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4. 주님의 죽음과 부활 >

박이레 2021. 7. 25. 21:46

2019년 7월 23일 화요일

정형모 형제님

< 04. 주님의 죽음과 부활 >

저희들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대해서 살펴볼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 말씀을 저희들이 생각할때, 우리 주님은 베들레헴에서 부터 시작이 아니고 영원전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탄생 이전부터 계속 계셨다. 선재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인간이 되셔서 완전무결하시고 흠이 없으시고 시험에 반응하시 않으시고 죄를 짓지 않으시고 무흠 하시고 하는 이런 모든면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질적인 영광을 가지고 계신데,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도덕적인 영광이 찬란히 빛났다는 것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신성과 인성, 그것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셔서 하늘에서 이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 또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5:12).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계4:11). 4장 11절 말씀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창조에 관해서 예배의 제목으로 생각하고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창조하신 분을 향해서 세가지 영광과 존귀왕 능력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5장 12절 말씀에서는 창조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입니다. 그분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일곱가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왜 이땅에 오셨을까? 수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구속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복음서 말씀에서 엄청난 분량인데 그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한주에 관해서, 전체적인 분량을 통해서 1/3이 마지막 한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33년 동안 사셨고 3년 공생애 기간을 사셨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한주가 복음서 전체에서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것이 많습니다. 어떤분은 복음서 구절을 다 세어봤습니다. 7천 599절입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175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는것은 53번 구절마다 주님의 죽음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통계적으로 말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죽음의 무게를 얼만큼 복음서 기자는 두고 있는가? 물론 구약의 예언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고 또한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말씀하게 될때, 복음 내용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첫째,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말씀 했습니다. 모세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분은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죽음에 관해서 이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시편에서 우리 주님의 수족이 찔렸다 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유명한 53장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지요. 너무나 유명한 구절들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언제 오실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성벽 건축령이 페르시아 아닥사스다왕때 있었지요. 주전 444년 입니다. 그떄부터 69주가 지나면 메시아께서 끊어진다. 이것은 주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83년이 지난후에 예수님께서, 메시아께서는 죽음을 맛보실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이 점에 대해서 대단히 깊이 상고 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10).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려 주십니다. 그 안에 우리 주님의 죽으심, 구속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말씀에서도 천사들이 이것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주님 자신도 주님 자신이 죽을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성전을 정화 하셨을때,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것은 몸된 주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주님과 대화할때, 주님께서 사실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는 들려야 한다.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 관해서 예언하시고 난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서기관 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사흘후에 살아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변화 산상 위에서도 주님께서는 별세할것을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대담했다. 그리고 변화산 이후에 내려오신 다음에 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것을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승리의 입성 하시고 난 이후에 말씀하셨지요. 유명한 말씀 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주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주님의 죽음을 친히 말씀하신 것이죠. 다락방에서 주님께서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이 죽으실것, 그것을 내다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념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오실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 나중에 사도바울은 주님의 만찬재정을 놓고 그렇게 고린도서에서 말씀하셨지요. 구약의 말씀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많은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가죽옷, 또 노아의 방주, 그리고 이삭을 제단에 드린 사건, 그리고 유월절 양,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간 사건, 그 차제가 말씀합니다. 또 놋뱀, 붉은 암송아지 등등이 수많은 구약의 것들이 그림으로 예표로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죽음을 가리켜서 속죄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을까요? 예수님은 아직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오실 예수님,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토대로 해서 이제 구약의 백성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나오게 될때 그들의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언제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마침내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도말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이 모든 죄는 아직 정리 안됬어요. 그러나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일을 근거로 해서 덮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히브리어로 '카파' 덮는다, 속죄라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과 신약의 말씀에서 동등된 것으로 소개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목제 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해서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서 진노하십니다. 이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일을 하는것을 화목이라고 말하지요. 어떻게 누그러뜨릴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입으셨다는 것이죠. 구약의 속죄는 신약의 화목제물입니다. 그와같이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성소 안으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지요. 피없이는 들어갈수 없습니다. 휘장 사이로 들어갑니다. 그때, 이것은 그저 화목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죄를 위해서 매년 또 다시 제물을 잡고 양과 염소를 잡아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영 단번,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시고 그 효능은 영원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로 인해서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화목제물로서 진노를 완전히 누그러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죠. 히브리서 9장 말씀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히브리 저자가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만 보겠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이 짧은 한 구절 안에서 제일 첫번째,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묵상하게 되는데요. 첫번째, 14절의 시작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드렸다." 우리 주님의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게 될때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성령님, 어떤 성령님입니까? 영원한 성령님으로 인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 단 한순간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가운데 행하지 않은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힘 가운데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흠없는 자기를 드렸습니다. 흠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한 희생을 드렸습니다.

세번째는 자기를 드리셨습니다. 인격적인 죽음 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드리셨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의 가운데에 담겨 있는 가치는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무한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우리 양심을 정결케 하고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양심이 정결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죄인이 죽어야 하는데 우리 주님이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에 "인자가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죽음은 대신 죽는 죽음 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대담하게 될때 하신 말씀이죠.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여기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할때, 인자도 반드시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들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의 죽음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요. 심지어는 어린아이 시절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업에 대해서 마음속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삼년간의 공생애는 말할것도 없이 언제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걸어가셨습니다. 단 한순간도 그것을 잊은적이 없고, 모든순간 그 죽음을 향해서 가고 계셨습니다. 마음속에 구약의 예언에 대해서 언제나 그 모든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성취하는 일에 주님은 온 영원을 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들린 것입니다. 놋뱀이 들렸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들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진, 성취된 일입니다. 세번째, 우리 주님의 죽음은 자원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원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 말씀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

여기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리켜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내 목숨을 다른사람이 내게서 뺐을수 있는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무결하시고 거룩하시고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의 인성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가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것을 가리켜서 "버릴 권세가 있다."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계명 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순교도 아니고 우연히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따라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자원해서 나가셨다. 자원하신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요한복음의 시작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끝에가서 우리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십니다. 돌아가실 뿐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원해서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8:31).

여기보면 우리 주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는다." 말씀했습니다. 여기 많은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인자가 죽는다' 라는 동사는 가장 중요한 동사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사건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 죽음은 어떤 죽음 입니까? 많은 고난을 받고 죽는다. 다시말해서 우리 주님의 죽음은 폭력적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죽는 죽음입니다. 안락사(euthanasia) 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죽는데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죽음을 편안하게 죽을수 있는 죽음을 도와주는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것을 위해서 마취를 하거나 다른 어떤 화학약품을 넣거나 몰약을 넣을때, 주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다 받으시고 죽으십니다. 주님, 자신의 죽음은 폭력적인 죽음이다. 그것은 수치의 죽음일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죽음이다 그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그 죽음,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가장 말로 할수 없는 고통의 깊이를 주님께서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죽음이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냥 죽으신 것 만이 아니라 폭력적인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죽음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이 어떠한 인생보다 상하셨다." 그 얼굴을 보면 그의 육체적인 상태를 단번에 알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돌아가시게 될때 여러가지 찔리고 피를 흘리시고 또한 몇시간동안 나무에 걸려 계시고 이런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육체의 고통은 말할것도 없고 영혼의 고통은 말로 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그의 몰골은 그의 거룩한 안면은 어떠한 인생과 비교할수 없이 상한 얼굴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고통스러운 푹력적인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값을 치루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 주님의 죽음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때 꼭 죽으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스스로 도울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이 나 자신을 스스로 도울수 없고 나를 구원할수 없는 이렇게 무력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꼭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생명적인 죽음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고통과 죽음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입니다. 가장 중요한 죽음을 죽으셨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비참한 것과, 저렇게 가서는 안될분이 저렇게 가엽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은 승리의 죽음입니다. 개선 장군께서 돌아오시게 될때, 그 위대한 업적, 그것입니다. 승리자 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는 고통과 괴로움과 많은 고뇌가 있습니다만,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우리 주님의 발꿈치는 상했지만 뱀의 머리가 상함으로 인해서 이것은 완전승리였다는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피, 그리스도의 피를,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더 말하고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세배나 더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다섯배나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싫어합니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피의 종교이기 때문에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저희들이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과 이 모든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제거한다면 기독교라는 것은 그저 윤리적인 종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엄청난 윤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것은 종교와 전혀 다른 것이죠.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뗄레야 뗄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위대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만약에 무덤에서 계속 계셨다면 우리에게는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도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기대할것도 없습니다. 전파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을뿐만 아니라 살아나셨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4-29).

이 말씀에서 이제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부활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 또 하나는 심판의 부활. 즉,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믿으면 나중에 예수님처럼 부활한다. 그리고 악인은 멸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도 부활합니다. 의인도 부활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악인의 부활은 주님 믿지 않고 죽은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의 부활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부활의 성격은 심판의 부활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부활하고 하늘의 위대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사람들도 부활해서 그들은 그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심판을 받게 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악인들이, 죄인들이 피할길이 있습니다. 그냥 사라져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 믿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있고 그냥 연기같이 사라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질이 다르다는 것을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지요. 구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지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주의 거룩한자로 썩지않게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흘동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속에 계셨지만 주님의 몸은 썩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썩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은 절대로 썩지 아니하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사야, 스가랴, 수많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우리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족장 욥도 부활에 관해서 말씀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지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도 부활을 예언 했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 성전 정화를 하실때 주님께서는 "성전을 헐라." 그것은 주님의 죽음이지요.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 이것은 주님의 몸이 다시 부활하신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말씀 하신 거지요. 이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표적을 보여달라, 그때 주님께서 말씀했어요.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것은 주님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지요.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나왔습니다. 고기 뱃속에 들어간 다음에는 순식간에 고기 뱃속에서 나오는 효소로 인해서 사람은 산화해 버립니다. 사흘동안 살수 없어요. 그러나 요나는 사흘만에 나와서 니느웨로 갔지요.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겠다. 주님 자신의 부활을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주님은 죽음을 말씀하셨는데, 동시에 예루살렘에 가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고난 후에 사흘만에 살아난다 이 말씀을 역시 하셨지요. 예루살렘 여정에서도 말씀 하셨고요. 또 승리의 입성에서도 말씀하셨고 다락방에서도 말씀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게세마네에서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에 관해서 기이한 것은 원수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의 제자들은 잊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 잠깐, 마태복음 27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27:62-66).

여기 우리 주님이 생전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원수들이 철저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부활하리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유혹거리가 있을것이라고 해서 그 돌문을 로마의 황제의 권리를 가지고 인봉을 하지요. 기이한 것은 원수들은 잘 기억했는데 제자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을 부인하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습니다. 몇가지 이론들을 보세요. 그것은 자작극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든 이야기다. 또 졸도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깐 졸도 했다가 일어난 것을,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부인하려고 하는것이죠. 마귀의 간계입니다. 인간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발로 짖밟는 것이죠. 인간을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요.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도 부활의 위대함도 다 잊고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설이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데 환상으로 보았다. 이런 모든것들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효과적으로 부인하고자 하는 원수의 노력입니다. 영설이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영이 부활하는것이 아닙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부활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또 한가지 심선, 마음속의 가설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사람의 마음속에 있던것이다라는 것이다. 실제 부활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탄생하심과 고난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이 모든것을, 이것은 실제적인 것인데 그것을 다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여자들이 제일먼저 찾아왔지요. 또 제자들이 찾아왔어요.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무덤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무덤의 돌문은 굴러갔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돌문을 어떻게 굴립니까? 로마 황제의 인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권한이 있습니다. 권위가 있어요. 아무도 그 문을 열수 없습니다. 군대가 와서 지키고 있어요. 제자들이 와서 그 문을 열수가 있습니까? 누가 그 문을 열겠어요? 천사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 돌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어요. 그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지금 다른데 가 계셨어요. 빈 무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증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고린도전서, 서신서를 종합해보게 될때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시작해서 여인들, 그리고 시몬 베드로와 그리고 엠마오 제자들, 그리고 열제자들, 열한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만나지요. 또 일곱제자,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지요. 또 열한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이 만나지요. 그리고 오백여 형제들이 만나지요. 그리고 야고보와 그 후에 열한제자와 사도바울 자신도 여기에 대한 증인입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 20장 7절 말씀을 보면요. "게켜있더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그냥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을 싼 세마포가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그 안에 들어가서 봤을때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세마포는 어떻게 놓여 있습니까? 만약에 시체를 가져간다면요. 세마포째 완전히 다가지고 가든지 세마포를 다 벗겨 가지고 가지고 갈 필요가 있어요. 시체를 도적질 하는데 그것을 벗겨 거지고 거기다 놓았으면 세마포가 어떻게 놓여지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본 그 세마포는 둘둘 말았는데 거기 피가 있었겠지요. 그것이 응고가 되어서 얼굴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나비가 되기 전에 번데기 이지요. 그래서 고치를 만들지요. 고치를 만들어서 나비가 되려면 나비가 고치를 갉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오지요. 그러지 않고는 나올수 없어요. 그런데 이 세마포는 그대로 있다면 찢어져야 해요. 우리 주님께서 나오시려면, 우리 주님은 그것과 관련 없어요. 그 세마포는 주님의 모양을 그대로 안고 있는데 주님만 사라진 거예요. 하나도 찢어진 것이 없어요. 우리 주님의 부활을 그대로 복음서는 우리에게 증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 굴러가는것, 세상의 권세를 어떻게 제자들이 밀어내고 돌을 굴리고 그 시체를 도적질 하겠어요? 군대들이 거기 있는데.. 돌이 굴러갔다고 하는 것은 천사가 와서 수직하고 있었고, 천사의 능력이고 하늘의 능력이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권위가 여기 담겨 있지요. 성령님께서 증거하십니다. 어떻게 증거 합니까?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28:12-13).

이것을 입에 넣어준 거예요. 돈 줄테니까 가서 잘때 제자들이 와서 도적질 해 갔다 라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 사실은 성령님께서는 폭로하고 계십니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증거는 이와같이 확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너무나 뚜렸하고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너무나 탄탄 합니다. 사도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의 회심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위대한 증거를 하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와 관련된것, 또 죄인과 관련해서, 마귀와 관련해서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구세주 자신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몇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론적으로 알고 수긍하고 그런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로마서 4장 마지막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함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의를 위함이라. 부활을 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이 확증하게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과 관련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님의 부활이 사싱이기 때문에, 우리가 섬기는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헛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섬겨봐야 뭐 인정 받나? 이렇게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과연 이것을 또 하나님께서 이것을 알아주실까? 하는 시험속에 빠질때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섬김, 우리의 수고가 절대로 헛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다 부활할 것입니다. 다 주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을때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까? 완전한 몸입니다. 첫째, 유리는 혈육이예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몸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의 몸에는 피 없어요. 그것은 골육입니다. 뼈와 살이다. 거기에 피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피 흘리셨고요. 그 생명의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부활하시게 됳때 영광스러운 몸은 골육이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을때 이제 새 몸을 가지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그분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오실 그분을 기다리게 될때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을 갑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 3장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같이 보게 될 것이다. 그분처럼 변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렇게 변할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영과읏러운 몸을 가지셨는데 우리 주님의 몸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예를들면 도마가 뭐라고 말했어요? "내가 그 상처에 내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주님께서 오셨어요. 그리고 도마의 말을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고 "네가 그렇게 의심하는가? 여기 와서 넣어보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감히 그 안에 넣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는 가지고 계시다.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 입니다. 스가랴서 말씀을 보면 12장에서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 그분을 거절했던 메시아를 보게 될때, 그 찌른자를 볼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찌른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제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우리도 완전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수 밖에 없는 몸, 병들수 밖에 없는 몸, 여러가지 제약속에 살수밖에 없는 몸, 그리고 아직 죄가 있는 이런 몸 말고, 영광스러운 몸, 죄와 상관 없이 그리고 물리적인 중력에 의해서 시간에 의해서 쭈굴쭈굴해지고 쇠약해지고 이런 몸 아니고요. 영광스러운 몸, 영원토록 청춘과 같은, 가장 영광스러운 몸을 우리는 갖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이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의 참여함을 알려 하여" 라고 말씀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압니다. 부활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파워가 있어요. 힘이 있어요.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될때에 우리의 삶은 힘있게 살아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권능을 모릅니다.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을때 어떠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지 그것을 만일 우리가 안다면 그 다음에 부활의 권능을 알때에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아는 사람을 어떻게 식별할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될때 고난을 당하게 될때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는데 우리가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교제함으로 동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아는 성도만 이와같이 고난에 동참할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슬프게도 편하게 가는것, 어려움 없이 가는것, 이것을 원합니다. 우리는 물론 본능적으로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되면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가 되고 어렵고 힘든데도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빌립보서에서 고백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실제적인 교훈은 뭔가? 우리는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악인들이 자기 죄로 인해서 고난받는 그런 고난이 아니고요.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의로 고난을 받게 될때 거기에 우리는 기꺼이 동참한다. 그것은 부활의 권능을 아는 사람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고린도전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미래의 복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의 이 몸, 썩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 겁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사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의 몸은 육의 몸입니다. 우리가 부활할때에 얻게 될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이 아니고 신령한 몸, 부활은 언제나 몸입니다. 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몸은 신령한 몸이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제약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죄도 관련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몸입니다. 우리 주님 승천하시게 될때 어떻게 승천하셨나요?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려면 비행기를 타야해요. 항공역학 때문에 우리가 올라가요. 비행기는 활주로를 가속도로 가면서 뜨지요. 그것이 아니고는 올라갈수 없습니다. 헬리콥터에서 잡아 떙겨줘야 중력을 이기고 올라갈수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중력을 이겼어요. 그냥 올라갔어요. 벽이 있는데 그냥 통과 했어요.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영광스러운 몸, 죄와도 관련 없습니다. 이러한 몸을 우리가 받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이라고 하는것은 신성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다. 마크다 그 말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신성이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정 되었다. 그 다음에 부활은요. 우리는 이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승격을 우리가 보게 될 겁니다. 이 승격은 부활 없이는, 부활은 관문 입니다. 예수님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그 다음에 승천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주는 놀라운 단계 였습니다. 그다음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죄인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인은 기억해야 합니다. 죄인은 심판 받아야 합니다. 아들에게 심판할 권세를 아버지께서 주셨어요. 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제 심판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죄인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이 장차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생각 합니다. 마귀는 영원히 멸망할 겁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원한 불못에 가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그와같은 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날입니다. 안식의 날이고요,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여기 모여서 주님을 기억 합니다. 그날 우리는 고린도전서 16장 말씀처럼 주님 앞에 연보 합니다. 예배 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은 주의 날인데 우리 주님 오실때까지 교회는 주의 날에 모여서 주님을 예배합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서 여기서 마쳐야 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저희들은 부활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십니다. 승격되십니다. 새로운 시대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의 주님을 보았어요. 이제 이후부터는 현재의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