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플러싱 수양회 05_교회의 일꾼, 영접 > / 정형모 형제님
형제 자매님들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 마태복음 28장 18-20절까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우리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위대한 위임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첫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이것을 의탁한다고 하는 말씀을 하시고 떠나시는데 세가지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받게,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 어제 저희들은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주의 일꾼으로, 첫째 우리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쓸데없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무한한 복을 우리가 얻을수 있는 놀라운 일을 우리 주님께서 행하셔서 우리는 그 복음의 영광스러운 메세지를 증거하게 될때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제자를 삼으신다. 두번째,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침례 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참 대단히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말씀인데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들" 참 성경 말씀안에 있는 다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미 침례받은 사람에게 이제 주님 어떤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개인이, 구원받은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아야죠. 성별되게 살아야죠. 주님을 닮아가야죠. 이런 여러가지 점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에 대해서 가르치고, 여기 중요한것은 가르칠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라" 훈련입니다. 우리가 아는것과 그 아는 것을 내가 손과 발로 행동하는것, 아는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소중하게 여기게 될때 나는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요, 대학 강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적인 어떤 활동이 아닙니다. 물론 지적인 어떤 활동을 포함해서 그것을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을때 첫째,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귀히 여겨야 합니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머리로는 알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머리로는 알지만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입어버리고 있고요. 내 마음속에 담아져 있지 않습니다. 첫째 마음에 담아져 있어야 한다.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사람은 그것을 실천하게 되죠. 실천하게 될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자세로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하죠. 둘째, 개인의 생활에 관해서 주님 말씀하신것 뿐만 아니라 가정 생활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부부관계는 어떤가? 그 다음에 자식들을 낳았을때 어떻게 가르쳐서 양육할것인가 라고 하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어요. 성경에 그것이 가득히 담겨있고 그것을 가르쳐서 그것도 마찮가지로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처신해야 하는지 교회는 어떻게 운용이 되는지, 교회를 주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이 점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분부하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또 하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회 생활을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될때, 그리고 학교나 직장에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생활하게 될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직장에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사회에서는 전과 무슨 관계를 관계를 가져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책임에 대해서 말씀 합니다. 이 모든것에 대해서 가르치라. 그리고 지키게 하라. 참 광범위한 분야죠. 그래서 첫째,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행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오늘 저희들은 아침에 복음이라고 하는것은 시작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작입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 아직 시작도 않은 것입니다. 아직 죽어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지어졌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태에서 조직하셨는데 우리는 아직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그저 육적으로 느끼고 그냥 사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짐승의 수준이죠. 이것이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하나님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한다.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제 저희들은 골로새서 1장 23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복음의 일꾼이요" 그리고 25절에서 "나는 교회의 일꾼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첫째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한다.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바친다 하는 점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두번째, 교회의 일꾼이다. 사도바울이 교회의 일꾼이다라고 할때 교회의 일꾼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하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점을 말씀드린다고 하는것은 상당한 많은 분량을 또 많은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짦은 시간에 되도록이면 아주 압축해서 많은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형제 자매님들 다시 한번 복습한다 생각하시고요. 말씀을 우리가 따라서 함께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5-16).
이것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사도바울이 간증하는것을 누가가 역사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에 9장에서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사울에서 그가 어떻게 바울이 되는가를 누가가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26장의 말씀은 사도바울 자신이 이야기한 내용을 여기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눈이 멀었어요. 주님께서 나타나셨을때 그는 너무나 놀랐지요.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네발로 일어나 서라" 주님께서 부툭해 주시지 않고, 이제 그는 주님앞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라. 여기 임금이 오십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일어나라고 합니다.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예의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분 앞에 그는 함부로 대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핍박했기 때문에 머리도 고통스러웠지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했을때에 "네 발로 일어나라" 우리는 구원받게 될때,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를 지으신 분, 나를 구속하신 분 앞에 처음으로 합당한 예절을 갖추는 순간입니다. "네 발로 일어나라" 네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일어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하는 말을 들으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주님은 "네 발로 일어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이야기를 너는 들으라. 그리고 순종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무얼 부탁하셨습니까? 첫째, "네가 나를 본것을 너는 증거하는데, 너를 사환과 증인으로 삼는다." 사환이라고 하는것은 종이죠. 증인이라고 하는것은 어떤 사실을 사람들 앞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첫째, 네가 본것, 구원받은 사실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요. 자기가 지금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살기가 등등해서 가던 이 모든 의지가 완전히 꺾이고 자기가 주님을 잘못 생각했다. 자기가 지금까지 죄인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것을 너는 가서 전하라. 그 다음에 두번째, "자아 내가 네게 나타날 일을 너는 증거하라" 이때보다 조금더 후에 사도바울은 아라비아로 갑니다. 사도바울은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분량의 계시를 줍니다. 그가 너무나 많은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혹시 자고할까봐 하나님께서는요 그에게 브레이크를 거셨지요. 이제 그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가 교만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말은 그가 얼마나 많은 볼륨의 계시를 받았을까? 그 중에 하나가 많은 말씀을 썼습니다. 신약의 27권의 반을 사도바울이 썼습니다. 교회 서신서 일곱 교회에 쓴 아홉권의 책과 그 다음에 목자서신, 그것을 다 포함하면 거의 신약의 반 입니다. 히브리서까지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이라 볼수 있습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신약서신 안에 대단히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네가 이방인들에게 가서 증거하라" 사도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할례자의 사도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사도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교회의 사도다. 그는 교회진리를 신약을 통해서 말씀했고 우리는 흔히 그래서 교회 진리를 신약교회 진리, 그것은 다른말로 하면 신약교회의 원칙과 시행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일꾼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만약에 모르고 우리가 주님일을 한다면 주님은요, 이 교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 합니까? 사도행전 20장 말씀을 보십시요. 이것은 밀레도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서 이제 떠나기 전에 아마 다시는 못볼 사람들을 향해서 에베소에서 그가 삼년이나 눈물로 그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했지요. 에베소 교회에 사도는 비교적 상당히 긴 기간동안 일했어요. 에베소 교회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샘플로 우리에게 교회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 실행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그런 교훈이다. 사도행전에 나오죠. 에베소라고 하는 서신서에 나오지요. 계시록에 보면 일곱교회에 또 에베소 교회가 나오죠. 그리고 디모데전서에 보면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 가서 또 어떤일을 하고 있을때 그가 사도바울이 조언한, 충고한 그런 내용들이 나오죠.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요.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열정이 있습니다. 이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이제 고별사해서 말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조심하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먹이게) 하셨느니라"(행 20:28).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셨습니다. 피로 사셨다고 하는것은 그냥 돈 주고 산 것이 아니고 피로 사셨다고 하는것은 생명을 바쳐서 얻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버릴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한것, 교회입니다. 주의 일꾼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모른다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픈것은 복음전파로 그냥 끝난다. 그것은 뭘 말합니까? 벽돌을 만들었어요. 찍든지 해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일을 다했다는 거예요, 집짓는데. 그 벽돌 가지고 집을 져야 하잖아요. 벽돌집을 지붕도 짓고 건물을 만들어야 해요. 건물은 어떻습니까? 외부의 사람들이 다니면서 "아! 멋있다." 간증입니다. 교회의 간증입니다. 그리고 내부 안에 들어갔을때, 따듯하게 해줍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줍니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해서 우리 마음속에 훈훈하게 해주고 즐겁게 해줍니다. 그것이 집이죠. 하나님의 집, 그것은 교회 입니다. 그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일꾼은 잘 알아야 합니다. 이제 창세기 보면 하나님께서 6일 창조동안 빛부터 쭉 짓고나서 짐승을 짓고나서 제 6일에 이제 창조가 완성될때, 남자를 짓고 아담을 짓고 그 다음에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여자를 지었죠. 그래서 6일 창조의 가장 절정은 여자 입니다. 사람이고 그 다음에 사람 중에서 여자 입니다.사람에서 아담과 하와, 아담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고 하와는 교회를 말하고 있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교회에 관한 플랜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소중함을 주님은 창세기에서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은 교회에 관한 말씀에 대해서 비밀로 하고 있어요. 교회에 관한 직접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도께서 이제 부름을 받았을때 하나님께서 이제 곧 그를 부르셔서 이 진리를 말씀해주고 그는 이 비밀을 이제 선포하죠. 사도행전에 보면 초기에는 베드로가 주역을 하죠. 그 후에는 안디옥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제 3차 전도여행과 그 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죠. 그래서 후에 바울의 사역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8장까지 우리가 볼때 28장에서 그는 로마의 옥에 갇혔습니다. 그때도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같은 옥중 서신을 쓰게 될때 교회의 진리에 대해서 이제 드디어 선포 합니다. 교회는 이미 생겼어요.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이미 지역교회들이 형성이 됬습니다. 그리고 총 교회 우주 교회, 몸이라고 하는것은 이미 지어져 가고 있었어요. 그 도중에 그는 부름을 받았고 이제 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이 위대한 성명서, 그것을 로마에서 그가 발표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 교회진리, 이 교회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이것은 일꾼의 필수 입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일하게 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책임을 하는것이 되겠습니다. 신약에 처음으로 교회에 관한 말씀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오죠. 그것은 사실 우리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말씀했습니다. 교회, 내가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그래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죠. 에클레시아, 어디로부터 불러냈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 110번 이상 나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광야교회라고 할때, 킹제임스 버전에서 처치(church)로 나오지만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회중이죠. 그 다음에 사도행전 19장에 '민회'라는 의미로 에클레시아가 나오지만 그것은 진정한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빼고 나머지 모든 에클레시아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똑같은 에클레시아지만 어떤것은 총 교회 입니다. 오순절로부터 시작해서 주님 오실때까지 이어지는 모든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 교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역 지역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모이게 되는 무리, 눈에 가시적인 성도들의 모임, 그것은 모임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다 에클레이시아 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읽게 될때 문맥적인 것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압니다. 몇가지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몸이라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이제 계시록에 보면 장차 하늘에서 결혼식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이 신부가 그리스도와 결혼을 할것입니다. 교회는 사실상 그래서 그리스도와 신부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간증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사람의 집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다 집입니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집이예요. 이 집은 이 관계를 잘 드러내는 간증을 해야할 모든 특권과 책임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몸과 비교해서 모임은 지역교회는 그것을 가리켜서 고린도후서 11장에 정결한 처녀라, 사도바울이 내가 중매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 입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를 놓고볼때, 그리스도는 모임의 주님이십니다. 모임의 머리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임의 주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몸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지어져가고 있고요. 주님 다시 오실때 완성이 되는데, 지역교회는 어떻습니까? 지역교회는 실제 입니다. 실체적인 존재 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라고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죠. 또 몸은 남녀의 구분이 없습니다. 남녀가 동등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에서 남자 여자 구분이 없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어떻습니까? 모임은 남자여자 구분이 있습니다. 형제님들 입 벌려서 말씀을 해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은사를 따라서 말해야 합니다. 책임을 따라 주님의 인도를 따라 질서를 따라서 말해야 합니다만 자매님들은 잠잠하시고 그리고 남자를 주관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사사롭게 가르치는것이 있습니다. 디도서 말씀을 보면 자매님들이 어떻게 사사롭게 뭘 가르칩니까? 홈메이킹을 가르칩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그리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어떻게 양육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 사사롭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매님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총 교회는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요, 그러면 안되는데 불행하게도 때때로 지역교회에서 징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징계중에 출교를 하면 교제 밖으로 나가야 하는 불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지만 때때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총 교회는 거짓이 침투해 들어올수가 없어요.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쥐시고 있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무너뜨릴수 없죠. 그 안에 거짓 것이나 악한 것이 들어올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어떻습니까? 들어올수 있어요. 사도바울께서 조금 전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떠나면 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이제 너희들을 해칠 것이다. 또 안에서는 자기를 좇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했지요. 총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고요. 지역교회는 사람이 세우고,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에서 지역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건물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누가 세우는 거예요?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바로 세워지죠.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이 가르쳐지는데, 어떤 말씀입니까? 교회에 과한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만 이 모임이 세워지죠. 그것은 교사가 세우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 세울뿐만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지역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총 교회는 함께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죠. 총 교회는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주님 오실때, 이제 사라집니다. 주님 오실때까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지역교회 총 교회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덯게 더해지는가?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는 머리고 몸은 총 교회인데요. 그 교회의 지체로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세례라 이렇게 말하죠.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한번 있고요. 그 후에 모든 믿는 사람들, 이 교회 시대의 믿는 사람들은 그 몸에 가입되는데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교회는 언제 가입될까? 구원받을때 저절로요? 아니 저절로 가입된다면 나는 어느 지역교회에 가입됩니까? 지역교회는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어떤 특정 지역교회에 주님이 인도하세요. 주님이 부르세요. 그래서 그 교회에 내가 이제 영접됨으로 인해서 가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서부터 초반에는 사도바울의 구원받은 모양, 다메섹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26절 말씀을 보면요. "사울이" 이것은 구원받고 나서 세월이 지난 이후 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도 전도 했고 그리고 아라비아에 갔다가 후에 예루살렘에 올때에 무슨일이 있었습니까?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6-27).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특별합니다. 거기선 핍박했거든요. 핍박자 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볼때에 그를 핍박자요, 포행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제를 할수가 없죠. 이사람이 교제하겠다고 할 적에는 이 사람이 자기를 속이고 거짓 형제로 들어오려고 하는가? 라고 하는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인도자들은 대단히 책임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냥 받은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옆에서 도와주죠. 세가지를 증거했습니다. 첫째,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본것, 주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구원의 사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제하기 위해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두번째, 지역교회에 들어올때요. 영접될때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것은 이제 "주께서 그에게 말씀 하신 일" 그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 그가 어떻게 행했는가? 그가 믿는바와 그의 행실, 이것은 다 교회에 영접되게 될때 인도자들이 고려했던 내용들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의 영접을 통해서, 따라서요.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지역교회, 내가 그곳에 과연 부름을 받을수 있을까?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데, 내가 그곳에 가서 교제를 한다고 하다면, 나는 불순종 하는데 가서 교제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님의 뜻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이 나를 정말로 교회로 부르신다면 그 교회의 부름은 바른 모임, 건전한 모임, 거기에 내가 부름을 받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주님의 인도라 그 말입닌다. 그렇지 않다면 어렵다 이 말이죠. 이제 저희들은 신약교회를 이야기하게 될때 실제적인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역교회 입니다. 지역교회를 짓게 될때 패턴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회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을 짓게될때, 첫째 산에서 패턴, 모형을 받았습니다. 식양을 받았습니다. 그 식양을 따라서 짓게 될때, 모세는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실제로 지은 사람은 오홀리압, 브살렐 그리고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식양을 따라서 지었지요. 그래서 성막이 완성이 됩니다. 둘째, 성전은 누가 식양을 받았습니까?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식양을 받은 사람은 역대상 말씀을 보세요.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대상 28:19).
성전의 식양은요, 다윗이 받았어요. 다윗이 지어드리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거절 하셨죠. 그때 다윗은요, 삐져가지고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해드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거절 한다. 기분 나쁘다."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럼 내가 할일은 뭘까?'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재료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준비 했죠.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식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식양은 다윗이 받았고 그것을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그것을 솔로몬은 실제로 건축을 했지요. 그런데 교회, 구약에는 회막,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어요. 신약은 어떻습니까? 성전이 아니고 교회죠. 교회의 식양을 누가 받았는가? 바로 사도바울이 받았다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이 식양, 그것은 신약의 반이나 쓴 성경 말씀에 그대로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꾼이라면 복음을 잘 전할뿐만 아니라 교회의 진리에 대해서 그것을 바로 전하고 가르치고 지키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제 이와같은 신약의 교회의 식양은 뭘까? 성경에 나타난 말씀들을 우리가 요약해 보면 첫째, 지역교회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할까? 라는것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성도, 형제, 그리고 제자, 여러가지 말로 표현 합니다. 다 똑같은 말이죠. 이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지요. 항상 모이면 주님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구성원은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종교활동입니다.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가 함께 모인다면 그것은 신약성경이 말하는대로 멍에를 불신자와 함께 매고 있다. 부둥멍에를 매는 것이다라는 말이죠. 이 점과 관련해서요, 일꾼이 주의해야 하는것은 뭘까? 라는 실제적인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지역교회를 믿는 사람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면 좋다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지역교회는 믿는 사람들로만 구성된다면 지역교회에 영접되게 될때 이 영접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한다. 첫째, 영접하게 될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분별해야 하죠. 분별입니다. 만약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 할때, 이것은 무분별이죠. 이와같은 경우는 형제가 아니고 믿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 지역교회의 구성원으로 들어올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문제가 되죠. 갈라디아서 2장은 거짓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때 거짓 형제는 지역교회 안에 들어와서요. 자유를 엿보려고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으로 도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다른 복음이 있고 그리고 거짓 형제가 모임안에 들어올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어요. 우리가 믿는 사람이냐, 아니냐 이것은 성도들이 분별할 일이고, 더 중요한 것은 책임있는 인도자들이 그것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인터뷰도 합니다. 그렇게 될때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다. 첫번째, 위험 요소를 생각해 보세요. 요즘에 우리가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고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적인 것, 복음 많이 들어가지고요. 이제는 구원 받았나? 우리가 간증을 듣게 될때, 우리가 흔히듣는 많은 내용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요. 내가 믿는 것인지 알고있는 것인지, 왔다갔다 합니다. 또 하나는 의도적인 것, 그것은 무얼 말합니까? 자기가 구원 안받았는데,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구원받은 체를 하는거죠. 그래서 모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케이스가 있어요. 여러가지 이유 입니다. 뭐 사업 문제로 그 안에 들어가서 누구하고 잘 해보면 좋겠다는 그런 이유, 또는 결혼문제, 대단히 많습니다.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결혼과 관련해서요, 성도들 가운데서는 상대자가 없다. 우리 마음속에 고민이 되고 문제가 되고 기도 가운데 있다가 시험을 받아서 안믿는 사람하고 교제를 해서 결혼 하고싶다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들도록 사단은 유도 하겠지요.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모임안에 들어왔을때, 구원 안받았는데 성도라고 인정이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어떤때는 구원 안받은 사람과 결혼할수 있어요.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결혼 했는데 구원 안받은 사람이예요.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힘든 일이죠. 그래서 분별은 대단히 중요하다. 엄청난 책임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주님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성경은 내적인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말씀에 성령님께서, 구원받으면 성령님이 들어오시죠. 성령이 나와함께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와함께 내가 구원받았다고하는 것을 증거합니다. 왜? 성령과 말씀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말씀은 구원에 관한 약속입니다. 회개하고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 도처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내가 어떤 말씀이든지 믿는순간에 그 말씀에 성령님이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을때에 성령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세요. 그 성령님은 주권적인 분이시고 인격이십니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인격과 나라고 하는 주권이 있습니다. 이 두 인격이 서로 상통한다. 성령이 너는 구원받았다라고 내게 말씀하시고 나는 그것을 스스로 안다라는 말입니다. 외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원받았을때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어요. 요한일서라고 하는 책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가족의 앨범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앨범을 보면 아버지 엄마하고 비슷하거든요. 사진들이 다 그래요. 다 닮은점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씨도둑을 했다라고 말할수 있죠. 우리는 구원받게 될때 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갖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아 구원받고나서 가족들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동생들, 구원받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안든다면 이 사람 구원 안받은거다라고 말할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와같은 생각은 누가 가르쳐준것이 아니라 생리라 그 말입니다. 선천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태어날때 그냥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애정, 그것은 주님이 우리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 말씀을 사랑 합니다. 성도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예요? 죄를 절대 안 짓는것 아녜요. 그러나 죄를 짓게 될때 계속해서 마음 편하게 지을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 가운데 살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은 성품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다른사람들을 하나님처럼 알아볼수 없지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첫째 분별하게 될때 그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만 가지고는 알수 없어요. 첫째는 어떤때는 너무나 명확할때, 얼굴의 표정과 그의 말과 그런 모든것들 자체가 드러내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생활을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냥 성급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잘 분별하고 이와같은 증거가 요한일서, 또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이런 증거가 그의 생활속에 나타나고 있는가? 감기와 사랑은 숨길수 없다. 왜냐하면 감기걸린 사람은 아무리 참아도 기침이 나오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나요. 구원받은 사람도 마찮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성품입니다.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성급하게 한다면 우리는 아무에게나 안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죠. 두번째, 분별하게 될때, 인터뷰 할때 잘 보면 압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은요, 인터뷰하게 될때 질분할때 겸손하게 모든것을 다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혹시 의심이 된다라고 해도, 자기 마음속에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하게될때 기뻐 합니다. 그런데 구원 안받은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체를 하게될때 대단히 화를 냅니다. 대단히 프라이드를 건드렸다는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주님 앞에서 자기가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식은, 우리가 분별하게 될때 영적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이다. 그와같은 것을 사용해서요, 우리는 주님의 영광, 무엇보다도 본인의 유익, 그리고 교회 전체의 유익, 교회간의 유익, 이 모든것이 다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말로 주님앞에 도움을 구하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일을 잘 집행할수 있도록 주님께 잘 도움을 구해야 되겠습니다. 침례, 침례는 예식입니다. 물 뿌리는것 아니고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죠. 왜 그렇습니까? 예식이지만 예식을 통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리고 자기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고 부활했다고 하는 사실을 성도들, 증인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이제 증거하는 것이죠. 예식입니다. 그러나 그 예식을 실행하게 될때 침례의 의미를 본인이 알고 있는가? 그냥 구원 받았으니까, 그 다음 단계는 침례를 행하는 의식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와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마서 6장은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죽었어요. 그리고 로마서 7장은 율법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경건하게 되는것이 아니고요. 율법을 난 지킬수 없어요.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나는 사랑 가운데 순종한다. 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이 우리를 인도 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가 행한다. 라고 하는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구원 받았는데 옛 습관이 있습니다. 술, 담배 등등 여러가지 습관, 이와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침례를 받는다고 한다면 스스로 모순된것 아니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자기는 담배를 피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점들에 대해서는 본인이 그것을 알게되고 주님의 도움을 따라서요, 이와같은 문제를 극복할수 있어야 되죠. 주님은 극복할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것은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가 잘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거룩한 생활, 경건한 생활, 성화되는 생활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 것, 침례는 단순한 예식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이와같은 것을 본인이 주님 앞에서 증거하는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점, 저희들은 그것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고 또 일꾼들은 그와같은 일에 대해서 기도하고 도와주고 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영접, 조금전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이미 그는 구원 받았거든요.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구원받는 순간, 그는 총 교회, 몸의 지체가 되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그곳의 지역에서 모이는 성도들이 이제 거기 교제에 함께 하겠다고 할때 절차가 있었죠. 그때, 첫째 장로들은 두려워 했어요. 그래서 바나바가 그를 도와줬죠. 어떻게 주님을 보았는지, 그가 무얼 믿고 있는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 했어요. 그때 그들은 기쁨으로 그를 영접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교제 했습니다. 그래서 영접 문제, 영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받고 침례를 받게될때, 나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같이 죽었다. 그리고 같이 살아났다. 주님과 하나됨 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생활을 한다.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요. 그런데도 아직 그는 주님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잘 가르쳐줘야 합니다. 침례 받고 난 다음에 이 점에 대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접에 대해서 교제 안에 들어오게 될때, 교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제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교제라는 말, '코이노니아 카페' 있죠. 교제카페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코이노노스'라는 말에서 유래됩니다. 코이노 노스라는 헬라어는 파트너쉽입니다. 동업한다. 그 말은 여럿이 함께 투자해서 자본을 가지고 기업을 돌리고 공장을 돌리고 사업을 운영을 해서 거기서 나오는 이익을 서로 나누는것, 이것이 파트너쉽 아닙니까? 교회는, 교회 모임의 교제라는 말은 모임 안에서 교제한다라고 할때, 그것은 투자를 하고요. 같이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모임생활 하잖아요? 모임생활, 좀더 일반적인 이야기 입니다. 모임 생활 할때 느낌은 그냥 모임에 가서 성도 중에 한사람으로 그냥 있다가 오고 상당히 피동적일수 있어요. 그냥 가서 껴 있다가 즐기기만 하고 그냥 올수 있어요. 그것을 모임 생활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교제라고 하는것은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내가 책임을 이행하고 내가 헌신하고, 나의 책임을 이행하고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영적인 것을 내가 같이 나누고 누리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이것이 교제 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말씀의 진리를 놓고 우리가 함께 합류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투자를 하는것입니다. 시간도 투자를 하고 내가 모임 집회에 나와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기도하고이제 마음을 쓰고,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영저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자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결과, 영혼들이 구원받고 우리는 모두가 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라게 될때 그 모든것들은 우리의 기쁨이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이익입니다. 이것이 파트너쉽입니다. 그래서 교제라고 하는것은 모임의 교제는 그것은 사교가 아닙니다. 사교라고 하는것은 등산, 여러가지 낚시 동호회, 동호회, 여러가지로 모여서 활동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 모여서 이제 즐겁게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의 교제는 영적인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주님이 항상 여기 계시고 주님의 목적과 대의와 이런 모든것이 거의 결합되어 있다라고 하는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요, 영접이라고 하는 문제를 놓고볼때, 어디로의 영접인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주일날 떡 떼고 싶다.' 본인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어요. 사실 구원과 관련해서도 이런 입장이 있잖아요. 나도 떡 떼고 싶다. 그래서 빨리 떡 떼고 싶어서 나도 구원 받았다라고 얘기하면 문제가 되죠. 이와같은 소원, 이와같은 분위기, 때때로 위험한 것입니다. 방언을 추구하는 그룹들이 왜 그렇게 되는지 아십니까? 방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 방언해서 방언 못하면 거기 축에 못껴요. 그래서 자기도 방언한다, 방언한다 하다가 자기도 방언이 터졌다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건전치 못한 분위기 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는것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무슨 특권인데 나도 거기 끼고 싶은것이 나의 소원의 전부라면 이것은 대단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정말로 나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그것을 내가 보게되고 내가 정말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때, 그때 진실히 주님을 믿고 주님앞에 나오겠죠. 만일 그렇지 않다면요, 이것은 주님의 일과 같고 주님의 대의와 같은 것이겠지만, 구원 받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동기가 특권을 나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이와같은 마음의 전부라면 이것은 문제가 될수 있다는 말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죠. 그래서 저희들은 영접이라고 할때요, 모임의 교제로 영접되는 것입니다. 떽 떼는데 영좁이 되는 것이 아니고요. 모임의 교제라면 만찬을 행하는 것, 이것은 정규집회 중에 만찬 예배예요. 정규 집회는 만찬 예배시간만 있는것이 아니예요. 말씀 시간도 있죠. 기도회도 있죠. 복음전도도 있죠. 이 모든것에 우리가 다 함께 투자하고 함께 이익을 누리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임 교제에 영접되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특별히 나도 이 성도들 가운데 그것좀 내가 하고 싶다라는 어떤 일을 구원받으면 나도 할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다면 이것은 첫째, 구원이 잘못될수도 있고요. 둘째, 교제가 잘못될수도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접이 된다고 할때, 영접될때 책임이 있어요. 책임은 뭡니까? 우리는 연합을 유지할 책임이 있어요. 일일히 다 말씀드리려면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타이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고 말씀했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종으로 일하게 할때, 그의 사역을 한마디로 말씀 한다면, 그의 봉사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요, 개개인의 구성원들이 거룩해야 하고 경건을 연습해야 하고 그리고 교회 전체가 순결해야 하고 여기 불순한 것들이나 악한 것들이나 잘못된 것들이나 이런것이 여기 들어와서는 안되지요. 그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잘 관리해야 합니다. 총 교회는요, 여기 불순한 것들이 절대로 들어올수 없어요. 그것은 신분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그러나 지역교회는 우리가 실제로 여기 모이고요. 실제 정기 집회 시간에 우리가 모이게 되고 그리고 한 곳에서, 이 지정된 장소에서 모여야 하고, 그것이 정규 집회 입니다. 정규 집회로 모이고 있는 지역교회, 이 지역교회 안에 여러가지 악한 것들이 들어올수 있다. 교리적으로 세상적인 요소들이나 또는 여러가지 부도덕한 것들이나 잘못된 생각들이나 이런 것들이 들어올수 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오게 될때, 진리의 말씀이 서서히 타락 됩니다. 이것이 서서히 바래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정말로 말씀을 받을때에 성도들의 마음속에 기쁨으로 받는게 아니고요. 아, 빨리 끝나줬으면, 빨리 끝나서 나가서 딴거 했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것은 모임 성장과 모임의 존재와 간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분위기는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것은 점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모임 안에서 분위기를 만들때 여기 구원받지 않은 영혼들이 들어왔을때 모임의 성도들이 모두가 다 저영혼이 구원 받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기도하고 접근하는가, 대하는가? 아니면 어떤때는 거꾸로 모임이 점점점 쇠약해지고 말씀에서 연약해 지면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와서요. 오히려 더 큰 소리를 해요.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영향력이 모임 안에서 복음을 위해서 역사하는 일에 대단히 커다란 힘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의 영적인 분위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순결, 그리고 영성,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계속해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모임 안에 슬픈때가 와요. 언제 입니까? 모임안의 성도가 잘못해서 징계 받을때, 안할수 없어요. 그런데 징계가 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해야 됩니까? 징계는 모임에 없어야 됩니다. 그것은 진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우리가 경건한 또한 영적임 모임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도들이 영적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의 말씀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생활하는 것과 밖에 나가서 생활하는 것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징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생활과 밖의 생활이 다르면 거기서부터, 사단이 어디로부터 우리를 파고드는지 아십니까? 여기 모였을때 보다는, 여기 모였을때 가능하면 사단은 공격하려고 해요. 근데 더 쉽게 공격할수 있는데가 어디예요? 밖에 나가서 느슨해 졌을때, 세상속에 막 들어가서 살때, 그때 세상의 가치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패션,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슬며시 들어온 거예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할때에 모임은 영성을 손상 시키죠. 사라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권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순종하고 지키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자유를 우리가 느끼고 있습니까? 권위와 순복을 우리는 정말로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주님앞에 드리는 일에 대해서 그런 책임에 대해서 나 자신을 드리고요. 찬양을 드리고 그리고 시간을 드리고 나는 주님앞에 내 재산을 드리고 소유를 드리고 이 드리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앞에 행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이 책임입니다. 시간이 다 가서요, 여기서 이 시간을 마쳐야 겠습니다. 모임의 교제, 여기는 책임만 있는것이 아니죠. 특권도 있습니다. 뭘 즐겨야 합니까? 다음시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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