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뉴욕 플러싱 수양회 08_복음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박이레 2021. 7. 24. 15:38

< 뉴욕 플러싱 수양회 8_복음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정형모 형제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우리 주님께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 입니다. 주님 자신이 진리 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래서 그 분이 말씀 하신 것은 진리 인데도 너무나 중요 해서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반복 해서 말씀 하고 계십니다. 확실한 것이다. 그냥 건성으로 넘어 가지 마십시요, 또 하나의 성경 구절 이라 생각 하지 마십시요. 주님이 지금 여러분 영혼에게 말씀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여기 듣는다는 말씀은 이제 저희들이 읽은 말씀 속에 자주 나오는 데요, 듣는다. 그냥 귀청이 울려서 그런데 그것이 아무런 내 머리에 입력되지도 않고 내 마음 속에 기록 되지도 않은 채로 그냥 듣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요, 여기 주님께서 이렇게 간절히 말씀 하세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주님이 어떤 메세지를, 어떤 기쁜 소식을 전하실지, 들으세요.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이분은 영생을 주십니다. 어떻게 영생을 주시는가? 하나님께서요, 우리 죄를 위해서, 죄를 감당하셔야 하는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죄를 감당하면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리고 우리를 심판 하셔야 하는데 하나님 아들을 심판 하셨어요. 그래서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피 흘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첫째 그분의 죽음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갚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무덤 속에 들어 갔다가 사흘만에 살아 나셨어요. 살아 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할때 우리는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자기도 살아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바로 이 분께서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영생, 한번 살면 영원히 죽지 않는 것, 두 가지 종류의 영생이 있는데요, 그것은 조금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가지 종류의 영생 중에 정말로 복된 영생이 있고요, 저주의 영생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주님과 영원히 살수 있다. 여러분, 2차 대전 때요, 나치에 끌려가서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사람들, 유대인들, 거의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죠. 그 사람들이 철조망에 서 있는 사진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보세요. 헐벗고 그 다음에 피골이 상접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살아 있지만 사는 것이 아니고요, 그냥 연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말고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호강 한다고 합니까? 호강하는 것은 자식들 잘 호강한다, 돈이 좀 많아서 호강한다. 호강 하는게 뭐예요? 편안하게 사는 것, 즐겁게 사는 것, 근심 없는 것, 그런것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사람답게 사는 것, 똑같이 밥을 먹어도 정말로 사람답게 밥을 먹고 똑같이 이야기 해도 좀 고상하게 이야기 하고, 여러가지 생활을 하게 될때 사람답게 사는 것, 그런데 하나님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었는데 우리는 죄 가운데 짐승같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는 이 바보같은 인생,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 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대화하고 하나님과 같이 누리는 것을 누리고, 하나님이 누리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 이십니다. 영생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칠십, 팔십이면 죽는다, 죄 때문에 죽는 것 이예요. 그러나 이 모든것을 초월하고, 어떻게 초월 합니까? 죄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는데, 이 죄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셨어요. 그래서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 합니까? 우리는 죄값을 못 갚지만 나 대신 죄값을 갚아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주님이 갚아 주신것을 내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내가 믿음으로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내가 받아 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 입니다. 그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영생을 얻는사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죠. 사망에서 물론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여기 다시 진실로 진실로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이 때는 곧 지금 이예요. 지금 입니다. 죽은 자들, 어떤 죽은 자요? 지금 죽어서 시체가 되어서 양안실에 있거나 무덤에 들어간 사람 말고요, 아직 목숨은 살아서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 말입니다. 살아 있지만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만 기도는 불가능해요. 기도하는 모양은 취할 수 있지만 나는 주님 앞에 인격되신 그분에게 내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이, 호흡 하고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어요. 구원 못 받았어요. 그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무엇을 합니까? 여기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죽은 사람이, 만일 여러분과 제가 구원 안 받았는데, 구원 안 받아서 하나님과 대화 못합니다. 그런데 대화 할 수 있도록 처음에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뭘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이 우리를 감동 하셔서 내 영혼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 "하나님 내 미래를 생각할 때, 나는 영생에 대해서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나는 구원받고 싶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 주님 앞에 그냥 손 들고 나오는 사람, 이 사람은 들을 수 있어요. 그 듣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지금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음성이예요?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주님이 하신 약속 이예요. 이 말씀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절대로 번복하지 하니하고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고 일구이언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기 때문에, 그 지킨 말씀, 주님은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냥 말만 하셨어요? 아니예요, 그 분 말씀이 정말로 뒷밭침 해주는 것은 실제로 그 분이 우리 죄를 담당 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500불, 카드 가지고 긁을때에 긁는 것은 쉽지요. 긁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뭡니까? 500불 이상의 돈이 은행에 있어야 합니다. 있으면 긁을때에 효력이 발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00불이 없는데 긁으면 반환 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 주님이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 주님이 빈말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약속을 하실 때에, 주님은 약속이 약속 답도록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더 필요하세요? 이것보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구원에 대해서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는가? 주님은 다 이루어 놓으셨어요. 이제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주님 앞에 "주님, 나는 이런 구원이 필요 합니다. 주님 다 이루셨으니 감사합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말씀 드리십시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요, 지금이 이 말씀을 들을 때라, 듣는 자는 뭐라고 말씀 했습니까? 25절에,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귀청이 울리는 것으로 그저 단순히 듣는 것 말고, 정말로 내 마음이 겸손해져서, 정말로 필사적이고 절실해서 "하나님 나는 죄인인데, 이제 죽으면 심판이 있다는데 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 나를 도와 주세요." 라는 영혼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는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듣는자는 살아 나리라" 듣는자는 어떤 사람 입니까?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얘기 했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메섹에서 나타나셨는데, 주님이 나타나셨는데, 그때 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때 나는 그 말씀을 처음으로 순종 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처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간, 그것은 구원받는 순간 입니다. 구원받게 될때까지 나는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영예를 드린적이 없어요. 나는 항상 그 말씀을 묵살 했고, 그 말씀이 아무 의미 없다고 지나쳤고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불경한 생활을 한 거죠. 그런데 처음으로 나 자신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 구원 받은 순간 입니다. 내가 죄인이고 영원한 멸망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내가 정말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서 이 음성을 듣게 될 때, 이 음성이 그렇게 달 수가 없어요. 절실한 사람은, 목말라서 거의 죽어갈 적에, 사막에서요. 한잔의 물이 딱 주어졌을 때, 여기 물도 많은데, 옆에 가서 물 한잔 주는 것은 필요 없어요. 물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사막에서 물 한잔 줄 때 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사막 속에 살고 있어요. 죄로 인해서 우리는 죽어 가고 있어요.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받으세요.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그 다음에 28절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이히 여기지 마세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 뭐라고 말씀 했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아니, 무덤속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요. 주님이 나중에 다시 오세요. 우리가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데요. 구원받고 죽은 사람이 있고요. 구원 안 받고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이 있어요. 주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옵니다. 장차 와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적선하고 자선 사업하고 십일조 내고 이런 사람이 아니예요.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선한 일을 했어요. 착한 일도 했어요. 그러나 그 착한 일이 절대로 그를 구원해 줄 수 없어요. 우리가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것은 다 헛것 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실 때 그 보혈만이 우리 죄를 용서 하셔요. 이 악한 사람들,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 세상에 악한 사람의 종류가 두가지 종류가 있어요. 아주 대놓고 악한 것, 깡패, 살인 하는 사람, 사람 죽이고 때리고 강간하고 폭력을 쓰고 아주 대놓고 악한 사람들 이예요. 우리는 머리를 흔드는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묘하게 악한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악한 사람들도 거부하지만, 왜? 악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거부 합니다.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 또 하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 종교인들,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십일조 바치고 교회 다시고 열심히 일하고 집사 장로라고 하는 사람들, 그런데 구원받지 않고요. 자기 종교적인 커리어를 놓고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악한 종류, 악한 것 이예요.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 악한 사람 입니다. 무엇이 선한 일인가? 선한 일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는 이 위대한 은혜에 대해서 정말로 우리 자신을 깨닫고 그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감사하게 받는 사람, 이것이 선한 사람, 구원받는 사람 이예요.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면 이 두 부활은 어떤 부활 입니까? 여러분 믿는 사람들만 부활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안 믿는 사람도 다 똑같이 부활 합니다. 부활 하는데,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아요. 그런데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무덤에서 살아나서 몸을 가지고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영원히, 아름답게 멋지게 고결하게 그리고 위엄있고 장엄하게 그렇게 행복하게 산다는 거예요. 그러나 악한 사람,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 주님의 십자가를 여전히 마음으로 거부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요, 자기 죄를 자기가 갚아야 합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죄인이라 죄 값을 갚아야 해요. 그런데 주님이 피 흘려 돌아가신, 내 죄값을 다 갚으신 이 일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내 죄를 내가 갚을 필요 없어요. 내 심판은 이천년 전에 주님께 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어떤 영생일까? 주님과 함께 아름답게 사는 행복한 영생 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부활 합니다. 영생 합니다. 어떤 종류의, 어떤 질의 영생인가? 심판의 영생이다 그 말입니다. 부활 해서요, 불못에 들어가서 뜨거운 고통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서 이를 갈고 사는 그런 영생, 우리는 두 가지 영생이 있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두 가지 종류의 영생 중에 하나 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갑니다. "이 말씀을 듣는자는 살아 나리라"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주님 앞에 진실하고 겸손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손들고 나아 온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기꺼이 교제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저희들이 열왕기하 5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시리아의 군대장관 입니다. 이 당시의 시리아의 왕은 벤하닷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람(요람)이었습니다. 이 벤하닷 밑에 있었던 군대 장관, 국방 장관이라 말할 수 있죠. 용감한 장군 입니다. 그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장군이 가장 유명해 질 수 있는 길이 뭐겠어요? 전쟁에서 이기는 거죠.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왕은 그런 사람에게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죠. 자기 보좌를 계속해서 보존해 줄 수 있는 그런 심복 입니다. 이런 사람이 왕 앞에 얼마나 존귀한 자 이겠어요? 크고 존귀한 사람 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전쟁에서 이겼는데요. 만일 전쟁에서 진다면, 어떻습니까? 전쟁에서 지는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나라가 1910년에 한일 합방으로 우리나라는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남자는 어땠습니까? 인간 대접을 못 받습니다. 인권을 완전히 짓밟혀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요. 왜? 국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전쟁에서 진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로맨틱하게 얘기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진다고 하는것은 두려운 현실 입니다. 남자는 일제 강점기 때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의 전쟁이 아닌데 끌려가서 피흘려 개 죽음 당했어요. 여자는 위안부로 끌려 갔어요.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이 모든 일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국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시리아를 모든 나라에서 보호 할 뿐만 아니라 점령해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왕에게 크고 존귀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가 있어요. "그러나" 여기 그러나가 있어요. "문둥병자더라" 나아만은 문둥병자 입니다. 그런데 한쪽으로는 군대장관 입니다. 존귀한 자입니다. 왕에게 총애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권력과 재물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부러워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것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가 문둥병자라는데, 여러분 설옥도에 가 보세요. 문둥병이 뭘 말하는지를 알려면 문둥병 촌에 한번 가 보시면 피부로 느낍니다. 몇년 전에 설옥도에 갔을 때, 거기 내리니까, 이제는 다리도 놨고요. 그 안에 갔을때 길이 있었습니다. 섬 안쪽에 저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 나무가 쫙 있어요. 그것이 폭이 넓은 길이예요. 양쪽에 길이 쭉 있는데 거기 사진을 보니까, 이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지만, 오래전에 매년 일어났던 일들을 사진 찍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쪽에는 격리되어 있는 문둥병자들 아버지 어머니들 이예요. 그들이 쭉 서있고요, 줄로 막아 놨어요. 이쪽 나무쪽에 쭉 서 있어요. 그리고 그 아들, 딸 들이 육지에 나가 있다가 엄마 아빠 보러 왔어요. 그래서 반대편 나무에 줄로 막아 놨는데 거기 쭉 서있어요. 거기가 길인데, 어떤 길인가? 격리의 길이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요. 그냥 얼굴만 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울면서 엄마,아빠 하는데 만질 수 없어요. 거기 가까이 가서 부둥켜 안을 수 없어요. 격리 입니다. 문둥병, 우리는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문둥병, 뭘 말합니까? 문둥병은 첫째, 불행 합니다. 딴데 가서 살아야 해요. 고립 되어야 합니다. 고립된 생활 입니다. 문둥병은 육체적으로는 문둥병이지만,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우리의 죄를 상징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 얘기를 자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그림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문둥병 걸리게 되면요, 코와 손이 막 떨어져 나가요. 이것은 기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요, 이것이 조금이라도 우리 몸에 생겼다고 생각해 보세요. 손이 막 떨어져 나갑니다. 코가 막 떨어져 나갑니다. 내가 뭘 느낄까,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으로 죄인 이라고 하는데 조금도 느끼는 게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이 죄가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과 불편함과 그리고 비극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지, 죄는요, 우리에게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람이요, 어느 한 순간에 가서 딱 이혼하고 돌아서게 될 때, 그것이 죄예요. 이기심이예요, 성격 차이라고 말하죠. 성격차이, 정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고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모두가 다 성격차이 입니다. 성격차이 안나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어떻게 통제 하는가? 우리는 사회생활 할 때에 어떻게 통제하고 사는가? 우리는 내가 느끼는대로 막 행동하고 살면 범죄자 되는 것입니다. 범죄자 되기 아주 쉽상입니다. 총 꺼내고 칼 꺼내서 행하게 될 때 이것 다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문둥병, 추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슬픈 것입니다. 격리되기 때문에 슬픈 것이예요. 너무나 고독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싫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둥병자들이 나오면 사람들 앞에서 막 소리질러 댑니다. "더럽다! 더럽다! 더럽다! 나는 더럽다!"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가까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문둥병자를 보고 더럽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럽다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왜? (??)되서 감염 되었다고, 죄는 고립 시키고요. 죄는 우리로 하여금 추하게 만들고 문둥병은 또 신경에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마비되요. 마비 되어서요, 느낄 수가 없어요. 감각, 무감각, 죄는 영적인 무감각,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는데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그 위에다가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한 500kg짜리 바위를 올려보세요.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 위에다가 5000t 짜리를 올려놔도 아무 소리 안합니다. 왜? 무감각하기 때문에, 죄는 우리로 하여금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요, 주님께서 아까 그렇게 말씀 했어요. "이때, 내 음성을 듣는다면 감각을 가지고" 어떻게 감각을 갖습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감각을 받을 수 있는 단 한가지,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주님, 나를 살려주세요." 라는 진실한 이야기 입니다. 여기 이제 문둥병자, 나아만은 위대하지만 문둥병자입니다. 나아만은 다 좋지만 그 사람은 죽었어. 이 사람 그렇게 위대하지만 문둥병,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에게 얼마나 큰 부담 입니까? 그래서요, 이제 여기 두번째, 2절 말씀을 보면요.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왕하 5:2).

이 아이가 주모에게 찾아 와서요, 주인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알고 "우리 주인이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를 만나면 좋겠다." 이거 참 기쁜 소식입니다.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얘기예요. 불치의 병인데 고칠 수 있다는 말이예요. 여러분, 죄, 불치의 병입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행할 수 없어요. 죄 때문에 죄책감이 있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냥 잊어버리세요." "코메디를 보고 잊어버리세요." "영화 보고서는 머리를 좀 식히세요." 머리를 식혔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 보니까 더 큰 죄책감으로 계속 되요. 극장 갔다가 나와 보니까 더 괴로워요. 코메디가 즐겁게 할때는 잊어 버렸는데, 죄책감이 잠깐 사라 졌는데, 거기서 나와 보니까, 죄는 여전히 나를 계속해서 누르고 있어요. 죄는 불치의 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게 될때, 우리의 모든 양심의 정죄도 다 없애 버리셨다. 우리의 모든 어떠한 정죄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는 다 피할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으로 시달리지 않는다. 우리 주님의 보혈은 그렇게 강력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구원 받으세요. 평화를 누립니다. 내 마음 속에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 불치병으로부터 나는 용서받을 수 있어요. 치유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왕에게 찾아 갔어요. 왕에게 찾아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 했어요. 이스라엘 선지자에게 가라고 하는데요. 이 사람 생각에는 이것이 고정관념 입니다. 이 여자 아이는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나가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뭐라고 듣습니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에서요,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편견이 있으면, 내 생각이 있으면요, 뭔가 얘기를 들었지만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요. 여기 선지자에게 가라고 했더니,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이스라엘에 간다면 왕에게 가야지, 라는 생각이죠. 이 사람은 정치적인 사람이예요. 왕에게 가서 이제 이야기 하죠. 왕이 선물을 많이 꾸려서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왕하 5:6).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 쓰면서 '이 사람을 고쳐달라.' 이것은 완전히 와전 된거죠. 왜 와전 되었는가? 우리 마음속에 편견, 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진리를 진리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좋은 소식이요, 선지자에게 가야 하는데 왕에게 간다고 하니까 무슨 결과가 나왔어요? 이 편지를 받아 본 이스라엘 왕이 깜짝 놀랐어요. 자기보고 문둥병자, 이 아랍의 국방장관을 문둥병을 고쳐 달라고, 그 편지를 읽었을 때 이스라엘 왕은 뭐라고 생각 합니까? "이 사람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서 못하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이런식으로 해석 했지요.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엘리사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나에게 불러오라." 그래서 이 나아만이 신하들을 끌고, 수행원들을 데리고 함께 엘리사의 집까지 갔지요. 여기서 나아만은 또 다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시 자기 생각이 있어요. 자, 그 선지자 집 앞에 왔으면, 자기는 위대한 사람이니까 선지자가 엎드려서 절하고 그 다음에 머리에다가 손을 얹고, 이것이 나아만이 생각하는 그런 치료 방식이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나름대로의 구원의 방식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구원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것이 여러분의 고정관념 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받을 수 있을까?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인데, 여러분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나아만은 그렇게 기대하고 나왔는데 엘리사가 종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하죠.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

딱 이렇게 전해 줬어요.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 나아만이 분이 났어요. "내가 아람에 있으면, 왕 외에는 다 내 앞에 와서 엎드리는데, 감히 자기가 나오지도 않고 종을 보내서, 그것도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구원 받는데 그에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람왕이 딴 소리 했죠. 이스라엘 왕이 두려워 했죠. 그 다음에 엘리사,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엘리사가 안 나왔죠. 엘리사도 걸림돌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 종이 나와서 한 말을 보니까 위대한 강들이 많은데, 조그만 요단강 시냇가, 개천 같은데 가서 나보고 목욕을 하라고 하느냐? 이것이 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요, 그 모든 걸림돌, 가장 중요한것은 나아만 속에 있었던 고정관념, 내 생각 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자기의 에이젠다가 있어요. 자기의 처방이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의 처방이 있습니까? 버리세요. 주님 말씀하시는 방식, 아주 간단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 한다고 할 때, 너무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 납니다. 그가 화가 나서 "다메섹 아마나와 아르발 아름다운 강들이 있는데 겨우 이런데 들어가느냐?" 그것은 나아만의 생각 이었어요. 여기 나아만을 도와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에서 온 계집 종, 복음을 전해 줬어요. 또 하나는 나아만의 종들 입니다. 그 종들이 나와서 말합니다.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 5:13).

이 종들이요, 자기 주인에게 와서 간곡히 부탁 했습니다. "제발 그냥 가지 마시고 여기가서 순종 하시고 그 말씀하시는대로 그대로 행하십시요. 그러면 낫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그나마 위대한 점은 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요단강을 갔어요. 말씀대로 했어요. 여러분, 오늘 저희들은 요한복음 5장 말씀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러면 영생을 얻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으로 옮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심판 받아야 하는데, 십자가 위에서 주님 말씀 했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어떻게 다 이루었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받아야 할 심판을 주님이 버림받고 다 그 죄의 값을 주님이 담당 하셨어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어요. 주님앞에 오세요.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 하고 "주님 나는 죄인 입니다. 나는 그냥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셨다고 하니 감사 합니다. 주님을 믿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여러분의 죄로 인해서 멸망이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일곱번, 한번 아니예요. 두번 아니예요. 두번, 세번,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 했을 때, 일곱번째 나올때에 살은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여상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오세요. 약속의 말씀, 너무나 단순 합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약속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너무나 엄청난 값을 치루셨다. 왜냐하면 단순한 그 약속이지만 그 고귀한 주님의 프로포즈를 내가 받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청혼하고 있습니다. 예스라고 말하세요 "주님, 제가 주님을 믿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내 죄는 다 없어졌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영생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말씀 하세요.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