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덕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박이레 2026. 10. 3. 15:44

< 덕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 한봉래 형제님 / 26년 9월 20일 일요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6).

아멘, 제가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단어들을 쭉 살펴봤는데요.  예를 들면 '여호와 라파' 그러면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시는 분이다. '여호와 닛시' 그러면 하나님께서 승리의 깃발이시다. '여호와 샬롬' 하면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여호와 치트넥', '치트케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의가 되신다' 라고, 마지막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걸 원어로 보면 이렇게 '여호와 로이'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로 돼 있지만 하여간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다.
이 표현은 여호와가 들어간 여러 가지 이름 중에서 나머지는 전부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신다 쪽이면, 이건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하나님의 사역보다 '인격'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건 물론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나를 길러주시는 목자시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요. 저희들이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런 거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선한 목자라" 이렇게 하셨죠. 그래서 주님이 저희들에게도, 구원받은 저희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시고, 하늘나라까지 이끌어주시는 목자가 되시는 거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다음 보겠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번역을 잘한 건데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인도자로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니까 나는 부족함이 없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엄청난 고난 속에 삽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니고, 먹을 게 없어서 진설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고 그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되지 않으신 적이 없다'입니다. 자기가 먹을 것이 없고, 적에게 쫓겨 죽을 지경에 빠져 있을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는 목자셨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했고요.

그다음에 2절 보시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이 대목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자는 우리를 돌보시되 두 가지로 돌보십니다. 푸른 초장이니까 먹을 것을 주시고요. 양은 풀을 먹는 거죠. 그다음에 먹은 후에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데요. 먹을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내가 정말 잘 먹었다. 정말 배고픔이 해소되었다라고 느끼는 것은 말씀을 먹을 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시고, 그다음에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은 항상 물은 둘 중에 하나죠. 저희들이 물을 해석할 때 항상 말씀이거나, 아니면 성령님이거나, 여기서는 앞에 말씀이 나왔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실 때 두 가지를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고, 그다음에 성령님은 이렇게 이해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사용해서 그 말씀을 내 삶 가운데 적용하게 하신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신다라고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3절 보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랬는데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말씀을 적용하며 사는 우리가 소생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목자시고, 말씀을 주시고, 성령이 인도하셔도,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세상 가운데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소생시키십니다.
이건 예를 이렇게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어려움 속에 빠지고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렇게 빠져나오는 경험이 많은데요. 그중에 하나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시글락에서,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가냐면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 아기스가 시글락을 줍니다. 거기서 부하들하고 함께 살죠. 600명과 같이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아말렉이 와서 시글락을 치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집을 다 불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제 다윗이 와 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죠? 이 사람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더 이상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웁니다. 성경이 그걸 표현하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이 다윗의 부하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생각해 보니까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 블레셋으로 오자고 그랬는가? 이스라엘 땅에 살았어야지, 블레셋으로 넘어오자고 한 다윗이 책임자라고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다윗이 여기까지 들어갑니다. 자기 가족은 다 포로가 돼버렸어요. 자기 전 재산은 뺏겼거나 불에 태워버렸죠. 그리고 자기와 함께 신뢰하던 부하들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들어갑니다. 이제 그는 소생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그가 소생되냐면 그가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을 힘입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을 힘입었다는 것 하나만 해석해 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 모든 것이 다 사라졌어도, 상황도, 내가 가진 능력도, 모든 것이 사라졌어도 그가 이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계신다.' 이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다. 이게 그를 소생시키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렇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 묻습니다. 신하들이 돌로 치려할 때에도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기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자." 뭘 물어보냐면 "내가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그 아말렉 사람을 치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그렇게 해주겠다." 그래서 그가 다 되찾아 옵니다. 이게 "내 영혼을 소생시킨" 여러 가지 경험 중에서 극적인 경험 하나를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다윗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자기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의 길로"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생애를 살게 하십니다. 놀라운 거죠.

그다음에 4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그가 또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죽는 거구나.'라고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실제로 죽음의 위협 앞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시 보면 4절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목자가 자기 양을 죽을지도 모르는 골짜기 속에 넣었을까?'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그때 양들이, 자녀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음 속에 빠져서 이제 죽는구나라고 하는 상황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오는데요. 이건 이 경험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쫓겨다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셔놓고 현실적으로는 사울이 왕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아들 요나단이 왕이 되기를 바래서, 하나님이 기름 부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죽음의 위협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맨날 도망다녀야 되죠. 10몇 년을 도망다닙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왕으로 세워놓고, 미래의 왕이다라고 세워놓고, 현재의 왕 사울에 의해서 그렇게 죽음의 위협 속에 살게 하셨을까요?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그를 진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이스라엘 왕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저희들이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들에게 어려움이 오는 것은 하나님이 저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만도 아닙니다. 우리를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래서, 그가 한 10몇 년 동안 사울에 쫓겨다니면서 어떨 때는 블레셋으로 도망가고, 안 되니까 다시 나와가지고 압둘람 굴에 있고, 이와 같은 어려움을 이렇게 당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때 하나님이 정말 내 하나님이구나, 나와 함께하시구나를 그가 실제로 경험합니다. 말씀으로 경험한 게 아니고, 자기의 삶 속에서 경험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돼어서 이렇게 말하죠. "사울 시절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했으나" 다윗이 자기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시대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행하자."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살자. 이게 다윗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 그가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자라는 새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는 저는 이렇게 이해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1. 막대기부터 보겠습니다. '막대기는 적을 쫓는 것'입니다. 양을 잡아먹으려고 위협하는 사자 곰들을 칠 때 막대기로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의 위협으로부터 공격할 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2. '지팡이'는 목자가 '양을 어려움 속에서 끌어낼 때' 이 지팡이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을 때, 나중에 성도님들께서 사무엘상을 한번 찾아보시면 그때 사울이 다윗을 자꾸 추격하는데 추격하다 보니까 한 번은 이렇게 합니다. 다윗의 반대쪽에다가 이스라엘 군대를 매복시켜놓고 이쪽에서 추격해 갑니다. 다윗은 저쪽에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의 군대가 있는 줄 모르고 사울이 이쪽에서 모니까 도망갑니다. 광야에서, 그래서 다윗이 뒤에 쫓아오니까 막 도망가야 되죠. 앞에는 저기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독안에 든 쥐입니다. 그는 이제 도망 나갈 수 없습니다. 사울이 전략을 짜서 완전히 다윗을 체포하기로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건지십니다. 어떻게 건지냐? 저희들이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저희들 위에서 보면 저희들은 알죠. 여기는 군인들이 있고, 그가 그리 도망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사무엘 상에 표현돼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 위기를, 이게 막대기죠. 어떻게 사울의 계략을 파하시느냐? 갑자기 소식이 옵니다. 블레셋이 침공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지금 다윗을 잡을 때가 아니고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구원해 냅니다. 이게 막대기입니다.
두 번째, '지팡이'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길러내셔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시냐면 사울 왕을 그에게 두 번이나 넘기십니다. 동굴에 있을 때, 혹은 또 뭐죠? 이스라엘 진에서 자고 있을 때,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들어갑니다. 진 안으로, 두 번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줍니다. 그리고 그때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게 지팡이입니다. 그를 보호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생존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길러내십니다.' 이게 "사망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막대기와 지팡이를 사용해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죠. 사울을 죽이지 않을 때, "여호와께서 사하시거니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5절을 보시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다윗의 생애 가운데를 보면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그는 도망가야 합니다. 울며 기드론 시내를 건넜죠. 그때 놀랍게도 그가 도망가고, 예루살렘은 다시 압살롬이 차지하고, 거기서 압살롬이 왕으로 선포하고, 하는 이 비극적인 슬픈 경험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십니다. 뭘로 위로하시냐면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가지고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자기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압살롬에 의해서 모독적인 피난을 가야 했을 때,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이스라엘에서 손님 접대할 때 그런 대목이 나오죠. 이렇게 손님이 오면 일단 입을 맞추고 그다음에 씻을 물을 주고, 물로 씻고 입을 맞추고 그다음에 머리에 기름을 부습니다. 이게 환영하는 태도입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을 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환영하는,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힘내도록, 그리고 다윗을 향하여 기름을 붓고 정말 다윗을 환영하는 그런 사람들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이 고난의 세월에서도 제가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6절에 다윗이 결론적으로 말하는데요. 자기 평생을 보니 내가 주님을 따라간 게 아니고, 양이 목자를 따른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이게 그가 자기 생애에 대한 결론적인 고백입니다.
"선하심"은 이렇게 보겠습니다. 선하심은 어떤 선하심이냐면 이것도 다윗의 생애 가운데 밧세바와 범죄합니다. 그리고 자백해야죠. 자백을 안 합니다. 얼마 동안요? 1년간 자백을 안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범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짓누르십니다. 그리고 자백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지적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지적합니다. 그때 다윗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자백합니다. 자백했을 때 나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렇게 선언하고, 이 선언의 배후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십니다. 그를 선대하십니다. 그를 범죄했을 때에도, 그가 마땅히 죽어야 될 때에도, 그를 선으로 대하셔서 그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평생을 뒤따랐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다." 23장은 1절은 광야에서 시작합니다. 초장이 있고 그다음에 물이 있는 광야에서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더할 것입니다. 이 놀라우신 주님을 다윗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이 주님을 예배드렸습니다. 이 주님이 저희에게 어떻게 선하셨는가,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소생시키시고, 사망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지 저희들이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저희들이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에게 항상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이 성경 말씀을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적용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저희들이 계속해서 주님 오실 때까지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로 다시 모여서 놀라우신 주님을 예배드리고, 지역 모임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다시 듣고, 그리고 그 말씀을 적용하며 살고, 이게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삶의 모습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