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10절

박이레 2026. 7. 17. 15:23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10절 / 마포모임, 20년

- 박성호 형제님 사회 : 오늘 살펴볼 말씀은 요한일서 2장 10절인데요. 제가 몇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7-11).

2장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거듭난 '신자들이 어떠한 자인가'라는 것을 중요한 특징을 들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이제 말씀을 쫓아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7절과 8절은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9절부터 11절까지는 그 말씀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실례입니다. 9절과 11절에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과 같이 거듭나지 못한 자의 모습이 어떠한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10절 말씀은 그럼 '거듭난 자는 어떠한 모습인가'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제 모임 생활을 할 때 성도에 대한 동기와 태도가 사랑으로 하는지, 아닌지, 여부로 그가 참된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가 검증이 되는 거죠. 만약에 형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원어를 알고, 각종 주석을 인용하고, 심오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또 놀라운 영적 체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거짓 신자인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면 제가 구원받고 모임에 더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요. 그때 청년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도 모르게 저보다 뛰어난 은사를 가진 것 같은 형제와 저를 비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문득 시기하는 마음이 들라고 하는 것 같았었습니다. 그때 이제 요한일서의 말씀이 이 부분이 생각나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지 않은 자인가? 하지만 제가 다시 요한일서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참 신자라면 그를 어떻게 대해야 될 것인가, 알게 됐고 그의 은사를 인정하고 그가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마음은, 그를 사랑하는 이러한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0절은 "빛 가운데 거한다"라는 표현이 있고요. 이 표현은 빛이신 주님과 지속적인 사귐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저희가 "빛 가운데 행한다"에 대해서 봤었고요. 또 "빛 가운데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제 "빛 가운데 거한다"에 대해서 교제를 해주셨으면 좋겠고요. 또 '거리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 이게 거리낌이라고 봤을 때는 조금 잘못 이해될 수가 있는데요. 조금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길이나 자기 길에 놓여서 자기나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실족하게 하는 것, 이런 것을 얘기하는데요. 또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또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10절 말씀 읽고 형제님들 교제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애 거리낌이 없으나"(10절)

- 형제님 1 : 10절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7절, 8절은 계명에 대한 말씀이 8절까지 돼 있고요. 9절부터는 그 빛 가운데 거하는 그리스도인 성도들은, 형제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되고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한 말씀들을 하고 있다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흠정역을 봤더니, 흠정역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빛 안에 거하므로 그 안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빛 가운데 있는 성도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이와 관련해서 7절에 새 계명으로 주신 그 말씀을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그 말씀을 따라서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그 모습은 빛 가운데에 거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도 같이 살펴봤는데요. 요한일서 1장 7절에도 그러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 가운데 주님과 함께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을 같이 살펴봤었고요.
그리고 여기 "가운데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되어 있는데, 흠정역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는 '거리낌'이라는 게 '걸림돌'이라고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그래서 여기서 거리끼는 게 없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본인의 그 안에 나타나는 모습들하고, 이제 다른 형제들에게, 다른 성도들에게 보여지는 행해지는 모습하고, 그 2가지 측면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로마서 14장 13절에 보면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라고 해서, 나로 인해서 다른 성도들이 실족하거나, 또는 부딪치거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로 인해서 다른 성도들이 실족하게 되거나 어떤 부딪치거나 거칠 것을 행치 않아야 하고, 행치 않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본인 자신도 그 빛 가운데서 사랑 가운데 거함으로 인해서 본인도 실족하거나 또는 거칠 것에 빠지지 않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 김영권 형제님 : 네, 10절은 그 앞절에 9절에 나와 있는 내용과 조금 대비돼서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9절에서는 말로 빛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는 말로만 그렇게 하고 행동으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아직도 그 어둠 가운데 있는 자다라고 저희가 공부를 했습니다.
10절에서는 뭔가 말로 그렇게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또 빛 가운데 거하는 자, 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특징으로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특별히 앞서 형제님들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거리낌'에 대해서 다른 부분을 찾아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시면 사단이 사단의 특징으로써 이렇게 '넘어지게' 하는 부분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즉 이 '거리낌'은 믿지 않는 자가, 그리고 특히 죄의 수장인 사단이 행하는 그런 모습으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41절에서는 '가라지'가 나오는데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풀물불에 모두 던져버릴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은 18장 7절에서는 실족케 하는 그런 말씀이 나와 있는데요. 형제를 실족케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에 이렇게 묶어서 던져버리라, 라는 그런 말씀과 같이 말씀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여기 공부하고 있는 이 '거리낌'이라는 그 단어가 마음속에 어떤 어려움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의 특징으로, 그리고 또 사단의 특징으로, 여러 부분에서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뿐 아니라 남에 대해서 걸려 넘어지게 하고, 또 같이 실족하게 하는 그런 모습에서 이렇게 심각하게 많이 쓰여진 부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올무'라는 뜻으로, 그리고 고린도 전서에서는 '거리끼는 것'으로, 또 베드로 전서에서는 '부딪치는 돌'로 이렇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단순히 '거리낌'이라는 것이 그 결과가 참 크게 주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실족하게 하고 또 더 나아가 주님과 멀어지게 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재밌는 부분은 참 십자가의 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은혜이고, 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고, 또 저희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것이 거리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서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교회로 더러 더해졌고, 또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거리끼는 것과는 참 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유대인들에게 거리껴졌다는 것에 참 슬픔이 있었고, 또 빛에 거하는 자가, 또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이렇게 살펴보았던 거리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여야 된다는 것에 교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성도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인 것이죠.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을 때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품'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의지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또 거짓으로 꾸며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하게 되며, 그것은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미워함으로 자기가 어둠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형제를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거죠. 성도들은 그리스께서 사랑하신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을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세상에서 보이는 어떤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어도, 또 자신이 손해가 나도, 형제가 유익이 되고 또 형제가 그로 말미암아 선하게 된다면 기쁜 것입니다. 이게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형제가 영적으로 세워지는 모습에 감사가 되고, 그로 인해서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자기가 복된 일인지 그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어떤 명예를 위한다면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세상에서는 그래서 그런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사랑하고, 그러지만 성도에게는 그렇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렇게 이타적인 그런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는 거죠.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한다면,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에 순종하는 그런 모습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결코 '거리낌'이 없는 거죠. 
거리낌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은 배교나 또 범죄하도록 하는 유혹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상실한 마음인 거죠. 빛안에 형제들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진실한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자신에게는 물론 또 타인에게도 이러한 걸림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빛 가운데 거할 복 중에 하나라고 그렇게 보여집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10절에 보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랑은 어떤 인간적인 그런 사랑, 어떤 인간적인 동기의 그런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앞서서 교제해 준 것처럼 어떤 희생적인 사랑이고, 또 형제의 영적인 유익을 주는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졌는데 몇 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한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거하는 거죠. 9절에서는 저희가 지난 시간에 교제 드린 것처럼 빛 가운데 그는 있습니다. 이제 빛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빛 가운데 거하면서 주님과 그런 친밀한 사귐과 교제 가운데, 거기서 힘을 얻고 또 그런 사귐을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이제 거한다는 걸 생각할 때 또 '열매'와 함께 저는 이제 또 생각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그런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렇게 했을 때 이런 형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고, 또 1장 6절에서는 "저 안에 거한다.", "저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에 행하시는데도 자기도 행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처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때 주님처럼 행하게 되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주님을 닮은 많은 열매들이 맺히게 되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그렇게 했을 때 그 주님으로 말미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부분을 또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리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앞서서 교제해 주신 것처럼 거리낌이라는 거는 '덕'과 관련된 그런 용어라고 볼 수 있는데, 넘어지게 하는 거죠. 넘어지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이렇게 죄를 짓게 하거나 아니면 잘못에 빠지게 하는데, 여기서는 속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 마음의 동기, 그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의 그런 속사람, 속사람의 그런 어떤 중요한 부분을 또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또 눈에 보이는 그런 겉모습, 또는 앞에서 계속 우리가 교제 되어진 것처럼 어떤 거짓 믿는 자들, 영지주의자들, 그들이 말하는 어떤 그런 말이나 그런 것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속이고, 그 내면의 모습이 중요한데, 그 속사람이, 그 내면의 모습이 자기 자신에도 거리낌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주님이 그러하셨죠. 주님께서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그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고, 또 참으로 그와 같이 행동하는 정말 주님을 닮아있는 모습을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예, 저희가 지금 10절을 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 10절과 11절이 대조가 됩니다. 10절은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11절은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11절은 다음 시간에 할 것으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10절을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형제님들께서 지금까지 말씀을 다 해주셨습니다. '거리낌'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셨고 '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셨는데, 다시 한번 조금 제가 정리한 것을 조금 이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거리낌'에 대해서는 신약에 여러 번 나오는데 아까 사회자 선생님이 '걸림돌'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걸림돌이라는 것은 결국은 넘어지는 것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같은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7절에 보면 "실족케 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데, 걸림돌이라는 게 그런 것이죠. 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족케 하는 것, 넘어지게 하는 것이지요. 아까 로마서 14장 13절도 교제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 보게 되면 거기도 마찬가지로 걸림돌, 거리낌이 나오는데, 그 로마서 14장 13절하고 이게 저는 요한일서 2장 10절이 약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는 '다른 형제 앞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 다시 이렇게 보게 되면 제가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 보면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에서" 거칠 것으로 거리낌이 번역이 되어 있는데,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 앞에 걸림돌을 두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여지고요. 요한일서 2장 10절 "자기속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속에 걸림돌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 요한일서 2장 10절이 처음에 읽었을 때 이게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가 가는 듯하면서도 또 이게 잘 정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한복음 11장하고 같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게 되면 11장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분 중에 9절 10절에 보게 되면 그 실족하고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12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으로 실족하느니라." 그래서 이 빛과 실족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9절, 10절을 보게 되면 낮에는 이제 빛이 있죠. 빛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밤에는 빛이 없고 그래서 넘어질 수가 있는 거죠. 실족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2장 10절을 보게 되면 저는 '걸림돌'이라는 것이 남을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자기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한일서 2장 10절은 물론 이제 자기속에 걸림돌이 있기 때문에 남이 그것을 보고 넘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특별히 "자기속에"라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넘어진 거'하고 관련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11절하고 대조를 해보게 되면 11절에는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결국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해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있다는 것은 사실 넘어진다는 것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 새 계명을 지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빛 가운데 거합니다. 물론 말씀드린 대로 다른 사람 사람이 나를 보고 넘어지지 않는 것도 있겠습니다마는 자기 속에 걸림돌이 없기 때문에 실족하지 아니하는 거 아니한다고 이렇게 저는 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거하여"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저희가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이제 교제를 했을 때 특별히 이제 '소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빛 가운데 있는가? 구원받았는가, 아닌가? 그런데 10절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소속이 빛 가운데 있으니까 빛 가운데 거하는 거겠지만, 특별히 '거한다'는 단어는 좀 더 이렇게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계신다'라는 단어가 이 '거한다'라는 단어하고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참으로 빛 가운데 있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 빛 가운데 거합니다. 좀 더 저는 친밀한 단어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기속에 걸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11절을 보게 되겠지만, 11절과는 분명하게 완전히 정반대로 이렇게 대조가 되는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 이상입니다. 

- 조재훈 형제님 : 앞에 형제님 말씀하신 대로 10절과 11절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또 미워하는 자는" 하고 이외의 설명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부분은 그 사람의 외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영역 가운데, 또는 어떤 사귐 가운데 있는가, 그의 밖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어지는 뒷부분은 그의 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내적 상태는 어떠한가? 그의 삶의 행동과 또한 영적인 지각력에 있어서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런 부분들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낌'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넘어서 거치다, 실족케하다, 이렇게 번역이 많이 되었는데요. 사도요한이 사용한 용례를 보면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올무'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올무라는 것은 결국 넘어지게 해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우상숭배, 그리고 도덕적인 타락,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또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 결국은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것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넘어지는 것의 결과였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거리끼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 거리끼는 것을 둘 수 있고 또 내 속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제하신 대로 10절에서는 '강조점'이 '자기 속'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기 속에 넘어지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속에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빛 가운데서 친밀한 사귐 가운데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안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또 의로운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그런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는 계속적으로 진리의 길을 또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라고 1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거꾸로 11절에서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벗어나고 의로운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조돼서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형제님 2 : 예, 말씀이 단어의 어떤 의미라든지 이런 부분들을 형제님들께서 충분히 말씀해 주셔서 저는 제게 주신 교훈에 대해서 잠시 짧게 교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형제와의 어떤 관계에 있어서 저희가 어떻게 그 관계를 접근해야 될 것인가? 이런 부분을 좀 생각하게 됐습니다. 특별히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이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다라고 저희가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까 형제님께서 찾아주셨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간구를 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의 말은 주님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네, 베드로의 마음은 선이었고 그리고 주님을 진실로 마음으로 생각해서 하는 그런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주님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성도님들을 대할 때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제가 선의로 하든 간에 또는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그 성도를 생각해서 제가 그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자칫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어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제가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바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그런 부분들을 예방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형제님들이 다 교제를 해 주셨는데요. 10절과 11절은 이제 겉으로 하는 태도, 특별히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동료, 형제들에게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를 보고 그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가고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은 형제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그런 거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영적인 신분과 상태를 말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면 빚 가운데 거하게 해 주겠다, 거리낌이 없게 해 주겠다, 이런 조건의 말이 안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겉으로 그가 어떤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면 그런 증거가 있다면 그는 빛 가운데에 거하는 사람이다. 그 안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실제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1. 첫 번째로는 빛 가운데 거한다. 2. 두 번째로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 둘 다 하나님과 지금 실제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지금 보이는 다른 형제들한테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는 "빛 가운데 거한다"라고 돼 있는데요. 사실 사랑하는 자가 빛 가운데 거한다라고 나오는 게 조금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빛이라는 것은 이제 특별히 이제 진리,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그런 면인데 그가 겉으로 사랑을 나타내고 있을 때 저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다 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금 어색한 면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요.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큰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도 특별히 그 '사랑'에 대해서 '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장 6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그래서 빛 가운데 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는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사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여기 우리가 읽은 이것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 이것을 정말 믿었을 때 그때 이게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이것을 아는 사람이고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고, 정말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온 '빛'은 1장에 나와 있는 그 빛과는 조금 다른 측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1장에서는 그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그 거룩하심에 비춰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런 모습을 말하고 있었고, 2장 여기서 나오는 이 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 진리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단지 그 빛을 알았다라고 하지 않고 "그 빛 가운데 거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밋밋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지식적으로 알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에 형제님도 말씀해 주셨지만 그 사랑을 알아서,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그리고 아까 또 형제님 말씀해 주신 대로 친밀하고, 친밀한 교제가 있고, 그리고 정말 포도나무와 가지와 같은 그런 생명이 연합된 관계에 있는, 이런 모습이 정말 그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습이고, 그것을 빛 가운데 '거한다' 라는 표현을 특별히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것이 한 번 이제 거했다가 아니라 계속 거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랑을 계속 누리고, 받고,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과 또 주님과의 그런 실제적인 교제의 영적 상태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이 들고요.
2. 그리고 이제 두 번째로는 "그 안에 거리 끼는 것이 없다"라고 돼 있는데요. 이 '거리끼는 것'에 대해서 저는 '두려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4장에 보면,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져 있고, 그리고 두려움이 없음을, 그 안에 거리끼는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담대함이 없고, 그게 계속 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를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고, 실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와 베드로 전서에서도 주님에 대해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로 주시는 구속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부딪치는 것으로,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오히려 실족하고, 잘못 이해하는 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지금 그의 영적 상태 상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고, 그의 사랑을 알고 있고, 담대하고, 자유함이 있고, 온전히 교제의 기쁨을 누리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표현으로 "그 속에는 거리끼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였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앞에서 어떤 형제님께서 이 말씀이 참 어렵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저도 이제 요한일서 묵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냥 이해하기 쉽게 그냥 한번 착 보고 그냥 딱 쉽게 알아서 이해하고 순종하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결코 저희에게 이걸 감추시려고 이렇게 어렵게 하셨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이 말씀들을 읽고, 또 연구하고, 또 그런 것들을 저희들이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틀림없이 더욱더 어떤 영적인 성장과 또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이 되고요.
저도 이제 10절 말씀 읽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또 이렇게 읽게 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계속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계속 여기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이고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계속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런 사랑을 나타내셨고 저희들도 그런 사랑을 요구를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현재형 동사로 되어 있죠. 그래서 그 사람은 삶의 방향이, 늘 삶의 목표가 특별히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형제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하는 자는 두 가지가 증명이 됩니다. 1. 첫 번째로는 그 사람이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신의 삶으로 그 성도의 유익을 대하는 그 태도로서 그 사람이 정말 빚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는 그 사람 안에는 걸림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빚 가운데 거한다는 것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해주셨는데 정말 이것은 그 사람이 빚 가운데 거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사랑입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지 않고는, 그 참된 생명을 가지지 않고는, 혹은 여기 말한 "빛 가운데"라는 의미를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되는 것, 이런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알지 않으면,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를 사랑하는 그 성도는 정말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고요.

"거한다"라고 하는 표현에 대해서 계속 교제를 해주셨습니다.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어디 잠시 들러서, 그곳에 들르는 게 아니고, 집에 있는 것처럼 거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집에 있는 것처럼 거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집에 있는 것처럼 안정감 있게, 평안하게, 기뻐하고, 이런 것들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고, 그 가운데서 만족을 누리고,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빛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고요.
두 번째로, "자기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이 사람이 누리는 어떤 영적인 축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거리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많은 교제를 해주셨는데요. 원래 원어적인 의미는 짐승을 잡을 때 쓰는 '올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딱 물게 해서 그를 딱 낚아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림돌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낌이라고 하는 것은 그를 유혹해서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유혹거리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희들이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요. 아까 요한복음 11장 9절, 10절 말씀 어떤 형제님 인용을 해 주셨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리가, 하나님, 주님의 말씀이 밝게 비추기 때문에 그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저는 강조점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결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혹에 빠져서 범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밑에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유혹에 빠집니다. 이런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런 유혹에 빠져서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정말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다른 성도님들의 유익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그 사람이 누리는 영적인 축복'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정말 저희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고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자신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에 빠지지 않고, 이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10절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그 요한일서의 큰 흐름은 주제가, 요한복음은 주제가 믿어서 구원받도록 쓴 거고요. 요한일서는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누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그래서 구원 분별을 위한 책으로 기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자꾸 나오는데요. 구원 구원받는 사람은 어떻게 됐는가? 그래서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주님에 대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갖고 있는 사람. 그다음에 1장 후반부에서는 '죄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 죄가 없다든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든지가 아니고 죄를 자백하는 사람. 그리고 2장으로 와서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 그리고 이번에 나오는 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여기 이 10절은 9절하고 비교해보면, 우선 사람은 9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미워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말로 구원받았다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런데 10절에 있는 사람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 이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장하지 않고 그 삶으로 증거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삶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9절, 10절, 11절을 이렇게 보면 중간이 없습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지, 사랑도 미움도 아니다. 어떨 때는 사랑하고 어떨 때는 미워한다. 이런 건 없습니다. 항상 요한일서나 요한서신의 특징입니다. 가운데는 없는 겁니다.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둘밖에 없다. 이게 항상 강조돼야 되고요. 빛과 어둠이지 회색은 없답니다.
그다음에 아까 자꾸 나온 대로 여기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지속적입니다. 한번 사랑한다, 이런 게 아니고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런 것이고요. 그다음에 이 사랑에 대해서는 보면 로마서 5장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 "선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혹 있거니와" 그다음에 "의인을 위하여 혹 희생하는 자도 있지만" 이렇게 돼 있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전혀 없다는 건 아닌데 거의 없고, 그걸 한다는 것이 자기들의 본성과 안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아까 어떤 형제님 말씀대로 본능에 가까운,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다음에 "빛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실족'이라고 하는 것은 11절하고 비교해 보면 실족은 '거리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건데, 자기가 넘어지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든지인데, 둘 중에 하나인데, 자기가 넘어지는 쪽으로 보는 것이 11절과 비교해보면, 11절과 10절이 연결돼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여지고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어떤 형제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영적인 행동들을 합니다. 그랬을 때 그걸 보고 사랑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믿음으로 죽일 때 요나단이 사랑합니다. 그걸보고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런 거죠. 그래서 어떤 형제가 믿음으로 영적인 삶을 살면 그걸 보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걸 사랑하는 거죠. 그런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제 제가 경험한 것 중의 하나는 어떤 모임에 자매님이 남편이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핍박하고, 학대하고, 이단에 빠졌다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이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집을 나왔습니다. 남편이 하도 피박하니까 집을 나와서 교회 근처에다가 방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됐을 때 문제가 딱 생깁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지. 집 나오면 안 되지. 구원받는 자매가 남편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돌아가야 된다." 어떤 분은 딱 찬성합니다. "나와야지, 그 사람하고 어떻게 사냐? 믿음을 핍박하는 데 나와야지요." 의견이 갈리는 겁니다. 그랬을 때 예를 들면 항상 영적인 것은 도덕적인 것하고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심지어는 우리 모임이, 모임에서 성도의 삶이 유교적이어서는 안 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죠. 형제에게 우애해야죠. 성도들한테도 잘해야죠. 그런데 이게 단지 예절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건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성도 회에에 갔는데 그 자매님에 대해서 성도 사이에 의견이 갈린 거예요. 저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아시겠죠? 하여간 그런 거죠.
그다음에 또 징계를 합니다. 모임에서 징계를 합니다. 이거 넘어갈 수 있는 건데, 이걸 꼭 징계를 해야 되냐? 그 징계를 했을 때 받아들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게 말씀을 따라 이렇게 징계를 했을 때 보통 이렇게 합니다. 회복되면 다시는 거기에 안 나갑니다. 창피한거죠. 그 모임에서 징계를 받았잖아요. 징계 사유라고 하는 게 대체적으로 좀 부끄러운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뭐 잘못했다고 그러고, 모임생활을 해야 되니까 뭐 회개했다고, 그러고 회복을 시키면 그 모임에는 안 나갑니다. 다른 모임에 갑니다. 천거서 써가지고, 그럼 이런 것들이 영적인 거냐? 물론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아 그렇지. 저기 부끄럽고 그러니까 다른 모임에서 생활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천거서 정말 써줄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정말 영적인 생명이 작동하고 있는가? 그런 경우에, 이제 이런 것들이 늘 항상 저희들이 삶 속에서 정말 내가 인간적이고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는 도덕적인 납득이 갈 만한 그런 행동을 하는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빛 가운데 주님이 주신 생명을 따라 사람은 낯을 보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과 달리 영적인 수준의 삶을 하늘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과 선택을 하고 있는가? 이게 문제인 거죠. 그리고 그런 걸 할 때 그런 걸 드러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지지하고 내 안에 있는 생명이고, 이렇게 지지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는 그런 게 약하니까 그래도 그래도 뭐 그러면 되는가?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원만하지 않은가? 이런 것들이 늘 생각이 되는 거죠.
주님께서 저희의 선택과 그리고 그 가치관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그와 같은 것들이 있고, 또 그런 것들을 보존해가고, 지켜가고, 이런 것들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느껴집니다. 

- 박성호 형제님 사회 : 여러 형제님들 교제 나눠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사회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은 특별히 크게 오래 교제할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사실은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 걱정하고 다르게 여러 형제님들이 이렇게 풍성하게 나눠주셔서 참 마음에 감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