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2장 4절 / 마포모임, 20년
- 사회자 형제님 :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일서 2장의 4절 진도를 나갈 차례입니다. 네, 먼저 제가 2장 1절부터 6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1-6).
저희가 계속해서 요한일서를 배우면서 사도 요한께서 영지주의가 가득한 가르침의 위험이 있는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특별히 1장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이제 특별히 사귐에 대해서 교제를 나눴는데, 그 사귐이 누구와의 교제인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며, 어떤 사람이 그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배웠고, 2장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하시면서 또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서 쓰셨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저희의 대언자이시며 또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여기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일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3절을 통해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사하신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주님을 아는 사람, 주님을 경험하고 그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적용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하신 주님을 아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그러한 자인 것을 말씀하셨는데,
오늘 진도를 나갈 4절에서는 3절과 반대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저를 아노라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 그런 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시는데요. 그러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말하는 자에 대해서는 요한일서의 여러 군데가 나오는데, 저희가 이미 배운 1장에서도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군요. 또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는 또 8절에서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렇게 설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런 이 나왔던 교제됐던 부분들하고도 같이 이제 교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러면 형제님들 가운데서 묵상하신 부분, 4절에 대해서 묵상하신 부분 자유롭게 교제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예, 4절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저희가 3절 말씀을 살펴봤는데요. 이 3절부터는 그리스도인 성도의 순종의 방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에 "계명을 지키고", 5절에 "그의 말씀을 지키고", 6절에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순종의 방법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는 '말하고'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고'라고 하는 게 말하고로 표현되어 있는 게 6절, "또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이게 저 안에 거한다 말하는 이런 뜻이고요. 또 9절에도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며, 하며가 '말하'며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노라, 주님을 아노라" 라고 말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주님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주에도 살펴봤는데,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말씀을 지키게 된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통해서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고 주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교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저를 아노라 말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행동으로, 또 그의 말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자인지, 아닌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들을 살펴볼 수가 있고요. 지금 저희가 1장부터 요한일서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들을 나타낼 수도 있고 그렇게 하게 되는 것에 대한 근거가 1장 3절에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래서 사귐이 저희 교제이며 구원이라고 저희가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주님의 뜻을 따르고 그 말씀과 그에 따른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는 곧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와의 사귐이 근거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해서 저희의 신분과 상태를 모두 가능케 하는 것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라고 하는 것들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게, 또 행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되는 것들이고, 4절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그리스도인은 그 말과 행동으로 그가 주님을 알고 구원받은 자라는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 전효진 형제님 : 예, 3절에는 '하나님을 안다' 말하는 사람이 그 '삶'을 통해서 그 안다는 것을 입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4절 말씀에서는 말로는 안다. 그렇게 말을 하는데 삶에서는 전혀 나타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한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형성을 했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계명에 반응하는, 반응해서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겠죠.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이 그냥 죄를 가볍게 여겨서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진리는 그 속에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이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죠. 진리라는 게 말만 그럴듯하게 주장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또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얘기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의 삶에서 그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가 나타나고 있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게 참 힘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은 믿음에 대해서 거짓말쟁이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사도는 그래서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그런 사람이라면 실제 삶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게 정상인 거죠. 그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의 어떤 사상처럼 머리로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이 우리들의 전 인격이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마음 가운데 최고의 자리에 모셔드리는 것을, 그것이 바로 이제 주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를 믿는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래서 이 생명의 그러한 속성이 삶 가운데서 드러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것을 보아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주님의 자녀구나.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꽃 같은 걸 이렇게 키우기를 좋아하는데 원가지를 잘라내고 거기다 접붙이는 그러한 일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면 접붙인 새 가지에서 새로운 열매가 맺히는 거죠. 그런데 간혹 가다가 접붙인 가지에서 새 가지가 안 나오고 그냥 원가지가 자라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덧붙이기에 실패한 거죠. 그것은 원하는 그러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보통 수박 같은 것도 접붙일 때 보면은 박뿌리에다가 원가지에 접을 붙이는데 수박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접붙이기가 잘 안 되면 그냥 박넝쿨이 잘 납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있지 않다면 본래의 성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민의 성품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술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한다고 해도, 실제의 삶에서 주님의 속성을, 그 성품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거짓말쟁이인 것을 이 또 4절 말씀이 분명하게 선언을 해주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상입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예, 아까 형제님께서도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 해서 이제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과 그가 하는 행동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안다고 이제 말을 하는데 저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안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안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고, 정말로 친밀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제 저를 안다고 이제 말을 했는데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 2가지는 이제 모순되는 것이고 그리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고요. 지난주에 3절을 통해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해서, 아는 것과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3장 24절에도 보게 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해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는 것이고, 또 거하는 것이고, 또 뭐 저희가 그 다음 주에 5절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고 이제 나와 있는데,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저희가 이제 많은 것을 갖다가 저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고, 또 저가 그 안에 거하고, 이런 것들을 저희가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이제 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해서 2가지로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이 '거짓말한다'라는 것은 저희가 1장에서도, 6절에도 거짓말이라는 것이 나오고, 10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제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거짓말을 하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하고 이제 양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거짓말하고 하나님은 양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다고 말은 하지만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양립되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거지요.
그리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라고 했을 때, 이 진리는 저희가 이제 요한복음을 참조해 보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라고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하고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런 모순을 보여주는 자는 사실 하나님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고, 우리 주님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고,
아까 제가 잠시 찾았던 그 3장 24절에는 그 '생명'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쉽게 말해서 그 생명 되시는 그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안다고 말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만약에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계가 없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안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저희가 지난 시간에 3절에서 했던 것처럼 이게 항상 이게 함께하고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저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형제님 1 : 네, "저를 아노라 하고" 라고 나와 있는데요. 이 3절에서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가" 완료형이었듯이 여기서도 '아노라 하고'가 완료형 시제로서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들이 알게 됐다고 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하는 그것을 뜻하고, 저번에 저희가 교제할 때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주장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저희가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님께서 아까 "말하고"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4절, 6절, 9절에 말하고, 말하는 자는, 말하며, 이 부분이 나와 있는데요. 저희가 요한일서 1장에서도 6절, 8절, 10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고", "만일 우리가 죄없다 말하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면" 여기서도 이제 '말하면'이 3번 등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쓰인 말하면의 원어를 볼 때 에포라는 단어로 주로 이게 개인적인 어떤 표현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그런 원어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2장, 4절, 6절, 9절에 나오는 여기서의 '말하고'는 이제 레고라는 원어로 이것은 개인적인 표현보다는 계획, 주장 등을 잘 정리해서 제시하는 것, 체계적이고 틀이 잡혀 있는 담화를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희가 다시 그 1장 6절, 8절, 10절을 2장 4절, 6절 구절과 비교해볼 때 1장 6절, 8절, 10절에서는 "만일 우리가"라고 말하면서 저자인 사도 요한까지 포함을 시켜서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있었는데요. 여기 이제 4절, 6절, 9절을 보게 되면, 4절에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리고 6절에서 또 "말하는 자는", 9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렇게 해서 이제 1인칭 시제를 사용을 해서 어떤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자나 거짓 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짜임새 있고 정리된 말과 혀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을 했지만, 이들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라 라는 말씀을 보게 될 때 이 동일한 표현이 요한일서 1장 8절에도 나오는데요. 이 부분을 저희가 공부했을 때 한 형제님께서 이 부분을 요한일서 5장 7절에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제 진리가 그 속에 없었을 때, 자신에게 죄의 본성이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이제 죄를 비추고 죄를 책망하는 진리가 없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 이제 2장 4절의 진리가 그 속에 없을 때를 보게 될 때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속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선한 것을 행하고자 하는, 그런 것을 공급하는 진리가 없음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희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보게 될 때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은 이렇게 저희가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또한 선을 행하게 도우시는 진리를 하나님께서 저희 안에 거하게 하신 것에 감사가 되었습니다.
- 조재훈 형제님 : 방금 형제님께서 1장 6절, 8절, 7절과 그리고 2장 4절, 6절, 9절에 "말하고"와 또 그 문장에서의 차이를 잘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래서 1장에서는 "만일 우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특징,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고백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을 제시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을 발견하고 또 그와 같이 계속 사귐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쁜 가운데 계속 교제를 해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와 같이 이미 말하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을 지목해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반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노라"라고 하는 것은 완료 시제로 돼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계명을 지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지키지 아니한다"라는 단어는 현재형으로 돼 있습니다. 몇 번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삶을 보았을 때에 그의 삶 속에서 계명이 소중히 여겨지고, 또 그 계명을 지키려 하고, 또 그와 같은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된 대로 그의 입술의 고백과 그의 행함이 모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순종이 그 특징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람은 불순종이 특징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장 6절에도 거짓말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거짓말을 한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고요. 여기서는 명사로 거짓말장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그의 한 말이 거짓말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볼 때에 그 사람은 거짓말장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회에서는 거짓말장이가 아닐 수는 있겠지만, 진리의 부분에 있어서는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그가 거짓말장이인 것은 그가 진리를 안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마귀에 대해서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귀는 그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래서 진리에 있어서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 또한 거짓말장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아비 마귀에게서 난 자들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내 안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특별한 진리를 알고 있어." "나는 특별한 진리를 깨달았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6절에서는 "나는 저 안에 거하고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고 또 "나는 빛 가운데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또 더 점진적인 부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 그러한 진리가 있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진리는 그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진리가 그 속에 있었다면 진리는 그들의 마음과 또 중심과 생각 가운데서 좌정해서 그들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진리에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순종치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요한사도는 2장에서 분명하게 영지주지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생각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이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 '저를 아노라 하고'는 구원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상관없이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라는 것이 계명을 완벽하게, 완전한 수준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그런 것을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과 정반대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그리고 또 이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라는 말은 자신을 자랑하는 그런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의 특권을 나타내는 그런 것인데요. 이 사람은 이것을 자신의 실제 신분과 상관없이 자랑하는 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해 주신 대로, 여러 가지 이론을 사용해서 자기가 어떤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발언들을 보면 전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특별하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죄가 없다, 범죄하지 않았다, 저를 안다, 저 안에 거한다, 빛 가운데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죠.
물론 이 중에 "알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거하고", "빛 가운데 있다"는 이런 말들은 정말 복된 구원의 특권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것을 다시 그런 말들을 교정해서 그것은 정말 이 구원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다시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교만한 말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또한 교만하며, 또한 세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이게 아까 이제 요한복음 8장에서도 마귀에 대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거짓말장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는 게 이제 마귀입니다. 마귀에 속한 자들이, 마귀가 아비인 자들이,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이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온 그 사람들을 보면, 그 유대인들은 정확히 주 예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은 주 예수님에 대해서 "사마리아인이다. 귀신 들렸다." 주님의 말을 전혀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제 짓말장이다라는 말을 보면, 다른 데도 살펴보면 둘 중에 한 사람이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장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거짓말장이거나, 그러니까 그 거짓말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대적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그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그의 정체들을 정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거짓말장이고 그리고 그들의 속에는 진리가 있지 않음을, 그들의 속 상태도 이런 말과 행동으로써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박성호 형제님 : 앞서서 형제님들이 요한복음 8장을 통해서 이제 얘기를 해 주셨는데요. 요한복음 8장 40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0절의 말씀과 요한일서 2장 4절의 말씀이 굉장히 유사하고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를 아노라' 하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그 모습은 이때 예수님께 나왔던 유대인들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제 8장 33절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라고 얘기를 하고요. 또 39절에서는 "우리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라고 얘기하고, 41절에서는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해서 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아노라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짓말장이고 마귀에게 속한 것이고, 그러한 것들을 공박을 하셨는데요.
이러한 예수님과 그러한 바리세인들의 어떤 모습이 이 사도요한 때 반복되는 것을 저희가 볼 수 있습니다. 바리세인 요한복음 8장의 상황이 특별히 좀 율법에 대한 것, 유대교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요한일서 2장은 영지주의자, 그리고 도덕 폐지론자들, 또 그런 상황과 오버랩이 되고요. 또 교회사를 통해서 저희가 계속 예전에 말씀드려왔지만 완전주의 성화론자는 이런 사람들과 또 반복이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시대든지 간에 이러한 거짓의 어떤 도전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랬을 때 바리새인이건, 영지주의자건, 아니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성화론자들이건 간에, 그 사람들의 영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건지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무리 말을 현란하게 말하고, 자신의 경험이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고, 그럴지라도 유일한 기준은 그 사람들이 말씀을 삶에서 지키는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의 모습을 저희가 잘 알게 되는데요.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푸시건, 또 영광을 받으실 만한 그런 일을 하시건 또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치시건, 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나가실 때도 공통적으로 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뜻대로 말하시고, 하늘에서 난 것을 얘기하고,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한다라고 하시고, 이렇게 이러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그러한 자, 그다음에 그러한 가르침이 정말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온 거다라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또 이제 사도 요한이 말년에 이러한 교훈을 성도들에게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런 교훈을 하셨을 때 사도 요한이 어린 제자, 젊은 제자로서 이것을 지켜보고 들었을 텐데요. 그의 말년에 또 이러한 그 교훈을 이제 저희들에게 또 경계로 주시는 걸 보면서 사도 요한께서 참 그 삶 가운데서 주님을 닮는 그런 모양을 닮았구나라는 그러한 것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 김회상 형제님 : 예, 지난 시간에 3절 말씀하고 대비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3절에서는 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4절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거듭나지 않는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이 그 3절에서 배운 것처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순종하고 있다면, 그의 삶이 그게 특징이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희들이 계속 저희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 말씀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순종하고, 그것을 불순종했을 때 슬퍼하고 회개하고 이러한 모습들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많은 사람이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정말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세상적인 지식, 이런 거하고는 정말 다르다고 이제 생각이 됩니다. 저희들이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정보를 정보나 지식을 정말 내 머릿속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참된 신앙은 여기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그냥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친해지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점점 알아가고, 이제 이런 것이 참된 신앙이고 그렇게 됐을 때 정말 하나님을 알았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을 때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정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이제 4절에서는 이 사람은 말은 계속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 말을 굳이 인용한다면, "나는 더 하나님을 잘 안다. 하나님을 깊이 안다. 하나님을 높은 수준으로 안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귀하게 여기거나 순종하거나 하는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나타났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의 당연한 영적인 실체는 그런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않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 아까 앞에서도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여기 1장 6절 말씀하고 비교가 됩니다. 1장 6절 말씀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다. 이것은 어떤 행위를, 그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는 거라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행위를 하고 있고 진리를 행치 않는 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더 심각합니다. 4절에서는 그 사람이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도덕적인 실체가 그 말 자체가 다 거짓말하는 사람이고, 그 영적인 또 실체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죠. 이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더 높은 수준으로 알고, 깊이 알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앞에서 말씀하셨는데요. 정말 내가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영적인 어떤 높은 수준의 진리를 깨닫고 있다라고 얘기하지만, 실상은 그거 그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제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그 실체를 이 말씀 4절을 통해서 저희들에게 교훈해 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잠깐 이 구절에서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구원의 확신을 알 수 있는가?' 이게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교만하다. 죽어야 알지.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알지. 어떻게 지금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불완전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게 참 문제인 거죠. 구원받았다고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첫 번째, 그가 복음을 듣고 이렇게 믿을 때, 복음을 듣고 복음이 말하기를 죄인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죄를 용서해 주셨고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쭉 따라오면서 "주님, 제가 믿습니다."고 할 때 자기가 구원받았단 걸 압니다. 그래서 믿음 속에, 믿는다고 하는 행위 속에 확신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돌이켜 보면서 처음 복음을 듣고 믿을 때를 생각해 보면서 '아, 이게 구원받았다.' 이렇게 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저희들이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마는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알 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잠깐 또 딴 이야기를 하나 하고 오면, 그다음에 "개인이 그가 자기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 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예를 들면 베드로 후서 1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씀을 썼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고린도후서 13장 쪽에 가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길을 가야 된다. 이게 성경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런 이런 질문인데요. "본인이 알 수 있는 거지, 교회가 분별할 수 있냐?" 본인이 아는 거지,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구원을 분별하느냐? 이런 도전이 늘 있습니다. "교회가 그걸 분별한다고? 본인이 구원받았다고만 하는 거지. 왜 당신들이 아니라고 하냐?" 그런데 이제 이런 도전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이게 요한일서에서 계속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지금 요한일서를 쭉 저희들이 1장 해보면, 1장 1절부터 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게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게 사도 요한이, 사도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동일한 교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가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2장 저희들이 다루고 있는 2장 2절까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죄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영혼은 구원받았을지라도 우리의 몸이 육체가 아직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완전합니다. 자, 이런 상태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이 상태로 두셨는데, 어떻게 말하는 사람이 있냐면 "나는 죄 없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랬을 때 두 가지 태도입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끝났는데, 뭐.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됐는데." 이렇게 하면서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하지 아니하고, 이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 끔찍한 벌을 대신 받으셨는데 그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경우죠. "나는 이제 죄가 없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 그래서 죄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인지,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인지 분별해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느냐, 구원받은 후 죄에 대해서 어떻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
그다음에 세 번째가 이제 저희들이 2장 지금 3절부터 쭉 다루는 내용이죠. 그다음에 세 번째 '삶'을 보면 압니다. 그의 일상적인 삶을 보면 그가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않았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제 삶에 대해서 나오는데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은 주님께 가셨는데요. 벤쿠버 캘거리에 계셨던 오의균 형제님이 이분이 암에 걸렸어요. 그래가지고 병원에서 간암이다. 그리고 생존 기간이 예를 들면 6개월이다. 이렇게 딱 진단을 받은 거예요. 그리고 치료가 불가능하다. 이제 이와 같은 진단을 받았을 때, 자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죠. 무슨 증상이 있었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긴 거죠. 그랬을 때 자기가 아는 거예요. 자기 마음속에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선고가 있을 때 자기 마음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기가 아는 거죠. 그런데 그랬을 때 자기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공포,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죽어선 안 돼. 이게 아니고 내가 주님께 가는구나. 내가 믿은 대로 이제 내가 주님 얼굴을 뵙는구나. 물론 죽음이 섭섭하지 않다든지, 이런 인간적인 감각이 전혀 없다는 게 아니고, 그의 중심 속에 주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천국에 대한 소망과 이게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자기 구원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걸 보고 그 형제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사가 그와 같이 말했을 때 내가 뭘 알았냐, 내가 구원받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구원받았던 거 알죠. 그래서 침례까지 받고 모임생활 하셨죠. 그런데 다시 한번 죽음 앞에서 삶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자기가 삶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고, 그 선택을 하면서 자기가 아는 겁니다. '구원받았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가 주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두 번째입니다. 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그다음에 그가 그의 삶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세 가지를 지금까지 이 세 가지가 나온 겁니다. 이걸 가지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또 내가 구원받았는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구원을 알 수 없다. 죽어 봐야 안다." 그러면 복음 못 전합니다. 복음을 전할 길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구원은 자기가 아는 거지. 누가 제일 잘알겠나." 물론 본인이 제일 잘 알죠. 그래서 본인의 간증을 존중히 여기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합니다. 제가 모임 생활하다가 어떤 어려움이 있었냐면 교회에서 침례를 줬어요. 구원받았다고 해서 쭉 조사해보고 침례를 줬어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징계해야 될 죄를 지었어요. 그래서 교회가 징계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 구원 안 받은 것 같아요." 구원 안 받았대요. 그러니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징계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갑자기 그 사람이 구원 안 받았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요. 구도자로 놓고 그다음에 구원받도록 기도했어요. 그랬는데 나중에 또 보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했더니, 구원받았대요. 그러면 언제 구원받았냐? 그랬더니, 과거에 구원받았대요. 그래서 모임이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면 이 형제가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구원 안 받았다고 했는가? 그런데 형제가 뭐 그러지는 않았을 거고, 이제 뭐 저기 나이가 많은 형제도 아니고 청년이고, 또 순수하고, 또 평소에 하는 것도 보면 순진하고, 그래서 막 그렇게 머리를 쓸 형제는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유지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말만 듣고 이렇게 구원을 이렇게 맡길 때 이제 어려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들이 요한일서를 다루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구원은 알 수 있답'니다. 그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후원받는지 알 수 있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는 그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본인이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게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
그래서 전번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알다'라고 하는 단어가 참 성경은 그런 거 보면 참 기이합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과연, 알다라고 하는 단어가 주관적으로 알다는 단어가 있고, 객관적으로 알다는 단어가 있고, 단어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말은 다 안다지만, 이게 헬라 원어가 다릅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안다라고 하는 단어가 7번 쓰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라고 하는 알다라고 하는 단어가 7번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떠어떤 구절은 주관적으로 안다. 그것들을 쭉 형제님들이 쭉 말해 놓은 거죠. 그래서 내가 주관적으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가 구원받은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게 요한일서가 계속 말해 가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고요.
그다음에 이제 주님께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어떤 씨는 이렇게 어떤 땅에 어떤 밭에 뿌려져서 처음에는 싹이 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걸 해석하십니다. "말씀을 받고 기뻐하다가" 말씀을 받고 기뻐해요. 그런데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말씀을 받고 기뻐했을지라도 그게 아닌 거죠.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고요.
그다음에 여기서도 나옵니다. 요한일서에서도 사도요한이 "어떤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가" 나갔습니다. 나갔어요. 물론 사도여야 합니다마는 하여간 이렇게 사도요한과 같이 교제하는 그룹에 있다가 나간 거예요.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나간 것은 처음부터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받지 않았는데 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못 견디고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나간 것은 그냥 나간 게 아니고, 뭐 이렇게 따로 그룹을 만든 게 아니고, 원래부터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담대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거짓말'에 대해서는 아까 계속 나왔습니다마는 이 "거짓말쟁이요." 이 단어를 볼 때 저는 어떤 구절이 떠올렸냐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백보좌 심판대에 심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심판받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진리가 그 가운데 없다"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계속 말하는 대로 주님을 아는 지식은 이론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제 스님들이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온갖 인연을 끊고 산속에 딱 들어가서 이 질문을 합니다. 스님들이 하는 이 한 가지 생각만 하거든요. 생각하는 것을 보통 '화두'라고 합니다. 이걸 딱 주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화두가 우리나라는 경상도 스님들이 많아서 그런지 굉장히 대표적인 화두가 '이먹꼬'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이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 계속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딱 깨닫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겁니다. 이 세상이 뭔지를 딱 깨닫는 거예요. 이게 득도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다가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는 것이 불교에서 득도하는 것입니다. 구분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내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거하고, 구원받으려고 성경을 보다가 '오! 이거구나.' 하는 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이게 그래서 '안다'라고 하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진리의 문제를 보면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왕이냐?"질문했죠. 주님이 이렇게 대답했죠. "내가 왕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위하여 왔다. 그리고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우리의 어떤 세계관, 견해를 바꾸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가 그 사람의 생애를 바꾸지 못했으면 이건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진리는 그를 변화시키는, 그를 주님을 닮는 쪽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귀중한 말씀이고 나를 위해서 피 흘리시면서 알려주신 말씀이고 그래서 그 말씀을 붙들게 되는 이와 같은 변화를 동반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특별히 요한사도는 저희들이 아는 대로 회색지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입니다. 가운데 지대는 없답니다. 그래서 이제 아주 단호하게 그런 것들을 말해가는 이런 구절들 앞에서 저희가 정말 저희 자신이 구원받은 후에 정말 성도답게 살고 있는가, 이 말씀들이 정말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이렇게 도전하고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 이상입니다.
- 사회자 형제님 : 예, 교제에 참여해 주신 형제님들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진도를 요한일서 2장 4절까지 나간 것으로 하겠습니다. 한 분 선생님께서 오늘 주신 시간에 대하여 감사드리심으로 오늘 집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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