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플러싱 수양회 7_성도의 책임 > 정형모 형제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1-4).
여기 이제 에스겔 시대에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목자들을 향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외치도록 했지요. 목자가 양들을 먹이고 돌보지 않는다, 그 말씀을 하고 계시죠. 여기 목자라고 하는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또는 방백들, 모든 인도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다 부패 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희들은 목자, 감독, 장로, 청지기, 같은 용어들입니다만, 장로의 일들. 여기보면 먹이는 일, 강하게 하는 일, 고치는 일, 그리고 싸매주는 일, 그리고 쫓긴자를 돌아오게 하는 일,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 그리고 강포로 다스리지 않고 그들을 돌본다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지금 하셨는데요. 장로의 모습, 무엇을 하는 것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가 하는 일의 다양한 일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께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양을 치라, 먹이라."고 했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먹이는 거죠. 시편 23편 보면 먹이고, 그리고 초장으로 인도하고 마시게 하고 쉬게하고 목자의 할 일입니다. 목자가 이와같은 일을 하게될때 그는 양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왜냐하면 주님이 이제 종에게 맡겼다고 했죠. 왜 장로를 가리켜서 청지기라고 말할까?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맡아서 관리하고 그들이 복지 가운데 건강하게 그리고 성장 하도록 그리고 살찌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먹어야죠.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먹이는 일, 목양입니다. 또 양들을 보호하는 일, 이리가 들어와서 교리로 혼탁케 합니다. 또 세상적인 풍물이나 세상적인 생각, 세상적인 가치, 이런것이 모임에 들어오게 될때 양들은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때로 양들은 그렇게 하는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할때가 있어요, 타락함으로 인해서. 그것은 이제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게 되는 거죠. 저해를 받게 됩니다. 이제 세속적으로 빠지고 그것의 영향은 자녀들에게 이어지고 모임의 기준은, 가치는 세속적인 것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참 슬픈 일이죠. 인도하고 다스리고 장로의 일들 중에 장로는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스린다. 교회는 정부 입니다. 교회는 그냥 모여서 서로 이야기 하고 그리고 교제하고 그렇게 하고 좋은게 좋은것으로 가는것이 아니고요. 여기는 다스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 다스리는 장로는"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때 주신 대행 권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권위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 입니다. 그 권위를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 이것은 이제 그가 주님으로부터 인도를 받고 또 훈련을 받고 그의 성품을 주님 앞에서 구비하게 되고 선한 마음이 있고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서 그는 모임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스림을 통해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카운슬을 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할까?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어려운 난재에 부딧쳤을때, 물론 각 성도님들은 자신이 주님앞에 기도하고 분별할 책임이 일차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때 기도하죠. 기다리죠. 그런데 장로들이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영적으로 도와줘서 가장 바른길로 선택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 충고 입니다. 카운슬, 어려운 자를, 이 에스겔서 말씀에서처럼 회복시키는 일, 또 잃어버린 양들을 다시 찾아서 돌아오게 하는 일들, 참 일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일, 영적인 일입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서 장로들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장로 마음속에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따로 저쪽에서 생각하고 있고 장로들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고요. 함께 생각하는데 함께 어떤 수준에 생각하는가? 성도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나가도록 계속해서 이끌어줘야 합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일입니다. 한번 먹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먹이고 계속 돌봐야 하고 계속 성도들 가운데서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고 또 때때로 일꾼들을 알아 봅니다. 일꾼들을 양육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양육하고 교제를 통해서 양육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통해서 여기서 일꾼이 일어나야 합니다. 일꾼은 다른 제도에 가서, 어떤 기관에 가서 배워서 온 사람을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교회는 이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고 그것을 개발하고 그것을 준비하고 하는 하나님의 학교가 어딥니까? 우리가 조금전에 하나님의 학교가 어디라고 생각해 봤어요? 내가 있는 곳입니다. 가정, 직장, 그리고 때로는 학생이면 학교, 그리고 모임에 와서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과 함께 여기 모여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꾼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천거하고 그를 위해서 지원하고 기도하고 하는 이런 모든 일들을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데, 에스겔 시대에 하나님께서 책망한 것을 우리는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화 있을 목자 입니다. 그들은 틀린 목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떻게 이와같은 일을 해야 할까? 라는 생각,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 저희가 성령이 장로를 세운다고 말씀드렸고요. 똑같은 성령이 장로들을 인식할수 있도록, 인정할수 있도록, 알아차릴수 있도록, 그리고 기도할수 있도록 그렇게 귀히 생각하고 기도할수 있도록 인도하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대단히 순리적인 일입니다. 모임 안에서 장로가 일어나는 일은요, 그것은 인위적인 일이 아니고요. 성령님께서 행하신 대단히 순리적인 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리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장로들이 일어났을때 대단히 주님이 인도하시게 될때, 참으로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위적으로 하면 거기에서 수많은 부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수많은 부작용을 우리가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도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양들이 할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장로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것은요, 머리와 순복 관계, 이것은 교회의 질서 입니다. 왜 발람이 아름답게 이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왜냐하면 거기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벌어짐이 아름답다,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요, 창조할때부터 이 머리와 순복 관계를 염두해 두고 계셨고요, 머리와 순복 관계는 하나님이 만든 제도안에 언제나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 제도를 바로 정상적으로 가동시켜주는 그런 것입니다. 국가, 정부가 있고 백성이 있어요. 여기 머리와 순복관계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입니다. 또 가정도 마찮가지 입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어요. 그리고 모임, 거기에 장로가 있고 성도들이 있어요. 여기에 머리와 순복관계, 하나님의 집, 여기서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집, 여기서 질서, 그것은 간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이제 장로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가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자기가 회계할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장로예요. 그래서 그들이 성도들을 인도하게 될때, "근심으로 인도하지 말도록 하라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 여러분, 여러분이 불순종 하게 되면요, 장로들은 굉장히 고민 합니다. 괴로워 합니다. 밤잠을 못잡니다. 그렇게 하도록 장로들을 계속해서 여러분은 그렇게 할겁니까? 계속해서 괴롭힐 겁니까? 여기 히브리 저자가 분명히 말씀 했어요. "순종하라 기쁨으로 이야기 하라" 라고 하는것이 최소한의 성도들의 책임 입니다. 그 다음에, 순종하고, 데살로니가를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살전 5:12-13).
장로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요, "누가 장로야?"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때, 성령님이 다 보여 주셨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런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정할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귀히 여기라 그랬어요. 장로들이 행하게 될때, 장로들의 일에 대해서 감사합니까? 때때로 전화라도 이야기 합니까? 감사의 표를 합니까? 마음으로요. 그것은 주님께서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임의 집합적인 간증이 세상으로 뻗어나가는데, 천사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순종하지 못하는가? 여러분은 성경에서 성도가 성도를 보게될때 그냥 인간으로 보지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어요. 사도바울은 성도를 자기의 기쁨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지요. 이것은 우리 주님 앞에서 합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로를 생각할때, 때때로 장로를 여러분은 나이 가지고 따집니까? 장로를 외모 가지고 따집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요, 여기 인식할뿐만 아니라, 인정할뿐만 아니라 귀히 여기고, 그렇다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고, 그들이 행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모임이 그래서 정상적으로 아름다운 간증 가운데 가게 될때 사실은 여러분 자신이 복을 얻는 것입니다. 모임이 정상적으로 가게될때 우리 가정이 유익을 얻고, 우리 자식들이 이곳에 왔을때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자라게 할때요, 십대에 가서 아이들이 이해할수 있을때부터 복음 전하고 그렇게 합니까? 아니예요. 태어났을때부터 아이들이 모임에 와서 모임의 분위기에서 숨쉬면서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베푸셨구나, 라고 하는것을 알고요, 그들이 빨리 구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나이가 된 다음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격려하는 생각 입니다. 그래서요, 그런 분위기, 인런 영적인 분위기가 우리 모임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강력한 힘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요, 모두가 다 이런 분위기는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말씀을 조금전에 봤었지요.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인도하는 자들을 잘 보라는 얘기예요. 인도하는 자를 잘 보는데 무얼 보는가? 그들의 외모를 보고 어떤 매너를 보고 이런것을 보지말고 그들의 믿음을 보라고 했어요. "그들을 주의하여 보고 믿음을 본받으라"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장로의 책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얼마나 막중한지 모릅니다. 모든것을 다 쳐다보고 있어요.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여러가지 순간순간의 모든것을 다 성도님들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을 감당할수 있습니까? 주님앞에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 막중한 책임을 위해서요. 주님의 영광과 모임의 복지와 성도들의 안녕, 질서와, 그리고 우리 후대에 모든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이 엄청난 책임, 모임의 간증을 위해서 어떻게 우리가 처신해야 할까? 장로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고, 장로들에게 본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본이예요. 그 본을 따라가게 될때 성도들은 장로들을 보고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씀했다면, 첫째, 양들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존경해야 합니다.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로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 예를들어서 장로가 모임을 대표해서 징계하게 될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동의하지 않는다면 징계 문제 말고도 여러가지 다양한 문제에 있어서 다스립니다. 그때,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뒤에가서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막 비난하면 합세한다고 하는것은 모임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을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만일 이견이 있다면 장로에게 찾아오세요. "형제님, 저는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는데 설명을 해주십시요." 이때, 장로는 모든 성경 말씀을 통해서요, 이것을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제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계속해서 웅성웅성 하는 것들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죠. 이것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형제 자매님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요, 인도력은 생명이다. 모임의 존재와도 같다고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아합이 전쟁에 나갈때, 왜 여호사밧이 함께 나갈때, "당신이 왕복을 입으세요." 왜 그런지 아세요? 왕복을 입으면, 제일먼저 화살의 타겟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왕을 먼저 쓰러뜨려야, 그 다음에 그 나라를 무너뜨리죠. 장로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런 역사를 하고있다. 그래서 만약에 장로에 대해서 출교의 대단히 중한 범죄중에 하나가 후욕입니다. 성도들을 후욕할수 있다. 후욕이라는 것은 그냥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계획된것 속에서 그 사람의 인품과 성품과 모든 명예와 명성과 신뢰도와 이런 모든것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출교 당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한 죄입니다. 후욕한다, 그런 모든 일들은 물론 합당치 않죠. 그래서요, 장로는 이와같은 일에 있어서 어떻게 행할까? 또 성도들은 어떻게 행할까? 그래서 인도력을 계속해서 주님앞에 보존하고 모임의 머리와 순복관계, 안녕과 질서, 그리고 간증, 이런것이 계속 보존되도록 장로는 물론, 성도들 모두가 혼연 일체가 되서 힘써야 되리라 믿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요. 장로만 주의 일꾼이 아니예요. 우리 모두가 다 주의 일꾼입니다. 그 생각을 한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합당히 행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믿습니다. 모임의 교제는 그래서 영적인 교제 입니다. 이것은 사교가 아닙니다. 모임에 교제하게 될때 원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때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가깝고 덜 가깝고 이래서 우리가 행동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많은 어려움들이 생깁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균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때때로 이견이 있고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찌라도 우리가 좀더 성숙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가, 그 원칙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이견이 있어도 원칙하에서 우리는 여전히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희들이 말씀을 들었지요. 하나가 되기를, 연합하기를 힘쓰라. 왜 힘씁니까? 거기에 우리의 성의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저희들이요, 순결, 모임은 순결해야 합니다. 순결을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로는 물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임이 순결해야 한다. 거룩해야 한다라고 하는것을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모임이 거룩하기 위해서 모임은 신령해야 합니다. 신령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신령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안에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 들어오고요,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오고 범죄할 가능성이 많이 있다. 모임안에 범죄가 들어올때 모임은 슬픈 것입니다. 왜? 징계를 해야 하기 때문에요. 고린도 교회에 사도바울이 말씀 했지요. 그 안에 범죄한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보다도 더 마음이 넓었어요. 더 사랑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들을 다 용납했어요. 사도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는 교만하다. 너희는 왜 이 사람을 너희 중에서 내쫓지 않았는가?" 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사도바울이 사랑이 없어서입니까? 고린도 성도들이 더 사랑이 많아서입니까? 우리가 만일 하나님보다 지혜롭다, 나는 하나님보다도 사랑이 많다, 여러분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많을 수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하지만, 참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런 사랑을 갖기를 원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닮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보다 내가 더 사랑이 많다, 그것은 주제넘는 일입니다. 그래서요, 이 징계는 왜 합니까? 모임을 보존하기 위해서,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순결이 만일 없다면, 거룩이 없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교회의 간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영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왜 지역교회를 두셨습니까? 왜냐하면 주님은 떠나가셨어요. 성령님이 오셨어요. 성령님이 이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왜 이 가운데 주님이 안 계신데, 모임은 주님이 오실때까지 이 땅에 남겨 두셨습니까? 왜? 이곳에 와서 성도들이 성장하고 모임의 간증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만일 여기에 범죄가 들어 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간증을 나타낼수가 없죠. 그래서 징계해야 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범죄한 성도와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 두번째, 동시에 온 모임의 성도들의 간증을 보존해야 합니다. 두가지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징계의 문제에 들어간다. 이 얘기를 다 하려면 지금은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할수가 없지만 징계는요, 범죄한 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벼운 것들이 있고, 이것은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모임의 교제안에 있으면서 징계를 받는 내징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 범죄는 모임의 교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외징계, 출교가 있습니다. 이 두가지 징계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하게 될때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어요. 징계는 있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 되겠다. 어떻게 예방합니까?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고 있고 영성을 유지하고 있고 이 가운데 신령함이 깃들때, 성도들은요, 범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마귀와 세상과 자아지요. 육신입니다. 사단이 여기 역사하게 될때 이제 범죄 하지요. 교만하고 또 세상을 사랑하고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5장의 말씀에서 출교의 예를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9-11).
대단히 엄중한 말씀입니다. 도덕적인 문제죠. 출교는 도덕적인 문제와 교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 중에 음행, 오늘날과 같이 성적인 부도덕이 넘치는 시대에 우리 자신을 잘 간수하지 않으면 성도들 가운데 이와같은 범행이 있을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깨어 기도하고 조심해야 할까?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개인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인도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보호를 받게 될겁니다. 탐람, 탐심입니다. 성도들이요, 복권을 삽니다. 그래서 당첨 됬어요. 삼백만달러를 받았는데, 저널리스트가 와서요, "삼백만불을 받게 된 기쁨을 한번 말씀해 주십시요." 말했어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내가 이 거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겁니까? 이것은 출교의 죄 입니다. 탐심 입니다. 우리는 슈퍼마켓에 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국에서 5불짜리 사요. 매일 삽니다. 가서 가스 넣고서 가서 보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가 볼때 거의 모든 사람이 5불짜리 10불짜리 두장 세장 사요. 제가 보았을때 한두명이 아닙니다. 곧 짧은 기간동안에도요. 줄서있는 사람들이 제 앞에 있는 사람, 제 뒤에 있는사람, 내고있는거 보면 딴거 사고 복권 삽니다. 이것이 사람들 가운데 편만 합니다. 물질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정말로 주님 앞에서 청렴 결백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철저히 살고 있는가? 우리가 돈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요, 주님께서 말씀 했어요. 탐람, 탐심, 이중 장부, 그리스도인이 이와같은 일들, 우상숭배,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했지만요. 모임에서의 징계는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증인 없는것은 징계할 수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임에서 두 세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다고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에 그렇게 말씀 되어 있어요. 그것은 무엇 입니까? 교회의 징계에 관한 결정은 대단히 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징계의 결정을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 여기 똑같이 말씀이 이어진다면 징계를 하게될때 이것은 대단히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범죄를 하는것이다라는 거죠. 엄청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우리는 올바로 해야 합니다. 장로가 가지는 권한, 장로가 징계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일을 집행하는 장로는 대표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인정 하신다는 말입니다. 매어도 풀어도 인정 하신다. 그렇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은 주님 앞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가볍게 생각 한다면 이제 주님께서 그를 다루실 것입니다. 여기 또 다른 일이 있지요. 후욕, 이미 말씀 드렸어요. 의도적으로 계획해서 사람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 술취하는 것, 술뿐만 아니라 마약, 모든 화학물질을 사용해서 거기에 빠져 중독된 사람. 성도가 이렇다면 참 불행한 일이죠. 습관 속에서 이렇게 됩니다. 소셜드링킹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토색하는 사람, 협박해서 뭘 뺏는 것,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도가 이와같은 일을 했다면. 시간이 없어서, 이제 교리적인 문제가 있고요. 그 후에 출교가 있습니다만, 그리고 내 징계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시간에 말씀을 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저희들이요, 모임 안에서 형제님이 있고 자매님들이 있죠. 몸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모임에는 형제들이 있고 자매들이 있습니다. 형제님들의 위치가 있고 역할이 있습니다. 자매님의 위치가 있고 역할이 있어요. 이 점에 대해서 저희들이 조금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8-15).
여기 첫째, 형제님들에게 말씀 했습니다. 형제님들은 분노와 다툼, 그런것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하라. 이 말씀을 읽게 될때 저희들은 모임안의 영적인 분위기를 저희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다툼, 분노, 이것은 대단히 육적인 일이죠. 슬픈 일들입니다. 미성숙한 증거고 그리고 육적인 말로 입니다. 그런것이 아니고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것은 단순히 기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러한 영적인 자세라면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 중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자세는, 그것은 경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겅건하지 않은 사람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 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뗄레야 뗄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거룩한 손으로 기도한다는 말 한마디로 모임 안에서 형제의 위치와 책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가 영적으로 주님앞에 가까이 있고 신령하고 경건을 연습하고 그와같은 상황에서 모임의 분위기가 그런 형제들이 모여 있다면 모임의 분위기는 영적일 겁니다. 여기 딱 들어오면 영적인 냄새가 날 것입니다. 거기에 걸맞게, 그래서 "이와같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걸맞게, "이와같이 여자들도" 자매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형제들은 기도 입니다. 자매들은 뭡니까? 단장 입니다. 그러면 자매들이 단장이면 형제들은 단장하지 않는가? 외모를 잘 추스리지 않을까? 물론 형제들도 단장해야 합니다. 단장이라는 이야기를 하게될때 이것은 외적인 거죠. 일차적으로 외적인 거죠.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것으로 단장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단장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임의 영적인 분위기, 자매님들은요, 이런것을 통해서요,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이 말은 머리를 빗을 빗고 또 적절한 옷을 입고, 이런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염치와 정절입니다. 염치가 뭡니까? 부끄러운 것을 아는것이 염치에요. 부끄러운데도요, 하나도 느낌이 없다. 이것이 염치없다는 겁니다. 염치없는 사람이예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뭐가 부끄러운지, 뭐가 영예로운지 우리는 알고 있어요. 우리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요, 어떤것이 영예로운지, 어떤것이 부끄러운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이와같은 점에서 자매님들이 염치와 정절은 일편 단심이죠. 관계입니다. 그래서 금이나 진주나 값진 것으로 하지말고, 우리는 돈을 사용하게 될때요. 어떻게 적절히 사용할까? 돈이 있다해도 어떻게 사용할까? 없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아니죠. 우리는 옷을 사서 입거나 행하게 될때 기준이 뭡니까? 내가 사서 입는 옷, 내가 행하는 모든 단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가? 내가 이 옷을 입고 나가서 이야기 하게 될때 복음을 전하거나 진리를 이야기하게 될때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라고 확신 합니까? 하세요. 만일 확신이 안되면 하지 마세요. 구체적인 얘기는 여러 형제 자매님들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 하십시요. 그래서요, 여기 자매님들은 잠잠하고 남자를 주관하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매님들은 사사롭게 가르치는 거죠, 공적으로 가르치는 것 말고, 베일을 쓰고, 이 모든 것들은요. 그렇다면 형제님들은 어떻습니까? 항상 이런 일들에 있어서 형제님들은요, 적당히 하고 와서, 자매님들 머리에 베일 쓰고 잠잠 하고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습니까? 아니죠. 형제님들은 입을 벌려서 주님 앞에 책임이 있습니다. 아까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 한다는 말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위기를 주도 해야 됩니다. 형제님들의 책임은 그것 입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은사를 따라서 이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형제들이 읽고, 묵상하고 이것을 전하고 하는일에 항상 힘써야 한다. 자매님들은 애찬 준비 하느라고 항상 마음속에 힘쓰고 있는데, 형제들은요. 그냥 한주 지나고 나면 그냥 모임에 와서, 이것은 안되는 것이죠.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안 하면요, 모임의 영성이 떠나가고 그리고 애찬 시간에만 열심히 먹는 것, 저는 오래전에 수양회때에, 지금은 주님께로 가신 형님이요. 나오셔서요, 그 형님이 그렇게 말씀은 안했지만 얼마나 속으로 분개해 했는지 저는 느끼고 있었어요. 점심 시간에는 얼마나 맛있는 것들을 먹고 그 다음에는 오후 시간에는 다 졸고 있다. 책망 받았습니다. 우리의 영성, 우리는 음식을 즐겨야 할 그런 모든 특권과 또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영성을 모임 안에서, 개인의 삶이나 모임 안에서의 삶 속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주님께 이와같은 영성을 드리게 될때, 그리고 자매님들도 그에 맞춰서 함께 협력하게 될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래서요, 형제님과 자매님, 특히 자매님들이 가르칠때 뭘 가르칩니까? 디도서 2장은 우리에게 특별히 말씀하고 있어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양육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이것을 가르치라고 말씀 했어요. 이 말씀을 우리가 가만히 볼때 모임과 가정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자매님들의 역할이 이제 가정을 다스리게 될때 형제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매에게 모든 자녀 양육을 일임하지 마세요. 형제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거기서 모든일을 자매와 함께 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홈메이킹을 한다고 하는것은 자매님들의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하는것을 기억 하세요. 이 말은 가정이라고 하는것은 모임과 어떠한 유기적인 관련이 있는가 하는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 양육이 되고 구원받고 주님앞에 드려지게 될때, 모임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모임은 이제 우리의 후대들이 계속해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자신을 주님 앞에 헌신함으로 인해서 이 모임이 설수 있도록 그런 비전을 우리가 갖고 가정과 모임,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사람의 집, 이 관리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은혜 가운데 해야 합니다. 그래서요, 형제님과 자매님의 역할이 있습니다. 또한 기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하게 될때, 사도바울은 교회에 관해서 말씀 하실때, 이 위대한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이제 권세와 정사와 천사들의 여러가지 계급을 향해서 이것을 보여준다라고 말씀 했어요. 천사가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고 있습니다. 모든 우리가 거주하는 성도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일에 있어서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보화를 맡기셨어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간수하고 갈 것인가? 남녀에 관한 이 문제, 모임 안에서 이 문제를 저희들이 주님 앞에 성실하게 충성되이 행해 드리게 될때 주님께서는 커다란 영광을 받으시죠. 성별, 문제 있습니다. 우리가 분리하는 문제,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는 문제. 요셉에 관해서 창세기 49장은 말씀하고 있죠. 야곱이 이제 세상을 떠나면서 주님께로 가면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요셉은 무성한 가지다. 담이 있고 샘이 있다. 그런데 거기 나무가 있어요. 나무가 자라서 그 가지는 밖으로 나갔어요. 요셉이라는 뜻은 뭡니까? 더해진다라는 것입니다. 빼기가 아니고 더하기 입니다. 더해야지 자꾸자꾸 쌓이죠. 빼기는 적자 입니다. 우리의 삶은 성별하게 될때 흑자 입니다. 성별하지 않으면 적자 입니다. 왜 흑자인가? 요셉은 첫째, 성공의 비결이 뭐예요? 담 입니다. 성별입니다. 그러나 성별은 고립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별 한다고 하는것은, 청년들은 흔히 성별해야 한다고 하면 아주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고립하는것, 우리는 세상과 고립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 살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세상에 속하지 않을까? 요셉은 나무 인데요. 나무에서 가지가 나오죠. 그런데 옆에 샘이 있어요. 샘이 어디 있습니까? 샘이 울타리 밖에 있는게 아니라 안에 있어요. 그래서 이 나무는 샘으로부터 물을 계속해서 받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어디로 갑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흐름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차단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흐름이 있어요. 성별이라고 하는것은 흐름이 있어요. 그것은 영향력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이 주신 위대한 열매를 따 먹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말씀의 진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향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영향을 받는 사람인가? 모임은요, 우리는 성별을 통해서요, 이 생각을 깊이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성별이라고 하는것을 볼 때, "믿지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여러가지 멍에가 있어요. 사업상의 멍에가 있어요. 믿지 않는 자와 사업 합니다. 처음에는요, 잘 될것 같지요. 제가 본 성도들 중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고 사업한 사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망했습니다. 망하게 될때 그가 투자한 돈은 전부 다 안 믿는 사람에게로 넘어가 버렸어요. 여러분, 얕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러분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 하지 마세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제가 본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빠짐이 없었어요. 모두가 다 그 사람들에 의해서, 불신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돈을 다 뺏기고 그리고 부끄러움 가운데 나올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신 결혼 마찮가지 입니다. 불신 결혼, 이것은 무엇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일생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더 말씀 안 드려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인해서 경고를 받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다음에, 자선 사업으로 멍에를 같이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선 사업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기를 원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어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자선 사업을 하겠어요. 자선 사업이 나쁜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선 사업은 목적과 방법과 모든일에 있어서 우리는 불신자와 같이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종교적인 점에서 멍에를 같이할 수 없어요. "아! 거기 갔더니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더라." 그런 종교적인 모임에, 거기 구원 안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아! 거기 목사님이 구원받았대." 그래서 갑니다. 그것을 근거라고 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자와 함께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구성원이라 말씀 드렸지요. 그래서요, 믿지않는 사람과 종교적으로 교제할 수가 없다. 멍에를 맬수가 없다. 우리는 이제 사교에 있어서요, 우리는 영교지, 사교가 아닙니다. 영적인 교제이지, 사교적인 만남으로, 동아리로, 클럽으로, 무슨 단체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할수있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너희가 시간을 구속하라(아끼라)" 거기가서 시간낭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교를 하게되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 전할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복음이 아니라 그냥 즐거움으로 대화 하자고 하는 것이예요. 우리는 한 순간도 그런 시간을 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와같이 믿지 않는 자와 사교로 멍에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왜 성별해야 할까? 성별의 이유가 있어요. 성별의 이유는요, 첫째 성별 하게 될때만 우리는 영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성별을 안했을 때, 다 잃어버렸어요. 눈 빠지고 힘을 잃어 버리고, 성별 하여야만 우리가 영적으로 힘을 얻고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복음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이라. 그래서 저희들이 교회에 관해서 생각해 봤고요. 교회 안에서 저희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행동 하라고 하는점을 간략하게 생각 해 봤는데요. 이제 저희들이 마무리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여기 첫째, 일꾼은 하나님의 보화 입니다. 비밀 입니다. 너무나 고귀한 것이예요. 그것은 은과 금과 같은 것입니다. 탄광에 가서 우리는 석탄을 캐죠. 금광에 가서 우리는 보물을 캡니다. 보물입니다. 이 비밀을 맡은 사람 입니다. 주님의 이 위대한 말씀을 맡았습니다. 이 말씀보다 더 귀한 보물이 없어요.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전해줘요. 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것은 엄청난 책임 입니다.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맡아서 이제 이것을 맡았으니까, 이것을 잘 관리해서 불려야죠. 그 일을 하게 될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충성을 한다고 할때 자동차 운전과 비교해 보세요. 자동차 운전을 하게 될때 몇가지 중요한 것이 있어요. 핸들이 있습니다. 핸들 방향을 잡아 주는 것, 이것을 잘못해서 추락해 버리면 죽는 거죠. 방향, 대단히 중요 합니다. 둘째, 가속기, 엑셀레이터 이 가속기, 엔진을 밟으면요, 빨리 가동하죠. 그래서 추진력있게 나가는 것입니다. 추진력을 말해주죠.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이것은 무기 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브레이크가 있어야죠. 그래서 핸들은 지식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교회 진리를 바로 알아야 교회를 바로 세울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운다고 이야기하면서 교회 진리를 모른다면 정확하게 그것을 모른다면 파일럿이 비행기 운전하는것을 잘 모른다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샘백명, 사백명을 태우고 운전하고 갈수 있겠어요? 교회진리를 모른다면, 사도바울이 교회에 관한 말씀을 우리가 모른다면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 와서 사교하고 우리가 모이고 활동하고 이렇게 가고,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건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핸들,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바른 방향이 있지만 그것을 추진해줘야 하는것이 있어요. 가속기가 있어야 합니다. 핸들은 지식이라면, 가속기는 힘 입니다. 추진력입니다. 그런데 엑셀레이터가 있다면 브레이크가 있어야죠.브레이크 없으면 죽습니다. 절제 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행하게 될 때, 가속기를 발로 밟지요. 핸들은 손으로 움직이죠. 손끝과 발끝이 핸들이 내손이 되어야 하고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가 내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처음 운전연습 하게 될때, 강습사가 옆에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게 될때 제일 처음에 운전을 배울때, 자통차를 몰고가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제 자동차 타고서 가는것은 물론 알지만, 제일 처음에 배워야 할 것은 키를 돌리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자동차가 이 정도면 얼마나 빨리 가는가? 이 정도 누르면 더 빨리 간다. 이것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가다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아 이렇게 트는구나, 아 요만큼 가다 서는구나. 이것을 익히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요,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가 자기 발에 똑같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지 않으면 이것은 운전하기 대단히 어려운 거죠. 운전이 아주 부드럽게 이루어지지 않죠. 핸들도 마찮가지 입니다. 처음에 운전하는 사람보면 두 손을 가지고 막 이렇게 하죠.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숙달이 되면요, 그 다음에 한 손 가지고도 할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두손 가지고도 잘 할수 있어요. 어째든, 그것은 손끝과 발끝의 맛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충성하게 될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확실히 알고,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그리고 절제 가운데 그것을 해야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그것은 주님 것이다. 너무나 고귀한 것이다. 이것을 바로 선포하고 바로 적용하게 될때 성도들은 살고 주님은 영광을 받는다. 영혼들이 구원받는다. 모임이 간증을 드러낸다. 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할까?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벧전 4:11).
우리가 말씀으로 섬기고 우리가 다른 봉사로 여러가지 섬기게 될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하게될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같이 하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의견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전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크게 한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니고요. 여러가지 논리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한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니고요. 하나님 말씀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것을 알고 성령의 인도 가운데, 능력 가운데 전파 되어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 전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뜻을 내 마음속에 소중히 생각하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하게 될때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처럼 하라. 주님 의지하고 해야 합니다. 그 앞으로 와서 2장 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어떤 본입니까? 우리는 이사야서 42장 1절 말씀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 종을 보라고 말씀했지요. 그 본을 따라간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가, 어떻게 종으로서 섬겼는가, 그 완전한 모습을 우리가 보게될 때 우리는 감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분의 본을 따라가라고 말씀 했어요. 우리의 일반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주님을 심기게 될때, 주님께서 어떤 본을 우리에게 보이셨는가? 우리 마음속에 두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니, 주님의 은혜 가운데,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진리를 따라서 지식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절제함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되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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