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뉴욕 플러싱 수양회 04_하나님의 종. 부르심 >

박이레 2021. 7. 24. 15:36

강사 : 정형모 형제님

< 뉴욕 플러싱 수양회 04_하나님의 종. 부르심 >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3:1-6).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 주실줄을 믿습니다.

어제 저희들은 모세가 40년동안 미디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어떻게 그가 그의 부르심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 시키셨는지, 준비 시키셨는지를 보았습니다. 어제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가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게 될대 그가 경험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40년동안 목자가 되어서 양을 돌보게될때 고요함 가운데서 그가 주의 일을 할때 그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모세가 그 후, 80세에 부름을 받고 그가 행한 모든일들을 압니다.

바로 앞에 가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파하고 내 백성을 떠나 가게 하라라고 할때부터 시작해서 그가 모압 평지에 와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주님께로 돌아갈때까지 40년동안 행한 모든 일들을 보게 될때, "아! 그는 광야에서 이런것을 배웠구나뼈."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그는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그는 계속해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이끌어내는 일에 위대한 쓰임을 받도록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그가 이제 부름을 받는날이 옵니다. 어제는 그가 준비하는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저희들은 오늘 출애굽기 3장 말씀에서 그가 부름받는 과정입니다.

부름받게 될때 첫째,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평소와 같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40년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때, 많은 사람들은 만약 모세와 같은 상황속에 있을때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놀라운 해야 할 터인데, 언젠가 이 백성을 구원할까? 하는 마음이 그의 속에 40년간 있었을 터인데 하나도 변한것이 없고요. 한해 두해 지나갈때 얼마나 그의 마음속이 초조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그냥 광야에서 세월을 허송하고 말것인가? 세월을 허송한다고요? 우리는 매일과 같이 모임에 옵니다. 우리는 어디가 학교 입니까? 우리는 일상 생활이 학교 입니다. 우리는 집안이 학교 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 거기가 학교입니다. 공부하는 곳이 학교 입니다. 학교이면서 하나님의 학교 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게 될때 하나님의 학교 입니다. 모임 안에서 우리가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될때 거기가 하나님의 학교 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때 그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학교다 그말입니다. 얼만큼 내가 주님을 배울까, 얼만 주님의 속성을, 주님의 임재를 내가 피부로 느낄수 있을까, 이것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모세는 그렇게 매일과 같이 양을 기르고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어느날 나타나셨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3:1).

모세는 거기가 어떤산인지 지리적으로는 알수 있었겠지만 그 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후에 그의 백성을 이끌고 바로 거기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거기서 전차된다. 하나님의 성막이 거기서 세워진다 하는 놀라운 랜드마크입니다.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바로가 될 사람이 가장 멸시받는 목자가 되어서 양을 이끌고 매일같이 똑같은 일, 수많은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먼곳까지 왔을때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뚜렷한 것도 없고, 모임 안에서 이러이러한 일들이 그저 반복되고 주일마다 매일 모이면 그저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똑같은 것의 쳇바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임 안에서의 집회는 똑같은 집회가 없습니다. 단 한번도 똑같은 집회가 없습니다. 이곳으로 모이게 될때 주님께서 오늘 어떠한 역사가 있을 것인가, 주님께서 무엇을 준비하셨을까, 여기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은 어떻게 새로운 일일까 하는 기대감과 주님께 의지함 가운데 우리는 나타나야 합니다. 쳇바퀴가 아니라 우리는 매일과 같이 기대감 속에서 설레임 속에서 이곳에 나타나야 합니다. 모세는 그와같은 성실함 가운데 나타났을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떨기나무 불붙는곳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고 그는 이 큰 광경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게 될때 그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고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럴찌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이나 바라보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직접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시게 될때 "모세야 모세야"하셨습니다. 모세는 불붙은 나무가 타지 않는것을 보고 너무나 기이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하나니므이 사자가 거기 계셨어요. 거기에 수많은 떨기나무가 사막에 있었지만 어떤 때는 너무 바짝 말라서 튀어 나와서 바람에 의해서 굴러갑니다. 그것이 불탑니다. 그런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떨기나무가 아닙니다. 바람에 굴어가는 덜기나무, 너무 바짝 말라서 불타는 떨기나무가 아니라 이것은 살아있는 떨기나무 입니다. 이것은 불붙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죽지않고 타지않고 소멸되지 않는 떨기나무 입니다. 이것은 기이한 광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때 하나님은위대한 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게 된다고 하는것은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일을 하신다해도 그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고 그것은 위대한 일이고 그것은 막강한 일이고 그것은 기적입니다.

이제 "모세애 모세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주의 종이 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요.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기본 자세 입니다. 군인의 기본 자세가 차렷입니다. 차렷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본이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실때 "주님 말씀하십시요. 내가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는 단순히 듣는것이 아니라 말씀하면 무조건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죠. 훈련된 사람입니다. 절제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희생이 들어가도 그것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는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십시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합니다.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여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모세는 양을 이끌고 호렙까지 풀을 찾으러 왔을 거예요. 먼 곳까지 양을 먹이기 위해서 그는 목자로서의 소임을 다 하고 있습니다. 40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의 장인의 소유를 위해서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온 곳이 거룩한 산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가까이 하지 말라. 그리고 네가 선곳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 다음 그의 후계자는 여호수아는 청년 때부터 모세를 항상 옆에서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그가하는 모든 일들을 항상 모격하고 많은 교훈을 받고 많은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이제 모세가 떠난 이후에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백성을 이끌고 나가게 될때 하나님의 사자인지 모르고 만나지요? 그때 그가 뭐라고 말했어요? "네가 선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 똑같은 말이예요.

거룩, 우리는 잠깐 거룩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어제 저희들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세운 학교가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의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그것은 인간의 강의 입니다. 그런 어떤 학교에서, 클래스에서 듣는 강의 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발달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어디가 학교라고 말씀 했어요? 살아가는 생활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장소에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어떤 곳에서도 계속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고 수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어떤 가르침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고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며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위대한 역사를 하시는가 라는것에 대한 배움 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동안 계속해서 그와같은 삶을 살면서 이제 하나님을 배워갔습니다. 애굽에서는 절대로 배울수 없는 그런 공부를 했지요. 어제 저희들은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다. 그런분이 안계세요. 이 세상에 스스로 계신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긍휼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이시다. 이 수많은 속성들, 하나님은 충성되시다. 이런 속성들을 그가 매일과 같은 삶 속에서 알 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배우게 될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위대한 가치에 대해서 마음속에 가득 채웠습니다. 나중에 모세가 부름을 받고 그가 행하게 될때 그와같은 하나님의 속성이 그의 말과 행동에서 항상 스며 나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많은 속성들 중에서 거룩이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5절 말씀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로 거룩하라"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이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거룩은 한 마디로 구별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별되신 분이십니다. 무엇으로 구별되었나요? 그분은 죄가 없습니다. 악이 없습니다.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악한 모든것, 오염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이예요.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타지오순애라는 말이고 앨글로색슨 말로는 할리브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전체가 온전하다. 건전하다. 건강하다' 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건전한 것을 우리에게 안겨다 줍니다. 죄는 무엇을 안겨다 줍니까? 죄는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죄는 파멸입니다.

우리는 청정 해역에서 난 해산물이라고 할때 우리는 모든 고가를 들이고도 다 삽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오염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산입니다. 아주 깨끗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그런것을 먹고 싶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죄가 없으시고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실때 천사가 와서 뭐라고 말씀 했어요? "나실 바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거룩하십니다. 거룩해서 죄가 전혀 없습니다. 죄가 사단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덴 동산에 들어올때 이 땅에 들어올때, 하나님은 철저히 분뢰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진 적도 없고 죄에서 떠나 계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인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하신 분입니다. 청정하신 분입니다. 순결하시고 깨끗하고 오염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은 그런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이라고 하는 속성은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전지하다라고 할때, 전지하신 분이 의롭지 않고 순수하지 않다면 이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악한 나라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전지하고 전능하신데 그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사랑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거룩이라는 말을 듣게 될때 무엇을 생각 합니까? 이사야는 그의 환상 속에서 스랍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이야기할때 그의 마음속에 엄청난 감동이 왔어요. 요한계시록 4장 말씀을 보면 24장로가 하늘에 있고 거기에 보좌가 있고 네 생물이 이야기할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그 거룩한 분 때문에,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거룩이 존재해야만 창조물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속성에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라고 할때만 영적으로 거룩하고 우리는 파멸이 없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될때 오염되게 될때 영적으로 섞이게 될때 우리 가운데 오는것은 무엇입니까? 슬픔과 불행과 모든 파멸과 분개와 또한 쇄약입니다. 병자를 보세요. 쇄약하지요. 아프지요. 골골하다가 나중에는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상관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에게 생동감과 에너지와 우리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과 생생한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될때, 교회가 거룩하게 될때, 가장 거룩하게 될때 우리에게는 영적인 건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모세가 광야에 가서 수많은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게될때, 거룩은 모든 속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것이 주님의 속성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거룩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40년동안 배우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를 부르시게 될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거룩하지 않으면, 육적이라면, 하나님의 종이 자기 생각대로 마음대로 한다면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여러가지 것을 마음대로 할수 있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거룩을 배워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룩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 가득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실뿐 아니라 전지하시고 그분은 은혜롭고 긍휼가운데 있고 영광 가운데 있고 이 모든 속성을 거룩이 밑에서 바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게 될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부름은, 아니 부름 이전에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훈련을 받고 준비하게 될때 거룩을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을 우리를 부르실때도 거룩한 곳에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보세요.

모세가 그의 생애에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사역에 마지막 부분에서 불평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이 부분을 보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백성이 막 불평했어요. 항상 그렇게 했지요. 반복해서 모세를 불평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이 백성을 향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너무나 답답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라 하셨는데 내리 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물이 나와서 그들은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하나님의 종의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부정적인 면을 보지만 저는 모세를 조금도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을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실때 그 말씀속에 담긴 의미를 우리가 생각할때에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게 될때,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고 하는것을 우리는 초신자 때부터 알고 배웁니다.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꼐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새 생명이 내 속에서 역사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신다. 그래서 나는 날로 날로 거룩하게 된다. 성화의 과정속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지요. 데살로니가서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우리를 부르신건 무엇 때문입니까? 거룩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가 계속 거룩하게 되어서 영과 혼과 몸이 그때까지 보존되기를 원한다. 거룩과 관련해서 보존이라는 말이 있어요. 거룩은 우리를 보존해 줍니다. 거룩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줘요. 그래서 사역자는,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름받았고 거기서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그 일을 할때도 거룩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활동 많이 하는게 중요합니다만은 그 활동이 어떤 활동이겠습니까? 육적인 활동입니까? 인간의 어떤 활동입니까? 인간의 어떤 조직적인 계획을 따라서 복음이라는 타이틀 안에서 뭔가를 하고 교회라는 타이틀 안에서 뭔가를 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합니까?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고 오염된다고 하는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이 처음 준비기간중에 배웠던 것은 거룩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 거룩으로 인해서 이 모든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속에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입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출3:7).

애굽에서 고통하는 백성의 문제,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 했어요. "네 후손이 애굽에 가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하고 거기서 나와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게 될때, 내가 너희를 도구로 사용해서 그들을 전멸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이미 오래전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그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타이 테이블에 의해서 지금까지 기다려 왔고 이제 때가되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가 40년전에 그의 백성을 구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지요. 이제 80세가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두번째는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세번째는 "그 우고를 알고" 네번째는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다섯번째는 "건져내고" 여섯번째는 "그들을 그땅에서 인도하여" 일곱번째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입니다. 일곱가지를 말씀 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데 왜 모세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직접 애굽에 가서 보셨잖아요? 그럼 그들을 간역자의 손에서 구출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모세를 부르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을 도구로 쓰시기를 그렇게 원하십니다. 이것은 위대한 은혜 입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불러서 쓰시겠다 하는것은 얼마나 영예입니까?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짜증내고 실증내고 답답해 하고 하는 모든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수준과 우리의 처지에 비해서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 했어요. 또 부름받은 종이 기억해야 할것은 내가하는 모든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쓰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3:9).

이 말씀은 앞의 말씀을 거의 요약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세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인도하는데, 내가 너를 보내서 쓴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곳에서 역하하고 계시는데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보이는 인간을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하나님이 하셔요. 그런데 거기에 딱 따라가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고, 나는 너를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그것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추진하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만일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중에 얼마를 빼거나 더하거나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다 주제넘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절대적인 순종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어요. 놀라운 부름 입니다. 떨기나무 앞에서 나타나셨을뿐만 아니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그 신을 벗으라" 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가 구한다. 그런데 나는 너를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주저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첫째, 주저 했습니다. 그는 40년전에 애굽에서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가 전부터 교육받았던 어머니로부터의 모든 이야기와 그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생각했던 모든 거룩한 생각 속에서 그의 동족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그의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 했습니다. 아무리 순수하고 아무리 진실하고 아무리 순결한 마음으로 한다해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첫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것, 그것을 하나님의 학교에서 지연의 클래스에서 배웠어요. 기다리는것,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기다립니까? 우리는 안달합니까? 기다리느냐, 안달하느냐, 둘중 하나예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안달로 인해서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나의 개인의 하나님의 학교로 인도받는 일도 실패하고 또한 하나님께 불명예를 안겨드리고 나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는 그와같은 일을 하는가요? 지체하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는 이와같은 것을 모세는 40년이나 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생각할때 그는 선듯 나설수 없었습니다. 그가 주저한것, 이 주저는 어떤 주저인가요? 반항이나 반역때문에 주저하는것이 아니고요. 모세 마음속에는 신령한 주저함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 앞에 설수 있습니까?" 그는 40년 바로의 낯을 두려워해서 도망왔었던 것을 기억하지요. 뼈 아픈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행하는 일들 중에 뼈아픈것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내가 잊을수 없는, 내가 그때 그렇게 하면 안됬을텐데하는 가슴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의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의 경우에는 그것이 정말로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그의 마음속에 출몰해 왔던것은 그런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관대"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게 될때 주님이 부르실때에 어떤 자세로 우리는 나갈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모세가 "아이고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오셨습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그의 마음속에 신령한 것이 없는것입니다. 그는 뭔가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속성중에 뭔가를 빠뜨리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할때, "나같은 사람을 써야지. 나 정도면 충분히 준비가 되었는데 왜 나를 안쓰는가?"라고 하는 스피릿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런 성도가 있다면 그냥 뒤로 가 앉아계세요.

우리의 현 대통령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스터 트럼프가 그래도 겸손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래도 상당히 겸손하다." 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얘기할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일을 하게 될때, 왜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가요?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고요. 그렇게 미흡한 것들이 아니고요.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요. 그것을 우리가 배우게 될때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것을 항상 느끼고 살지요. 우리의 부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연약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지만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이것을 할수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때 나는 너무나 두렵고 떨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이 될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섬긴 형제님께서 어느날 차 뒤에 앉아서 가는데 그 형제님이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살아왔고 주님을 섬겼더니 이제는 일들이 다 보인다." 그 말을 들을때에 제 마음속에 답답함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게 될때, 내가 어느정도 선에 도달한다고 이야기 하는거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모세는 여기 경건한 주저함이 있었어요. 그것은 하기 싫어서가 아니고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뭔가 소극적인 마음 때문이 아니고요. 하나님 앞에 그는 배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누구관대"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일을 할때에 "내가 누구관대"라고 하는 생각은 내가 주님 앞에 갈때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 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함께 있으리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함께하신다. 주님의 임재 입니다. 40년동안 그가 배운것이 뭐예요?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개념조차 없었어요. 구원받고 난 다음에 우리는 "아!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는것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구원받게 될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고 그 약속은 사실이고 이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고 알게 됬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구나. 그분의 약속은 절대로 사실이구나. 그 전까지는 못 믿었는데 믿어지는 순간부터 "아!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후에 하루하루가 지나가면 "하나님은 정말로 계시는가? 그 하나님은 정말로 계셔서 정말로 역사하시는가?" 하는것을 우리는 점점 배워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낀다. 주님의 임재를 내가 센서한다라고 하는 것은 점점 깊이 느껴가는 것입니다. 한 모임이 거룩하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말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성도들이 주님의 임재가,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거기에 주님이 계시 것입니다. 그러니 "신발을 벗어라" 우리는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다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게 될때 우리는 모든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분위기는 모임을 어떠한 곳으로 인도하는가요. 여기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이 뭐예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죠. 우리 자신이 거룩함을 느끼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게 될때 거룩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곳도 거룩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말로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그는 구원 받을때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부름을 받을때에 인도를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째, 부르실때에 "가라"라고 할때 "내가 누구관대" 신령한 주저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깊이있는 심오한 겸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꾼의 기본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세요. 하나님은 "여기 준비되어 있는데 왜 안쓰세요?" "나 할수 있는데 왜 안합니까?" 투덜대는 사람, 입에서 투덜대는 사람 그 자체가 불경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쓰실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겸손과 하나님 앞에 경외심과 이 모든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얼마나 아름다운 속성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주님의, 하나님의 속성을 배웠습니다. 그분에게 속해있는 성품을 배웠다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서 위대한 자세가 나왔습니다.

또 한가지, 두번째는 3장 1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3:13).

두번째는 하나님의 이름 입니다. "주님, 저를 보내시는데 제가 가면 그들이 반드시 나에게 물을 것입니다." 모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첫날 그가 가서 애굽사람이 때리는 것을 보고 애굽사람을 보고 애굽사람을 죽였지요. 둘째날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너무 한심하여 그렇게 느끼고 찾아가서 뜯어 말리고 "왜 싸우느냐?" 물었을때 그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네가 법관이냐? 네가 누군데 왜 나를 다스리려고 하느냐? 어제 죽인 애굽사람처럼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하는 반역의 이야기, 그 얘기가 그의 머리속에 항상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가게될때 그의 백성들이 자기에게 묻게 될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일을 하게될때 사람들이 "네가 뭔데 이런일을 하느냐?" 하는 반발이 가능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발을 어떻게 제압할까요? 이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서 종교계, 기독교계에서는 이제 학교에서 만들어준 졸업장을 가지고 "당신은 없는데 나는 이것이 있으니까 당신은 내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죠. 그것이 가장 편리한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종은, 그런 하나님의 종은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 그런 하나님의 종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낸다고 할때 모세가 두번째 주저함 가운데 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저를 보내신 그분의 이름을 물을텐데 제가 뭐라고 얘기해야 합니까?" 그는 40년동안 그것을 배웠어요. 우리는 어제 하나님의 속성중에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말했지요.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계신 분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다 피조된 창조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조자가 계십니다. 그 창조주는 어떤 분이신가요? 창조자는 스스로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스스로 계신가? 이 우주를 생각하게 될때 우주 배후에, 이 우주는 무한 합니다.

저는 어릴때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땐 주님을 믿기 훨씬 전이었고 교회를 다녔습니다만 어린 마음에 하늘을 바라보게 될때 위대하고 어마어마하고 무한한 하늘을 볼때에 '저 끝은 어디일까?' 그것을 생각하면 어지러웠어요. 도저히 저는 상상할수 없어요. 저 북극성은 어마어마한 거리인데 저 뒤에는 뭐가 있을까? 그리고 끝까지 간다면 무엇이 있을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주가 여기까지라면 그 밖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습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지혜로 도저히 측량할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보내십니다. 40년동안 그가 광야에서 양을치며 배운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이제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이제 달이 떠오르고 할때, 그는 온 우주를 바라보면서 바로, 애굽, 궁전에서는 너무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매일과 같이 바라보는것이 하늘입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무엇이관대 우리를 생각하시며" 이렇게 무한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얘기하라 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영어로 "I AM THAT I AM"이죠. 그래서 이 이름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주님 말씀하시죠.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라고 할때 "나는"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I AM THAT I AM"의 바로 그 "나" 입니다. 그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여호와, 신약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보내신다. 스스로 계신 분께서 보내신다. 바로의 모든 권위와 주권보다 말할수 없이 비교할수 없이 어마어마한 모든 주권과 능력과 모든것을 가지고 계시고 그 존재 자체가 출생으로부터 시작한 인간이, 죽을수 밖에 없는 인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고 영원까지 지속될 분이시다. 그분이 불쌍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가서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크레덴셜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졸업장, 그것은 나에게 필요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도구로 쓰시겠다고 하시는 이 위대한 말씀, 그 자체가 부름이다 그 말입니다.

오늘 시간 이것을 마쳐야 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은요. 광야에 가서 그가 무엇을 배웠습니까? 수많은 하나님의 속성중에 거룩이다. 그리고 그 거룩함 가운데서 그는 부름을 받았고, 이제 하나님의 이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꾼이 되었는데 일꾼이 되려고 하는 이 순간에 그에게 있었던 이 주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주저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때 나타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 많은 반대, 많은 나의 뒤에서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고 많은 일들이 있을텐데 내가 어떻게 이 일을 할까 라고할때 우리는 모세가 주님앞에 드리는 말씀과 주님이 그에게 답변하는 내용을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