확히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데, 제 2절은 이런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두렵게 만든것은 은혜고, 나로 하여금 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 시켜준 것도 은혜다' 똑같은 은혜인데, 첫째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왜 두려움을 주는가?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는 먼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인한 두려움, 심판으로 인한 두려움, 죄가 가져오는 모든 비참함과 그리고 죽음과 심판과 이것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하는것은 은혜 입니다. 존 뉴턴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는 노예상이었죠. 그는 잔인한 사람이었죠. 그는 비열한 사람이었지요. 노예들을 잡아다가 파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와같은 사람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인간을 사서 인간에게 돈을 주고 팔고, 그리고 배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될때 그 노예들에게 학대하고 성폭행하고 그리고 그들을 물건 취급하고 그와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었어요. 그가 처음으로 대서양에서 폭풍 가운데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이제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생각하게 될때, 은혜는 그의 마음으로 처음으로 그를 두렵게 느끼게 됬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오는 이와같은 잔인한 사람이, 그 사람이 처음으로 두려워졌습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심판과 또한 죄로 인한 죽음과 여기에 대해서 처음으로 두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두려움으로 해방시켜 주신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 2절의 노래가사 입니다. 여기 바디매오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그는 그냥 햇볕이 따스하게 쏘이게 될때, 그는 땅바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소경은 볼수 없기 때문에 대단히 귀가 밝지요. 그래서 조그만 소리도 다 들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다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그날로부터 그는 마음속에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이 들려졌을때,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소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일이 있었나보다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소경에게는 그 간단한것 같은 이야기가 대단히 그의 생애에 영혼을 전율시키는 소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이고,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갈수밖에 없는 것을 깨닫는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은혜의 구원은, 이 죄로부터 내가 구원받을수 있다는 그와같은 메세지는 나의 귀에 음악과 같이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처음으로 죄인라는 이 염연한 현실을 깨닫게 될때 우리는 주님앞에 나올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디매오는 어느날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소경이 눈을 뜬다. 귀머거리가 귀가 열린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입니다. 그는 언제 그와같은 것을 알게 되었는지,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는 어쩌면 귀동냥으로 그와같은 내용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지나가는 어떤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다라는 얘기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과 같이 메시아께서 오시면 소경의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한다고 하는 말씀을 그가 들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때 그가 외친 말씀에서 알수 있습니다. 여기 소경이 앉아있습니다. 어느날, 세월이 오래 흘렀어요. 처음으로 예수님이라는 분의 이름을 들었을때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종류의 환자들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어느날 바로 그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부터 그는 매일과 같이 그와같은 위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는 살았습니다. "내가 만일 내 생애에 단 한번만이라도 예수를 만날수 있다면, 그 예수님을 내가 만날수 있다면, 내가 눈이 멀어서 볼수가 없고, 그저 사람들이 지나가게 될때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인데 만일 예수님을 내가 내 생애속에 만날수 있다면, 나는 그분앞에 가서 엎드리리라. 나는 그분앞에 가서 호소 하리라. 나는 그분앞에 가서 내 상태에 대해서 그분 앞에 엎드려 간구할 것이다." 그는 그런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도 변변치 먹지 못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적도 없는 이 사람이, 거지로서, 소경으로서, 그냥 똑같은 자리에 주저 앉아서 하루종일 세월을 보내면서 그와같은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날이 저무는 것도 그는 알수 없고, 해가 뜨는것을 그는 알수가 없지만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아니면 그가 막대기를 짚고 자기 집까지 갔다가 다시 또 해가 뜨면 그는 뜨는해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암흑속에서 그는 똑같은 자리에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성경에는 그런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볼때,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인내 가운데 기다렸을까? 그것이 그에게 위대한 소망이었는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속에 이와같은 소망이 있습니까? 죄인으로서 죄의 결과가 죄의 말로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만나 내가 준비를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될때 "나는 정말로 구원받을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가 다 그런생각을 하기 시작한 날이 있습니다. 그날로부터 시작해서 어느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가운데 구원받게 되는데, 이 사람은요. 그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사람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이것 참 놀라운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바디매오가 모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와같이 절박한 사람들, 이와같이 마음속에 갈구하는사람, 그 사람에게 우리 주님게서 어느날 찾아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리고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통과해서요, 바로 그 사람이 앉아있는 바로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내 마음속에 찾아오는 날이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때 바로 그 주님께서 저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죄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원받기까지 1년 반이 걸렸습니다. 1년 반동안 대단히 두려운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날수 없는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그리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에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때 내 마음속에 압도하고 있는 공포, 죄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해결해야 되는지 알수 없는 그와같은 1년 반이 지나는 동안에 내 마음속을 억누르고 있었던, 하루도 빠짐없이 억누르고 있었던, 그와같은 나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이날 바디매오 앞으로 주님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갔지요. 웅성웅성하는 소리, 많은 소리, 그런 분위기를 바디매오는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죠. 그는 보지 못하지만 그는 무슨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지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통해서 느끼고 있었어요. 그때, 절호의 찬스다. 내가 내 생애 동안에 단 한번만이라고 예수님을 만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 그는 드디어 그 기회를 포착 했어요. 그런데 기회를 포착하려고 할때, 마귀는 절대로 우리가 기회를 포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막 10:46-47).

이 소식을 들었을때, 그는 아직 눈뜨지 않았어요.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 희열이 그의 마음속에서 전율했을까? 아무도 그것을 몰랐었죠.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라는 분은 소경의 눈도 뜨게 할수 있었다라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부터, 그 마음속에는 하루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애에 꼭 한번만이라도 이분을 만날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이날까지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통과하고 계시다. 예수님께서 오늘 통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통과하고 계실때 내가 주님앞에 나와야 합니다. 여기 주님께서 통과하실때 그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인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그동안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그는 알고 있었어요. 어쩌면 그는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그분이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고, 특히 소경의 눈을 뜨게 할수 있는 그 일을 한다면, 그분이 누구냐는것을 어떤 사람들에게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 그분에 관한 이 구약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원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또한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나는 잘못했고,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모두가 옳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구원 안받는 사람은 "내가 잘못한게 뭐가 있나? 잘못한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하나님이 잘못하고, 하나님은 없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구원 안받은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사람은 처음으로 이제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죄인이다. 하나님은 옳으신 분이다. 의로운 분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로, 그것만이 그가 예수님을 만날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 것,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꾸짖었습니다. 주님앞에 나가려면 많은 사람이 꾸짖거나, 많은 사람이 멸시하거나, 많은 사람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이제 정신병자라고 이야기 하거나 따돌리거나 또는 비난하거나 수많은 그와같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친구들이 뭐라고 할까봐 구원을 못받습니까? 가족들이 뭐라고 할까봐 구원을 못받습니다. 나의 생애, 나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것으로 구원을 못받는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왕왕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라고 이야기할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더욱 큰소리려 외쳤지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바디매오가 그동안에 매일과 같이 마음 속에서 '내 생애에 단 한번만이라도 이분을 만날수 있다면' 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 순간이 왔을때 그는 '절대로 나는 이 순간을 놓칠수 없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우리 마음속에 이와같은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구원 받습니다. 이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요" 예수님께서 말씀 했어요. "저를 부르라." 사람들은 "잠잠하라." 사람들은 방해꾼이죠. 예수님은 이 사람, 이와같이 거지같은 사람이, 소경이 무슨 자격으로 예수님 앞에 오겠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이런사람을 만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은 주님만날 자격이 없고 자기야 말로 주님 가까이 할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 그가 외쳤을때, 그를 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 입니까? 위대한 은혜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실상 주님이 우리를 부르세요. 이 바디매오는 주님의 부름을 사실상 이미 받고 있었어요. 드디어 주님을 만났을때, 주님께서 뭐라고 얘기 했어요? "저를 부르라" "저희가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우리 주님의 말씀의 권위 입니다. 그때까지는 욕하고 방해하고 이랬는데, 주님께서 "부르라" 주님의 말씀의 권위 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그를 주님 앞으로 이끌어 와야만 했습니다. 그때 소경이 어떻게 했어요? 겉옷을 벗어서 내던져 버렸어요. 겉옷은요, 그 당시 재산 1호 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버렸어요. 물론 그 겉옷은 얼마나 더러운 겉옷이었겠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자주 빨래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만이 자기를 추위에서 보호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예요. 그러나 이 재산 1호를 다 갔다 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앞에 나가기 위해서, 주님앞에 나가는 것 이상으로,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가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죠. 그는 겉옷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세속의 옷, 자기 생각의 옷, 또 이기적인 생각의 옷, 그리고 죄악의 옷이 있습니다. 그것을 버릴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바디매오는 그것을 버렸어요. 그리고 주님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네게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 주님께서는 바디매오가 무엇을 원하시는 알고 계세요. 주님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찾아나가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다시한번 물었어요. 그는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하고 깔끔하고 분명하게 말씀했어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딴거 없어요. "선생님 나에게 재산 한뭉치도 주셔서 내가 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시요." 그거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나올때 딴 생각을 하고 나옵니다. 또 예수님은 필요없다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그렇게 오래 기다렸어요. 예수님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왔을때, 그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놓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주님앞에 나가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생각했던 것을 정직하게 그대로 이야기 했어요. "보기를 원합니다." 볼수 없는 영적인 소경은 죄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것은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죄의 더러움, 그리고 죄의 무서움,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려진 상태, 이것을 보게될때, 그리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될때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사, 바로 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사랑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랑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고 보좌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그 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첫째, 믿음 이전에요, 그는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회개일까? 그는 소경의 비참함, 소경이 가난도 가져왔고, 볼수 없는 비참함과 또한 슬픔을 비극을 가져 왔는데 그는 거기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했다. 이것이 회개 입니다. 죄인으로부터, 죄의 삶으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는것,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나의 모든죄를 사하신 예수님,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나를 의롭다 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나는 믿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게 될때 나는 구원받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예수님의 은밀한 제자였어요.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내 생애 한번이라도 그분을 만났으면' 하는 그 마음속에 소원이 있었어요. 드디어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었어요. 구원받았어요. 그는 이제 삼라만상, 찬란한 총천연색, 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칼라로 모든것을 다 볼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볼수 있엇던 것은 그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여기를 지나가고 계세요.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하는것, 그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구원받을수 있는 길을 바로 이분께서 마련하셨다. 그분께서 피흘려 돌아가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세요. 이 예수님을 믿는사람, 구원받습니다. 또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오시는것에 대해서 소망을 삼고 우리가 살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모든삶의 목적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삶의 한걸음 한걸음에서 나는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드릴수 있는지, 나는 마음속에 가졌던 모든 구원받고자 하는 그와같은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 난 이후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따라갔어요. 왜냐하면 그는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