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6. 대언자되신 주님, 목자되신 주님 >

박이레 2021. 7. 25. 21:48

2019년 7월 24일 뉴욕 플러싱 여름수양회 / 정형모 형제님

< 06. 대언자되신 주님, 목자되신 주님 >

어제에 이어서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데, 이 주님께서 현재 무슨 사역을 하고 계신가? 현재라고 하는것은 오늘 이 시간만이 아니라다시 오실때까지 보자 우편에 계시죠. 거기서 지금 행하시는 일 전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여러가지 사역이 있지만 주님의 큰 대제사장,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것, 그리고 오늘은 저희들이 대언자로 일하고 계신것, 그리고 또한 위대한 목자로, 큰 목자로 일하고 계신 이 점에 대해서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

요한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 말씀하신 것은 "나의 자녀들아 이 서신을 쓰는 이유는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고 나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실 생활에서 우리가 때때로 범죄합니다. 생각으로, 또 행동으로, 이와같은 문제는 로마서 6-8장에서 다루고 계시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 옛사람을 실제로 죽은것으로 여기고 우리 자신을 드려서 불의의 병기로 우리몸을 드리지 않고 의의 병기로 이제 드려야 되겠다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어떻게 거룩하게 살게 될수 있을까라는 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께서는 여기에서 동일한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주님과 교제를 하고 말씀 가운데 거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게 될때 죄를 무겁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서 소홀히 한다면 죄를 가볍게 생각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우리는 죄를 쉽게짓고 죄를 짓고도 불신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별로 감각이 없다.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이 말씀을 하고 계시면서 죄에 대해서 우리는 민감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요. 여기 동시에 그러나 누가 죄를 범하면, 죄를 범했을때,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죄를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죄를 조심해야 하고 그럼 죄를 절대로 범하면 안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럼 문제가 되는 것이죠. 죄를 범했을때에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현재 일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다는 말입니다. 어제 저희들은 현재 우리 주님께서 위대한 큰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시다. 그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 주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연약에 싸여 있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러므로 인해서 이 죄를 이길수 있도록,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들이 자녀들에게 관해서 이야기하게 될때, 이 대언자는 누구 앞에서 일하시는가? 동일한 주님입니다. 하늘의 보좌실에 앉아계신 주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옆에 계십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옆에서 일한다면, 대언자는 아버지 앞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서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대언자가 있다." 이렇게 요한일서 2장은 말씀하고 있지요. 그래서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드릴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대제사장이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두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대제사장께서 하나님 앞에서 받아서 그것을 전달해 드립니다. 이와같은 일을 생각할때 대제사장께서 우리가 연약에 빠져 있다는 점을 다루고 계시다. 그런데 자녀로서, 아버지와 교제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 주님께서는 대언자로서 일하고 계시다. 그래서 여기 대언자가 있다는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8:1).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을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2장 말씀은 대언자가 우리에게 있다고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죄를 지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절 하반절을 보면 "아버지 앞에 우리의 대언자가 있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 대언자의 이름이 누군가? 여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 앞애 '의로운'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의로움 입니다. 그분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성도가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했을때 이 문제를 다루신다는 것이죠.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왜 여기서 갑자기 화목제물에 대해서 말씀하실까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신분을 잃어버립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상실합니까? 아니죠.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그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의 위치를 여전히 보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죄를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 하셨어요. 그래서 죄를 지은것에,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시죠. 이 진노를 화목제물이 누그러뜨리셨습니다. 죄는 용서를 받는 것이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누그러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용서되고 진노는 누르그러뜨려졌습니다. 진노가 누그러뜨려진다, 진노가 경감된다, 사라진다고 하는 것을 화목이라고 말하는 거죠.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을 향해서 사라져 버렸어요. 왜? 근거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죠. 죄가 도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화목제물이십니다. 그 화목제물이 되시기 때문에, 바로그분께서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바로 그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화목제물이세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셔서, 살아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인격이 계시다. 그분이 대언자로서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대언자께서는 바로 그 즉시부터 역사합니다. 무엇으로요?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교제는 손상된다는 그 말입니다. 아버지와 교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범죄 했을때 우리는 여전히 하늘나라 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의롭다함을 받을수 있습니다. 화목제물 때문에, 그러나 아버지와의 교제가 끊기기 때문에 우리의 상태는 이때부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일을 할까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이것은 다락방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떠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여기 보혜사, 그런데 특별히 16절에서는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른 보혜사라면, 여기 다르다고 하는것은 같은 종류의 다른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종류의 다른것이 아니고요. 이것은 '헤테로' 입니다. 그런데 같은 종류의 다른것은 '알로' 입니다. 같은 종류의 다르다고 하는것은 우리 주님도 보혜사고 성령님도 보혜사라는 그런 말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늘 보좌실에 계세요. 그러나 성령님은 보내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믿는사람 속에 계십니다. 위치가 다르죠. 그래서 한 보혜사는 하늘에 계시고 한 보혜사는 우리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을때, 우리가 죄를 지었어요.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었을때 당장에 무슨일이 벌어질까? 하늘의 보혜사께서는요, 전에 화목제물이셨어요. 성령은 화목제물로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그분은 인간이 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에 인간이 되시고 화목제물로 돌아가셨기 떄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우리의 위치를 전혀 손상받지 않도록 하고 계시다. 그런데 그분은 살아계시고 보좌실에 계신데, 다른 보혜사께서 우리 속에서 근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여러분과 제가 죄를 지으면 즉각적으로 우리 속에서 성령님은 근심합니다. 근심하기 때문에 나라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는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원하시죠. 우리는 성령님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게 되었을때, 범죄했을때,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속에서 근심하지요.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셔야 하는데 범죄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성령님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근심하기 때문에 우리의 성정으로는, 우리의 성품으로, 구원받은, 신의 성품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이 근심할때, 우리는 그냥 맹숭맹숭 가만히 있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주님앞에 자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 죄에 대해서 자백 안할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자백할때까지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이 있어요. 우리가 주님앞에서 민감하다면, 영적인 탄력이 있다면, 우리는 범죄하자마자 바로,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는 범죄하는 순간 주님께 자백 합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하는 순간 자백합니다. 자기가 범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압니다. 조금 늦은 사람은 얼마 있다 자백하겠지요. 다윗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죠. 물론 그는 구약의 성도고 성령이 그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했을때,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다음에 그냥 시치미 떼고, 그냥 입 싹 씻고 모르는 척하고 그냥 밀고 갔어요. 그래서 애기도 낳았지요. 1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나단이 찾아 왔어요. 범죄하고 난 다음에 세월이 계속해서 갈때, 이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뭐라고 말씀했어요? 그가 병에 들고, 그는 마음속에 괴로워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뭐가 달라집니다. 여러가지로 달라집니다. 영혼이 달라집니다. 깨끗한 물이 아니고요. 혼탁해진 물과 같은 그런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릴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정상적이 아닙니다. 뭔가 피합니다. 눈초리가 이상해집니다. 우리의 영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질에 있어서 섬김에 있어서 예배에 있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것에서 다 변해 버리고 만다. 어제 아침에 저희들이 시리얼을 먹는데 뭔가 이상하다. 맛이 이상하다. 이상한 시리얼을 갔다놨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우유가 잘못됬습니다. 그래서 시리얼 맛이 이상합니다. 상하면 맛이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은 대언자로 계시다. 그래서 성령이 근심하면 우리는 불안해서 불편해서 가만히 있을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앞에 자백하게 됩니다. 주님앞에 자백하지요.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죄를 사하시고" 왜요?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우리의 케이스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언자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언자로 행하실때 무슨일을 하실까? 우리 죄에 대해서 "그 죄는 괜찮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는 상황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할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편들어주는 것이 대언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언자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의로운 분으로서-그분은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얘기했죠-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것은 가차없이 그것은 잘못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입장에서-그래서 보혜사인데- 말씀을 드리게 될때 어떻게 우리편을 들어주십니까?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죄에 대해서 자백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 앞에서 말씀 드리고 그 말씀을 드리게 될때, 대언할때, 즉각적으로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깨진 교제가 순식간에 회복이 된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언자는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의 교제가 계속해서 진행되도록 돌보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 주님 참 철저하죠.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선한 목자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우리 죄를 다 해결해 주셨어요.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셨어요. 그리고 구원받고 난 다음의 문제도 우리 주님께서 지금 다루고 계시다. 대제사장으로 다루고 계시고, 그리고 대언자로 다루고 계시다는 그 말입니다. 대언의 근거는 첫째,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예요. 그리고 현재 그분은 살아나셔서 사신 분으로 보좌 우편에 계셔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보좌실에서 대언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잠시 구약의 민수기 19장을 보겠습니다. 민수기는 대단히 독특한 장인데 여기 붉은 암송아지의 규례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 밖으로 끌어 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것이며"(민19:1-3).

이 붉은 암송아지는, 털 전체가 온통 붉은 암송아지여야 합니다. 대단히 귀한 암송아지 입니다. 이 암송아지는 대단히 오랜기간동안 몇마리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이 붉은 암송아지를 제사장 앞에서 잡아서 그 재를 진 밖에 정한 곳에 둡니다. 그 재는 계속해서 오래 사용할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재를 만들었을까? 시냇물을 가져다가 그릇에다가 재를 넣고 물을 부어요. 그렇게해서 잿물을 만듭니다. 그 잿물을 부랴서 정결케 한다. 이런 규례가 레위기에 있지 않고 왜 민수기에 있을까? 이상합니다. 이와같은 규례는 대게 레위기에 있지요. 민수기는 무슨 책입니까? '광야에서'라는 책입니다. 민수기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광야에서'라는 이야기 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가장 하나님의 백성이 위험한 것은 무엇인가?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대언자와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될때 이 주제와 이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광야를 지나게 될때 어떻게 더러워지는가? 여기 11절 이하를 보면 세가지 케이스를 말씀하고 있는데, 11절을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자는" 그리고 14절에 보면 "장막이 사람이 죽을때 법은 이러하니라" 장막안에서 가족이 죽었어요. 시체를 만졌어요. 이때 더럽혀진 거예요. 이것은 물론 예식적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15절에 뚜껑을 열어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 이것 더러운 거예요. 뚜껑 안덮고 그냥 열어놓은 거, 집안에 시체가 있는데 뚜껑을 덮지않고 열어놓은 그릇자체가 더럽다. 세번째, 들에서 시체를 만졌을때. 그래서 다 시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가정 안에서, 세번째는 들에서, 가정 안에서 더러워질수 있어요. 그리고 들에서라고 하는것은 세상에서 더러워질수 있어요. 그 다음에 이 더러워질수 있는 영향력을 향해서 뚜껑을 닫지않고 열어놓을때 더럽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정하게 할까? 정하게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예요.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런것이 아니라 잿물을 뿌리는 것입니다. 여기 잿물을 보게 되면요. 밑에 재가 깔려 있어요. 그리고 시냇물을 무어요. 밑에는 재, 그리고 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섞어 놓으면, 가만히 놔두면 잿물이 되는데 이 잿물을 뿌려 더러운 정을 정하게 한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광야를 지나게 될때 더러워지는 것, 죄를 짓게 되는것, 세상의 영향, 이 부패, 죽음, 썩는것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될때 거룩하지 않은 것, 거기에 영향을 받게 될때 생각에서 행동에서 이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런것을 정결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여기 재가 있습니다. 이 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재는 붉은 암송아지 자체였죠. 정하고 온전하고 흠이 없고 그리고 멍에매지 않았아요. 인간을 위해서 멍에매지 않았어요.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서 멍에매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일을 하셨어요. 온전하시고 흠이 없는 그분께서 돌아가셨어요. 그 재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물을 넣어서 잿물을 만들었죠. 이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두 보혜사꼐서 역사하지요. 우리가 범죄 했을때, 즉각적으로 성령이 근심하죠. 그래서 아버지 앞에 자백하지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 우리 주님께서 대언하시죠. 이 두가지, 재와 잿물 그리스도와 성령, 두 보혜사께서 우리가 범죄 했을때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세상에서 접촉하는 것,영향 받는것,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뚜껑을 열어놓고 있는것이 아니고 주님과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 세상과의 영향력을 단절해야 하는 이와같은 책임. 이것을 우리는 붉은 암송아지의 규례에서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에서 우리가 만찬 앞에 나올때, 만찬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님앞에 나올때 우리 자신을 검사하고 검토 해야 합니다. 매일과 같이 우리는 주님앞에 나올때, 매순간 우리가 주님과 교제 한다면 우리가 혹시 죄를 지었을때,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다 해도 죄를 짓는 순간, "주님앞에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수 있는 영적으로 탄력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처럼 죄를 하나도 안졌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때 우리는 말에서 행동에서 딱 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했으면 안됬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때가 있지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당장 주님앞에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영혼은 아버지와의 교제가 계속해서 보존이 된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력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을 계속해서 잘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 얼굴, 피부만 보습제로, 화장품으로 관리하는거 아니고요. 우리의 영혼을 관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과 같이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해가 지기전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정리하고 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응어리 만들어서 또 그 다음날 가고 하는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성도 관계에서도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그렇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적어도 그렇게 관리 못했다면 마지막 보루는 어디 입니까?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은, 만찬상 앞에 나오기전에 주님앞에 이것을 정리하고 가야한다. 그러지 않고 간다면 우리는 위선자로서 주님앞에 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만 주님 앞에서요. 정리하지 않은 문제가 있어요. 사람들과 성도들 관계에 있어서 정리하지 않은 문제가 이어요? 이것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될때 우리는 서서히 타락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타락합니다. 서양에서 끓는물에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를 찬물에 넣고 서서히 불을 지피면 반드시 개구리는 그 속에서 죽어요. 그런데 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그 안에서 편안하게 들어가있는 개구리는 없습니다. 뜨겁기 때문에 펄떡 뛰어서 거기서 나가요. 살아요. 그런데 개구리를 찬물에 넣고 그 속에 가만히 있는데 서서히 열을 가하면 그냥 거기서 죽어버려요. 죄는 서서히 우리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지 않고 간다면 성도들은 타락하고 나중에는 대게 어디로 갑니까? 엉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그룹으로 갑니다. 개방적인 교회라든지, 교파라든지, 처음엔 그렇게 가요. 그 다음엔 어디로 가나요? 아예 세상으로 가 버려요.세상 사람같이 되어버립니다. 생각이나 행동에서 세상 사람같이 되어버립니다. 구원받았는데요. 이렇게 보면 세상사람 같아요. 말이나 행동이 세상사람같이 된다. 왜 그런가? 대언자께서 지금 무슨일을 하고 계시는가? 주님은 요한일서에서 2장 1절 말씀에서 "자녀들아 죄를 범치않는것이 주님의 뜻이다" 라는 말씀에 대한 관념이 없다라는 거죠. 우리는 이 점에서 주님앞에 분명히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대언자와 관련해서 시편 139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139:1).

여기 감찰이라는 말이 나오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똑같은 말씀입니다. '감찰하사'

이 시편 기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보시고 살피시고 조사하신다. 감찰하신다. 그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범죄했을때 즉각 주님앞에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순식간에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교제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영적인 사람으로 인도하신다. 주님의 참 위대한 은혜지요.

우리 주님의 현재 사역중에 세번째 사역, 중요한 사역은요. 큰 목자 입니다. 큰 목자로서 일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죠. 대단히 짧은 시 입니다. 6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 시편을 보면, 시편 22-24편을 시편의 삼중주라고 말하는데요. 이 시편은 우리 주님의 목자되심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22편은요, 십자가의 시편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3편은 지팡이의 시편이다. 시편 24편은 면류관의 시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시편 22편은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2편의 시작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때 가상칠언 네번째 말씀이지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다윗이 천년전에 예언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선한 목자로, 선한 목자는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선한목자라" 라고 말했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그런 선한 목자 입니다. 그래서 22편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시편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23편이 선한 목자에 관한 시편이라면 24편은 지팡이의 시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편은요, 큰 목자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잠깐 여기 손을 넣으시고 히브리서 13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히13:20-21).

여기 20절 말씀에서 "양의 큰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양의 큰 목자, 큰 목자 입니다.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죽었습니다. 그게 시편 22편이예요. 그런데 죽으신 이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요. 위에 계시면서 우리를 대제사장으로 돌볼뿐만 아니라 대언자로서 돌볼뿐만 아니라 우리를 큰 목자로서 돌보고 계시다. 큰 목자로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계신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지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있어서 연약에 싸여 있는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 그래서 합당한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그분께서는 하신다.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예배가 주님앞에 합당하게 드려지도록, 하나님 앞에 드려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일하신다. 대언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신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교베가 원활하도록 하신다. 그런데 큰 목자는 무슨일을 하십니까? 큰 목자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필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하는일이 바로 그런것이죠. 보호하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합니다. 이리나 사자나 곰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가지 벌레나 파충류나 기생충이 또한 먹는 풀이 제대로 됬는가? 이것을 다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양들은 피곤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천천히 몰아야 합니다. 그리고 쉼터로 가서요. 거기서 물을 마시게 해야 합니다. 거기서 양들이 편하게 누워 있어요. 먹고 난 다음에, 물먹고 물가에 누워 있어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그 필요, 제일 첫번째 필요, 우리의 필요의 넘버 원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먼저 선한 목자가 되셨어요. 그러나 구원받고 난 다음에 다 되었습니까? 아니죠.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이 필요를 위대한 목자께서, 큰 목자께서 돌보고 계시다. 시편 23편은 이와같은 큰 목자에 대해서 그림과 같이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그것을 조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시편 24편은 뭡니까? 시편 24편은 면류관의 시편이라 말씀드렸는데요. 시편 24편을 보면요, 이제 강림하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왕, 그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 그분께서는 여호와시라 말씀했는데요. 그 왕이 들어가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찌어다" 여러분, 문이 어떻게 머리를 듭니까? 여러분 성문을 보면요. 문이 두짝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두짝이 있고 하나는 위에 또 있어요. 세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짝은 이렇게 만나고 위에 있는 문은 양문을 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때는 그냥 두짝만 열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드나들어요. 그러나 왕이 오시면, 왕이 통과하게 될때는 위에 있는 문까지 열려요. 셋까지 다 열려요. 그게 왕이 입성하게 될때 다른 것입니다. 영국에 가면 트라팔가 스퀘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이제 볼이 있습니다. 광장에서 볼을 통과해서 가면 버킹엄 팰리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볼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왕이 마차를 타고 올때 트라팔가 스퀘어로 들어올때 거기에 문이 있습니다. 거기의 문은 세개가 있습니다. 가운데 문은 안열려요. 보통때는 옆으로 자동차들이 갑니다. 그러나 왕이 올때는 가운데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왕이 거기를 통과합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찌어다" 위쪽의 문이 열려야 된다 그말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통과하기 위해서 입니다. 영광의 위엄과 영광과 권세 입니다. 그래서 이제 시편 24편은 오시는 왕, 입성하는 왕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목자 입니까? 목자장입니다. 잠시 베드로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드로께서 장로들에게 양들을 어떻게 돌볼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계시고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하 목자죠. 장로들은 하 목자죠. 그 하 목자들의 행한 일들을 큰목자께서, 목자장께서 보셔서 상급을 주실 것이다는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들을 잘 돌보고, 양들의 본이 되고, 즐거운 뜻으로 하면, 자원함으로 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성실하게 했을때, 라는 말이죠.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목자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였어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장차오실분은 목자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 보좌 우편에 계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그 일은 위대한 목자, 큰 목자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 이것은 참 우리에게 마음속에 커다란 위로가 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말씀을 저희들이 잠시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위로와 확신이 충만한 말씀이죠. 지난 삼천년동안요, 우리 주님이 오시기 천년전에 다윗이 이 시를 썼는데, 그 후로 이천년이 흘렀어요. 삼천년동안 이 시는 얼마나 많이 모든 성도에게 인용되었고, 읽혀졌고 위로가 됩니까? 위로가 가득한 시다. 그리고 이 시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번영할때나, 우리가 어려울때, 곤경에 빠졌을때, 우리가 당황하게 될때,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때, 아니면 성공할때, 모든 상황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위로와 모든 통찰력을 주고 우리를 붇들어 주고 세워주고 인도하는 그와같은 말씀이다. 어떤때나 목자는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 이것을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편은요, 변화에 대해서,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 우리 인생 살아가게 될때, 오늘은 태양이 이렇게 떴는데 며칠전에서 폭풍우가 쏟아졌어요. 상황은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수많은 변화예요. 변화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시고 관리하고 계시고 돌보시고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고 공급하고 계신다. 보호하고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을 보면 초장으로 시작해서 물가로 인도되고 그 다음에 의의 길로 인도되고 그 다음에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그리고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고 있고 그리고 고원에 올라갔을때 그분께서요. 기름을 발라 주시고 그 다음에 잔이 넘치게 하여 주시고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전으로 인도하신다. 이 위대한 시, 이것을 시편의 진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은 마치 나팅게일과 같아서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는 새는 평범한 새입니다. 그냥 조그만 새입니다. 그런데 그 새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늘로 쏜살같이 올라가지요. 그러면서 노래합니다. 이 시편은 나이팅게일의 시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상황속에 즐거운 때에 언제나 우리는 하늘로 높이 올라가면서, 왜냐하면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는 위대한 목자입니다. 큰 목자 입니다. 그분이 어디 계십니까? 저 위에 계세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이, 우리 영혼이 하늘을 높이 올라가면서 노래할수 있도록, 우리가 즐거울때도 노래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게되면 어려울때도 우리가 노래할수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시다. 다윗의 시,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 우리는 알수 없지만요. 여기에서 분명한것은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목동으로 아버지의 양들을 쳤고, 또 그 양들을 돌보게 될때 그는 얼마나 성실하게 돌보았는가? 사무엘서를 읽게 될때 다윗이 소년이거든요. 사울왕에게 찾아가서요.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이야기 할때 뭐라고 간증했습니까? "왕이시여, 나는 내 아버지의 양을 돌보게 될때 사자가 오거나 곰이 오면 내가 달라 붙어 싸웠습니다." 여러분 사자와 곰을 어떻게 달라붙어 싸우겠습니까?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요. 그분은 정말로 선한 목자일뿐 아니라 양들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싸우고 양들의 모든 복지를 위해서 그는 모든것을 다 바쳤다. 우리의 큰 목자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서 모든것을 알고 공급하시기를 원하세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아시고요. 우리를 인도하시고 편한 곳으로 먹이시고 또한 우리 마음속에 곤고하게 될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통과할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붇들고 계시다. 우리로 하여금 높이서서 높은 고원으로 올라가게 하고 잔이 넘치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을 보면 양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양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볼수 있는가? 목자가 인도한 발자취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큰 목자께서는 우리를 돌보세요.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시편 23편은 여섯절로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석절과 두번째 4-6까지 둘로 나눈다면 첫번째에 1-3절 사이에서요. 우리 목자께서 어떻게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간결한 말씀속에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번째 1절 말씀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것은 서술한 말이 아니라 감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다윗은 왕이었어요. 엄청난 권력자 입니다. 전쟁에서 능한 왕이었어요. 전리품을 어마어마하게 들여왔어요. 부자 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될때 자기가 성전을 짓지 못하지만 자기 아들에게 이제 성전을 지을수 있도록 그가 남겨준,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 있어요.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전리품을 가지고 엄청난, 막대한 전리품을 남겨줬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짓게 했어요. 또 하나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성전의 식양을 받아서 전달해 준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솔로몬은 위대하지만 사실 다윗이 성전 건축에 대단히 위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풍부한 사랍니다. 부자 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내가 부요한 재물들을 이미 전쟁에서 많은 전리품으로 얻어서 부자가 됬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까 내가 부족함이 없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요, 이 세상에서 항상 분한것,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재물을 많이 안넘겨져서 나는 이렇고 이렇다. 또 누가 이래서 이렇다. 매일과 같이 마음속에 원망과 불만과 이런것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아는 사람들은 성도들은 여호와께서는, 나를 돌보시는 그분은 선한 목자였고 지금은 큰 목자이다. 그분께서 나를 돌보시고 내 필요할때는 언제나 그분에게 청구할수 있고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시고 내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 공급하신다. 그분이 내게 계시다. 그래서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는 위협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마음속에는 확신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든든함이 있습니다. 나를 백업해주는 그분이 계시다. 언제나 주님께서 필요하면, 공급해주실 분이 계시다. 이것은 진술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이렇게 뭐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인도가 있습니다. 인도, 큰 목자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디로요?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먼저 먹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마셔야 합니다. 세번째는 쉬게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쉬는것,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건요, 영적으로 먼저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푸른 초장, 아름다운 초장, 팔레스타인은 일년에 두번 비가와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슬이 내립니다. 그래서 초장을 찾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목자의 가장 위대한 일 중에 하나는 아름다운 초장, 좋은 초장을 찾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때 모임의 장로들은 양들을 지속적으로 가장 맛난것으로 영양가 있는 것으로 먹여야 한다. 필요한 양들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합당한 말씀, 관련된 말씀을 먹여야 된다는 책임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거대한 특권이고요. 왜냐하면 우리의 큰 목자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하 목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바른교훈, 좋은 풀을 먹어야 한다. 그 다음에 쉴만한 물가 입니다. 물에 가서는 물을 먹어야죠. 풀만 먹어서는 안되고 물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는 쉽니다. 물도 마셔야 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쉬어야 합니다. 안식입니다. 우리는 어떤때는 너무 바빠서요, 쉬지 못합니다. 어떤때는 심지어 주님일을 하다가 그냥 완전히 쓰러져 버립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 영혼이 쉬어야 합니다. 영혼이 쉬어야 우리가 또 주님일을 할수가 있지요. 이와같은 가운데 있어서 우리는 주님을 인도하신다. 이 큰 목자의 인도를 따라 간다면요. 우리가 어떻게 먹고 우리가 어떻게 마시고 우리가 어떻게 쉬어야 하느냐라고 하는 것을 인도 받습니다. 그래서 사실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시간이 다되서 여기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계속해서 저희들이 큰 목자께서 저희들을 어떻게 돌보시는가, 보좌 우편에 지금 가 계시는 그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땅에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돌보시는가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