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9절 / 마포모임, 20년
- 김영권 형제님 사회 : 안녕하세요. 저희가 오랜만에 화요집회 성경 읽기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지난 성경 읽기를 보니까 8월 18일, 딱 2달 만에 저희가 성경 읽기를 다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나갈 차례인데요. 일단은 저희가 2장 1절부터 9절까지 읽고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요일 2:1-9).
네, 저희가 그 요한일서 2장에서는 저희의 대언자이신, 또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이심을 앞에 서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명을 가지고 있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저를 아는 줄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 안에 있고 그 속에서 온전케 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고 또 저가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을 계속 공부해 왔습니다. 또 7절부터는 '새계명'에 대해서 나오는데 사실 여기 새계명이 뭔가 새로운 어떤 다른 말씀이 아니라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과 같은 같다라고 지난 시간에 교제가 되었고요. 이 또한 참빛이 벌써 비춰지고 있는데, 저희가 특별히 빛 가운데 있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해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9절 말씀 "빛 가운데 있다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이 말씀을 교제해 주시고, 또 묵상하신 부분, 그리고 질문 있으시면 서두에 말씀해 주셔서 답변을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형제님들 준비해오신 대로 교제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형제님 1 : 예. 2장 9절은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며"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2장 4절과 6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4절에는 "저를 아노라 하고"인데 여기 "말하고"라고 번역이 되어야 되고요. 그다음에 6절에도
"저 안에 거한다 말하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빛 가운데에 있다 말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게 다른 그런 세 가지 경우를 말씀을 하고 있는데,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며"라고 여기 빛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것은 빛 가운데 거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요. 이와 관련해서는 저희가 1장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래서 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서로 사귐이 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서로 사귐이 있고 교제 가운데 있다 라고 하는 것들을 제가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 말과 행하는 게 다른 거죠.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지금까지,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제 그 8절에서 그 마지막 부분에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라고 했던 "벌써"와 대조되는 그런 표현이고요. "지금까지"라는 것은 '여전히'라고 해석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여두운 가운데 있는 자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새 계명'에 대한 것들을 저희들이 공부를 했었는데요. 이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신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있는 이 새 계명을 받은 그 사람들은 형제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 말씀에 전반부에는 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후반부에는 어떤 새 계명을 실행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또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한다 해서 여기 형제는 구원받은 그리스인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라고 앞에 말씀을 하셨는데 그 새 계명 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한다라고 하면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야 하는 사랑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몇 구절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15장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35절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 있고, 사랑을 해야만 하고, 그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 나타내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계십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구절 말씀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그래서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도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서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1번 험담을 하거나 1~2번 미워하는 게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에 있으면서 이런 것들이 몸에 배어 있고 계속 지속적으로 어떤 표현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빛 가운데 있지 않고 어둠 가운데 속해 있는 그런 자들이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상입니다.
- 전효진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2장 9절 말씀에서는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자의 특징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빛 가운데 자신이 있다고 착각을 하거나 아니면 그걸 거짓으로 포장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자신은 믿음 안에 있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그 열매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둠의 열매를 맺어서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의 특징인 거죠. 이사람의 삶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 그 말을, 그 주장을 부인하는 거죠. 자신의 어둠에 속한 자라는 것을 그 삶으로 분명하게 증거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그런 사람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사랑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그냥 거짓으로 빛 가운데에 있는 채 뿐인 것이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어둠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빛 가운데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 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모순된 그런 주장인 것임을 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빛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어둠 가운데에 있었던 어리석고 또 교만했던 그런 사람인 것임을 9절 말씀을 통해서 또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9절 말씀에 보면 이제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워하는 것은 현재 시제 동사가 사용되어졌는데 습관적인 생활 패턴을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교제해 준 것처럼 어떤 실수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몇 번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마음의 본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 그런 부분을 지금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이제 어떻게 보면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의 그런 관계의 문제를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빛은 주님과 또 하나님과의 그런 다른 관계 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성도들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그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금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과의 그런 바른 관계 가운데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형제자매들을 분명하게 사랑할 것이다. 이렇게 유추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은데, 9절에서 빛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계속 저희가 1절부터 11절까지 형제 사랑에 대해서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 빛과 이 사랑은 함께 간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슷한 어떻게 보면 속성이 것이고, 마치 대조가 되는 게 구절에 미움, 어두움, 거짓, 이런 게 함께 가는 것이고 빛과 사랑 이런 거는 어떻게 보면 짝을 이루면서 비슷한 속성이기 때문에 빛 가운데 가면 반드시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게 함께 움직이는 것들을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어둠 가운데 있는 자요"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과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런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걸 분명하게 지적을 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이제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는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는 빛을 보지 못했고 그러기 때문에 빛의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빛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렇게 그 말을 해 주면서 저희가 계속 교제되어진 것처럼 이제 주님을 안다. 또 주님 안에 거한다. 또 주님과 교제한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 그런 모순에 대해서, 또 그런 거짓에 대해서 그것은 거짓이다. 이런 부분들을 계속 저희가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각별히 영지주의자들 그들이 이렇게 주장을 하고 빛 가운데 있다고 하고, 또 그런 어떤 지식을 자랑하고 그런 영적인 경험들을 자랑하고 그러지만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봤을 때, 그들의 행동이 특별히 7절부터 11절까지 말씀에서는 그런 사랑의 결핍, 형체를 사랑하는 그런 것들이 결핍되어져 있다면 그 말은 거짓이다. 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빛의 자녀들,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은 분명하게 같은 속성인 그런 사랑을 나타내게 되는 부분들, 이런 부분들을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9절 전까지는 계명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계명은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9절부터는 사랑을 통해서 신앙 고백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 신앙 고백은 거짓된 것일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며" 1장 7절에서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있고 또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있고 우리가 10절 보면 빛 가운데 '거하는 것', 세 가지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그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그가 친밀한 사귐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빛 가운데 있다라고 소속이 어디인가 그의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빛 가운데 속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영역 가운데 들어온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형제'라고 했을 때 성령께서는 "그의 형제"라고 붙이십니다. 이것은 그에게 마땅한 의무임을 가르쳐주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과 참된 관객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사귐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그의 형제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형제를 그가 미워하고 있다면, 지속적으로 마음과 행동으로 그런 미워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속한 것입니다. 그의 위치는 빛의 영역이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한 번도 그는 빛의 영역에 들어온 적이 없고, 즉 구원받은 적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2장 9절과 2장 11절에서 한 번 더 나오고요. 2장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그리고 3장 15절에서는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리고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2장 9절과 11절에서는 만약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형제를 미워한다면,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참된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세 가지의 부분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4장에서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가족인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는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즉 우리가 앞서 나온 주제와 이어서 생각한다면 이것이 계명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진리가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그 마음에서 이룬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기에, 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저희가 지금 9절을 보고 있습니다. 저희가 8절 마지막에 보게 되면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라고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벌써'하고 '지금까지'를 조금 이렇게 대조해보고 싶습니다. 8절에서 참빛이 '벌써 비춘다' 라고 했을 때, 이 빛이라는 것은 결국 실제적인 것입니다. 벌써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다"는 거는 예를 들어서 '아직'이라고 좀 바꿔보겠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님들께서 교제하신 것처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소속'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다" 빛은 벌써 비췄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어두운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 빛 가운데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읽게 됩니다. 이 말은 빛과 어두움이 결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빛이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 그러니까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합니다. 내 소속은 빛이다. 그런데 그게 드러나질 않는 거죠. 왜냐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거죠. 그러니까 빛 가운데 있기는 한데 형제를 미워한다. 이런 의미가 아니고 여전히 이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빛 가운데 소속된 적이 없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 가운데 있었던 적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1장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나오면 또 4장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양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속이 빛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 빛은 8절 마지막에 나온 것처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는데 그 형제를 이제 미워하는 자는 사실은 그 소속이 어두움에 있는 것이고 빛과 양립하는 그 사랑이 드러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 더 쉽게 말하면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것,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아직 안 비쳤다 이런 것이 아니고 벌써 비쳤는데 아직까지도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있는 이것에서 8절과 9절에 '벌써'하고 '지금까지'가 대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형제님 그래서 또 말씀하신 것처럼, 이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 있는데, 미워하는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여전히 어두움이라는 것을 이렇게 9절이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교제가 됐지만 4절에도 말하는 사람이 있고 6절에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가 볼 때마다 4절에 말하는 사람, 6절에 말하는 사람, 그리고 9절에 말하는 사람은 그의 말과 행동이 양립하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희의 소속이 빚 가운데 있다면 저희의 그 이 행동도 양립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 이상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예, 여기 9절에 이제 말씀해 주신 대로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러니까 한 번도 그 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구원의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던지 간에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태도와 행동을 보고 그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임을 분별해 내고 있는 것이 이 9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9절과 또 다음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해야 되는 그런 교훈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또 전체적인 서신서에서 그런 사랑하기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특별히 이 9절에서는 말하는 것이 누가 구원받은 사람이고 누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여기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인데요. 특별히 '형제를 미워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좀 냉랭하게 사랑하는 그런 게 아니고 적대감을 가지고 이렇게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연히 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디도서 3장에서도 그걸 말하고 있고요. 이제 예전에는 피차 미워하는 자였으나 그런데 이제 범사의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사람으로 중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감정이 없어졌다거나 모든 것을 미워하지 미워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옳게 미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리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 그리고 유다서 보면 잘못된 교리에 빠진 그 교리에 대해서 미워하고, 그런 교리를 통해 나오는 행위들을 미워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그 의미를 한번 생각을 해보자면 3장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은 형제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들, 그 형제들을 미워한다면, 세상과 똑같은 태도와 행동을 가지고 있는 게 되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이 그리스도인들, 형제를 미워하냐면 그 앞에12절에도 나와 있지만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아벨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벨이 그 의로운 제사를 드린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이 온 세상을 위한 화목 제물인 것을 믿고 그분께서 그 죄를 온전히 처리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을 이 세상은 싫어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믿고 있는 의인들을 싫어한다면, 형제들을 싫어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람들이 말로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 가운데 있다라는 말을 앞에 계속 거짓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4절에 "저를 아노라 하고" 그래서 특별히 이것은 자신의 지식을, 특별한 지식을 자랑하는 말로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지식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들이 2장 19절에 보면 나가버렸습니다. 그 형제들과 같이 있지 않고 그들이 나가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랑 같지 않다." 하면서 스스로 나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분의 온전한 구속 사역을 믿는, 단순하게 붙들고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낮은 수준의 것이고 우리는 너희와 맞지 않다라고 나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고 그들이 스스로 구원받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저희가 요한일서 2장 9절 말씀 저희들이 교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저희들이 아는 대로, 배웠던 대로 영생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빛 가운데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2장 3절부터는 그와 같이 거듭나서 영생을 가지고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함께 교제하는 자들의 특징을 저희들이 계속 발견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6절까지는 그 특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 이것이 빛 가운데서 교제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배우고 있는 7절부터 11절까지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빛 가운데서 교제하는 자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저희가 그 가운데서 9절 말씀을 보고 있는데요.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저희들이 이런 말씀을 대했을 때 저희 자신을 적용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형제 자매님들을 사랑하는 이러한 삶의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저희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은 당연히 저희들은 "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한 참된 증명이 뭐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으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이 교제하는 이 부분에서는 "당신은 정말 빛 가운데 계십니까? 어둠에 속하지 아니고 빛 가운데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것을 저희들이 증명하는 방법은 우리가 말로 그냥 저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의 형제 자매님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특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제 자신한테 생각을 해보고 만일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거나 뭔가 좀 문제가 있다면 점검을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정말 생명이 있는가, 혹은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가, 정말 아니면 내가 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가, 혹은 내가 죄를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점검하고 이런 특징들이 저희 사랑 가운데 나타나도록 요한 사도께서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8절에 보면 "내가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 와 너에게 참된 것이라 이런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이제 저희들이 지난 시간에 8월달에 교제한 대로 지금 세상은 어두움은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끝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또 궁극적으로는 저희들이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갔을 때 어둠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은 지금 이 땅에 남아 있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빛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참빛은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신 이후로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 비춰지고 있는 빛입니다.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찬 빛으로써 지금 세상을 비추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빛에 거하고, 빛 가운데 행하고, 그리고 그 빛을 나타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을 어떻게 나타내냐면 사랑함으로써 나타난다고 이 말씀은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도 형제님 말씀해 주셨는데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정말 이 참빛을 비추는 자가 정말 누구인가를 지금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세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는데요. 이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정말 누가 참빛에 속해 있고 그 참빛을 비추는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9절에서는 오늘 배우는 것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 10절에서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 11절에서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 이 세 부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정말 참빛을 비추고 있는 사람인가, 저희들은 그 해답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이제 9절에서는 당연히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요. 이 사람이 이제 그 형제를 미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형제님들께서 다 교제해 주신 대로 이건 현재형 동사로 되어 있고 그의 삶의 전반적인 태도가 형제를 향해서, 특별히 시도를 향해서 미워하는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제 요한일서 서신서에서 그 미움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제가 조금 찾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까도 잠깐 언급된 말씀인데요. 13장 12절에 보면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그래서 왜 미워하냐면 자기는 악하고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가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그렇게 살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세상을 경건하고 의롭게 살 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것을 우리 형제 간에 적용을 해보면 자신보다 의롭게 사는 형제의 에 대해서, 자신보다 경건한 삶을 사는 형제에 대해서 미워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서로 사랑할지니" 그리고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라고 얘기합니다. 저희들이 자신보다 경건하고 의롭고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말라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3장 10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를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어찌 거할까 보냐?" 이 미움이 어떤 형식으로 또 나타나냐면 무관심으로 나타납니다. 성도의 어떤 부족함, 영적인 부족함일 수도 있고 여기서는 물질적인 부족함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성도의 연약함, 다른 성도의 궁핍함을 보고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미움입니다. 저희들이 주님의 정말 저희 그들의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 가운데 정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할처럼 서로 사랑하라" 라는 그러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또한 이러한 미움들이 사라지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에서 계속 형제님들 질의를 해 주셨는데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이게 그 앞에 있는 '이미'라는 말하고 이렇게 비교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까지 어둠에 있다고 하는 의미는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마땅히 이들이 변화됐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땅히 빛으로 왔어야 되는데 아직도 어둠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계속 비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각 사람의 마음속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을 실제로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통해서도 그것들이 보여지고 나타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이들이 마땅히 변화하고, 마땅히 회개하고, 마땅히 구원받아야 되는데, 그들이 아직도 그것을 거절하고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제 암시하고 있다고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이 됩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앞서서 잘 말씀해주셔서 저는 그냥 짧게 첨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형제를 미워한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말할까 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다 얘기를 잘 해주셨는데 뭐 다른 측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모임 생활 실제 중에서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가 있을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봤을 때 그런 일들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들이 성도들 가운데 상처가 되거나, 아픔이 돼서 안 좋은 감정이 생기는 거죠. 그런 경우들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느냐, 그것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용서하는가? 이러한 것이 또 그리스도인의 임을 테스트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은 18장에서 1만 달란트 빚진자와 100데나리온 빚진자의 예를 들면서 얘기를 하셨고, 또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되어 있고 17절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측면이 모임 가운데 분명히 있을 수 있고,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미워하는 어떤 한 모습이 될 수 있다라는 점을 봤을 때 이제 한번 이러한 측면들이 교훈이 됩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우선 본문을 잠깐 보면, 8절에 보면 이제 "새 계명" 7절, 8절에 앞에가 계명 나왔는데요. 이 계명은 저희들이 아는 대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는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7절, 8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이 제시되고 그리고 나서 그 명령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 10절, 11절에서 적용을 합니다. 9절에서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 미워하는 사람, 하나님 계명과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죠. 그다음에 10절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고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 11절 미워하는 자, 여기는 이제 빛 가운데 있다고 말도 안 하는 거죠. 미워하는 자, 이 셋을 적용하는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그 명령이 실질적으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만든다. 이렇게 볼 수 있겠고요.
그다음에 계속 논의되고 있는 그럼 사랑이 뭐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게 뭐냐? 혹은 미워한다고 하는 건 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저희들이 여러 번 계속 말하고 있지만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내가 느끼고 있는 좋은 감정, 싫은 감정, 이런 게 사랑이 아니고 저희들이 사랑 그러면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구절이 있는데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고 저희들이 하는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어야 되죠.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것이니까, 1.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영적인 최고 수준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모임 안에서 어떤 성도들과 함께 한 지체로서, 교회로서 모여서 생활할 때 누가 사랑하는 거냐? 어떤 성도를 보고 그 성도가 영적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까지 이룰 수 있도록 그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 이게 첫 번째 사랑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2. 두 번째 사랑의 특징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 때문에 마땅히 심판받을 죄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왜냐하면 만약에 심판을 하면 우리는 이제 지옥에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희들 가운데도 상대방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려고 한다. 물론 땅에 속한 유익은 상관없다 이런 뜻이 아니고요. 영적인 유익을 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그것을 위해서 내 자신이 필요한 희생을 해야 된다면 기꺼이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것. 이게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인제 두 번째는 미움은 뭐냐 그러면 이제 정반대죠. 어떤 아까도 그런 거에 나왔습니다. 나보다 영적으로 자꾸 사는 것이 싫어지는 거죠.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는 것처럼,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이 나의 죄를 지적해 올 때, 나의 연약이 좀 더 성숙돼야 된다고, 영적으로 변화돼야 된다고 나를 지적해 올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적인 태도로 받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대서 이걸 나에 대한 공격으로 이렇게 받는 것이 미움입니다. 미워하는 거죠.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거죠. 아벨 죽일 이유가 없죠. 그런데 아벨이 외롭고 자기가 악한 것이 드러났으니까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충고를 주님 안에서 우리가 더 나아가야 되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도 온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해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그 수준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로 두시고 지체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교제를 통해서 영적인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데, 그와 같은 것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자신의 연약을 인정하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나는 혼자 그 길을 갈 수 있다라고 굳게 가는 것, 이게 이제 미워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잠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금 어떤 태도들이 가짜인 경우에 어떤 태도가 있냐면 저희들이 영지주의, 이렇게 했는데요. 빛을 받으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많이 알게 되면, 성경적인 지식이 있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나오냐면 성경적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아직도 수준에 못 이르렀네. 아직도 그걸 모르다니? 이렇게 가는 거죠. 이게 그 지식을 잘못 사용한 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늘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죠. 세상에서 지식인들이 늘 그런 거죠.
그런데 참된 지식은, 정말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낮게 보지 않고 그들을 섬기려 합니다. 내가 더 낮은 자리로 가서 어떻게든지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여기 차이가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잠깐 적용을 해보면 제 개인적으로 느낀 건데요. 예를 들면 교회 진리가 잘 밝혀지지 않았을 때, 그냥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떡 떼고 주님 오실 것 기다리며 이렇게 산다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 교회 진리들이 많이 밝혀졌을 때, 도입되기 시작하고 이렇게 했을 때, 제가 받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이 맞는 말을 해요. 맞는 말을. 그런데 되게 기분이 나빠요. 맞는 말인데, 물론 받는 사람 쪽에 문제도, 저도 문제가 있었겠죠. 그런데 교회진리를 막 설명하는데, 그게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데, 영 마음이 안 좋을 때가 많아요. 그 이유는 뭐냐면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 지식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아니어도 사람은 딱 감각이 있어서 그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지식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이 싫더라고요. 하여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정말 성경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정말 다른 사람에게 유익으로 되기를 원한다면, 정말 섬기는 마음으로, 이걸 알고 있는 것이 어떤 높은 게 아니고, 안다는 게 높아진 게 아니고, 오히려 더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겸손해지고, 또 나도 모를 어떤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르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하여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게 느껴지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저희들이 여러 가지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이 사실은 이렇다.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이제까지 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어나, 혹은 큰 흐름이나, 이렇게 좀 더 정확하게 보면 사실은 이런 뜻이다라고 말을 할 때, 참 이런 게 조심스럽고 그렇게 섬길 때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 이런 구절이 아닌가, 정말 이게 주님으로 온 것이면 참 주님의 인격과, 혹은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다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이런 게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제 저도 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때 거부감을 갖는 분들이 많이 있고 또 그 거부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소리도 많이 듣고 그렇습니다. 그때 이제 느끼는 게 미움이 돼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미워하는 것은 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예를 들면 가인의 길을 갈 수 있는 거다. 이런 생각과 또 이렇게 해야 되는 사람의 책임, 받아들여야 되는 사람의 책임, 형제를 사랑해야 되고, 해야 되는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 쪽 책임이고, 그다음에 듣는 사람 쪽에서는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인격, 그리스도를 닮아간 인격, 이런 것들이 참 필요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 김영권 형제님 사회 : 네, 감사합니다. 오늘 성경읽기 집회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오늘 집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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