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복음_네가 낫고자 하느냐 >

박이레 2021. 7. 25. 21:50

2019년 7월 24일 수요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 정형모 형제님

< 복음_네가 낫고자 하느냐 >

이번시간 요한복음 5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1-9).

복음서에 수많은 병인들이 우리 주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해서 낫게 된 모습들은 영적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가 라고 하는 것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살펴보는 말씀은 이제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었던, 38년이나 고통 가운데 있었던 병자, 그가 나은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제일 첫번째, 때는 언젠가 라는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유대인의 명절" 입니다. 이것은 이 당시에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잘 반영해 주고 있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하는것은 원래 없습니다. 여호와의 절기죠. 여호와의 절기인데, 여호와의 절기를 이 사람들은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요. 인간의 중심으로 되 있는 모습, 이것은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이제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습니다. 베데스라라는 말은 '자비'라는 뜻이죠. 그 못 근처에 행각기둥 다섯이 있고 거기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다. 이 못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 자비의 못이라는 말이죠. 자비의 못, 자비는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자비를 그런데 어디서 얻을까? 라고 하는 문제죠. 거기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땅에 오셨을때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이스라엘에 있었을까 하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 마름에서 잘 볼수 있습니다. 이 많은 병자가 모여 있다. 또, 주님을 따라올때 한두 사람이 아니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 귀신이 역사하고요, 인간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그들 가운데 거의 사라져 있다고 하는 현실을 저희들이 보게 됩니다. 이 많은 병자, 물론 그것은 우리 죄인들의 모습을 잘 말씀해주고 있죠. 여기 예를 들어서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 영적으로 볼수 없는사람, 그제 저희들은 소경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죄를 볼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주님도 볼수 없고 자신의 죄인된 비참한 상태, 그리고 위험한 상태, 두려운 상태를 보고있지 못하다. 이것은 참 커다란 문제죠. 또 하나는 절뚝발이, 섬길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섬길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섬겨드릴수 없다. 또 혈기마른사람, 움직일수 없습니다. 자기몸도 가눌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어요? 죄인은 이와같은 모습니다. 죄인이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받으시지 않는다. 여기 병자의 모습들, 그런데 적은 병자가 아니라 많은 병자가 이 베데스다 못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물의 동함이죠. 언제 어디서 이런 말씀이 시작됬는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전통입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이 전통이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전통이 우리를 속이는 것중에 하나는요, 그냥 전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때부터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이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전통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수 있습니다. 이 전통, 그 전통은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사람도 그렇게 믿고있고 저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꾸 더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병자는 그 전통을 믿고 여기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은 근거없는 기다림이고 하염없는 기다림이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아무런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기다림이다 라고 하는것입니다. 여기 이제 물의 동함을 기다리는데, 여기 이야기는 천사가 가끔, 가끔이라는 말은, 이 가끔이라는 말이 어떤때는 참 황당합니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 묻지요. "여기서 OOO가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 "이리가서 길이 있는데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마일인지를 말을 안해줘요. 그냥 가면 된다고 하는데 제 생각과 그분의 생각이 서로 다르면요, '여기 신호등이 하나 있으니까 2-3분이면 되겠지.' 해요. 실제 가보면 한 20-30분은 가야 신호등이 나올수 있어요. 우리의 기다림, 이들이 천사가 내려오는것을 기다리는데, 가끔이라고 하는것은 얼마나 자주인지 몰라요.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동하지 않으면 천사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안동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도없고 끝도 없는 기다림, 그렇다고 천사가 과연 내려올까? 때로는요. 바람이 살짝 불어서 수면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으면 천사가 왔다고 생각할수 있죠. 얼마나 많은 이와같은 생각들, 이와같은 가설들, 이와같은 전통들,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혹하게 하는가, 하는 거죠. 오늘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 진실한 구원, 그 구원의 메세지 이외에 다른 복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길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갈수 있고, 또 놀라운 나라에 들어갈수 있고, 이런 수많은 이론과 이런 수많은 메세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메세지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메세지를 선호하고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다 따라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는지 알수 없지만 그것을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 온 일생을 바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실이 아닌것을 믿고 생애 전체를 바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근거가 없는데, 사실이 아닌데, 여기 천사가 내려오기를 여기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동하면 그것도 제일먼저 들어가야 구원받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가야 이제 병이 낫습니다. 종교는 이런 것이죠. 여기 수많은 사람들은 움직일수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제일먼저 들어가겠습니까? 여기서 아무리 오래 기다려본들, 혹 천사가 내려온다해도, 그래서 물이 동한다 해도, 이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가는데, 움직일수 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데, 움직일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요, 제일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고요.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 "누구든지" 여기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무력하다고 하나님은 알고 계신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고, 죄인은 아무것도 할수없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의 메세지는, 누구든지, 아무런 능력이 없어도, 행위를 따라서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나, 찬란한 사람이나 이런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수 없다고 하는것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는 무력하고 나는 내 죄를, 내가 살수없고, 내가 나를 도울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라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든지. 여기 이제 먼저 들어가는 사람, 참, 이런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베데스다 연못에는 수많은 사람이 움집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을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그것은 모르지만 하여간 낫기를 원했습니다. 여기 모였습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비참함, 이와같은 인간의 소망없음, 이런 것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이날 주님이 어느 안식일날 여기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찾아오셨어요. 우리는 복음서 말씀에서 이와같이 비슷한 케이스를 볼때마다 가장 놀라운, 사건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 오시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온다고 그렇게 철썩같이 믿고 잇지만, 그래서 물이 동하면 제일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나을수 있다고 하는 한가닥의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부여잡고 거기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르고 어떤 사람이 나았는지 알수 없고 그들은 막연히 그와같은 소망 가운데, 근거없는 소망 가운데, 그들은 그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만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상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전통을 의지하고, 아니면 예식을 의지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사가 내려오고, 제일먼저 내려가고, 이와같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바, 그런 생각들은 그것은 우리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 오셨을때, 아무도 주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주님을 보지 않았어요.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천사가 내려오기만 기다리고 있고, 그들은 수면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일히 한사람 한사람 물어보면 "아, 인생은 반드시 죽지요. 죽음은 참 슬픈 일이고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 동의 합니다.거기에 대해서 "나는 50년만 살고 죽는것, 참으로 행복합니다."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나서, 그들의 영혼은 만물의 영장이죠. 인간이 생각하는 최대한의 생각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죠. 그래서 인생이 다른 짐승보다 동물보다 낫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는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영원히 살수있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와같은 위대한 은혜라고 하는것은 인간은 알 길이 없고요. 그냥 막연한 그와같은 소망, 전도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떠난 타락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가려진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영원히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속히 빨리 죽어야지 라는 이야기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고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얻을수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다만, 병에서 낫기를 원하고 있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주님께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거기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 수많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지요?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 그 외에도 수많은 종류이 다양한 종류의 병자가 있었는데, 성령님께서 이 사건에 대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어요. 38년된 병자, 이 사람은 수많은 다른 병자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이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기 전에 저와 모두가 다 베데스다 못에 와서 누워있는, 가련한 병자와 같이, 소망없이 살았습니다. 영원히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가련한 소망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냥 살다 죽으면 할수없고, 어떻게 할수 있는가? 다른일은 없다. 소망 없는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놀라운일은 38년된 병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냥 38년된 병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38년된 병자를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찾아오셨다.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다 이말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집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하려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이렇게 유명한 말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그냥 위대한 말씀으로 받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해서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항상 인류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빠져 있어요. 개인적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셨어요. 이 병자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신것이, 33년, 30년 동안 나사렛에서 조용히 사셨고, 3년동안 공생애를 사셨다면 33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요, 38년 병자로 있었어요. 그렇다면 38년 전에 태어난것이 아니고요. 아마 그 전에 태어난 사람이 어느날 병에 걸렸는지, 그것은 알수 없습니다. 다섯살때 병에 걸렸다면 지금 마흔세살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약 30년 조금 더 넘었어요. 그저 주님께서 열두살때 예루살렘 성전에 오셨을때, 바로 이 근처에 오셨을때, 이 병자는 거기 있었어요. 주님 열두살때, 예루살렘에 오셨을때 그는 거기 병자로 거기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모든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죠. 그런데 여기 수많은 병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왜 이 사람에게 찾아오셨을까?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우리는 설명할수 없습니다. 그분의 주권적인 선택이고 그분의 뜻 가운데 오셨어요.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왜 이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나보다 더 많은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나보다 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많고, 더 불쌍하고, 또 도를 닦고, 그런 더 많은 일들을 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왜 나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는지 나는 알수 없습니다. 이 38년된 병자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이 38년된 병자, 주님께서 이르셨을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병자를 가만히 생각해 볼때, 이 병자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안고있는 잘못된 생각, 관념, 그리고 잘못된 오류,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자기의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흔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 이 사람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38년된 병자였습니다. 거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도 계속 아플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38년동안, 그렇게 장구한 세월을 고통 가운데 있었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익숙해 있어서요. 그와같은 사안이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스러운 상황이 자기 생애의 전부다라는 생각 가운데 벗어날수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류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지금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지만 나는 오늘 주님을 만날수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것이 잘못됬다고 하는것을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되는 위대한 은혜를 우리가 얻게되죠.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 했어요. 과거, 그것 때문에 현재도 계속 그럴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마귀는요, 과거에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계속 살기를 마귀는 바라고 있고, 마귀는 전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마귀의 그와같은 생각속에 살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것은 우리의 이와같은 잘못된 생각을 깨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과거, 그것 때문에 우리는 현재가 똑같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거에 불행한 것이 있다면 내가만일 주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바껴질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두번째요, 이 사람은요. 문제만 보았지, 잠재력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 입니까? 이 사람은 38년된 병자예요. 자기는 병자, 이 병을 나는 여태까지 고칠수가 없다. 일념으로 그것을 고칠수가 없다. 어떤 의사도 나를 고칠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베데스다 못 옆에 온 겁니다. 만일 그가 의사를 만나서 고칠수 있었다면 의사를 찾아가서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았겠죠. 그러나 그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 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치병이다. 그래서 나는 헤어날수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문제속에 빠져 있어요. 베데스다 못가에 와있지만 문제 속에서 벗어날수 없는 그런 상태속에 있었다. 그는 잠재력을 보지 못했어요. 어떤 잠재력입니까? 여기 주님이 찾아오셨을때요. 놀라운 잠재력을 그는 이제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뭐라고 질문했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떻게 이렇게 말할수 있지요?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요, 사람은 말할수 없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때,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아니면 사기꾼이 아니면 이렇게 말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값을 내가 다 갚았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추친해도 도중에 여러가지 어려움 때문에 도중에 하차 하거나 포기하거나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거의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다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확실하게 다 이루었다고 말씀했어요. 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가운데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위대한 사랑 가운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이와같은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분이 오셨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생각을 못하고 천사가 언제 내려오는가, 그리고 물이 언제 흔들릴까, 이와같이 눈이 터지게 거기만 쳐다보고 있어요. 주님이 오셨는데도 거기만 쳐다보고 있어요. 문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 쳐다보면서도요, 움직인다해도 '아마 나는 못갈거야. 왜냐하면 딴 사람이 먼저 갈거야.' 그런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사람이 문제에 폭 빠져 있을때, 거기에 수많은 사람이 똑같습니다. 모두가 다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셨을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런 말을 할수 있습니까? 이렇게 불치병인데, 이렇게 고칠수 없는 병을 안고있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만약에 내가 고칠수 없다면, "네가 낫고나 하느냐?" 말하지 않겠죠. 그런데 "고쳐주십시요." 라고 했는데 고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할때 이 말씀에 대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 주님은 위대한 능력과 잠재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요, 곧 이 사람을 고쳤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때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때 우리의 죄로부터 해방 받을수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이 또 한가지 오류, 그것은 뭘까? 이사람은요, 자기가 가진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것만 보고있다. 이 사람은요,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한것, 건강 못가지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건강, 그러한 육체, 못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불행합니다. 그래서 연약합니다. 그래서 병자로서 오랫동안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뭘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 사람은요, 예수님이 안왔으면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셨을때요, "내가 낫고자 합니다." 하는 믿음을 행사했습니다. 이 사람은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믿음도 행사할수 없었어요. 가진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가진게 있을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만약 만난다면 나는 전에 그런것이 없었는데 그분 때문에 내가 믿음을 행사할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전에 믿음이 없었는데 우리는 가진것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났을때 그분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그 말씀 때문에 내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어요. 나는 그분을 믿었어요. 이 사람은 그렇게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히 낫고자 하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낫기 위해서 왔죠. 왜 예수님께서 그런것을 물어보시냐?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환자들을 만났을때, 병인들을 만났을때, 이런 질문을 주님께서는 자주 하셨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낫기를 원한다고 해도 주님은 그 사람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어요. 우리 주님은 그것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우리 사람이,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까?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메시아로서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요, 가진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날 베데스다 못에 찾아오셨을때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38년된 병자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기까지 그 사람은요, 연못만 보고 있었습니다. 딴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은 이 사람 뿐만 아니라 거기있는 모든 병인들이요, 예수님이 오셨을때, 예수님은 그저 한갖 수많은 사람들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중에 하나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지않고 그들은 천사를 기다리고 있었고 연못에 물이 동하는 것만 하염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자가, 행복하지 못하죠, 연약합니다. 거기 앉아있고 누워있고 누워서도 호수나 바라보고 있다. 하루종일,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는데 어느 하루가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해서, 이 사람은 38년동안, 만일 병에 걸린 다음부터 5년 후에 여기 왔다면, 33년동안 베데스다 못 옆에서 거기만 바라보고 살고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바로 이와같은 사람, 죄인은 이와같은 사람입니다. 죄인들이 기대하는것은 현실적이 아니고 이루어질수 없는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요, 쾌락이 인생의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고 살면서 거기에서 어떤 답을 얻지 못하고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제 뭔가를 추구하고 난후에 더욱더 허탈감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구하고요, 어떤 사람은 명예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재력을 구하고 수많은 그와같이 추구하고 추구하고 추구하다가 결국은 다 이루지 못하고 또 이뤘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룬 다음에 그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카 드림을 통해서 외국에 와서 젊었을때, 상당한 오랜 기간동안 인생의 모든 힘을 다해서 그리고 자기 성공을 위해서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 또 밤을 세워서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노력해서 자기가 원하는, 그래도 나 나름대로 원했던 목표를 달성하려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요, 목표를 달성하고 난 다음에 허탈감에 빠집니다. 그 허탈감은 말로할수 없습니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낸 지난 40년 동안의 지난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하는 성공하고요, 뭔가 이루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허탈감은 말로 할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하신 그 분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정해놓은 어떤 목표를 놓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해도 거기에는 허탈감이 있다. 거기에는 만족이 없다. 거기에는 마음속에 정말로 나 자신과의 성공했는가하는 회의심 속에 사람들은 빠지게 되고 우울감속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왜? 왜냐하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여기 베데스다못에 와서 38년된 병자를 지금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바로 이분은 조금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 그 보혈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 보혈로 인해서 구원받을수 있도록, 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길로 가실것입니다. 그것을 눈앞에 두신 주님께서요, 십자가 가시기 전에, 여기 오셨습니다. 열두살때 예루살렘에 왔을때 여전히 이 사람도 고통 가운데, 병인으로서 고통 가운데 있었던 바로 그 사람, 그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때로부터 적어도 18년이 지나고 난 후에 우리 주님께서 여기에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나십니다. 이것을 참으로 기이하죠.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어떤 사람을 내가 만난다고 하는것은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하죠.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같이 많은 사람들인데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만났을까? 라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우연인지 우리는 그것을 알수 없습니다만 만납니다. 만나게 되는데,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는데 그런 만남이 아니고요.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알고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람의 필요를 알고 찾아오셨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낮고자 하느냐?" 우리 주님은 낫게 하실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속임수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지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사람의 대답을 보십시요. 이사람은 지금 딴 얘기하고 있어요. "주여 물이 동할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하니까요 낫고자 합니다 그런말이 아니고 사실 낫고자 합니다라는 말이기도 하겠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려 왔고 그렇게 오래 기다려 왔는데 물이 조금 움직이면 사람들이 확 가는데 나는 갈수가 없는데 나를 인도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이사람의 커타란 고민이었어요. 이사람의 생각은요, 물이 동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사가 내려오면 그리고 많은 사람을 제치고 자기가 제일먼저 못 안으로 들어갈수 있다면 구원받을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얼마나 슬픈 말입니까? 이것은 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 입니다. 이 사람 이야기의 톤을 우리가 보면 그 사람은 불신 속에서 지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이고 가능성을 이야기할 뿐이지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수 없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제일먼저 그곳에 들어갈수 없다. 그러면 왜 거기와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많은 세월을 왜 거기서 허비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와같은 종교를 의지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분은,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 사람을 만났어요. 그러나 오늘 여기 와 계신 주님은 이천년전에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도말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내가 나의 죄를 해결할수 없고, 내가 나를 도울수가 없고 "하나님 나는 무력한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시죠.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피흘렸다." 그 보혈은 모든죄를 사할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 우리 주님은 승격되셨습니다. 다시 오신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주님 못에 들어가야 하겠는데, 못이 움직일때 제가 제일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누가 나를 도와줘야 하는데" 이 말을 한걸보면 이 사람은 혼자갈수 없는 사람인거 같습니다. 자기 혼자 막 뛰어갈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이사람에게 말씀했어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네가 나았냐, 일어나서 걸어갈수 있다라는 말이 아니고요. 지금 아픈사람보고 "네가 일어나" 어떻게 일어납니까? 못일어납니다.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혼자 일어나는것도 아니고 "자리를 들고" 그리고 "걸어가라" 세가지 명령입니다. 일어나고 자리를들고 그리고 걸어가라. 이것은 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는 가능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 말씀의 배경에는 그 말씀을 뒷받힘해주는것,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기실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빈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요.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믿었어요. 지금까지는 딴 얘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이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조금전에, 물이 움직일때 나를 붙들어서 데리고 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할때 그것은 뭘 말합니까? "내가 너를 구원할수 있다. 일어나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 라고 할때, 이 사람은 전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믿음, 그 믿음을 주님 앞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믿을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 대상이 있다. 믿음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셔서 지금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명령, 이것은 그를 낫게 하는 명령입니다. "일어나" 이 사람이 꿈엔들 그것을 낫기를 원하지만 자기가 나을수 있다고 생각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요, 지금까지 그런 삶을 살았는데 주님이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실때, 아무도 나를 도와 줄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이 움직일때 막 뛰어가는데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것은 이 사람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자기를 돕는 분이 옆에 계시다고 하는것을 믿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자기는 낫고 싶지만 제일먼저 달려갈수가 없고 그일을 위해서 누구도 나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에 누워있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지만 그는 그저 누워 있었지 그는 소망이 없다고하는 것이 마음소에 박혀 있었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죠. 이것이 죄인들이 갖고있는 현실입니다. 영생을 얻었으면 좋겠다. 또 죄사함을 정말로 받고 의롭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노력한다. 그런데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만일 만난다면 이 모든 불가능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잠재력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구원,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요. 나를 구원하신 그분, 나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신 그분을 내가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입니다. 위대한 능력이 그분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렇게 하기 때문이죠. 그는 걸어갔어요. 그가 "곧 나아서" 얼마있다 나은것이 아닙니다. 곧 나은것입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입니다. 믿는순간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는 38년된 병자를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주님께서 열두살때 예루살렘에 왔을때도 그는 예루살렘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거의 20년의 세월이 또 흘러갔어요. 그러고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그 현장에 오셨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박대하지 마십시요. 그 주님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십시요. 구원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