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6절

박이레 2026. 7. 4. 20:11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6절 / 마포모임, 20년

- 사회자 형제님 : 요한일서 2장 6절을 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절부터 6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1-6).

네, 저희가 지난 시간에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그가 주님안의 거함을 알게 된다는 것을 배웠고요.
오늘은 또 같은 맥락에서 주안에 거한다고 고백하는 자는 그가 거한다고 하는 주님과 같이 행해야 하고 또 행하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구원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6절 말씀 통해서 형제님들 교제해 주시기 바라며, 참고를 위해서 제가 쉬운성경에서 요한일서 2장 6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쉬운성경의 번역입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6절 흠정역을 보면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으신 것 같이 자신도 또한 그렇게 걷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지금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 안에 거한다고 하는 자"로 돼 있는데, '말을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저 안에 거한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행할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지다', '의무가 있다'라는 그런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게 아니고 '행해야만 한다'라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가셨던,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그러기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어떤 저희의 생각이나 저희의 힘으로 그걸 하기는 어려운 부분들이고요. 그래서 저희 안에 있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통해서 제가 주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야 한다라고 하는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말씀으로 저희가 1장 7절에서 배웠던 것처럼 "저가 빛 가운데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해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빛이신 주님 안에서 저희가 행한다라고 하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래서 여기서는 '주님 안에서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간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지체나 어떤 부분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동행한다, 같이 행동한다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우리도 주님이 거니셨던 그 삶을 같이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상입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성도들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 하는 것은 이건 지속적이고 중단 없는 그러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만 따르고 그냥 그 뒤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 한번 시작한 것까지 끝까지 주님 다시 만나는 날까지 이어지는 상태, 그 상태가 주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고 말로만 주장하는 것은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그러한 새로운 성품이 자리 잡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성품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행하셨던 그대로 본을 쫓아서 행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주님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주님의 본을 따르기 때문에 성도들이 주안에서 주안에 거하는 자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1년 동안 가르쳤을 때, 그때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졌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졌던 것은 그들이 말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틀림없이 주님 안에서 있는 모습들,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가 있고, 또 주님께서 겸손하신 것처럼 겸손하실 수가 있고, 또 주님께서 온유하셨던 것처럼 저희들이 온유할 수 있고, 또 주님께서 희생하신 것처럼 저희들이 또 희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보여주신 본이고 또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마땅히 그 길을 깨따라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어떤 이미지나 저희들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저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본능적으로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하는 것을 이 6절 말씀을 통해서 또 확인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형제님 : 여기 저희가 저번에 배웠던 5절에서는 이제 '저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것과 비교하고 이제 6절에서는 '저 안에 거하는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와 사귐 가운데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주님을 깊이 신뢰하므로 어떤 안정적이고 평안한 가운데에 있는 것을 또한 말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저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 주장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아까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이 "행할지니라"가 행할 의무가 있다. 책임이 있다라고 원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이 돈을 빚졌다는 이 단어가 여기서 쓰인 것을 보게 됩니다. 잠깐 예시를 들어서 생각을 해볼 때 한 집주인이 자기의 집을 공짜로 그 안에서 거하게 해주었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사랑에 빚졌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저희를 그분 안에 값 없이 거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저희는 참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할 의무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아마 이러한 의무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주안에 거한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말 주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 주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주님의 본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면서 2장 28절에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얻어서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안에 거하는 자들은 주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와 같이 행하며, 또한 주님과 같이 될 날을, 주님이 강림하실 날을 바라볼 것입니다. 다음 장인 3장 2절에서 우리가 "주님이 계신 그대로를 볼 때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3절에 주님을 향하여 "그러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깨끗하신 것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주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자기도 거룩함을 지킬 것입니다. 또한 3장 16절에서 나온 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알며, 또한 그러한 사랑을 형제들을 위하여 실천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자신과 같이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라고 말씀하신 이 부분에서 발을 씻길 의무, 책임이 있다 라고 하는 6절의 동일한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게 됩니다. 

- 형제님 2 : 저는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 그러니까 '거한다'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좀 묵상을 해봤습니다. 먼저 거한다는 단어의 어떤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람이 어느 집에 산다' 또는 '어느 지역에 머물다', 성경에서는 대부분 기본적으로는 이런 단어에 쓰였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 많은 경우에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그런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그 의미의 근거는, 그것은 이제 우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다 아시는 말씀이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은, 주님 안에 사는 것은 우리 스스로부터 난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주위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런데 이것을 저희가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깨닫느냐, 이것도 마찬가지 저희가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4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돼 있고, 또 요한일서 4장 12절, 13절 말씀 보시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을 때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래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는 것을 알게 하신다라고 이렇게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저희가 또 알아야 될 것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해야 또한 우리가 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5절 말씀 보시면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시느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사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의 결과는 무엇이냐면, 이 몸은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이지만 영이 새롭게 사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영 안에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의 결과는, 즉 무엇으로 저희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면 바로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서 성도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의 결과는 바로 열매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과 한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구원은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 만약 어느 성도의 믿음이 약해진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즉 그 상태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만 우리가 거하는 그 주님께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 주님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질 때,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 그때 우리는 이제 시험에 들 수 있고, 약해질 수 있고,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고, 그런 상태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저희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저희 안에서, 마치 나뭇가지에 큰 줄기에 가지가 붙어 있어서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참된 열매와 그리고 참된 믿음의 열매가 맺히리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상입니다. 

- 이기범 형제님 : 6절에 "거한다 하는 자는"에서 지난번에도 교제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이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4절, 6절, 9절에, 4절에 "이제 아노라 말하고" 그다음에 6절에 "이제 거한다 말하고" 그다음에 9절에 "빛 가운데 있다 말하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기록이 된 것 중에 '두 번째'입니다.
방금 이제 형제님께서 이제 '거한다'에 대해서 교제를 해주셔서 거기에 대해서 좀 추가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거한다라는 것은 교제가 된 것처럼 '계속'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 요한일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거한다라는 단어는 신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제 요한복음에서 몇 구절을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거한다'라는 단어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장 32절에 보면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이 '머물렀더라'가 이제 거한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물러, 그러니까 '거한다'라는 표현을 써가지고요. 그 삼위 하나님의 그 관계를 나타나는 하나의 예가 됩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해서 이 '계셔'도 지금 말하는 '거한다'랑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그리고 성령의 각 관계를 나타낼 때 이렇게 '거한다', 또는 이제 번역을 '머물렀더라', '계셔', 이런 식으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또 이걸 볼 수 있는 게 이 '거한다'라는 단어가 주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돼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8장 31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해서, 이 '거하면'도 이게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많이 알고 있는 포도나무의 비유가 있는 요한복음 15장도 보게 되면, 그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 아까 형제님께서 이제 '교제의 사귐'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교제와 사귐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거한다'라는 이 동사를 통해서 표현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한다라는 단어는 삼위 하나님과 간의 관계도 표현이 되고, 또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사용이 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이 거한다라는 단어를 단순히 이렇게 머무른다라든가, 이렇게 해서 좀 가볍게 볼 수 없는 그런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해서 이제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라고 이렇게 표현이 있는데, 흠정역을 보게 되면 이게 "그의 행하셨던 대로"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대로 저희도 행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특별히 생각이 나는 부분은 베드로 전서 2장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1절에 보게 되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냐라고 했을 때 동일한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보게 되면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한 자에게 부탁하시며" 이렇게 말씀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인 '거한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주님께서 행하셨던 대로 우리도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가 그래서 이제 특별히 6절에서는 이 거한다하고, 그 행하셨던 것에서, 그 행하셨던 것이 '걷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주목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상입니다. 

- 김영권 형제님 : 네, 교제할 때 늦게 마이크를 잡을수록 다 형제님들께서 앞에 나눠주셔서 하기가 어려워지는데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일단 중복되지 않게 좀 얘기를 해보면, 저도 이 '거한다'라는 부분이 일단 처음으로 쓰여진 부분 찾아보니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 평안하게 그 사람들을, 10장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무 성에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머물라'라는 부분과 같은데요. 물론 앞서서 행제님께서 단순히 머물다라는 것만으로 이렇게 볼 수 없고, 더 다른 계속 주님의 뜻이 거하고, 또 주님이 저희에게 계속 거하게 해주시는 그런 뜻도 있습니다. 또 쓰인 용례를 보면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평안하기를, 또 영혼들을 만나기까지 그곳에 거하면서 기도하고, 또 주님께서 주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고 있는 그 거하는 것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빌어야 되는, 뭔가 주님께 뜻을 구하고,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온전하고 완벽한 대상에 거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명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쫓아서 그 거해야 되는 곳을 찾았고 또 주님의 뜻을 전했지만, 그분, "저 안에 거한다"라는 이 안에서의 거하는 대상은 참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저희가 평안하게, 언제나 평안하고 또 마땅히 저희가 거해야 되는 대상인 것에 감사가 되었습니다.
또 저희의 저희가 행해야 되는 것도 앞서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본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형, '행하셨다'라는 부분을 말씀해 주셨는데 이렇게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 주님께서 그의 생애를 통해서 본으로 보여주신, 이미 이루신 과거형이기 때문에 저희가 그를 보고 저희의 삶 또한 그렇게 행해야 되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또 저는 5절과 6절을 연관돼서 계속 생각나는 부분이 마태복음 17장인데요.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산상에서 변화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초막을 짓는다라고, 또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을 짓는다라고 말했을 때, 하늘에서 이렇게 소리가 났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여기서 저희가 요한일서 2장 5절에서 "그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참 이 부분이 연관되게 생각이 되었고요.
또 우리 주님에 대해서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저희가 말씀을 그대로 깨닫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저희 안에서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에 대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해 소개하고 선포했을 때 그 주님의 모습이 저희에게도 이렇게 비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얼굴에서 나온 빛이 저희 개개인에게도,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비춰져서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 사랑이 저희 안에 온전케 되고, 또 그 말씀을 듣고 거하게 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님을 지칭하셨을 때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뻐하는 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도 우리 주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고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지신 그 시간에 또 그 방법대로 이 땅에 오셔서 다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6절에 있는 내용이랑도 연관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행하시던 대로" 주님께서 그 길을 순종하셔서 걸어가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과 같이 저희 또한 그 안에 거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는 자, 그리고 그대로 행하는 자로 계속 살아갈 책임과 또 특권을 가진 자라는 부분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 박성호 형제님 : 2장 6절은 요한일서 1장 6절과 어느 정도 대칭이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영지주의자들이 '그의 안에 산다' 이제 보면은 어떻게 보면 영지주의자들이 얘기하는 표현으로, 이제 그 절대적인 그런 초월자와 자기가 연합해 있다. 어떤 신비스러운 그런 관계에 있다라는 것을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표현이 1장 6절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둠에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정말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관계에 있다면 "그의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해라."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고요.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다 그래서 '걸어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과 영지주의자들의 차이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말하기만 하고 그다음에 제 갈 길로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안다라고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 가운데서 주님이 사시는 대로 똑같이 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거하실 때 본을 보이시기를 사람들을 만족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삶의 본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능력과 그 인격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누가 정말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주님을 닮으려는 소원이 있는지, 주님처럼 행하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있는지, 또 앞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과 말씀을 지키려 하는지, 이러한 것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하고 확신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3절부터 6절까지 저희들이 한 단락으로 지금 계속 이해하면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제 사도요한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교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저를 안다" 그 다음에 5절에서는 "저 안에 있다" 오늘 공부한 6절에서는 "저 안에 거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친근히, 가까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주님 안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제 '거한다'라고 하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주님 안에 연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계속 형제님들이 조금씩 조금씩 말씀도 찾아주시고 언급을 해 주셨는데, 이 거한다라고 하는 표현은 집에서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지속적으로 거한다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평안하고 기쁨이 느껴지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성령님께서 주님께 임했던 것처럼, 그리고 어떤 제자가 그 집에 가서 평안을 구했던 것처럼, 그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늘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그 안에 지속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평안한 마음으로, 이제 주님과 거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의 표현하고 좀 다릅니다. 사도 바울 형제님은 '주님 안에 있다'라는 표현을 주로 신분적으로, 어떤 신분적인 표현으로 쓴다면, 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영적인 경험들, 실제적인 우리가 영적인 경험들을 표현한 단어로 많이 씁니다. 그래서 저희가 계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 평안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그런 것들을 표현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주님과 지속적으로 평안한 교제를 누리는 사람은 어떤 결과를 나타내냐면, 저희들이 계속 교제한 대로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고, 주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모습을 저희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이제 그것을 순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배우는 6절에서는 그 말씀하신 분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고, 주님의 모습을 보고, 정말 이분을 닮아야 되겠다, 이분처럼 살아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그는 갖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그도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이제 '주님이 행하시는 모습'이라고 했을 때. 이제 이게 어떤 모습이냐라고 생각을 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하시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이제 아까 어떤 형제님이 시제에 대해서 언급을 해 주셨는데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즉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나타내어 주신 그러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냐면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저희들도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희들이 요한일서 초반부에 배울 때 주님을 어떻게 나타내냐면 주님을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렇게 저희들이 배웠습니다. 주님은 저희들에게 이 땅에 오셔가지고, 영생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아, 영생이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단지 그냥 저희들이 천국에서 사는 영원히 사는 그 삶이 아니고,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삶이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금 방금 주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영생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시작하는 삶이 영생이 아니고, 이미 저희들은 영생을 가지고 있고 영생을 지금 살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영생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영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영생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아,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나타내 주신 보여주신 영생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이러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행하셨고, 저희들이 영생을 가진 자로서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러한 생명을, 그러한 삶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계속 교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해야 되고, 하나님 안에 거해야 되고, 하나님 안에 늘 하나님과 교제해야 되고, 그러한 삶 가운데서 저희들에게 이러한 영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저희들에게 이제 교훈이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예, 이상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여기 우리가 함께 계속 살펴봤던 세 가지 표현이 있는데요. "저를 알고" 또한 "저 안에 있고" 그리고" 저 안에 거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또 우리가 계속 교제한 대로 이것은 점차적인 성숙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그러한 내용이고, 특별히 우열의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강조점이 다른 면에서 성숙된 면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하다'라는 것이 요한복음 15장에 나와 있는데, 거기도 보면 "내 안에 있는" 가지는 과실을 맺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거하는" 특별히 '거하다'라고 표현됐을 때는 "과실을 많이 맺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5절이 요한복음 14장하고 연관된다고 생각이 들고요. 요한복음 15장은 6절과 연관이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순서적으로 보면 요한복음 14장에도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한번 보았지만,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내용이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그리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이런 내용들, 내 안에 있고, 나를 사랑하고, 이제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런 것들이 5절에서 다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다음에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것이 "내 안에 거하라", "과실을 많이 맺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강조점, 그 차이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봤을 때, 그래서 거한다라는 것은 그 신자의, 믿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 요한일서에서도 '명령형'으로 사용합니다. 2장 28절에 보면 "자녀들아 그 안에 거하라" 이렇게 명령형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내 안에 거하라" 이렇게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5절에서 "저 안에 있다" 이것은 이제 저 안에 있는 어떤 상태를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이죠. 저 안에 있는 상태를 그들이 주님을 사랑해서, 그 사랑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에 그 사랑이 온전케 되고, 그러면서 그들은 이제 경험적으로 그 상태, 자기가 주님과 어떠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거한다라는 것은 그 신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제 명령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앞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저 안에 있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다는 건데, "그 안에 거하라"라는 것은 그 친밀한 관계를 계속해서 그가 '유지'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치밀한 관계가 유지되게 하는 것,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을 죄와 다른 것들을 버리는 이런 것들을 말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는 '책임', 그리고 두 번째로는 '계속'되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이 특징이 항상 '결과'를 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거한다라는 것은 항상 결과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내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그 어떤 결과를 내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거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어떤 결과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행할 찌니라" 그 의무를 말하는 표현을 사용해서 연결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다 어떤 표현에는, 자신이 어떤 것을 말할 때는 그것에 따른 결과를 보여줘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특별히 거한다는 것은 더욱더욱 결과가 있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식물을 키울 때 보면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열매를 맺는 분명한 결과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거한다는 표현이 항상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이 '거한다'라는 것은, 거한다라는 것 자체가 뭐냐 그러면, 거한다라는 것은 주님을 더욱 가깝게 의지하고 주님과의 계속되는 교제를 통해서 그분으로부터 양분을 계속 받는, 그 능력을 받는, 그 영향력을 받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냥 어떤 계명과 어떤 말씀들,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어떤 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주님을 의지해서 계속적으로 받는,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의지해서 받는 것을 거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랬을 때에 결과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이 그를 봤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를 아는 걸로 알고", "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그런데 또 특별히 이것은 그 결과가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리스도인답다고 말할 정도로 하는 결과와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지 어떤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셨을 때에 행하셨던 그 모든 일 가운데서 본을 받고, 거기서 또 힘을 얻고, 또 그것을 그대로 보일 뿐만 아니라, 앞에 찾아주셨는데 2장 28절에서 "그 안에 거하라"라는 말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2장 27절 28절에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힘과 또 그 영향력은 주님의 영광에서 영향력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땅 가운데 삶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존귀가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고, 그래서 나중에 주님을 영광 중에 만날 때 부끄럽지 않는 그런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나오는 "그 안에 거하라"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그 영향을 받는 것이고, 3장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세 번째 나오는 그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그래서 이제 이 그리스도인들은 주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고, 주님의 영광과 또한 주님의 거룩하심이 그로 인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 형제님 3 : 지금 6절을 보고 있는데요. 제가 이제 문맥을 좀 따라가면서 보려고 흠정역으로 4절, 5절, 6절을 좀 교제하려고 합니다. 일단 5절이 중심이 됩니다. 5절을 보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사랑이 완전하게 돼서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보는 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 이게 사랑이 완전하게 졌다, 이게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을 알려고 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다 아시고, 하나님은 다 아시죠. 그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시지만 우리가 모를 수 있으니까, 우리가 알기 위해서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셔가지고,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자녀구나, 내가 구원받았구나, 이걸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거죠. 하나님은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거고,
그럼 이 우리가 안다는 거를 왜 얘기하냐? 그건 영지주의자 때문에 그렇죠. 4절에 보면 "내가 그분을 아노라." 라고 말하는데 그분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자기도 자기가 속고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그러면 답을 내가 알고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의도적으로 거짓말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이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영지주의자는 자기가 믿고 있는 거죠. 나는 알고 있어. 난 그분 알아.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을 안 지키니까,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지 않으니까. 그래서 "너는 니가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거 아니다.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이렇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냐라는 것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지적을 하고 있고요.
마치 그런 거죠. 어떤 형제님 왼쪽 손가락이 분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 저는 당연히 분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형제님 왼쪽 손가락이 분리가 되는 게 답이었죠. 그 형제님이 그걸 확인해 주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그걸 아는 거죠. 좀 주일학교 때 말씀하셔서, 생각나는데 어쨌든 성경에 마태복음에 보면 그런 예가 나오죠.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나오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밝힌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확인이 된 거죠. 나는 그렇게 믿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하면은 내가 주님만 아는 거지.'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잘못 알고 있었던 거죠. 그게 아니고 21절에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가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여야만" 행해야 되는, 그러니까 그게 있어야 된다는 거죠. 너희가 그게 '주의 계명을 지킨다'고 되어 있고요. 이게 딱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아시지만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이제 행하는지를 보는 것이 이게 중요하다는 거고요.
그래서 4절, 5절 그다음에 이제 6절 오는 것입니다. 6절에 와서 "자기가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은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걸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이제 순서대로 쭉 직역하면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마땅히 너희도 그렇게 걸어야 된다."라고 의무를 부여하는데 그게 직역이죠. 그런데 이 문맥상 이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려면 결국 그 말은 뭐냐면, "너 주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안 행하지? 그럼 너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너는 그분 안에 거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딱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직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맥상 약간 의역을 한 거죠. 제가 물론 직역을 하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되겠고요.
그다음에 저는 여기 6절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뭐냐면, 흠정역에서 "걷는다"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한국 한글 성경에는 "행한다." 또는 쉬운 성경에 "산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실 원어에는 '걷는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생각이 드는 거죠. 왜 사도 요한이 굳이 산다라고 해도 되고, 행한다라고 해도 되는데, 왜 걷는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그게 궁금한 거죠. 그런데 이 걷는다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걸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를 들어 행했다라고 하면, 하나님도 행하실 수 있잖아요. 그냥 신도 행하고, 신도 사신 하나님이니까 살고, 그런데 걷는다라는 거는 사람이니까 걷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걸으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셨고, 다분히 영지주의자들을 의도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 진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걸으셨고, 또 울기 하셨고, 피곤해서 앉기도 하셨고, 또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기도 하셨고,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물론 부활하셨고, 이런 것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이 땅에 살잖아요. 이 땅에 살지만 주님이 이 땅에서 다 그렇게 행하면서 사신 것입니다. 그걸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초월적인 그런 분이 아니었고, 우리랑 똑같이 육신을 입고, 똑같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으셨다. 한 단계 한 단계 걸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것에 대해서 주님은 신이니까 쉽게 하셨고, 우리는 그거 불가능해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주님이 걸으셨던 것처럼 너희도 순종하고 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걷는다'라는 거는 방향성이 있죠. 어디로 가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나사렛에 가신 것처럼 우리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주님이 십자가에 가신 것처럼 우리도 자기 부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예를 들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형제, 동역하고, 이런 게 있어야 되는 거고, 엠마오로 가신 것처럼 같이 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주님의 이런 것들을, 특히 이 땅에서 그런 것들을 이렇게 다 내포하는 그런 표현을 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단어를, 특별히 이제 걸었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주님, 그러니까 문맥은 이렇습니다. 흐름을 저희들이 잡으면 3절이 일단 어떤 '명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2장 3절을 보시면 우리가 구원받은 줄, 하나님의 자녀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제 3절이 큰 명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입니다. 말씀 순종할 때, 그러니까 이제 구원 받았다고 하고 예를 들면 침례는 못 받겠다. 어릴 적부터 세례 받았는데, 유아 세례 받았는데 침례 못 받겠다. 혹은 너울 못 쓰겠다. 고린도 교회의 풍습이지. 무슨 너울을 쓰라고 하냐? 요즘 시대에, 요즘같이 여성들이 그 지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게 뭐냐? 이렇게 하면 구원받지 않은 거죠. 저희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이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이게 큰 명제고요.
그리고 나서 4절, 5절은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적용을 어떤 사람이 안다고 말하면서 계명을 안 지키면 아니다, 이렇게 한 거고요. 5절은 긍정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안다. 그래서 저희들이 첫 번째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줄 어떻게 아느냐? 첫 번째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3절부터 6절까지가 그렇고요. 그다음에 이제 7절부터는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이게 이제 구원의 긍정적인 증거들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3절이 큰 명제고, 4절은 부정적인 예, 그 명제를 적용한 것입니다. 5절은 긍정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은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처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보통 저희들이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우리가 어떤 걸 결정해야 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이 이 상황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걸 생각하면서 그렇게 믿어지는, 물론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한 개인이 믿음으로 주님 같으면 이렇게 하셨을 것이다라고 자기의 이제까지의 믿음과 또 성경적인 지식을 통해서 어떤 결동을 딱 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스도인은 주님처럼 하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조금 애매합니다마는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오병이어 후에 "먼저 가라." 그리고 주님은 산으로 가셨거든요. "너희들은 먼저 건너가라." 그래서 건너갔는데 풍랑이 일어서 날은 어두워지고 그다음에 배는 바람 때문에 못 나가고 그러고 있는데, 주님이 걸어오신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막 귀신인가 싶어서 두려워하다가 "나다." 그랬을 때 이제 저희들이 생각해 보는데요.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주님이시라면 저를 오라 하십시요." 그래서 베드로가 위험한 상황에서 안전한 배를 떠나 물 위로 걷죠. 그래서 이 물 위를 걸어오신 분이 주님이라면 자기도 물 위를 걷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 마음이 뭐였을까? 왜 갑자기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하는데, 하여간 기본적인 마음은 주님이 걸으시면 나도 걸을 수 있다, 나도 걷고 싶다. 이런 거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요.
그다음에 그래서 저희들이 항상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 길을 따라서 걷고, 이럴 때 중요한 게 시선을 주님에게 고정해야 된다. 이런 원칙을 베드로가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았을 때는 몇 초인지 모르지만 주님을 봤을 때는 물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봤을 때는 빠집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처럼 행할 수 있는 거죠. 주님처럼 행하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계속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것. 그런 예를 들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이렇게 보면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저희들이 집사모임 때 그런 책들을 읽었는데, 그중에 하나의 아마 그런 '생명력 넘치는 교회'인가 하는 책을 읽을 때 그런 대목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많은 성도들을 만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만날 것이고, 모세도 만날 것이고, 또 베드로도 만날 것이고,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교제할 때 저희들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냐면 주님의 재림이 굉장히 가까운, 항상 말세지만 항상 그 마지막 때를 살고 있죠. 이게 여러 가지로 위험한 때이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성경이 완성돼 있습니다.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들이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서 입증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에서 그렇게 나왔는데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교회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이 은혜의 시대, 성령시대, 교회시대를 알지도 못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저희들 보고 "교회로서 생활하였을 때 어땠습니까?" 이렇게 물을 거라고, 또 어떤 분들은 정말 교회 진리가 완벽하게, 교회에 관한 성경의 여러 가지 말씀들이 거의 실현되고, 우리 앞선 세대 가운데에서 싸우고, 예를 들면 정말 루터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하고 그 이후에 그 진리를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 순교하고 했던 많은 진리들이, 피로 저희들에게 전달된 많은 진리들이 있고, 또 앞선 모임 형제님들에 의해서 교회의 세대에 관해서,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는 우리들에게 질문을 하겠죠. "그 많은 진리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모임 생활을 했을 때, 어땠습니까?" 라고 질문을 받을 것이고, 그때 우리들이 교제할 수 있는, 우리들이 성경이 완성돼 있기 때문에 가졌던 놀라운 축복들, 그리고 니골라당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세,운 성령께서 세운 장로들에 의해서 인도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은사를 따라 섬기고, 그 지역 모임 가운데서 성령 인도하심을 받았던, 이 놀라운 축복들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고, 특권에 속한 것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교제할 것이다.
이렇게 책에 나와 있는 것을, 책을 찾아보니까 책이 옛날에 봐서 어디로 가버려서, 하여간 그런 느낌을 제가 받았던 책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정말 저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영적인 삶이 얼마나, 예를 들면 복음에 대해서 그렇죠? 구약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자기들이 예언을 했지만 그 내용을 알지를 못했던, 그러나 그 복음으로 구원받아서 모임을 이루고, 주님이 그 가운데 주인이시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영적인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간증을 해줘야 됩니다. 그와 같은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고 하는 걸 느끼게 되고 정말 저희들이 주님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이 그렇게 쓸 것 같으면 주님을 보면서 그 길을 걷는, 그그러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만 그렇게 하고 아는 사람들은 아닌 거죠.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구원분별을 어떻게 하느냐?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게 이제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준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는 거 아니다. 이게 이제 명백한, 굉장히 명백하고 뭐랄까 엄숙한 그런 말씀으로 생각이 됩니다. 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