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덕언 :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이다 - 하나님이 우리의 작전이다.

박이레 2026. 1. 20. 17:55

< 덕언 :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이다 - 하나님이 우리의 작전이다. > 한봉래 형제님 / 26년 1월 18일 일요일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8-16).

아멘,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7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맨 처음에 '여호와 이레', 했고요. 그다음에 '여호와 라파'를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이름이 '여호와 닛시'입니다. 여호와 닛시는 이제 뜻이 '하나님이 우리의 깃발'이다. 닛시라고 하는 것은 깃발인데, 전쟁하는 부대에 보면 이렇게 깃발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깃발을 가지고 군인들이 모이기도 하고, 전투를 하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고, 이렇게 작전을 이렇게 보여주는 깃발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작전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투 방법이다라고 하는 여호와 닛시입니다.

우선 전쟁을 보면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인데요. 이 전쟁의 특징 몇 가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그러니까 구원받은 후에 첫 번째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고 나면 이제 이제 계속 승리만 있고, 믿음으로만 살고, 실패는 없고, 내가 주님을 믿었고, 주님이 내 주인이고, 주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니 내가 넘어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렇게 구원받았을 때의 그 첫 감격과 달리 그리스도인이 최초로 싸워야 되는 전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게 되는 것이 첫 번째 전쟁이고요.
그다음에 이 전쟁은 두 번째로 어떻게 말하면 '대대로 해야' 됩니다. 이게 한 번 이겼다고, 혹은 한 번 졌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이건 그러니까 평생을 싸워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 최초로 놀라는 전쟁입니다. 최초로 놀라게 되었고, 전쟁이 있구나. 구원받은 후에 전쟁은 없다? 아니요.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한 번 이겼으니 이제 그다음부터는 계속적인 승리만 한다, 아닙니다. 계속 싸워야 됩니다. 실패했어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승리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전쟁을, 누구하고 전쟁이냐라고 봤을 때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아말렉하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말렉이 누구냐 그러면 에서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부분을 형제님들이 전부 '육신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아직도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으로 살아야 되죠. 그리고 승리해야 마땅하죠. 또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여전히 세상적인 것,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이걸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죽을 때까지 싸워야 되는 전쟁이다. 첫 번째 뜻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이 전쟁은 두 군데서 일어납니다. 이제 아말렉이 공격해 오니까 모세가 여호수아한테 "네가 나가 싸워라. 군인들과 싸울 만한 사람 데리고 나가 싸워라. 나는 산으로 올라갈게." 여호수아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니, 같이 같이 싸우시든지, 이렇게 좀 작전을 지시하시든지, 이렇게 해 주시면 좋은데 나는 산으로 올라갈게.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싸움은 두 군데에서 일어납니다. 산 위에서, 산 밑에서,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승패는 여호수아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걸 잘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달려 있지 않고 모세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게 기이한 거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승리합니다. 그런데 모세 후손이 내려가면 여호수아가 아무리 강력한 힘으로 아말렉을 쳐도 집니다. 이게 기이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제 '승패는 산 위에 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육신과의 전쟁은 우리 육체를 제어하고, 우리 육신적인 생각들을 제어하고, 하늘에 속한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어디에 달려 있냐? 내가 육신을 어떻게 잘 제어할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을 볼 때,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이기는 것이지, 내가 뭐가 약한지를 알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알고, 그래서 그 방법을 잘 사용함으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있고, 여기에 승패가 달린 거지, 그가 얼마나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고, 의지가 강하고에 달려 있지 않다. 이게 두 번째 교훈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이 전쟁 기록을 책에 기록해 둬라.' 그래서 성경에 기록해 져 있고요. 다시 말하면 신약 성경에도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신약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로마서 6장입니다. 로마서 6장, 7장, 8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저희들이 보통 이렇게 말하죠. 구원은 세 가지입니다.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 그다음에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구원. 그래서 형벌로부터 구원이 3장, 4장, 5장에 나오죠. 6장, 7장은 지옥에 관한 심판으로 구원이 아닙니다. 6장, 7장은 해석할 때 전부 죄를 이기는 구원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공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 이것은 심판받는 구원 아닙니다. 죄와 싸우고 갈등하면서 내가 어떻게 이 갈등에서 이길 것인가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 이제 로마서 6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그랬습니다. 자기가 자기 속에 있는 육신적인 경향과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원리를 기억하고 싸워야 합니다. 자기가 잘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다. 모세에게 승패가 달려 있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며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이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다시 약간의 예를 좀 보겠습니다. 성경을 조금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몸까지 구원을 안 하시고 영혼만 구원하셨죠. 이걸 잘 나타낸 구절을 하나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인간은 셋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 몸입니다. 여기서 몸은 육체라고 표현돼 있는데요. 영, 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3개의 요소 중에서 두 개가 구원받습니다. 영혼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남아 있습니다. 이 육체는 언제 구원받냐? 주님 공중에 오실 때 구원받습니다. 주님 공중에 오시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주님의 부활하신 몸으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이때 육체가 구원받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속에 육신적인 연약이 사라진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놀라운 몸으로 변화돼서 주님과 같이, 주님께서 그러셨죠.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이렇게 문을 닫고 있는데 쓱 들어오셨죠. 그렇게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리고 특히 우리가 배고프고, 또 자꾸 갖고 싶고, 이런 욕구 없이, 정말로 구원받은 영혼과 참으로 조화로운 그런 육체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육체가 영혼을 거스립니다. 그러면 이제 거스리는 육체를 따라가면 안 되죠. 구원받았으니 성도답게 살아야 되죠. 그래서 성도다운 삶을 방해하는, 이탈시키는 이 육체를 제어해야 합니다.
이건 성경 안 찾고 제가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인가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은" 사도 바울도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사도바울같이 영적인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교회를 계시하시고, 그를 사용하시고, 그를 놀랍게 인도하셨죠. 함께 하셨죠. 그래도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죠? 그가 사도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버림이 될까 하노라." 이때 버림은 구원을 버림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 지면 구원을 잃어버리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성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간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금이 되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버림받지 않도록" 그가 사도로서의 기능을 하도록.

그리고 그럼 이런 상태에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건데요. 이것은 다시 성경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사사기 구약 성경, 신약 성경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사사기 3장 보시죠. 에훗라고 하는 사사인데요.

"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삿 3:16-22).

여기 이제 에훗이라고 하는 사사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모압 왕 에글론' 인데요. 모압도 이스라엘의 친척입니다. 암몬, 모압이 다 롯의 후손들이잖아요. 그래서 이게 다 육신을 가리킵니다. 이 에글론이 '비둔했다' 그랬으니까, 이 육신은 욕구가 많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많아요. 우리한테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게 많아요. 그래서 그거 해주면 아주 그냥 비곗덩어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게 육신의 또 하나의 비유는, 자기 혼자 서늘한 다락방에 있는 거예요.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고 자기 혼자 시원한데 혼자 앉아서, 이렇게 있는 이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떡합니까? 힘이 없으니 조공 바쳐야 합니다.
우리도 육신의 욕구가 너무 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육신의 육체에 굴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공을 바치다 보면 에우시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일어납니다. 이렇게는 못 산다. 언제까지 내가 육신에 굴복하며 살 거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이렇게 살 수 없다! 라고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이 에훗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싸워야 됩니다. 어떻게 싸워야 되냐면 다시 보겠습니다. 모세가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호수아가 싸웁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뭘로 싸웠죠? 칼로 싸웁니다. 에후도 칼을 만듭니다. 근데 이 칼은 어떤 칼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받아낸 칼'입니다. 그래서 이게 자기가 만든 칼입니다.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의 날선 검을 만듭니다. 이 칼은 성경에 있다고 쓰는 게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성도에게 특별히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언제 주시냐? 기도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때, 모임에서 교제할 때, 교회에 나와서 이 고통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주님 말씀해 주옵소서.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습니까?" 하고 있을 때, 교회에서 들려지는 말씀 속에서, 혹은 자기가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 그 말씀의 칼을 갈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칼을 가지고 찌르는 것입니다.
어디서 가냐면 길갈 근처, 19절의 길갈에서 돌아섭니다. 길갈은 잘 아시는 대로 할례를 하던 곳입니다. 할례는 무슨 뜻입니까? 육신을 베어버리겠다고, 육신과 결별하겠다고, 하갈을 취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만 받겠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고 했던 그 길갈에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에글론에게 말하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전투입니다. 여호와 닛시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도록 지휘하신 그 방법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가지고 이제 당신과 싸웁니다. 이렇게 하고 칼을 빼어 찌릅니다. 이런 이게 이제 하나의 어떤 상징적인 사건인데요. 이와 같은 전투를 저희들이 해야 합니다.

이건 나중에 신약에 있는 걸 로마서 하나만 보시겠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뭐가 있냐면 '내 속에 있는 육신을 죽여야 된다.', '나는 육신을 죽였다.' 라고 말하는 가르침들은 전부 이단적인 겁니다.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네.", "이 사람은 아직 살아있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부 이단입니다. 로마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가르침이 모임에서 한참 동안 유행했습니다. 박희범 형제님이라고 하는 형제님이 퍼뜨린 사상인데요. "이 죽은 사람이 살아있네." 막 이렇게 자기를 죽여야 된다. 자아를 죽이기, 그건 전부 나쁜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6장 보면요. 로마서 6장에서 지금 이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로마서 6장은 '세 가지 동사'를 말합니다. 동사만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알지 못하느뇨", "앎이로라" 첫번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여길찌어다" 알고,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육을 죽일 수 없습니다. 육을 죽인 사람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걸 알고, 그다음에 그렇게 '여기고', 이게 믿음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드리라" 그다음에 세 번째, 13절 "드리라"입니다. 이게 전투 방법입니다. 알고, 여기고,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육신적인 생각들을 죽이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여호수아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승패는 모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도움 없이 죽이려고 하는 것, 그 예가 로마서 7장입니다. 그는 곤고한 자가 됩니다. 이게 이제 책에 기록돼 있는 거고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에있는 모세인데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신약 성경에 의하면 무엇과의 교제를 뺄 수 없냐하면 모임에서의 교제를 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은, 주님이 머리 대신 교회 가운데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걸 혼자 해결하는 게 아니고 모임 안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제가 간증을 한번 드렸었는데요. 제가 이제 담배를 피웠는데 구원받고 나니까 누가 말을 안 해도 담배를 끊어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담배를 끊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끊었냐하면, 제가 담배를 하루에 한 갑쯤 피웠거든요. 이걸 이제 내 의지를 사용해서 끊었습니다. 언제까지 끊었냐? 담배 한 대까지 끊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에 가면 저희 집 앞에 그때는 포장마차가 있어가지고, 포장마차에서 왜 그때는 담배를 한 개피를 팔았는지 몰라요. 한 개피를 팔았어요. 그때는 참새 구이도 있었고, 오뎅도 있었고, 소주도 한 잔 팔았어요. 아니 집 앞에 하필이면 포장마차가 있어서, 어찌저찌 하루를 다 이제 일을 직장 다니고, 수업도 하고, 그리고 이제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잘 살고 가다가, 집 앞에 포장마차에서 담배 한 개 피려고 삽니다. 그러면 얼마나 자존심이 무너지는지 모릅니다. 이게 뭐냐? 그 앞에 말씀 보고, 기도하고, 뭐냐 이게? 그리고는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담배 한 개비 그거 못 참아서, 그런데 이걸 해결을 못 했어요. 부끄럽게 제 의지로 해결을 못 했어요. 언제 해결했냐? 수양회 참석해서 해결했어요. 수양회가 2박 3일이잖아요. 수양회에 있으면서는 못피잖아요. 포장마차도 없고, 그래서 2박 3일을 담배를 딱 끊으니까, 그리고 나가니까 끊어지더라고요. 이제 물론 어떤 분은 의지가 강한 분이 계세요. 의지가 강해서, 저는 그렇지 못하지만. 제가 강서에 있을 때 김우종 형제님 아버지가 계셨어요. 할아버지인데 김우종 형제님 아버지가, 우리 모임에 오셨는데 자기는 자기는 담배를 이렇게 끊었대요. 담배를 이제 자기가 끊으려고 할 때, 이미 자기가 가진 담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걸 놓고 그걸 바라보면서 끊어버렸대요. 그래서 제가 "대단하시다." 그런 분도 계세요. 훌륭하시죠. 그런 분이 계시지만 저는 교회 가운데서 성도들과 함께할 때, 내 혼자 할 수 없었던 것을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게 저는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임 안에서 저희들이 함께 이 같은 일을 이루어내고, 함께 기뻐하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찬양하고,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