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3일 화요일 뉴욕플러싱 여름 수양회 / 정형모 형제님
<복음말씀_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
주님이 읽은 말씀 복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느날 율법사가 주님께 와서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하게 될때 성경 말씀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 합니다. 질문을 하고자 할때 무엇을 알고자 하는 질문이 있고, 질문을 빙자해서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시험하는 그런 질문들도 있죠. 율법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복음서 다른곳에 청년 관원이 주님께 찾아와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은 해묵은 질문이고, 이 질문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사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있는 질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무엇을 하면 갈수 있을까?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수 있을까? 무슨노력을 하면 이것을 쟁취할수 있을까? 이것이 종교의 생각이고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인류 처음서부터 내려온 생각이고 바벨탑은 그러한 생각속에서 하늘로 탑을 쌓고 올라가는 그런 노력을 저희들은 보게되는 것이죠. 영생을 얻는가, 아니면 영생을 선물로 받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네가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분에게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정관념은 하나님을 향해서 무언가 행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뭔가 할수 없습니다. 사실상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노력하고 나름대로의 생각 속에서 기대하고, 헛된 노력을 일생을 통해서 행하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율법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이와같은 문제점을 그대로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지요,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주님 질문했을때 대답합니다. "내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는 두가지 계명을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율법사 입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요약해서 두가지 계명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는 신명기 6장에 있는 말씀을 따라서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또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유일한 하나님, 한분 하나님,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6장의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그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계명, 나를 향한 계명인데 이것은 레위기 19장에 있는 말씀이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두가지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하되 네 몸처럼 사랑하라. 율법은 그렇게 말씀 했지요. 마태복음 22장 말씀에서는요, 이것을 가리켜서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정확히 요약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들었을때, "바로 말했다. 네가 그러면 이를 행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엄숙한 말씀 입니다. 네가 이 율법을 아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도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이 두가지 율법의 강령을 네가 안다면 그렇게 행하라. 율법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율법을 네가 안다면 그렇게 살라고 하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살수 있다고 장담할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안다면, 네 대답이 옳은데, 그대로 살아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면 산다.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 질문하는 사람의 태도, 첫째는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고, 여기 또 한가지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이 옳을 수 있습니다. 다른사람이 보기에 그 사람이 참 옳다, 그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실때, 정말로 옳다하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객관적으로 볼때 옳다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볼때 옳다는것이 아니고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데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겉모양으로 단장함으로 인해서, 여기서는 위선이 들어가 있지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이와같은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설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될때 옳게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우리의 모양을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옳게 보일수 있습니다. 우리속이 더럽지만 겉으로는 아름답게 단장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단장해서 우리 자신을 옳게 보일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면 그분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땅에 오신지 알았다면 그는 감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옳게 보이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은요, 하나님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도 사랑하는데, 그것이 율법의 강령이라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얘기했으니까, 이웃이 누굽니까? 옳게 보이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그 이웃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는 그렇게 살수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는 다 이 말씀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갔습니다. 어제 여리고 밖에서 길가에 앉은 소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 우리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 주님의 이름을 두셨으므로 거기에 여호와의 간증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거기서 어디로 갑니까?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은 높은 곳이고 여리고는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내려갈뿐만 아니라 여리고는 저주받은 성입니다. 여호수아 6장 말씀을 보면 여리고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성을 하루에 한번씩 제 칠일에는 일곱번, 다 돈후에 무너졌죠.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은 저주받은 성이다. 이성의 기초를 쌓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맡아들이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건축을 진행한다면, 문짝을 단다면 그 사람의 말째 아들이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와같은 말씀을 하시고 나서 약 6세기가 지난후에 분열왕국 시대에 히엘이라는 벧엘의 사람이 여리고를 건축 합니다. 그가 그 터를 닦았을때 그의 맡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제 그가 문짝을 달았을때, 그의 말째아들이 죽었습니다. 600년전의 하나님의 말씀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위함과 두려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제 이 저주받은 성, 여리고,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갔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잘 말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여기 율법사는 영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왜 영생을 구할까?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다. 원래 영원히 살도록 지어졌지만 이와같은 고상한 위치로부터 죄로 인해서 타락하고, 우리는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인생의 수명은 제한되어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는 저주 가운데로 빠져 버렸습니다. 죄는 저주를 받는 것이고 멸망을 당하는 것이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 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낙원에서 실낙원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갑니다. 참으로 슬픈 것이죠. 우리 사람들은 아침부터 일어나서 마음속에 오늘 또 무엇을 해야할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디 휴가를 가서 전화 다 끊어놓고 조용히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만약 직장 상황이나 여러가지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도 마음놓고 할수 있겠습니까? 직장 상황이 좋지 않는데, 어디 두달가서 편히 쉬십시요. 그러면 편히 쉴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마음속에 항상 쫓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뭔가 이겨야 하고 뭔가 허리를 굽혀야 하고 뭔가 우리는 움직여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너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다. 땅을 파야 합니다. 비료를 줘야 합니다. 아담은 농사짓는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지금 묘사되고 있지만, 농사짓는 사람, 농부만 그런 일을 하는것은 아닙니다. 모든사람들은 손에 총칼을 들지 않어도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고해야 합니다. 염려해야 합니다. 직장이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업이 어떻게 될까? 항상 염려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 염려, 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 그것 때문에 아침부터 근심속에, 오늘 무슨일이 벌어질까라고 마음속에 전전긍긍하고 사는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매일과 같이 우리는 이와같은 삶에 익숙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원래 어떻게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리는 어떻게 지어졌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우리의 본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업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래 할일 이었어요. 그러나 죄로 인해서, 마귀의 간계로 인해서 그 간계에 우리는 응함으로 인해서 마귀와 함께 같은 동행의 길을 가게되고, 동행의 길을 감으로 인해서 같은 운명에 빠져버린 인간, 그것은 여리고로 내려가고있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와같은 교제를 통해서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누려야 될 인간이, 저주를 향해서, 멸망을 향해서 갈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지금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강도에게 매맞고 터지고 깨지고, 그리고 상처받고, 그는 더이상 여행할 수 없습니다. 그는 길에 쓰러졌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 모양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리고 가다가 강도 만나서 터져서 상해버린 우리 인생을 적나라하게 잘 말해주고 있지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범죄와 죄악된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하고 말할때에 그들의 죄악된 모습을 터져 상한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다 터져서 깨지고 피흘리고 그리고 멍들고 상한것 그것 뿐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어느 한 군데만 상한것이 아니고요. 온 몸 전체가 상했다. 우리 주님을 묘사하게 될때, 아가서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로 아름답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분과 교제해야 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던 우리 인간은,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죄로 인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한것 뿐이다. 그리고 치료를 받고있지 못하다. 에베소서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 죄인을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게 될때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하게 하면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 그들의 과거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었습니까? 그들은 장사하는 사람이고요, 부유한 사람들이었어요. 대단히 바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육체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지중해를 누비고 또한 수많은 무역상들과 대면하면서 그들은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은 활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죽었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들의 과거를 말씀하고 있을때, 그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들의 영이 죽어 있었습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죠. 화살을 쐈는데 제일 중앙에 과녁에 맞추어야죠. 그런데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기준에 우리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과녁에 미달되었습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영광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허물은 무엇입니까? 허물은 들어가서는 안되는데 들어간 것입니다. 잔디밭에 들어오지 마세요. keep out. 그런데 들어가는 것, 이것이 허물입니다. 들어가야 되는데 안들어가는 것이 죄입니다.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들어가는 것, 허물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무죄함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드려야 할 이런 인간들이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이후에 우리의 영적인 주소는 뭘까? 죄와 허물로 영이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터져있고 상하고 온 몸 전체가 터져있고 상한것, 그것 뿐만 아니라 달리 묘사하면 우리 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돈만 벌고 이세상에 살다가 이러다가 죽으면 그것이 끝난 것인줄로 생각하고, 그와같은 사단의 거짓에 속아서 사람들은 살고있는 것이죠.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에베소서 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을때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공중의 권세잡은 자, 사단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불순종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 이끌리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모든것을 진리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에 속하서 철썩같이 믿고사는 사람들이다. 누구의 거짓입니까? 거짓의 원조,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서 살고 있다. 우리 인생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때에 우리는 내 죄로 인해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내 죄를 위해서 나 대신 돌아가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세상을 살면서 그분을 의지하니까, 그분을 믿은적이 있다. 그래서 나의 심판은 이천년전에 그분께서 나의 심판을 대신해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나의 심판은 이미 지나갔다. 라고 여러분 오늘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분의 위대한 은혜와 희생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죄 가운데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정확히 말씀하고 있는 명확한 현실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와같이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며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 허물로 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차마보지 못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계획을 따라 우리 주님께서 때가 되시매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하에 나시고 저희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구속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값을 통해서 저희를 사유하신 것입니다. 이제 누가복음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터져서 쓰러졌습니다. 상하고 피흘리고 이제 길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갔지요.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돌아갔어요. 아마 그들은 이 강도만난 사람의 근처에 강도가 있을 것이다. 그냥 그들은 그냥 자기몸을 사려서 급히 도망 갔다고 생각됩니다. 제사장은 유대교에서 종교인으로서 최고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레위인, 성막을, 성전에서 제사장을 도와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 종교인입니다. 유대교에 대단히 중요한 요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기능은 대단히 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사람은 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도, 구원을 받는 일에 어떤 도움도 될수 없다고 하는것을 여기서 잘 말씀해주고 있지요. 우리 주님께서 사실상 누가 이웃입니까? 라고 이야기하게 될때,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가버렸어요. 이웃이 아닙니다. 여기 또다른 사람이 있지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에" 이 사람도 여행하고 있었어요. 어디로 가는지를 알수 없었으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아니면 벧엘로 가는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는 여리고로 가는지, 그가 여행중에 있었어요. 그가 여행중에 있을때에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도와주기 시작하지요. 가지고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의 마음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이 쓰러진 사람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선한 이웃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부요하신 분께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 영적으로 우리는 파산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햄에 우리 주님께서 말 구유에 계신것을 보십시요. 그것은 크리스마스때 그냥 지나치는 카드에 나오는 그림일뿐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이신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초 이 땅에 오셔서, 천한 장소, 인간이 태어날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태어나지 않고, 이제 인간이 태어날 장소가 아니고 가축들이 사는 그러한 장소에서, 말 구유에 주님께서 누워계셨는가, 이 광경을 우리가 보게 될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고 계셨는가? 영원전에서 하나님께서 아드님과 함께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입니다. 사단을 따라간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었는가? 그 영원을 언약을 따라서 때가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가, 오시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시고 멸시를 당하시고 조롱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오셨는가? 여기 이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상처에 붓고 싸매고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려왔습니다. 여기 이 사마리아 사람의 돌보는 모습을 볼때에 이 돌보는 모습은 그냥 책임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사라마리아 사람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조상의 조상의 죄로 인해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심판으로 가고 있는것을 차마 하나님은 볼수 없었습니다. 죄는 미워했지만 죄인들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여러분과 저의 죄값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그 값을 갚으셨다. 우리 주님께서 모든 처벌을 우리 주님이 홀로 받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의인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처벌을 우리 주님께서 한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값을 받으셨기 때문에 심판은 이미 이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지나갔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간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갚으신 그 위대한 값은 그것은 나를 위해서 적용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말했어요.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영생을 선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값을 이미 다 지불한 고귀한 것을, 거저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다.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걸어다니실때, 말씀하실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실때, 기적을 베푸실때, 사람들과 대화할때, 이 모든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 주님은 말씀이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때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꼐시는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뜻을 그대로 밝혀서 보여주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줄 알지 못하고 죄의 길로 가고 있고 사단과 함께 동행하고 있고 영원한 멸망으로 속히 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길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책임감 때문에 하신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메세지 입니다. 이 사랑의 메세지를 우리가 받게될때, 그 메세지에 감동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통해서 감동 받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표현이나 사랑의 행동이나 이런것을 경험하게 될때, 우리는 그런 모양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모양을 보게 됩니다. 2차 대전때에 어떤 아이가 빵집 앞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 입니다. 사실 고아죠. 엄마 아빠, 죽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방황 합니다. 빵집 앞에서, 제과점 앞에서, 쇼윈도 앞에 여러빵들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그냥 쳐다보고 있습니다. 살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 돈도 없습니다. 그냥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군인이 그 안에서 나오다가 이 아이가 빵집의 쇼 윈도우를 보고 있는것을 보고, 다시 들어가서 빵을 다섯개를 사가지고 봉지에 담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툭툭 쳤어요. 그 아이가 뒤를 돌아봤어요. 웬 군인이 서서 봉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얘, 이거 가지고 가 먹어." 그때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 군인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입게 될때, 우리는 목이 잠겨서 말할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는 그것을 가리켜서 목에 머리가 생겼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말할수 없습니다. 사랑을 느끼게 될때, 우리는 말할수 없습니다. 그것을 느끼게 될때 우리는 전율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지, 십자가에서 어떻게 해로움을 당하셨는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시게 될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칠떄까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여전히 달려 계셨고,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의 몸에 감수하고 있었고 그 영혼이 고뇌속에서 통과하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이분을 가리켜서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말씀에 보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증오하면서 "너는 사마리아인이다. 너는 귀신들린 자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유없이 미움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께서 그와같은 일을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할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자를 그분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 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치료해주고, 그러고 이제 그만큼 했으니 됬다. 이제 이 사람이 때가 되면 일어나겠지, 그러고 간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을 치료해주고 포도주 붓고 기름 붓고, 싸매주고 그리고 자기 나귀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려가서 그 다음에 두 데나리온을 주고 "부비가 더 들면 다시와서 내가 갚겠습니다." 주님의 구속은 모든 값을 다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행한것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것은 더욱 더 위대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아주 패키지로 우리의 모든것을 다 갚아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화목제물로 바침으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에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앞에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나서 나를 구원하셨는데 확증하시고 인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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