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플러싱 여름 수양회 10_고린도전서 1장. 교회의 터, 하나됨 >

박이레 2021. 7. 24. 15:40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플러싱 여름 수양회 10_고린도전서 1장. 교회의 터, 하나됨 >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1:10-12, 개역한글)

이 구절은 저희들에게 익숙한 구절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넷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 그룹들이 상대방을 향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이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이와같은 일이 생겼으며 그것을 또 어떻게 해결하도록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적인 입장으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나는 바울에게'라고 주장한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요? 정말 그분들이 바울을 사랑할까요? 정말 바울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바울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런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바울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은 '나는 바울에게' 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첫번째, '나는 바울에게'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럼 어떤 분들일까요?
성경에서 보여지는 바울의 이미지가 어떻습니까? 그가 고소와 비난을 받을때마다 '그가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 '사람들이 받을수 없는 유전을 전한다'라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에서의 자유를 전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받는것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지키는 방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자유가 있음을 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자유를,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전했습니다.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 내 의로, 내 행위로 섬기는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나는 바울에게'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를 방종으로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자유다. 율법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내가 원하는대로 뭐든 할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할수 있는 구절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것이 내게 유익한 것이 아니요>

여기서 '가하다'라는 단어는 영어로 lawful로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도바울은 모든것이 가하지만 모든것을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것은 덕을 세우지 못하고 어떤 것은 잘못했다가 내가 그 행동의 노예가 될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모든것이 가하다'라고 하며 사적인 욕구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는 자유롭다. 바울이 자유를 가르쳐 줬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에서 학문에 능하고 성경을 잘 말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볼로는 태어날때부터 교육을 받고 말을 잘했습니다. 또한 의사표현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성경을 끌어내어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해 내는데 능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인것을 구약성경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압도적인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성경에 대한 이해와 그 성경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것을 입증하는데 사용되는 적용을 감사히 여겨서 정말 그 말씀에 아멘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사는 분들은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볼로에게 정말로 영적인 유익을 얻은 분들은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들이 '나는 아볼로에게'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왜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할까요?
아볼로는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일꾼들을 보면 조금 이상한 예일수도 있지만, 얼굴이 잘생긴 일꾼이 있습니다. 딱 보기에 일꾼같아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그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갖춘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꼭 그런사람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것은 다른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볼로에게 그와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볼로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깨끗한 그릇일때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는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일때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큰 집에는 여러가지 그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금그릇, 은그릇이 있을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그릇은 금그릇이다. 이 반짝이고 아름다운 금그릇을 보아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이 말을 할줄 모르겠습니까? 그는 당대최고의 선생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할때에, 교회에서 가르칠때에 그가 할수 있었을찌라도 인간의 아름다운 것과 지혜로운것을 사용해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약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부르시고 강한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일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의 편지는 힘있고 중하나 만나보니 그의 육신은 별볼일이 없고 말에 졸하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육체대로 행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볼로에게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높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의 말의 지혜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했다."

세번째로 '나는 게바에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사도바울과 비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통 수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에 열두명의 사도들을 택하셨습니다.
열두명의 제자를 말할때에 변함없이 맨처음 나오는 제자가 베드로 입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사도의 이름은 가룟유다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변함없는 주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에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추가로 부름받은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 대해서 여러가지 비난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처음부터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통성이 있고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게바에게'라고 하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주님과 3년간 함께 있었고 주님의 낮아지심과 그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주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알고 그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마음에 감사하고 베드로를 통해서 알려주신 은혜에 대해서 더욱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짜로 그렇게 사는 분들을 '나는 게바에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게바에게'라고 하는 분들은 정통성을 좋아하는 사람들 입니다.
자기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나는 예루살렘 출신이며, 나는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안디옥에 있을때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이 오자, 식사하지 않은척 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애 대해서 사도바울이 면책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겉으로 볼때, 흠이없는 쪽을 택합니다.
외적으로 행동이 훌륭한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것은 중심입니다.
그 중심이 어떤지를 사람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보십니다.
그런데 외적인 행동만 보고 그 예절과 정통성과 언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는 게바에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주장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나는 주님에게 직접 배운다. 나는 사람에게 배우지 않는다."라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너울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변론하려는 자가 있을찌라도>
사도바울이 여러가지 창조와 질서의 원리를 들어 자매가 너울을 쓰는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쳐도 변론하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서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나를 신령한 자라고 여기거든 내 말이 그리스도의 명령인줄 알라>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교회 진리를 전합니다.
교회로 모였을때 어떤 질서 속에서 모임이 진행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명령인줄 알아야 그가 신령한 자다'
고린도교회 안에 사도바울이 말할찌라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직접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사도바울을 보낸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하시고 그를 1년 6개월동안 머물게 하시며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과 장막을 치며 일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그를 보내서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네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천년전에 있었던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에 더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어떤 죄를 범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그 죄를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갈 가능성이 있나요?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성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령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구원받아 놓고서도 사람이 할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사람에게 속한, 능력과 아름다운 것들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바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중심이 아니라 외모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나름대로 성경적인 확신을 받으면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는 문제 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는 왜 이와같은 문제점들이 생겼을까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주님께서는 반석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석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내가 터를 놓았고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초가 되는, 터가 무엇인지를 사도행전 2장 42절이 말합니다.

41절에 구원받아 교회에 더해진 성도들이 42절에서 4가지를 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네가지 행동을 하는데 고린도 교회가 실패했기 때문에 네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와서 같이 가르쳤고 아볼로가 와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다른이야기를 했습니까?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는 다를찌라도 같은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가 열두명입니다. 한사람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러명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쓴 서신인 고린도전후서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후서도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가르침인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계시록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사도바울의 로마서는 참 좋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못받아들이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고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모순되 보일찌라도 그것을 모순으로 느끼는 사람이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데 고린도 교회는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것, 이것이 교회의 터입니다.

두번째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에대해 책망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귀신과 교제하는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들은 누구와 교제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교제하는 것에서 실패했습니다.

세번째로 만찬예배 또한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누구는 많이먹고 누구는 늦게오고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배고팠습니다.

네번째, 기도하는것 또한 실패했습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기도할 때 잠잠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 네가지 터가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네가지의 잘못된 그룹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저희도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하고 성경적인 교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만찬 예배가 되어야 하며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다시 교회를 원상회복시키는 방법입니다.

잠깐, 구약으로 가셔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분열될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분열이 일어나려고 했을때 그와같은 분열을 막아내려 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그렇게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비느하스가 세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해 냅니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기에 성경을 찾지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 당시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어떤 레위인이 첩을 얻습니다. 그런데 첩이 자기 친정으로 도망합니다. 레위인은 그 첩을 데리고 오기위해서 장인의 집에 갑니다. 그리고 장인어른이 사위를 기쁘게 맞고 장인의 권유로 계속 있다가 결국에는 늦게 출발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땅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람들이 이 첩을 강간하고 죽여버리는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 레위인이 화가나서 첩의 시신을 열두토막을 내서 이스라엘에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내전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상 없었던 죄악이라 하며 흥분하여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틀림없이 베냐민 지파가 잘못한 것이었지만 전쟁을 했을때에 베냐민 지파가 이깁니다. 다시한번 했을때 베냐민 지파가 또 이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때 비스하스 제사장에게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일찌니라 (삿20:18, 개역한글)

이것이 첫번째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삿20:23, 개역한글)

그리고 또한 두번째 전투도 또 집니다.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삿20:26-28, 개역한글)

그래서 세번째 전투에서 이깁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첫번째, 두번째 하나님께 물었지만 집니다. 이는 잘못 물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비느하스가 언급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번째 질문과 나머지 질문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가서 싸울까요?"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공격한다고 하는것은 이미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열한지파 중에 어느 누가 제일 앞장 설까요? 를 질문한 것입니다.
합당치 않은 질문입니다. 자기들이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통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졌습니다.

두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약간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싸울까요?"
이것도 베냐민 지파를 친다라고 하는것은 정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의 중요한 차이는 "싸울까요? 말까요?"입니다.
첫번째, 두번째에는 싸운다는것은 정해놓고 어떻게 싸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낮아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것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바울이 좋고 나는 아볼로가 좋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보겠습니다. 제사를 지내는것을 보면 번제와 화목제를 지냅니다.
다시 말하면 베냐민 지파에 죄가 있었고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우는 도중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속건제를 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립니다.

항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문제가 있을때에 중점을 둬야 하는것은 문제 자체에 대한 해결이 아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속죄제가 아니라 번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것 같은것을 물어야 합니다. "베냐민이 분명히 잘못했고 이것을 묵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저희가 그들과 싸워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재판장은,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두 가지를 이스라엘은 배워야 합니다. 저희들도 안에 갈등이 있을때에 배워야 합니다.
틀림없이 잘못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빌립보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2-4, 개역한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4:2, 개역한글)

빌립보 교회는 대체적으로 문제가 없는 교회입니다. 인도자들이 세워져 있었고,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을때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서 돕고 복음의 교제에 참여한 모임 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때 한번, 두번 헌금을 보냈던 교회입니다. 처음부터 복음에 동참했던 복된 교회입니다.

사단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빛을 전파하는 강력한 교회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단은 빛을 희미하게 만들고자 할것입니다.
그 첫번째 방법으로 핍박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사도행전에서 보아온 대로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핍박을 통해서 모임이 공격받지 않으면 두번째 방법이 일어납니다.
밖에서 아니고 안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내적인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기 위해서 두자매를 사용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입니다.

그들은 혹시 모임초기 루디아가 구원받을때 같이 기도처에서 같이 구원받은 초기 자매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본이되고 먼저 주님의 길을 걸었던 자매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인간적인 차이를 사단이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확장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할것을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는 <마음을 같이하라>고 합니다. 한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겸손하게 남을 낫게 여기라>라고 합니다. 4절에서는 <다른사람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위하여 선물을 보내고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자기가 복음을 전했던 그 지역모임이 처음 데살로니가 있을때에 한번 두번 복음을 위해 헌금을 보냈지만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세월이 10년쯤 흘렀습니다. 사도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가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있었지만 할수 없던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낸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도바울의 마음이 기뻣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내적으로 하나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나에 대해서 기억하고 나에 대해서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것이 기쁩니다. 그러나 내 기쁨이 완성되려면 그것은 여러분의 하나됨 입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일꾼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물론 그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도바울)를 존귀히 여기듯이 같은 지역모임에서 같이 섬기면서 본인과 견해가 다른사람을 나에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귀히 여기고 존중해 줄때, 나의 기쁨의 충만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한마음을 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다른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사람의 일을 돌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높아서 우리가 쉽게 도달없는 목표가 아닙니다.
이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나야 하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수 있을까요?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2:17-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첫번째로 (3절)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사람을 낫게 여기는 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제물(복음, 예배 등)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제물이 본 제물인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사도바울이 본 제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주의 일을 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수고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섬김을 본 제물로 보고 자기의 섬김을 관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하는것에 자신의 예를 든 것입니다.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빌2:19-2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두번째로 디모데의 예를 듭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과 같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기를 살필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 빌립보 교회를 방문해서 그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를 함께 아파하면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데 그는 자신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2절에서 사도바울이 한마음을 품어야 하는것을 디모데로 예를 든것입니다.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빌2:25-26, 개역한글)

세번째, 에바브라 디도는 병에 걸렸습니다. 사도바울을 섬기다가 자기몸에 병이 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몸이 병들었다는것을 빌립보 성도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병이 문제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이로 걱정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사람의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4절)

사도바울은 2-4절에서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1. 한마음 2. 겸손한 마음 3. 다른사람을 돌보는것 세가지를 주문합니다.
그리고 그 세개에 대한 예를 듭니다. 이 세가지는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개역한글)

<구원을 이루라>

여기의 구원은 무슨 구원인가요?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칭의를 받았을찌라도 성화되어야 하며 마침내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와같은 구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교회 서신서 입니다.
그들의 구원이 무엇입니까? 모임이 고린도전서 1장처럼 네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는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경향 때문에 모임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도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일치에서, 육신적인 것에서 영적인 일치로 변화되는것을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하나됨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개역한글)

이 일을 결국에 가능하게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마음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속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행할때, 주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갈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가신 길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낮아지신 일곱개만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6, 개역한글)

하나님은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계셨으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홀로 하늘의 영광속에 계신다 할찌라도 아무런 문제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죄악중에 빠진 인간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자신만 생각지 않고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구하지 않고 마땅히 형벌받을 인간들의 죄악된 비참한 운명을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낮아지심입니다.

두번째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신은 천사들의 경배를 받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단(타락한 천사)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자기 뜻대로 하신다해도 주님은 항상 올바른 뜻만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독립적인 권위를 포기하고 자기를 비우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내 나름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 혼자 있어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나름대로 행동할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무엇인가요?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영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도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을 수 있다면 교회의 등불은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5, 개역한글)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2:16, 개역한글)

<생명의 말씀> 복음이 분명하게 전달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길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걸어갈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심령을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