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모임 성경읽기/요한일서 성경읽기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7절

박이레 2026. 7. 7. 22:16

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7절 / 마포모임, 20년

- 이병호 형제님 사회 : 예, 오늘 요한일서 2장 7절 말씀 진도 나갈 차례인데요.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도 그런 문맥의 흐름을 살피기 위해서 2장 3절부터 11절까지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3-11).

저희가 7절 말씀 오늘 교제를 할 건데요. 저희가 지난 시간까지 어떻게 보면 1장부터 이어서 계속 구원의 참된 증거가 무엇인가, 이런 부분들을 계속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주님 안에 거한다. 또 주님과 사귐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주님을 닮아 있지 않고 주님처럼 행하지 않으면 그거는 가짜다, 이런 부분들이 계속 교제가 되어진 것 같습니다.  그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아니라 그런 구원의 증거, 또는 어떤 그런 합당한 열매들, 이런 것들이 중요하고 그런 것들이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게 해준다. 이런 부분들을 계속 살펴보고 교제가 나눠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7절 말씀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이 호칭은 요한일서에 처음 언급이 되지만 사실 3장, 4장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호칭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요한사도가 또 친근하게 이렇게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 교제가 되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새 계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한 가지 생각하는 부분이 흠정역이나 또는 원어 성경도 이렇게 많이 살펴보시면서 그 단어 의미들을 많이 살펴보시는데요. 3절, 4절에서도 계명이 나왔습니다. 거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어졌고, 여기 7절에서 새 계명, 또 옛 계명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단수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새 계명, 옛 계명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는 이제 7절, 8절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런 전체적인 문맥상 이 계명이 무엇인지 교제가 되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옛 계명과 세 계명, 이 한 계명이 무엇인지 교제가 되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옛 계명을 처음부터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처음은 언제를 말하는지, 이런 부분들 교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고, 또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부분들이 교제되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형제님들 묵상하신 내용들 2장 7절 말씀, 그러면 또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형제님 1 : 예,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형제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의를 좀 환기시키고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는 새 계명과 옛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 말씀하신 것처럼 새 계명과 옛 계명이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그 말씀을 좀 강조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 계명과 관련해서는 3절하고 4절에 계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3절과 4절에는 영어로 보면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명들'로 되어 있고 여기 7절에 나오는 계명은 7절, 8절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주셨던 그 계명들과 새 계명은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새 계명이라는 것이 모든 것, 그전에 말씀하셨던 것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라는 그런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여기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요한일서 저희가 공부한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돼 있고, 또 요한사도께서 쓰신 요한복음 일장일자리도 태초와 관련된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세계명과 옛계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부분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동일한 것이었고 옛것이나 새것이나 구별되는 것이 없이 항상 한결같은 말씀을 하셨다라는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 계명과 옛 계명을 나눠서 말씀하신 이유는 요한일서의 서신을 쓰시게 된 게 영지주의자들, 또 거짓 교사들의 어떤 잘못된 주장이나 잘못된 어떤 실행에 대한 내용들과 관련돼서 쓰신 것이고,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예를 들어서 구원을 받았으면 더 이상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마음껏 살아도 된다라고 하거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은 다른 것들, 뭔가 사람들이 현혹될 만하고 좋아할 만한 어떤 새로운 것들을 자꾸 이야기하면서 이게 새로운 계명이고 새로운 것들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그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없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썼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여기서 말씀하셨던 새계명과 옛계명으로 나눈 것은 옛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에 말씀하셨던 율법하고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고요. 거기에 내용에 보면 신명기 6장 말씀해 보면,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나오고요. 그리고 레위기 19장 말씀해 보면, 18절부터 살펴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쭉 해서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할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한 계명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 또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말씀하셨던 내용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43절에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픽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관된 말씀은 '사랑 하라'고 하는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통해서 성경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이외의 것들은 없으며 구약부터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말씀을 계명으로 주셨다라는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살펴본다면 로마사 13장 9절 말씀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 3절, 4절에 계명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던 게 지금 7절 이후에 계명으로 나오는 것은 단수로 되어 있었던 그런 계명들은 구약에 나오는 계명들을 모두 포괄하는 사랑 안에 다 들어있다라고 하는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 최경환 형제님 : 네, 7절 말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는 새 계명에 대한 의미와 또 둘째,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하거니와" 하는 옛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에 대해서 교제 나누려고 합니다. 그 사도요한은 그 어떤 새 계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함을 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의 새로운 지식으로 변화받는 것이 아님을 또 강조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변화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시고 이루신 말씀을 믿고 우리를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새로운 진리로 변화받는 것이 또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상태가 예전처럼 머물러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 진리 안에 믿고 행할 때 날로 변화하며 또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있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 마음은 뜨거워집니다. 엠마로로 향하던 두 제자의 모습을 살펴볼 때 그들은 3년 넘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생활했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두 제자뿐만 아니고 또 여인들과 예수님과 함께했던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두 제자의 모습을 볼 때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주님은 다시금 구약의 모든 말씀들과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새로운 말씀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해 주실 때 그들의 반응이 또 이렇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은 이미 있는 그 진리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그 마음이 그 뜨거워짐을 이제 느끼게 이제 합니다. 그 뜨겁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그들은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또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지에서 나타나는 결과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있는 진리로 인해서 기뻐하며 충만함을 누리고 있는가? 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옛 계명은 너희에게 들은 바 말씀 이거니와"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 계명이 무엇인가? 옛 계명 앞전에 형제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이라고 요한일서 1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7절에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도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또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되어 있으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고요. 예수님께 친히 증거하실 때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우리로 만족해합니다. 그리고 완전합니다. 이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 됨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상태는 변하되나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견고케 인제 합니다. 주님의 그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또 친히 모든 사람의 죄가 돼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또 완전한 구원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으시고 3일,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또 500의 형제에게 나타나 증거하신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사망이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고 힘을 잃게 또 되었습니다. 이제 죄가 우리를 하나님과 떨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그 권능과 또 그 능력, 힘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부활을 통해 입증하신 그 주님을 우리는 바라보게 됩니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그 부활하신 그 능력을 우리가 볼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또 그분에 의해 부활하며 새 몸을 입게 된다는 그 사실을 또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골로새서 2장 8절과 10절 말씀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등 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이 말씀을 기억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다시금 우리 가운데 새기며 이 진리 안에 있는 그 지혜의 부요함과 또 그 능력을 알게 합니다. 이상입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호칭은 계속 요한 서신서에 보면 새로운 단락이 시작될 때 이렇게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은 주님의 복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이 호칭으로 불려지려면 주님,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또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그러한 삶의 증거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며 또 선한 영향력을 가져오는 그런 간증을 보일 때 이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호칭으로 불려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 이들은 절대로 이러한 호칭으로 불려질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죠. 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호칭 가운데 담겨 있는 의미가 저희들에게 참 복스럽게 느껴집니다.
요한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것을 이제 형제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 말하고 그것이 말씀이다,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말씀을 통해서 다 완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이룬다 하신 그 말씀대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그 사랑을 완벽히 드러내셨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된 것이며 또 수신자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받을 때 분명하게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그래서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라는 것을 사도요한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가 없어서 "너희가 들은 바"라고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그렇게 보여집니다.

- 조재훈 형제님 : 6절까지는 참으로 구원받은 증거가 순종으로 드러났는데요. 7절 이후부터는 사랑으로 그것이 시험됨을 알게됩니다. 사도는 이제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요. 그는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6절에서 "그의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라고 그는 말을 했는데요.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그와 같이 사랑하셨듯이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수신자, 항상 사랑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로 사랑하다'라는 말을 함에 있어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는 참으로 실천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요한일서에서 여섯 번 사용이 되는데요. 그 첫 번째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다'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카이노스'라고 해서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가 있고, 또 하나는 '네오스'라고 해서 그거는 시간상으로 새로운 것, 최근의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카이노스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 한 계명에 있어서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 일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9절과 10절을 이어서 본다면 그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있어서 새로운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셨듯이 구약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22장 40절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의 바로 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친히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또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도의 가르침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 이 계명에 있어서 그 내용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님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교제된 대로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의 가르침이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새로운 계명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들을 때에 그것이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이 아니었습니다. 8절에서는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또 다음 시간에 의미에 대해서 교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옛'이라는 것은 오래되었다. 그런 뜻인데요. 오래된 계명을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처음부터가 어떤 때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부연설명으로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들었다라는 것은 단순 과거형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들은 한 시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처음부터"라는 단어는 1장 1절에서 태초부터 계신이라는 것에서 나온 태초부터인데요. 그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부터"는 그들이 말씀을 들은 순간이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사도들이 들었고 이제 사도들의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은 바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고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옛 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특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는 첫 번째 여기서는 계명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후에 3장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4장에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또 사랑하는 것임을 특별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 이기범 형제님 :2장 7절에 보게 되면 지금 다 교wp가 나왔습니다. 특별히 새 계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완전히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물론 여기서 옛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딱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7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해 보게 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특별히 그 옛 계명이 구약 가운데도 나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신 부분 중에서 마가복음 12장 31절을 보게 되면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내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8절에도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질적으로 새로운, 전에는 전혀 모르던 것을 그래서 갑자기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지금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의 그 말씀을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고 또 야고보서에서도 그렇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 시간에 다시 한번 교제는 되겠습니다마는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이제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새 계명을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옛 계명이라고 했는데 왜 다시 새 계명이라 그럴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교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새 계명도 분명한 것은 요한복음 13장 34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그 새 계명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구약에 나온 나와 있는 그 내용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장 11절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래서 여기도 '처음부터'라는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고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새 계명이라는 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어떤 그런 계명이 아닙니다. 그 옛 계명은 구약에도 나와 있고 그것을 주님께도 말씀하시고, 또 신약에 여러 군데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당장 요한일서 내에도 또 다른 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옛 계명과 새 계명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시간에 보게 되면 이제 새 계명을 또 쓴다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인데, 옛 계명인데 그것은 또 저희에게 어떻게 새 계명이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물론 다음 시간에 좀 더 이게 교제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 옛 계명이 또 새 계명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약의 옛 계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저희가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가 이 구약에 나온 옛 계명을 생각하고 또 그것을 순종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거운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용이지만 그것이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옛 계명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일 때 이것이 또 새 계명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옛 계명을 저희가 처음부터 가지고, 또 요한일서 3장 11절에서는 "처음부터 들었다"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어느 순간에 처음부터 이것을 가지고 또 듣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 이상입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앞에서 다 많이 잘 얘기해 주셨는데요. 약간 다른 측면에서 좀 볼 수 있을까, 해서 좀 짧게 교제를 해보려고 합니다. 앞서 형제님께서도 옛 계명과 세계명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원래부터 동일한 말씀인데 왜 7절에서는 옛 계명이라고 했을까라는 점에 대해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인데요. 그런데 왜 하필 옛 계명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이것은 제가 인제 생각해 본 바로는 이것에 적용 대상이 되는 사람이 레위기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었을 때는 사실은 지킬 수 없는 것이었죠. 왜냐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의 옛 생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만족시킬 수가 없는 거였죠.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구약의 모든 말씀은 선생님들 다 아시겠지만 오직 주님께서만 만족을 시켰습니다.
둘째 아담, 주님의 생명만이 이러한 말씀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함으로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셨고, 또 즐거이 하셨고, 또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하나님과에 있어서 이 교제가 어떠한 장애도 없이 가능했고 기쁨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계속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러한 근거가 됨을 얘기를 했는데요. 그러한 측면에서 이것이 저희 간의 주님의 생명이 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에서 옛 개명이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좀 생각해 보게 됩니다.

- 김영권 형제님 :저는 여기 7절 보면서 그 요한복음서를 이렇게 볼 수 연관돼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유한복음 12장 49절, 50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요한사도가 이렇게 쓰면서 주님의 그러한 뜻과 또 우리 주님에 대해서 2장 1절부터 6절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고, 또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서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과거형으로 주님께서 이미 저희에게 다 걸어가시고 보이신 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또 저희가 그것과 연관돼서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요한복음 12장 부분이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부분과 같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자의로 말씀하신다고 말하지 아니하셨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하신 것을 내가 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새로운 어떤 것을 다른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주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그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본을 사도 요한 또한 여기 요한 서신서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영지주의자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이 말한, 새로 첨가한 그런 어떤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대로 순종하시고 본을 보이신 그 명령을 사도 요한이 여기에서 쓰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본을 지난 절에서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그 본을 실천하시고, 또 편지로 쓰시는 모습을 볼 때 감사가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앞에서 형제님들 교제해주신 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에 대해서 3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그의 삶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저희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7절부터 11절까지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것이 나타납니다.
특히 7절에서 저희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그래서 아까도 계속 앞부분에서는 복수인데 여기서는 단수라고 말씀을 해 주시는데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또한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순종할 것을,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저희들이 이 말씀을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 앞에서 다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만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읽는 자들에 대해서 자기의 사랑을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이제 주님께서 명하신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그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과 영적인 안녕을 위해서 이 편지를 사랑의 동기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설명을 해 주신 것처럼 "이것은 새 계명이 아니다. 옛 계명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러니까 사도가 이것을 무슨 추가로, 내가 이것을 뭔가 추가로 만들어낸 말씀이나 개명이 아니고 구약 시대부터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것이고,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너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처럼 우리는 더욱더 깊은 지식을 얻고 있다가 아니고 이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옛날부터 뜻하신 것이었고, 주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던 것이고, 그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 전하여 주는 것이다. 이건 절대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까 형제님 말씀해 주신 것처럼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때 이러한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배우고 이 말씀을 순종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조금 제가 생각이 드는 것은 보통 저희들이 사랑이라고 했을 때, 성도들을 사랑이라고 했을 때 생각이 드는 거예요. 첫 번째로는 저희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본성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희 자신만을 사랑하다가, 자신만을 위하다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다른 사람의 영적인 것들을 구하는 그러한 본성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에 의해서도 저희들은 그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첫 번째 열매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성령님을 순종할 때 제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7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좀 강조점이 그런 쪽에 강조점이 물론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제 자신에게 도전이 되는 게 뭐냐면 이것을 '처음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처음에 구원받을 때 들었던 말씀 중의 하나가 형제들을 사랑하라. 주님이 사랑한 것처럼, 정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처음 구원받을 때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보통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고 성도들을 위해서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대하고 보면 이것은 정말 갓 구원받은 성도라도 그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주님의 계명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두 가지를 반성을 해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내가 정말 이런 사랑을 정말 구원받을 때부터 해오고 있었는가? 이런 주님의 계명을 정말 내 삶 가운데 적용하고 있었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두 번째로는 정말 이런 가르침이 사도가 어린이 신자들에게 주님의 계명으로써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보게 되고 특별히 처음 구원받은 형제자매님들과 교제할 때, 혹은 갓 구원받은 성도님들과 교제할 때 이러한 부분들을 내가 교제해 왔었는가라고 딱 생각을 해봤을 때 조금 도전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면에서 또 생각이 드냐면 저희들이 바이블 리딩 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저희가 들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이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인내를 내가 듣고 너희를 칭찬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말씀을 하셨냐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이게 지금 사도바울이 정말 어떻게 보면 3주 정도, 뭐 한 달 정도 사역한 그 새로운 교회, 갓 태어난 모임이 형제 사랑으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안에 주님의 계명이 가르쳐지고 순종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딱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저희들도 이러한 정말 주님의 가르침, 정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이러한 형제 사랑이 저희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지고, 이것이 성숙한 자나 아니면 갓 구원 받은 사람이나 정말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것들이 저희 안에 이루어질 때, 참 그러한 모습들에 대해서 조금 제 개인적으로는 도전이 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예, 7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로 시작을 하고 있는데요. 사랑 받는,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그래서 이제 그들은 마땅히 사랑을 하는 것이고 또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2장 앞에 쪽에서는 그들이 자녀됨, 특별히 그 '자녀'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였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요. 또한 그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사랑을 하는 자들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말하고는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아는 것을 자랑했고, 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빛 가운데에 있다하는, 뭔가 특별해 보이는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 사랑을 받은 만큼 또 사랑을 하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기도 하고 옛 계명이기도 하는데요. 7절에서는 옛 계명이라고 말하고, 8절에서는 새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새 계명이라고 할 때는 우리 주님도 요한복음 13장에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이라고 했을 때는 단지 의문에 써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또 제한돼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제한 범위가 넓혀지고,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고 성취한 그 정도의 기준과 또한 그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의 그것은 분명히 새 계명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옛 계명이라고 할 때는 다른 것에 의해서 개정되거나, 덧붙여지거나, 그런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순수한 그 말씀대로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옛'이라는 표현을 붙여가지고 10편에 119편의 "옛 규례를 기억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런 것에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그 순수한 말씀, 그것을 옛 규례라고 말합니다. 그 옛 규례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레미야에서는 그것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옛 길"이라고 그것을 선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자랑하고 하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특별히 "처음부터 가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배웠고, 그들이 실행하고,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가운데 복을 누리고 있는 그 계명임을 옛 계명으로 말해주고 있고요. 또한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이것은 권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처음부터 들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온 권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요한 일서에 보면, 요한 서신서에 보면 이제 옛 계명인 면도 중요하고 새 계명인 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서신서에 보면 옛 계명인 면을 더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2장 24절에도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3장 11절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한이서에도 보면 5절에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절에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왜냐하면 7절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우리가 이제 사랑을 행한다고 할 때에, 또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에, 또한 먼저 주의해야 되는 것이 미혹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또한 더하거나 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그대로 행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중요하다. 옛 계명을 먼저 7절에서 말하고 8절에서 주님께서 본을 보이시고 이루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대로 행한 것을 또한 8절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우선 한 가지는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증거로 1. 첫 번째로, 말씀을 순종한다. 하나님 말씀을, 여기서 강조해야 될 것은 율법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이거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 갈까 봐, 벌 받을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이게 첫 번째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인데, 이렇게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 나온 대로 사도 요한이 추가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뭔가를 덧붙이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뜻인데요.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반대를 받고 있냐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형제를 나중에 이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 것까지 나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실행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니까 어떤 반대에 부딪치냐면 그건 덧붙인 거다. 구원은 은혜로만 받는 거다. 왜 구원받은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행동들을 추가로 요구하느냐? 라고 하는 반대에 부딪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내가 사랑하라, 서로 형제를 사랑해야 된다 라고 하는 말은 새로 이건 덧붙인 게 아니다. 지금 이렇게 방어하고 있는 거고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가르침과 그 가르침이 만들어내는 삶을 연결 안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거기 보면 어떤 시인들이 나옵니다. 김소월, 한용운, 저희들이 교과서에서 나오는 이런 시인들의 시라든지 어떤 작품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그걸 해석해 갈 때 항상 이런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건 순수한 작품으로만 봐야 된다. 작가가 어떻게 했는가는 따지지 말자.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그런데 이 시를 쓴 분이 요즘에 그러면 이 시를 쓴 분이 친일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분의 시를 교과서에 싣고 그분의 시의 아름다운 어떤 미적인 것들을 논할 수 있냐? 그랬을 때 늘 갈립니다. 이건 문학으로만 보자. 아니다, 이것은 그 시를 쓴 사람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고, 같이 봐야 된다. 이게 늘 갈립니다. 산하는 순수문학을 하는 분들은 그렇게 가고,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순수한 게 아니고 어떤 사회 경제적인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보려고 하는 게 늘 있었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보통 이렇게합니다. 어디가 우세하냐? 제가 문학 공부할 때 이 문학만으로 봐야 되는 데가 우세합니다. 문학 외적인 요소는 도입하지 말자. 이게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렇게 하죠. 그래서 보통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사상과 그 사람의 삶을 연결 안 시킵니다. 제가 굉장히 놀랜 것 중의 하나가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는데요. 저는 공자님께서 이혼하셨다고 하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공자님이 어떻게? 가르치신 분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저도 공부하다가 보면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의 공부를 하다 보면 그분들의 사생활을 부득이하게 알게 됩니다. 논문을 쓰려고 하면 그 시대를 알아야 되고, 그분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어떤 식의 영향을 받았고, 이런 거 하거든요. 대체적으로 유명한 분들의 사생활에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분이 위대한 어떤 걸 남겼기 때문에 세상에다 말 안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괜히 권위가 떨어질까 봐 그렇게 안 하는 거죠. 그래서 세상은 그 사람의 믿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확신과 그 사람의 삶을 분리시킵니다. 두 개를 연결 안 시키려고 합니다. 요즘에도 제가 뉴스를 보니까 부동산 정책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가 집을 몇 채 갖고 있냐? 딴 거 빼놓고 강남에, 이런 걸 따지면 꼭 따져야 되나? 그런데 이제 하도 이렇게 되니까 사표도 내고 그러는데 이게 연결이 돼 있습니다. 연결을 안 시키려고 하고, 결국은 연결이 돼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인이 이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 은혜와 사랑으로 내가 구원받았고, 이렇게 믿는 이 믿음이 실제 삶에서 말씀을 순종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사도 요한의 주장입니다. 가짜답니다. 아니답니다. 그러면 이쪽 반격이 있는 거죠. 아니, 언제는 믿음으로만 받는다매? 믿으면 된다고 했는데 왜 믿은 후에 삶의 변화가 반드시 동반돼야 된다고 말하냐? 라고 하는 것이 지금 요한일서의 논쟁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계속적으로 말하는 것은 삶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은 없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첫 번째, 말씀을 순종한다. 성경이 써져 있으면 그대로 순종하려고 한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구원받은 형제를 사랑한다. 이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두 번째로, 저희들이 생각해 보는 것은 이겁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복음을 전할 때 보통 이렇게 강조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구원받게 할 때는 은혜만 말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전한다. 거기다가 다른 걸 넣으면 그가 지금 행위로 구원받는 건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건지, 은혜로 구원받는지에 대해서 헷갈리니까, 일단은 아무것도 필요 없고 믿기만 하면 된다라고 복음이 나갑니다. 이 복음이 성경적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을 잠깐 바꿔보면 처음부터는 태초부터가 아니고요. 요한일서에서 나오는 처음부터는 태초부터가 아닙니다. '복음을 들을 때부터'입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하셨을 때, 그리고 주님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전할 때, 그래서 성도들이 구원받을 때, 복음을 들을 때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들을 때부터, 그들이 들은 복음이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변화된답니다. 변화되지 않는 구원은 없다를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분을 처음부터 빼버려요. 그래서 당장 어떻게 바꾸자는 게 아니고, 하여간 그런 면에서 저희들이 정말 어떤 복음 자체에 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야 되지 않는가? 성경적인 복음을 우리가 전하고 있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저희들이 저번에 말하는 대로 요한일서의 1장 8절에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다 가져갔으니까 죄 있어요, 없어요? 죄가 없어요. 그러면 그것을 긍정적인 걸로 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몇 가지 면에서 저희들이 정말 성경적인 용어와 성경적인 개념을 분명하게 해야 된다. 이런 생각이 들고요.
그다음에 또 하나는 사도 요한 자체도 저희들이 한번 그런 교제를 했는데요. 사도 요한 자체도 변화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가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사도요한을 사랑의 사도, 이렇게 말하죠. 항상 사랑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했는데, 저희들이 사도 요한이 어떤 사람이냐고 보면, 첫 번째는 그가 '우뢰의 아들'입니다. 한번 교제한적 있는데 '우뢰의 아들들', 아주 성격이 아주 그냥 천둥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잘못한 것 한 100배는 화를 내는, 그래서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자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마을을, 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이 사람들을 태워버리라고 할까요?" 이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돼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하는 표현 곧 그 5개를 골라서 그런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켰다, 이렇게 저희들이 한번 교제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도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도 주님의 사랑을 입으면 그게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그가 친히 경험하고, 그리고 이제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에게, 그 경험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시키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그런 면에서 새 계명이 아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것과 관련돼서 '옛 계명이다'라고 했을 때는 그 옛이 구약으로 가기보다는, 뭐 구약으로 가도 뭐 틀린 건 아닙니다마는, 이게 지금 그 얼마 동안 된 거냐면 사도 요한이 구원받고, 그다음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지금 이 서신을 쓸 때 가지를 대충 보면 예를 들면 길게 잡아서 한 60년 된 계명입니다. 그동안 계속적으로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의해서 입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추가한 게 아닙니다. 말씀에 덧붙인 게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부터 복음이 전파되고 믿을 때부터 계속 전해졌던 말씀입니다. 이게 뭐냐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 두려워서가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게 그들이 들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전했지 않냐? 그리고 그렇게 믿었지 않냐? 그래서 실제로 그와 변화가 있었지 않느냐? 그런데 왜 이 말씀이 공격받아야 되느냐?" 이게 지금 현재 7절, 8절을 넘어가면서 사도 요한이 싸우고 있는, 말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라고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예 이상입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오늘 7절 말씀 교제 했습니다. 세 계명, 옛 계명, 이것이 한 계명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서 교제를 했는데요. 이 교제를 인도해 주시고, 또 오늘 이런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