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0일 토요일
정형모 형제님
< 03.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_소제되신 주님, 주님의 생애 >
저희들이 주님의 인격과 관련해서 주님은 영원전부터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또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 하셨다. 그리고 인간으로 오신 그분은 완전무결하시다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계속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1절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십니다. 그분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14절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원래 가지고 계신 영광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본질적인 영광,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실때에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지고 계셨던 위대한 영광입니다.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지고 계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게서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처럼 육신이 되셨습니다. 육신이 되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영광, 본질적인 영광을 사실상 육체로 가리셨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막에서 휘장이 있습니다. 휘장뒤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의 위대한 영광, 하나님의 임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잘 말씀해주고 있는 이 찬란한 언약궤는 휘장에 가려져 있습니다. 휘장은 히브리서 10장 말씀에 의하면 그의 육체라고 합니다. 그 위대한 영광이 육체로 인해서 가려졌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본질적인 영광이 가려졌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 그저 인간, 사도바울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그가 어찌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하는가? 생각했던 기간들이 있었죠. 물론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와같은 그의 오해와 무지가 깨졌습니다. 그의 눈은 멀었지만 그의 마음이 그때 열렸지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인간의 몸으로 본질적인 영광을 가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때 그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 이 영광을 가리켜서 기술적으로 도덕적인 영광이라고 합니다. 육체로 가려졌습니다. 하나님 아닌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걸어가실때 나타내신 위대한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을 도덕적인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위대한 일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부활시키시고 승천하시고 그리고 보좌우편에 앉으시는 일, 승격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새롭게 얻으신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을 획득한 영광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세가지 영광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영광, 도덕적인 영광, 그리고 획득하신 영광. 오늘 저희들은 이 도덕적인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래 이 영광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첫째, 찬란하다. 영광은 찬란한 것입니다. 영광은 희미하거나 어둡거나 그런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찬란하다. 또 영광에는 명성이 있습니다. 위대한 이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영광에는 빛이 있습니다. 영광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에는 영예가 있습니다. 영광 안에는 이 모든것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을 누린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지만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린다. 요셉은 먼저 고난이었고 나중에는 영광이었고,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늘의 요셉인 우리 주님은 먼저 고난을 받으시고 이제 영광을 받으신다. 그 위대한 영광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나누게 될 것인데 우리 주님께서 어떤 영광을 원해 가지고 계셨는가? 그런데 그 영광을 어떻게 가리셨는가? 그런데 그 가리신 영광에도 불구하고 육체로 이 땅에 오셨는데 여전히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라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 주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찬란함입니다. 우리 주님의 빛입니다. 우리 주님의 영예요, 명예 입니다. 구약에서 이와같은 영광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이와같은 영광을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걸어가신 행실과 실행을 통해서 그 영광을 조금도 여과없이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신서에서는 이와같은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교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레위기 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2장 말씀을 보면 다섯가지의 중요한 제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죠. 그 제사에서 두번째 제사인 소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 제사중에 구약에서 희생제사를 말씀하고 있는데, 딱 하나 독특한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우리 주님의 생애를 말씀하고 있는 이 위대한 제사, 소제를 우리는 레위기에서 볼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2:1-2).
제일 첫번째, 이 소제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고운가루 입니다. 고운가루라는 말은 그 입자가 모두가 다, 그 입자의 직경을 측정할수가 있을까요? 현미경으로 보면 측정할수 있을까요? 그 직경이 그 입자가 얼마나 고와요? 그 입자의 직경이 얼마나 작습니까? 그런데 소제는 그 입자의 직경이 모두가 다 똑같다 그 말입니다. 하나도 굵고 가늘고 그런것이 없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그의 생애를 우리가 가만히 보면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 여러분과 저와는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런데 또 그분의 본질적인 성품은 인성과 신성을 다 가지고 있는 도대체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사셨을까?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고, 어떻게 생각하셨고, 어떻게 걸어가셨고, 그분의 모든 처신은 어떻게 했을까를 우리가 살펴볼때 구약은 그분께서 이땅에 오셨을때 어떻게 살아가셨을것을 예언하셨고 복음서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때가 되서 오셨을때 어떻게 걸어가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 위대한 영광, 영예와 또한 찬란함과 그 명성과 이 모든것을 먼저 한번 예언에서 살펴보세요. 입자가 똑같다. 직경이 똑같다. 굵기가 똑같다. 하는 이말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고운가루, 맷돌로 얼마나 정교하게 갈았는지 그것은 균일하다는 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삶속에서 철저하게 균형속에 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힘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균형이 잡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균형잡힌,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삶. 우리 주님의 지상사역을 가만히 보게 될때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속에 은혜와 진리가 같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진리가 그렇게 고르게 갖추어져 있을까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복음서에서 살펴보게 될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무흠합니다. 완전무결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흠을 잡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속에 담겨있는 내용이나 말씀을 하게될때 주님의 영이 모두가 다 완전 무결하게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도 있고 동시에 진리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진리가 있으면 은혜가 부족해요. 은혜가 있으려고 하면 또 진리가 부족해요. 이와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는 연약 입니다. 불균형입니다. 불일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주님께서 고운 가루가,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게 될때 이땅에 오셔서 인성을 가지고 살아가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통해 볼때 우리 주님의 그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도덕적인 영광이라고 말하죠. 우리 주님의 모든 삶은 불규칙한것이 없습니다. 치우친 것이 없습니다. 불일치한것이 없어요. 변덕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이 그런 아름다움,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운가루에 기름을 붓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름이 두번째 요소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시게 될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시고 탄생하셨지요. 잉태와 관련해서 성령님이 역사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삶 속에서 공생애 시작하시게 될때 성령께서 내려 오셨고 우리 주님의 생애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런 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때, 성령의 능력으로 힘입음을 받고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간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니예요? 어떻게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성령님과 동등하신 분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할까요? 이것은 우리 주님 생애속에서 나타난 위대한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함 없이 성령의 능력없이 우리 주님께서는 단 한번도 걸어가신적이 없습니다. 발걸음을 뗀 적이 없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듣게 될때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탄하지만 우리에게 적용하게 될때 어떤때는 우리 생각대로 걸어가지 않습니까? 우리의 결정대로 가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적인 힘가지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게 될때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탄하고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우리는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의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그것으로 끝날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와같은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숙제 입니다.
또한 소제에 나타난 것은 무엇입니까? 유향입니다. 유향이라고 하는 것은 향기로운 것입니다. 향기은 아름다운 향기로써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흠향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시게 될때 아름다운 향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을때 동방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어요. 몰약, 우리 주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요. 유향은 우리 주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황금, 우리 주님은 원래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동방박사가 가지고 온 그 선물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로서의 그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 그 중에 하나가 향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시게 될때 모든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의 삶속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향기를 발견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셨는가? 여기 보세요. 도덕적인 영광속에서 드러나는 향기들 많이 있습니다. 곧바름입니다. 사랑입니다. 부드러움 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런것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부족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아름다움을 때때로는 상실해 버리고 우리가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될때 대단히 절망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습니다. 주님앞에 자백하게 되고 돌이키게 되고 그렇지요.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향기를 보세요. 진리가 가득합니다. 온유합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십니다. 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겸손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순복이 있습니다. 의로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믿음이 있습니다. 순종함이 있습니다. 또한 헌심이 있습니다. 순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것들이 나타나게 될때 이것은 향기로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말로 볼수 있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본질적인 영광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형기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생애를 잘 해주는 소제안에 금지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누룩이고 또 하나는 꿀입니다. 누룩은 무엇입니까? 누룩은 죄 입니다.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누룩, 위선입니다. 헤롯의 누룩,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누룩은 뭡니까? 도덕적인 악이예요. 또한 적은 누룩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교리적인 누룩은 교리적인 누룩입니다. 이런것은 주님께 물론 없습니다. 또한 꿀은 변질하는 것이죠. 꽃에서 벌이 꽃가루를 쭉 빨아들이죠. 꽃의 씨 방에서 긴 관을 꽃고 빨아들이죠.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을때 그것이 돌아올때까지, 꿀이 될때까지, 변질해서 된 것이 꿀이 아닙니까? 꿀은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변질되는 것은 없죠. 우리 주님은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이신데, 그 주님의 삶 속에서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관심, 우리를 향해서 항상 변치 않고 가지고 있는 열정과 사랑과 모든 정열, 이런것들은 우리주님의 삶속의 아름다움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2:13).
또 하나는 소제에 넣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번째것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죠. 소금의 역할이 여러가지 것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금은 골로새서 4장 말씀을 보면 우리의 말에 있어서 언어생활을 정말로 바르게 하게 위해서 사도바울이 권면하는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은혜로서 우리의 말을 소금으로 고르게 한 것처럼 하라. 간을 아주 적절하게 될때, 음식은 정말로 맛있지요. 똑같은 재료, 음식인데 간에 의해서 음식 맛이 전혀 달라지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우리가 언어 생활에서 매 순간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정말, 주님처럼, 주님은 철저하게 완벽하게 소금으로 고르함 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는 부패함이 없습니다. 소금을 치는것 같이 변질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변질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보게 될때 첫째로 마음속에 감탄하면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예배하게 된다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봉사하게 될때 우리는 변함없는 봉사, 변질하지 않는 봉사, 이런 섬김이 우리에게 있어야 겠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고 그와같이 걸어가게 될때, 우리는 그와같은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속에서도 나타나야 겠다 라는 것이죠. 주님 앞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이, 구원받고 주님앞에 갈때까지의 삶이 바로 이와같은 발걸음으로 갈수 있도록 주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세요. 첫째 탄생, 복음서에서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와서 마리아에게 말씀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올것을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처녀를 통해서 이제 탄생하실 임마누엘 되신 그분을 주님 오시기 700년전에 예언하셨는데 또 700년을 하나님께서 기다리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드디어 마리아에게 이 위대한 소식을 전하게 될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구약에 수많은 여인들이 임신하지 못한 그런 케이스들을 발견 합니다. 사라도 오랫동안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한 리브가도 그랬습니다. 또 한나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삼손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여러가지 그와같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와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죠.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이 와서 "성령이 너와 함께 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나실바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말슴하실때 우리 주님의 탄생을 예고 합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을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기이함을 언제나 버릴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깊은 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높으신 분께서 그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의 슬픔의 세상에 오셔서 고난과 역경과 반대와 오해와 거짓 고소와 또한 아픔과 영혼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과 이 모든것을 전혀 마다하지 않고 이 땅에 오셨다는것은 어떠한 겸손이고 어떠한 낮아짐인가 하는 그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애 속에서 구원받고 주님 앞에 갈때까지 영원토록 우리 주님의 이 낮아지심에 대해서, 그 낮아지신 탄생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항상 기억하고 잊지않고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언제나 우리를 추진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할때, 우리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때, 우리 주님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는가요? 나를 위해서 어떻게 낮아지셨는가? 우리는 여러가지 슬픔과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거나 또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나게 될때 그와같은 것을 기억해 보십시요.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낮아지셨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걸어가는 일에 있어서 변절하거나 또한 포기하거나 하는 일을 할수 있을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생각하게 될때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헌신속에 담긴 위대한 도덕적인 영광이 담겨 있다는 그 말입니다.
두번째, 우리 주님의 성장, 누가복음 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고 30세 공생애 들어가기 전까지, 그 기간에 관해서는 거의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성장하신 것에 대해서 아주 짧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지를 말씀했어요. "그 지혜가 자라가고 그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 주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서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어요. 그런데 그분의 지혜가 자라갑니다. 그분의 육체가 자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우셨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신것, 이것은 우리 주님의 영적인 성장 입니다. 성장에서 영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사회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성장하시게 될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본보기이죠. 우리가 성장하게 될때, 우리 자식들이 성장하게 될때, 이와같은 여러가지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균형잡힌 성장입니다. 이것은 하나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장은 무엇입니까? 지적인 성장, 그것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고 이런 성장, 그래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없는 그와같은 성장, 구원받지 않습니다. 영이 죽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여러가지 수많은 세상에서의 명성과 명예를 위해서 이제 지적인거나 육체적인 것의 성장을 원하지만 영적인 데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 영적으로 죽어있죠. 이런 점에서 우리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전에 또 한가지 열두살때에 예루살렘에 갔던적이 있죠. 잠깐 바로 그 위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2:46-47).
여기 보세요. 우리 주님이 열두살 소년이예요. 그런데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세요. 그런데 열두살이예요. 작은 소년인데 그 소년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박사들과 함께 앉아 있어요. 그런데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박사들을 가르쳤습니까?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는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듣고 물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우리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소년이 되어서 박사들을 가르치실수 있어요. 그렇게 하실수 있어요. 그런데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주님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말씀입니다. 사회성입니다. 관계 입니다. 인간 관계 입니다. 그런데서 우리 주님이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영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2:49).
어머니가 왜 여기 있는가? 라고 말했을때에 "내 아버지의 사업에 내가 몰두해야 할것을 어머니께서는 모르셨습니까?" 마리아는 알고 있죠. 나실바 그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리아는 어머니 아닙니다. 요셉은 아버지 아닙니다. 물론 육체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때에 항상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버지의 비지니스에 대해서 항상 마음에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열두살 소년도 항상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틴에이저의 소년들과 소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우리는 구원받고 이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업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때, 이 위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에 골몰하고 있는 가? 그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에 도덕적인 영광을 나타내신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가 받는 교훈입니다. 소년이예요. 내 아버지의 이 위대한 일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어머니께서는 감히 생각할수 있습니까?" 그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전부터 구속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기 전부터 수천년을, 장구한 세월을, 영원한 세월을 사실은 생각해 왔고 그리고 이 땅에 오셨을때 삼십년동안 생각했고 삼년의 공생애 동안에 단 순간도 그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산적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주님의 사업에 대해서 정말로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사는가요?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주는 도전 입니다.
요한의 침례를 받게 될때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침례를 베푸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오는데, 우리주님께서 침례를 받는다고 오니까 "제가 어떻게 주님께 침례를 드리겠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의를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겸손이 있습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제 죄를 회개하고 요한의 침례를 받습니다. 그런 경건한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그말을 한번 보십시요.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열두살때 이야기 했지요. "내 아버지의 일에 내가 생각해야 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 곧, 사역에 공생애에 들어가고 삼년 마지막에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것, 심판의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와같은 예식을 통해서,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의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은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에서 또한 주님의 생애 전체에서 도덕적인 영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광야 시험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시험하지요.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고 완전무결하신 그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구세주임을 입증했습니다. 도덕적인 영광이 환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 사역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가지 수많은 말씀들이 사복음서에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위대한 사역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균형과 조화 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주님게서 말씀을 하거나 기적을 베푸시거나 사람들을 가르치시거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거나 어떠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그 모든 일들을 우리가 말씀에서 읽게될때 균형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에서나 행동에서 장엄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장엄하면 왕들이 오고요 팡파레를 울리고요. 장엄함이 있을때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장엄하신데 온유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위엄이 있습니다. 위엄이 있는 사람은 오만하고 거만합니다. 그 사람들의 오만을 가리켜서 슈퍼실리알이라고 말합니다. 실리알이라고 하는 것은 눈썹입니다. 이 눈썹이 치켜올라갑니다. 그것이 오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위엄이 있는데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위엄이 있는데 겸손했습니다. 이런 조화, 우리 주님은 위대하세요. 위대한 사람은 자기가 위대한 것을 의식하고 자랑합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복음서에서 살펴보세요. 어떤 도덕적인 영광이 있는가? 위대한데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쉽게 잔인해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능력이 있는데 긍휼과 은혜가 가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의롭습니다. 공의로운 사람은 흔히 다른사람을 난도질 합니다. 가끔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한다고 하는데 잘못하면 다른 사람을 잘못하면 칼로 찌를수 있습니다. 난도질할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의롭지만 진리를 가지고 행하시지만 주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박애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거룩하시고 거룩한 진노가 있습니다. 거룩한 노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떤때에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화는 거룩한 화 입니다. 성전안에 돈 바꾸는 사람으로 가득할때 주님께서 화가 나셨어요. 그러나 그 화를 내시게 될때 거룩한 화이기 때문에 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거룩한 화를 내실때에 진노하실때 우리 주님 안에는 부드러운 동정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균형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모든 공생애 사역은 언제나 균형잡힌 조화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부드러우세요. 만일 사람이 부드럽다면 쉽게 연약으로 빠져들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부드러운데요 강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세요. 우리가 사랑하게 되면 자칫하면 감상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주님의 사랑은 의지 가운데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뜻 가운데 하는 사람입니다. 감상주의로 변질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사랑을 베풀다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감상적으로 빠져 버립니까? 열심, 우리 주님은 열심이 있었어요. 열정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뜻을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고 그 일을 행하는 철저히 열정적으로 행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떠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시작해요. 그렇게 막 시작하는데요. 그 다음에는 용두사미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충동적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을 하지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앚아 버립니다. 우리 주님의 열정은 어떻습니까? 열정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고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요하게 되면 무관심속에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고요한데 깊은 관심 가운데 계속 고요하셨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는 기도하는데 어떤때는 무심한 가운데, 교요함 가운데 가지 않나 염려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것은 그의 생애속에서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균형입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 어떻습니까?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 주님 자신의 뜻도 있어요. 그러나 자신의 뜻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이 언제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동등하신데 동등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육체 가운데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높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뜻은 언제나 자신은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러셨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뿐만 아니라 시련을 받을때 어떤 시련 입니까? 십자가 전에 체포되서 재판 받았어요. 재판 받을때에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언어적인 폭력입니다. 위협하고 수치를 주고 모욕을 주고 이랬어요. 군병 앞에서는 매 맞고 사람들은 야유하고 거짓 고소하고 이와같은 상황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와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만약 거짓고소를 당하면 우리는 열받습니다. 자기를 변호하려고 하고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고 그것이 우리의 본능적인 그런 모습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거짓 고소를 당하고 이제 매를 맞고 수치 가운데 들어가고 모욕을 당하는 순간에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너무나 고고하셨습니다. 복음서 말씀읊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재판장에서 어떻게 처신하셨을까요. 그와같은 불공평한것, 억울한 상황인데 주님께서 그런 모습이나 그런 느낌이나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았다. 우리 주님게서 고고했습니다. 여전히 위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빌라도 앞에서 이야기 할때 죄인으로서 얘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얘기할때 대제사장들에게 애기할때, 군병들 앞에서 태도, 헤롯 앞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때 야유할때 우리 주님께서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요? 우리는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통해서 많은 힘을 얻습니다. 많은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때에 어떻습니까? 우리는 막 울고 땅을 치고 억울해서 견딜수 없어서하고 우리는 이러는가요? 여기 보세요. 고고하고 위엄하고 고요하고 그리고 조용했습니다. 어떤때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입을 벌리시면 위엄가운데 말했어요. 어떤때는 입을 다물었을때는 그냥 잠잠했습니다. 그냥 양같이 가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삽자가에 돌아가실때 어떠셨습니까? 가상칠언을 우리는 기억하지요. 십자가에서 일곱가지 말씀만 생각해 보세요. 첫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러분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혀서 고통 가운데 갈때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욕을 합니다. 저주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용서를 빌었어요. 이것은 도덕적인 영광이 아니예요? 우리는 여러가지 여러움을 당하게 될때, 억울함을 당하게 될때, 고통을 당하게 될때, 우리는 쉽게 거기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여전히 사역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사역입니다. 두번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는 순간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 구원하는 일을 끝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는 때까지 주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름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강도를 구원시키는 일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그런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여자여 보시옵소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염려하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님은 버림받아야 해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님게 고뇌였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서 버림받은것은요.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법적으로 그 아들을 볼때에 아버지가 버린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법을 통해서 그 아들을 버렸어요.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이야기 할때, 말씀 하실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버림받는 순간에도 이제 그래서 자기는 버림을 받고 인간의 죄를 대신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죽음의 순간을 맛보시는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섯번째, 주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그 고통가운데서, 목마른 고통을 말로 할수 없는 것인데요. 아픈 고통, 수많은 고통이 있는데, 영적인 고통,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목마르다고 할때 주님께서는 무엇때문에 이 이야기를 했을까요? 구약의 예언이 있습니다.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항상, 어느때까지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 주님의 열정과 우리 주님의 충성과, 우리 주님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귀히 생각하는 자세는 죽는 순간에도 여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여섯번째, 우리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 때문에 그렇게 오랜 장구한 세월을,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비지니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때가 이루어졌을때,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어요.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도덕적인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가상칠언의 제일 첫번째는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가상칠언의 중앙에 있는 네번째 말씀은 하나님으로 이어집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아니예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버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대속의 죽음 가운데서 죽음을 맛보셔야 하기 때문에 버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나이다." 그래서 아버지로 시작했고 하나님으로 중앙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아버지 입니다.
부활에서 생각해 보세요. 엠마오의 제자들, 낙심속에 돌아가고 있을때 우리 주님께서 찾아가셨지요.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가볍게 책망 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이야기 해주었어요. 이것이 균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책망도 하셨지만 가르쳐 주시고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음이 뜨겁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했어요. 또 한가지,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 나서 갈릴리로 갈때 같이가자 해서 여러 제자들이 같이 갔지요. 우리 주님은 거기까지 또 쫓아갔어요. 갈릴리 바다 그 곁에, 그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입니다. 갈리리 바다 아침에는 아마 안개가 자욱할거고 희미할 것이고 아직 어둠이 깃들여 있을때 그렇게 새벽에 우리 주님이 거기가서 바베큐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제자들이 밤새도록 한마리도 못잡았지요. 그 제자들을 먹이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 주님입니다. 그리고나서 제자들이 왔을때, 베드로가 왔을때에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책망했이죠. 도전입니다. 그래서 그로하여금 네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양을 먹이라고 말씀했어요. 삼년전에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네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사람낚는 어부예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양을 먹이라."말씀했어요. 음식을 준비 했어요. 주님께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것과 균형이 있습니다. 책망하고 도전합니다. 그렇게해서 베드로를 위대하게 세웠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오늘 저희들은 도덕적인 영광을 보았어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셔서 이땅에 오셔서 본질적인 영광을 가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영광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 있다. 그분의 말씀, 어떻게 하늘에서 이땅에 오셨는가? 우리 주님께서 부요하신 분인데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난한자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의 낮아지심, 허리를 굽히심입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위대한 도덕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그 말씀을 들을때마다 은혜와 또한 감동과 우리 마음의 도전과 또한 하늘나라의 위대한 것을 비쳐주시는 위대한 계시와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순종과, 그분의 하나님 앞의 순복함과 그리고 그분의 사역, 봉사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영광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첫째, 우리 예배가 풍성해집니다. 이 도덕적인 영광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는 성도들, 주님앞에 예배드리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마음속에 담는 성도들, 묵상하는 성도들은 주님을 효과있게 섬길수 있는 성도 입니다. 또한 이 도덕적인 영광을 마음속에 깊이 세기고 마음속에 두고 사는 성도들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닮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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