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뉴욕 플러싱 수양회 06_모임의 교제, 장로 >

박이레 2021. 7. 24. 15:37

< 뉴욕 플러싱 수양회 06_모임의 교제, 장로 > 정형모 형제님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민 24:5-7).

누가 한 말씀입니까? 발람이 합니다. 발락에게 초청 받아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거짓 선지자죠. 그가 이제 나귀타고 먼곳까지 여행해서 높은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발락의 주문대로 저주해서 돈을 많이 받고자 그는 그런 생각속에 왔는데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보세요. 이것은 발람의 의도한 바도 아니고 발락이 원하는 바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막을 보고서 그가 한 이야기는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라고 말씀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름답다는 말이예요. 그러면 안되는데, 저주해야 하는데, 멸망시켜야 하는데, 성령의 통제하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은 참 놀랍지요.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바리새인이 와서 불평할때 "너희들이 만약 찬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돌들이라도 찬양하도록 만들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발람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가 한 말을, 내용을 가만히 보세요. 첫째, 이스라엘의 장막이 아름답다. 그들의 거처가 아름답다. 왜 아름답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회막이 있고 거기에 여호와의 구름기둥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동서남북으로 열두지파가 이렇게 진을 치고 있습니다. 동편에서는 제사장 아론의 가문이 그 바로 앞에 진치고 있고 그 다음에 레위의 세 아들들이 남서 북쪽에 성막 가까이에 진치고 있다. 아름답다 그 말입니다. 여기 아름다움은요, 질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할때도요, 그냥 막 오합지졸로 간게 아니예요. 지파들마다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언약궤가 가고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이 정해주신 순서, 질서를 따라서 이동할때도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구름 기둥이 서면,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진 치게 될때 회막이 다시 세워져요. 그리고 그 회막을 중심으로 해서 언제나 사람들이 먼저 진치고 그 다음에 회막을 세우는게 아니고요. 먼저 회막이 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제 진친다. 그것을 여기서는 '내 벌어짐'이라 말씀하고 있어요. 벌어졌다, 사방에 펼쳐졌다고 할때, 이것은 정리정돈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 강가의 동산, 그리고 백향목과 같다. 그리고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친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때에 시편 23편을 읽는것 같습니다. "잔이 넘치리로다" 잔이 고갈되어서 밑에 물이 조금 있는 그런것 아니고, 다 말라 빠진것 아니고, 잔이 넘치는것, 통에 물이 넘칩니다. 풍성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질서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원이 하나 있고요. 그 바깥에 큰 동심원을 그려보세요. 두개의 원을 그려보시고 바깥에 테두리가 있죠. 그것을 셋으로 쪼개 보세요. 그리고 이쪽에는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 그리고 이쪽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그 다음, 이 바닥에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그리고 이 가운데 원은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네가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인의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가정, 만일 온 가족이 구원받았다면 이 가정은 여기에 온 식구들이 전부 성령님이 계시는 멤버들이, 식구들이 모이게 될거죠. 이것은 참 특권 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어요. 나만 구원받았고 나머지는 전부 불신자인 가정도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조금 더 다르겠죠. 그 다음에 세번째, 사회생활, 이것은 구원받지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 가서, 직장가서 일하든지 학교가서 공부하든지 하는 그런 사회죠. 그런데 나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속에 성령이 계시죠. 그런데 가운데 교회생활, 교제를 하게 될때 여기의 구성원은 모두가 다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교회가 아니죠. 그러면 개인의 생활과 교회생활, 여기에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의 생활과 교회생활, 여기에 연관 관계가 있어요. 그 다음에 교회에서 교제하고 하는 생활과 사회생활이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것은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가 있고요. 이 관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될때, 여기 나 개인이 주님앞에 기도하고 말씀 읽고 대화할수 있지만 교회생활은 무엇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그것을 다른말로 이야기하면, 저는 교회생활이라는 말을 별로 안좋아 합니다. 지역교회의 모임의 교제안에 들어와서 특권과 책임을, 책임과 특권을 행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책임있는 삶 입니다. 그냥 들락날락 왔다갔다하고 방관자처럼 말고 정말 나에게 주님이 사랑하신 교회, 내가 여기에서 한 지체로 있는 교회, 이안에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데 주님의 간증을 위해서, 나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두가지예요. 모임의 교제라고 하는것은 양 다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 개개인의 영적인 성장, 주님을 닮아가는 것, 그리고 영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집합적으로 간증을 드러내는 것, 이 두가지가 모임의 교제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가운데 교회 생활이 있다면, 발람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야기 하게 될때에 "이스라엘아 야곱아 너의 장막과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너의 펼쳐짐이, 벌어짐이 아름답다." 왜? 회막을 중심으로, 주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이렇게 모여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볼때 정렬되어 있습니다. 정리 정돈된 삶, 질서있는 삶, 그것은 구원받고 교회생활을 하게될때 모임 생활을 하게 될때, 나 개인의 삶이요? 정리정돈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정리정돈, 질서가 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은 부인할수없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의 리서치를 해보세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따라가고 함께 하시고 그들의 삶을 질서있게 만드셨는가? 그리고 성공적으로 인도하시고 계시는가? 비록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고, 반대를 받고 오해를 받고, 그렇게 한다해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있다는것 때문에 주님이 이 통에 물이 넘치도록 하신다. 그리고 보게 될때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고 백행목과 같고, 침향목, 이것은 대단히 비싼 나무예요. 그리고 물가에 심겨진 나무예요. 그것은 대단히 싱싱하고요. 저는 케나다에서 20년 살면서 록키산맥 근처에 살았는데, 그 산, 거기에 하늘을 찌를듯한 이 전나무와 수많은 종류의 소나무, 그속에 들어가면요. 거기서 나오는 향기, 그것은 말로 할수 없습니다. 거기를 걸어가게 될때, 숨쉬고, 잠간 냄새를 맡는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복주시기를 원하세요. 주님 따라가면 손해본다. 어떤 모임의 부모님이요, 자식들에게 "너무 그렇게 하지마라. 적당히 하고 딴데 생각해라." 직업이나, 커리어나, 세상의 성공에, 그렇게 하니까, 저는 찾아봤어요.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자제들을 찾아 봤습니다. 조사해 봤어요. 성공하지 못했어요. 이것은 제가 이야기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입니다. 우리 주님을 영예롭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영예롭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 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고 왜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하고, 구원 받을뿐만 아니라 왜 모임생활을 해야 하는가, 왜 교회진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오늘 아침에 교제에 관해서, 교제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오늘은 특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기집회를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모임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위대한 특권, 교제를 통해 특권, 첫째, 정기집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기집회, 정말로 성실하게 참석하는 성도들, 저는 타락한 성도를 본 적이 없어요. 왜? 모임은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론 구원받았을때,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보호하세요. 그런데, 모임의 교제에 들어와서 이제 생활하게 될때, 세상이 우리를 앗아가려고 하는 세상의 스탠다드, 패션, 세상의 가치, 이런것이 우리 마음에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분은 방주를 기억하시죠? 거기에 무엇을 칠햇습니까? 역청을 칠했습니다. 또, 모세의 갈상자를 만들었을때, 애기를 그냥 넣으면 안되죠? 여기 역청을 칠했어요. 왜? 물이 못들어오게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보호해야 하거든요. 모임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예요. 우리는 수도원에 가서 사는 사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의해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님이 우리르 보호하십니다. 개인생활에서 물론 보호하시고, 모임 생활을 통해서, 모임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철저히 보호하세요. 말씀교제를 통해서요, 우리 성도의 섬김과 기쁨과 또한 주님을 중심으로 해서 예배와, 또한 복음의 활동과 섬김과 많은 것들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일초일초 시시각각의 생각이 주님의 스탠다드와 주님의 가치 가운데 머물도록 하신다. 그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며시 슬며시, 갈 상자에 역청 안칠하고 놔 보세요. 조금은 가지요, 물이 서서히 스며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그냥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 여기 히브리 저자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 이것은 습관 입니다. 한번 빠져 보세요. '아이 수요일날 바빠 죽겠는데, 모임가고 이런것..' 그런 각도에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서히 서서히 안가는게 더 편해요. 발뻗고 자고, 저녁 시간에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갈상자가 점점 물속에 빠져들어간다고 하는것을 기억하세요. 모임의 집회에 갔다가 올때, 우리는 주일날에는 많이 나오지만 주중에는 많이 빠져 버려요. 이런 패턴, 이것이 타락의 징조 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로 발람같은 이 악한자가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 했다고 하는것을 보세요. 성령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보면, 모임이, 구약에는 회막이지만 오늘은 모임입니다. 주님께서, 거기에 우리가 모여서 정기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정기집회 네가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찬예배, 예배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 주님의 말씀을 이제는 개인적으로 읽는게 아니라, 듣는게 아니라, 공적으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또는 바이블 리딩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공적으로 배웁니다. 그 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임에 오게될때 정기집회에 그냥 맨몸으로, 우리가 사회에서 우스갯소리로 말하죠, 맨입으로 그냥 되겠느냐? 성경은, 공수로 오겠는가? 바구니에 아무것도 담지 않고 그냥 오겠는가? 여러분, 우리는 주일날, 수요일날 정기집회에 모인다고 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기 나가면 그 다음엔 삭 잊어버리고 세상에 뭍혀 살다가, 수요일날 그냥 헐레벌떡 와가지고 그때서야 여기의 어떤 영적인 분위기나 말씀에 비로소 좁촉합니까? 아니면 나갈때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이곳이다, 주님이 계신 곳이다. 여기의 필요가 무엇일까? 여기에 무엇이 필요할까? 여기에 성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헤어졌지만 성도들은 각기 이런직장 저런직장,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하고 있을때, 그와같은 것에 대해서 내 마음간에 심령이 모니터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구하고 있습니까? 떨어있었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모임을 폐해서 떠나갈때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우리로하여금 질서 가운데, 아름다움 가운데 주님이 보존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임은 보호막입니다. 모임은 피난처 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살면요, 세상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살고 그렇게 하지 마라. 조금 농땡이도 쳐라." 어떤때는 왕따 당합니다. 이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때는 억울함이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만일 우리가 경건하게 산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핍박은 우리가 더욱더 주님께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주님께 가까이 있을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기집회에 참석하세요. 그것은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특권 입니다. 만찬 예배때 어떻게 준비할까? 나는 바구니에다가 나는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서 가득히 담아서 가려면 나는 평생 어떻게 삽니까? 바쁘게 일하면서도 내 마음은 주님에게 향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주님을 기억합니다. 말씀을 읽게 될때 주님을 발견하려고, 잠언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잠언은, 그런사람은 마치 금광에 들어가서 금을 캐는 사람처럼, 불을 키고 계속 파대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맛에 들리면, 이것은 거룩한 습관입니다. 모이를 폐하는 것은, 그것은 참 불행한 습관 입니다. 이제 모임을 폐하지 아니하고 정기집회에, 정말로 준비된 마음으로,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온다. 집회마다 이제 일생에 이 집회는 다시오지 않는다. 오늘 이 집회는 다시오지 않아요. 정기집회, 항상 똑같은 장소에서 모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거기에 주님이 새롭게 임재하세요. 새롭게 준비하고 또 오세요.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기대하고 가는 것입니다. 정기집회, 제 시간 이전에 오세요. 준비하는 마음이 있으면 제 시간 이전에 옵니다. 저는요, 어떤때 불가능해서 그렇게 되는때도 있어요. 물론, 주님이 아세요. 그러나 그것이 습관이 아니고요. 그것은 예외 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시간 이전에 와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것, 그것은 우리 마음을 주님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속에 주님께서 어떤 복을 주실까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정기집회 참석, 기도회때, 기도집회에 참석 할때요, 나는 개인적으로 기도할수 있죠. 그러나 기도집회는 모임의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 이것은 관심 입니다. 모임에 와서 기도집회를 할때에 무슨 기도를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은 나의 무관심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모임의 성도들은 어떤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모임은 어떤 필요를 지금 느끼고 있는가? 모임은 지금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가? 이런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고요. 이것은 대단히 책임 있는 사람이고요.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참 리더 입니다. 세상일을 해도 그는 똑바르게 할 겁니다. 세상일도 얼렁뚱땅하는 사람, 모임일도 얼렁뚱땅할수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요, 우리의 생활 방식을 달리하자. 정기집회, 기도집회 할때, 기도는 무얼까? 물론 기도 내용을 다시한번 리뷰하지만 그러나 그 전에 내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관심을 가지고 있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대로 복으로 돌아옵니다. 누가 얘기하는 것처럼, "너무 그렇게 참석하면 너에게 손해다." 그분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드려야 겠습니다. 우리는 만찬 위해서, 예배 위해서 어떻게 준비 합니까? 일주일 동안 어떻게 준비합니까? 말씀을 읽게 될때, 이것이 꿀과같이 달다. 이러면요, 말씀 계속해서 읽지 않을수가 없어요. 성경이 닳도록 읽지 않을수가 없어요. 여러분, 말씀을 읽어라, 읽어라 해서 그냥 마지못해서 오늘 하루, 얼마 한장, 두장 그렇게해서 의무감에서 읽는다면, 여러분 차라리 그냥 안읽고도 괜찮아요. 거기서 무엇을 얻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주신 눈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주님을 발견할때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보석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석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석보다도 더 위대한 주님의 아름다움을, 이 말씀에서 기묘한 것들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지 않을수 없어요. 주님을 예배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복음 전하는데에 대한 열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복음 전도의 열정, 그리고 우리가 만찬 예배로 모이게 될때, 이런 정기집회에 참여하게 될때, 우리는 그냥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저는 고기를 먹게 될때, 그냥 뻗뻗한 고기 말고, 고기 사이사이에 살짝 기름이 끼어있는 고기는 맛있죠? 우리 신앙생활, 그냥 맛없는 뻗뻗한 섬유로 된 그런 고기말고, 우리가 주님앞에 이런 마음을 드리면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우리의 생활이 정돈되고 질서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요, 이제 그러므로 임해서 번영할수 있습니다. 질서있는 삶이 아니면 절대로 번영할수 없어요. 그것이 첫째, 우리가 정기집회에 참여하는 위대한 특권, 그것을 우리가 누려야 되겠다. 말씀, 형제님들이 말씀을 합니다. 은사를 따라서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죠. 말씀이 성령님에 대해서 인도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을 보십시요.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3).

여기 방언의 해악 때문에 예언을 하라 말씀 했는데, 예언은 알아들을수 있는 말씀 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게될때 성령님께서 인도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세가지예요. 덕을 세우는 것, 덕을 세운다는것은 건축한다는 그 말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세워줘요. 우리의 구비되지 않은것을 구비하게 만들어주고요. 풍성하게 세워주고 아름답게 세워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세워 줍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괴 하지만 말씀은 우리를 세웁니다. 그래서 말씀이 끝나고 난 다음에, 아 이것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셨구나! 라고 하는것을 우리는 즉각적으로, 성도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즉각, 피부로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세우셨구나. 또 하나, 두번째는 권면하며. 권면이라고 하는것은 휘젓는다는 말입니다. 휘저어요, 액체에다가 뭘 섞으면 그 다음에 휘저어 균등하게 퍼지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가라 앉아있으면 휘저으면 확 올라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착 가라앉았을때, 우리의 마음이 실망으로, 또 두려움으로 이렇게 착 가라 앉았을때 이 권면은요, 우리로 하여금 교정하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휘저어주어서 주님 앞에서 우리가 정신을 깨고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요. 주님 앞에서 정신이 깨어 말짱하고 이런 마음으로 주님앞에 나와야 하죠. 이런 마음으로 주님앞에 생활해야죠. 그래서 권면,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재, 안의,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서 낙심 가운데 있어요. 절망 가운데 있어요.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참 놀라와요. 똑같은 말씀이 한 형제님이 똑같은 말씀을 했는데, 여기 성도들 모두가 다 필요가 다 달라요. 그런데 성령님은 이 모든 필요를 총괄적으로 알고 계세요. 그래서 한 형제님을 성령님이 인도하실때, 이 말씀을 통해서요. 각각 성도의 마음속에 필요, 어떤 분은 낙심 가운데 있어요. 어떤문은 덤덤해 졌어요. 어떤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열의에서 식어져 있어요. 어떤분은 염려 가운데 있습니다. 수많은 문제들, 필요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성련님,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 요리해서 각각 필요에 맞춤으로 전달해주는 놀라운 권세. 그래서요, 모임에서는 말씀은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있어야 하고, 바이블 리딩은 뭡니까? 바이블 리딩은 성경을 우리가 순서적으로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계속해서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강대상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메세지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이 확 살아나도록. 우리가 화분에 물 안주고 수양회 왔다가 돌아가면 푹 가라 앉잖아요. 가서 물을 확 줘보세요. 조금 있으면 확 올라오잖아요. 말씀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솟아 올라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교제의 특권은요, 정기집회에 여러가지 참석하게 될때, 예배의 특권이 있죠. 제사장으로 주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으로 주님앞에 예배하죠. 우리는 기도하게 될때, 공적으로 와서 기도하죠.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이와같은 유익을 얻게되죠. 우리는 이일을 위해서 엑서사이즈(exercise)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 전도하는데 이미 그것을 교제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참여할까, 그 다음에요. 영적인 성장, 우리 모임은 정기집회에 참석하고 교제하고 하게 될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주님 닮아가요.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기적이고 아직도 주님의 모습과는 달리 모가 나 있고, 까칠해요. 모가 나있는것은 어떻습니까? 해안가에 가면, 어떤 해안가는 동글동글한 돌로 되어 있는 해안가가 있습니다. 사실은 조금 힘들어도, 맨발로 가도 다치지 않습니다. 왜? 돌들이 동글동글하기 때문에, 그런데 삐죽삐죽한데, 맨발로 한번 가보세요. 우리가 교제하게 될때, 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숙하게 될때, 수많은 문제를 넘어갈수 있어요. 저는 성숙이라는 말을 애기하게 될때 어디에 비교하고 싶으냐면, 슈퍼마켓에 가면 카트가 있잖아요. 카트에 바퀴가 있어요. 작은 바퀴, 그런것을 끌고 다니다보면, 조금 울퉁한 곳에 걸리면 못 가요. 바퀴가 크면 어떻습니까? 그냥 그런것은 훌떡 넘어가 버립니다.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큰 바퀴 입니다. 미성숙이라고 하는것은 작은 바퀴에요.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지고 계속해서 부딧쳐서 문제 만들고, 사단은 거기 껴들고, 이런것들, 그런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모임 안에서 교제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성도들을 우리가 눈으로 보게될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의 성도들의 교제의 위대한 점은 바로 그겁니다. 본을 보게될때 많은 격려야 많은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많은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도 저렇게 되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는요,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를 성장하도록 만들어주죠. 모임의 교제, 이것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방해막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모임의 교제는 정말로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특권중의 하나는 장로들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때, 첫째, 장로의 자격중에 하나가 말씀을 가르쳐요. 그 다음에 장로들은 카운슬을 합니다. 어떻게 카운슬을 하는가? 말씀을 통해서 카운슬을 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에 부딧쳤을때 어떻게 결정해야 될는지 모를때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앞에 먼저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또 분별해보고 하죠. 그래도 어떤때에 또 답이 안나와요. 더 기다립니다. 또 주님을 기다리죠. 그래도 안될때 어떻게 합니까? 또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성도들과 만날때, 어린 형제를 찾아가서 한번 이야기 해보세요. 무슨 도움을 받을수 있습니까? 어린 형제, 대단히 짦은 경험, 그리고 육적인 생각, 미숙감, 이런 것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때,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교훈해 주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왕이 되었을때 그에게는 두가지 종류의 교도가 있었죠. 카운슬러 입니다. 하나는 자기 또래의 카운슬러, 다른 사람은 노인들의 교도죠. 누구의 교도를 받았습니까? 청년들의, 같은 또래의 권면, 같은 또래의 추천, 카운슬, 사람들은 이런것을 선호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왜냐하면 내 마음과 합한것이 그쪽이기 때문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고싶은것을 하고 싶은데, 그 사람의 말을 듣는것이 저쪽가서 말을 듣는 것보다, 저쪽가면 고리타분한 사람들, 맨날 하지말라 이럴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가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상 궁극적으로 거시적으로 볼때, 모든 도움과 유익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르호보암 보십시요, 젊은 교도들에게 가서 카운슬을 받았을때 그의 프라이드를 마음껏 높여 줬어요. "당신이 왕인데 백성들이 뭘 불평합니까, 그냥 가서 확 짓밟아버려라. 당신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추앙해주는것을 좋아하죠. 그래서 아첨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첨을 원합니까? 아니면 진실된 하나님의 분별을 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원합니까? 노인의 교도, 노인들이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의 생각에는 잘 맞지 않았어요. "당신이 만일 왕이라도 겸손히, 백성들 앞에 그들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들 편에 서서 한번 생각해보는 생각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한번 해결해보라." 좀더 객관적이죠. 그런데 청년들의 교도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왕인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반발할수 있느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뭉치를 가지고 그냥 확 해봐라." 참 마음에 합하죠. 내가 왕인데, 왕이 되본적이 없어요. 이제 왕이 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번 해보면 얼마나 즐거울까? 우리는 국가를, 백성들을 나의 즐거움이나 나의 어떤 만족을 위해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어린 사람들에게, 저는 결혼 문제로 인해서요, 여러가지 낭패를 본 자매들, 형제님들 중에, 친구들 조언 듣고서는 이리저리 해본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는 이미 결정이 되어 있어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나에게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발람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갈까요, 말까요?" 마음속에는 그냥 다 갈거로 작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표현으로, 그냥 형식으로 하나님 앞에 묻는 형식을 취했을 뿐이예요. 하나님은 말씀 하셨죠. "가라, 네가 가고싶은대로 해라." 그런데 어떻게 됬어요? 가서는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못했어요. 성령이 그를 통제했어요. 우리가 만일 주님을 경외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의 권면, 저는 물론 장로들이 주님앞에서 합당한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주님이 주신 대행권세가 있어요. 이 대행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다루실 것입니다. 주님앞에 가서 직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로는 주님 앞에서 신령하고 경건하고 책임 있는 그런 장로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장로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겠어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장로에 관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임의 리더쉽, 모임의 존재, 모임의 리더쉽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요, 사단은 성경에서 여러가지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공격하는데, 그 중에 두가지 집이 있죠. 하나님의 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있고 하나님의 사람의 집,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 집은 사단이 아주 작정하고 때려 부시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게 공격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그것 때문에 고통 가운데 때로는 자살을 생각하고 때로는 여러가지 비관 속에서 살아가는 힘을 잃어버리고 그런 비극을 몰아넣는 일, 그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한다. 부부관계가 소홀해지고 이혼하고, 집안에서 왈가닥 왈가닥하고, 매일같이 이런 분위기 속에 산다면 어린 아이들의 감정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통제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책임,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에서는 부모가 누구예요? 장로죠, 두가지가 집입니다. 그래서 장로를 생각할때 부모를 비유해서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제 장로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의 심정으로 합니다. 이 집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우리가 결혼했으니 우리가 집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시편 127편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돕지 않으시면 이 집을 건설할수가 없다.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주님의 도움, 그것이 없이는,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시는 위대한 질서, 이것이 없이는 집도 세울수 없고요. 그리스도인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수 없어요. 그래서 마귀가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는가?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이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귀에게 동조하는 그와같은 어리석은 일을 내가 해서는 안된다. 나는 마귀는 아니지만, 나는 마귀를 물론 싫어하지만 어떤때에 주의하지 않으면 나는 마귀가 하자는대로 하는일이 마귀를 지원하는 일을 할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리더기 때문에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고 우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사랑하신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교회를 누가 파괴하려고 하는가? 마귀가 파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교회의 가장 효과적인 파괴 방법은 뭔가? 그것은 리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가? 성도들은 장로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주님 앞에서 처신해야 할까? 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로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이 두가지 양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해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로는 어떻게 세우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저는 너무나 자주, 이제는 모임 안에서 이제는 모임 안에서 어떻게 이런 얘기를 이렇게 흔히 이야기 될수 있을까? 장로를 투표해서 뽑자, 사람이 추천해서 "해보세요."라고 해서, 이런 모든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사도행전 20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행 20:28).

여기 뭐라고 말씀 했어요? "성령이 너희 가운데서 감독자를 삼고" 감독자, 장로, 목자, 청지기, 이 네가지가 다 똑같은 말입니다. 장로, 감독, 청지기, 목자, 같은 말입니다. 감독자로 삼았다. 누가 삼았습니까? 투표해서 했습니까? 성령이 세우셨어요. 그러면 성령이 세우실때, 어떻게 세웁니까? 장로의 자격을 보면, 수많은 자격들 중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이 있어요. 장로의 감독의 직분은 어떤 사람들에게 있는가? 선한일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 마음의 사모심, 소원, 소원은 누가 넣어주겠어요? 투표하면 소원이 나옵니까? 사람들이 "아, 당신이 한번 해보세요." 라고 하면 소원이 나옵니까?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요, 사도바울이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필요가 생깁니다. 여러분, 아이가 태어나면요, 그날부터 엄청난 필요가 시작되요. 앙앙대고 울죠. 울지않게 해주고요. 계속해서 젖 먹이고, 똥 싸면 갈고, 밤잠 못자고 이게 신혼 부부들, 아기 낳은 부부들의 밤의 고역이죠. 여덟번, 열번도 더 깨고, 밤잠 못자고, 낮에는 졸립고, 필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때, 영적으로도 마찮가지예요. 그리스도인이 탄생될때, 수많은 필요가 바로 시작된다. 바로 그 필요를 누가 보는가? 그 필요 때문에 성령은 그들 가운데서요, 어떤 형제님 마음속에 말씀해 주세요. 소원을 넣어 주세요. 그 필요를 보면요, 그냥 도저히 가만히 멀뚱히 보고있을수 없다는 그런 마음을 주셨다. 이것이 소원이예요. 어머니가 그랬는데요, 이 세상에 그런 매정한 엄마가 있어요. 애기를 낳고서는 그 다음에는 피시방에 가서는 이것저것 하다가 그런 뉴스가 가끔 나오지요. 이런 어머니가 가끔 있지만, 거의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는요, 아기가 울면 아무리 피곤해도 밤에 일어나요. 왜? 필요를 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영혼들이 있으면, 그 필요에 대해서 마음속에 누군가 도저히 견딜수 없다라는, 바로 그 사람이 장로예요. 그 사람이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받고, 성도들이 모이면서부터 그것은 지속되게 연결되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뭐 구원받은 때가 따로있고, 또 어느날 선한 마음이 생긴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속적인, 연속적인 일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형제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생겨서 일하는데 성령님께서 또 다른 형제의 마음속에 그 형제님은 아마 봤을 거예요.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 일을 하는것을 보고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도 감동 시켜요. 그래서 또 일해요. 장로들을 하나 둘씩 세우는 겁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4).

미디안이 점령 했을때, 다 뺏어 갓지요. 먹을게 없어요. 그래서 기드온이요, 미디안이 점령했을때 다른사람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기드온의 얘기가 이제 시작되거든요. 그 참상을 사사기 6장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기드온에 대해서 성령이 갑자기 말씀하세요. 왜냐하면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기드온이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죠.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랬더니, 기드온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기드온은 백성들이 다 타락하고 이제 침략을 당하고 다 뺏기고 이렇게 궁핍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하에 있을때, 참으로 슬픔 시대죠. 그때에 기드온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의 필요, 자기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장로는 언제나 그런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장로들에게 "너희는 먼저 너희를 조심하고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 조심하라" 먼저 자기예요. 자기의 필요를 생각하고, 답답해서 견딜수 없어 했어요. 그리고 자기 백성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견딜수 없어 했어요. 모든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다 그런 마음을 가진것이 아니었어요. 기드온이 이런 마음을 가졌을때 주님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할때 14절에 말씀했지요.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리고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삿 6:16).

이스라엘의 당시의 필요는 미디안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밥도 음식도 얻어야 됬습니다. 기드온은 그것을 봤어요. 다른사람도 그 필요를 보지만 그냥 탄식속에 그냥 맥 놓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어요. 그래서 기드온이 주님을 의지하고 두렵지만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34절 보십시요.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삿 6:34).

기드온이 먼저 일어났어요. 주님이 부르셨거든요. 왜? 그 마음속에 어떤것이 있는지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예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예요. 소원, 이것이 성령이 우리속에 불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나팔을 부니까, 아비에셀, 자기 아버지의 가족들, 친척들입니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벌떡 일어나서 그를 따랐어요. 인도력, 따른다고 하는것은 인도력 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갔는데 아무도 안따라와요. 인도력이 없는 것입니다. 인도력이라고 하는것은 다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던 것같은 감동을 그의 부름을 따라서 주님앞에 선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게 될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도력이예요. 사람들에게 총 칼을 대고 나를 따라오지 안흥면 죽인다고 하는것은 인도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독재죠. 인도력이라고 하는것은 사람이 자원해서 감동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의 인도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첫째, 성령이 그 사람의 선한 소원, 그것이 첫째. 그 다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장로는요, 개인적인 영적인 자격을 보면 그런 자격이 있죠. 그는 절제 합니다. 그는 신중 합니다.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성품, 그런 사람 마음속에 그런것이 안생길수가 없어요. 여러분, 성도의 필요를 느끼게 될때, 우리는 가끔 소년가장이라는 말을 듣죠. 소년가장은 틴에이저인데 보통 애들과 달라요. 왜냐하면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행하지만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어린 아이인데도요. 저는 그런 아이들을 봤습니다. 제가 토론토에 갔을때, 어머니가 정신병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우리 성도들 가정이예요. 처음에 모르고 그 집을 갔는데, 아버지가 있고 그 집에 딸들이 여럿 있는데, 어머니가 안보여요. 그런데 다 음식을 차려놓고 가져왔는데 조그만 애들이예요. 제일 맏 언니는 틴에이저 정도 됬어요. 그 음식을 가져와요.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의 골이 났기 때문에, 책임감을 맏딸이 느끼는 것입니다. 책임감을 느끼는것, 필요를 느끼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 가운데서 장로를 일으키는데 중요한 지뢰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자격, 소년 가장이요, 동생들에게 뭐라고 얘기 합니까? 뭐 보통 아이들처럼 막 뭐라고 하지 않죠. 막 울고 자기 주장하고 자기 챙기고 그렇지 않잖아요. 왜? 동생들 챙겨야 하니까요. 안챙길수 없어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소명을 주시고요. 그런것을 내가 느끼게 될때, 성령님이 내게 역사하실때 그렇게 해보면 다른 성도가 내게 감동 합니다. 거기에 따라 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아무것도 안하고 투표합시다. 뭐합니다. 투표를 열다섯번, 스무번 해보세요. 거기서 무슨 장로가 나옵니까? 그것은 정치적인 활동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예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혜를 초워해서요, 한 목적적이고, 가장 유능하고 가장 합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래서요, 개인적인 자격이 있어요. 가족적인 가정의 자격, 그는 한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 사람, 그는 그의 삶 속에서요. 가정의 정말로 정절과 질서,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이예요. 그리고 자식들을 잘 기르는 사람이예요. 그리고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예요. 가르치는 능력, 대접하는 일들, 그런 책임을 합니다. 카운슬을 합니다. 성도들의 책임에 대해서 곰곰하게 생각하고요. 성도들의 필요를 어떻게하면 채워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문제들을 생각하게 될때 남달리 고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은 어떻게 해결할까,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그래서요, 자꾸자꾸 해 보니까, 주님의 지혜를 알게 되고요. 그렇게 터득해서 그렇게 카운슬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아니고요, 자기 경험 아니고, 주님 말씀을 따라서 카운슬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장로, 성령이 세우시죠. 그는 일하는 사람이지, 나는 장로니까 나를 따르라고 하는 사람 아니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성령은 또 다른 일을 하세요.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살전 5:12-13).

한 형제님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요, 소원이 생겨서요. 막 일을 해요.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막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열심히 목자로서 일을 합니다. 그는 자기가 장로라고 얘기 안해요. 그런것을 추구하지도 않아요. 정말로 그런 사람은 그런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성령님이 다른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해요. 그래서 장로가 되는 사람은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한 동기를 가지고 선한것을 사모하면서 일을 하는데, 동시에 똑같은 성령님께서는 다른 성도들 마음속에서 '이분은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게 하신 다스리는 사람이다.' 라고 마음속에서 자원해서 인정하도록 한다. 따라서 모임 안에서 장로가 서는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말이예요. 저는 아까 하나님의 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의 집이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집은 어떻습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의 집에서 아이가 태어날때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 엄마가 아이에게 계속해서 "나는 너의 엄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이 소리 합니까? 그래서 애가 '아, 어머니구나.' 이렇게 얘기 합니까?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하는것은 말도 못하지만 깨닫는것은요, 말로할수 없는 분량의 어머니의 희생과 수고와 사랑, 이것 때문에 어머니라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의 집 안에서 되어지는 리더쉽의 부모 자식관계의 리더쉽이죠. 다스림 입니다. 이 세상에 정부 세가지가 있어요. 가정과 정부와 교회 입니다. 이 세가지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정부예요. 거기에는 다스림이 있고요. 다스림을 받는 권위가 있고 머리가 있고 순복이 있습니다. 그와같은 관계를 하나님이 집안에서 세워 놓으셨어요. 마찮가지로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에서 똑같습니다. 장로를 세울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순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 앞에서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서 장로의 편에서 행하는 사람의 입장과 다른 성도, 양들의 편에서 행하는 일들을 골고루 말씀하셔서 이것이 서로 맞아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리적으로 대단히 자연스럽게 일이 일어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장로의 기능은 뭘까요? 시간이 다되었네요. 장로의 기능부터 내일 마지막 남은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결론은 모임의 인도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형제자매님들 모두가 이 인도력에 대해서 사모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사람이 그것을 사모하고 인도를 받는 성도들도 그것에 대해서 사모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세우셨고 마귀는 이것을 모든힘을 다해서 파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순종하게 될때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하게 되고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어떤 사람만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고요. 주님 안에서 이와같은 뜻을 이루어드려서요. 교회가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고 소중히 생각하는 교회가 번성하도록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해야 하겠다. 그것만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요, 내가 질서, 나의 가정의 질서, 이것은 교회가 번성하게 될때 우리에게 끼쳐지는 그런 유익입니다. 우리 가정이 번성하게 될때 교회는 또 마찮가지로 이것을 윈윈 효과라고 말하죠. 서로간에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잃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이런 관계, 이것을 우리는 배제해야 되겠죠.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