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은사, 오늘날 성령님의 사역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3일
안녕하세요. 히브리서 10장 말씀을 펴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군데 성경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에 이렇게 많이 성경 말씀을 보통 찾지는 않는데요. 특별히 오늘 주제와 관련돼서는 여러 군데 성경 말씀을 찾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특별히 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빈번하게 또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성령님에 대해서 모욕하는, 이제 그런 아주 엄중한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28절과 29절에 이제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사실 이 현대의 움직임과 또 구체적인 면에서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것이 다른 점이 있겠지만 사실 그 중심 사상은 여기 나와 있는 것과 똑같이 오늘날에 많은 종교인들이 이제 '은사주의'라는 것을 통해서 이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은사들, 방언과 병을 고치는 그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실제로 통계상으로도 오늘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20-25%가 이 은사주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수의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제 이 은사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그것을 '오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은 성령의 침례를 기다려야 되고 그것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며, 그리고 "당신이 그 성령의 침례를 받는 순간 당신은 방언을 함으로써 자신이 성령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음 전하는 것은 그와 같은 표적과 기적적인 일로 함께 동반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또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받는 계시들을 말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교회가 된다면 이제 그 교회의 집회는 눈물로 가득 차거나 또한 웃음으로 가득 찰 거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이 구원을, 또는 예배드리는 것을 이제 육체적으로 자기들이 어떤 느낌과 감정으로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아주 위험한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각 구원받은 어린 성도들에게 "만약 당신이 그와 같은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라고 잘못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이고 그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모욕'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고 또한 성령님을 합당하게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29절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교제가 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은혜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간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은 분명히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요즘의 트렌드에 이러한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되돌려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지가 하나님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이제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잘못된 불을 드림으로써 그가 죽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하나님의 예배를 손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만찬만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집회 가운데 하나님께 사실상 예배를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말미암아 됩니다. 저는 특별히 그 구절을 좋아하는데요. 그것을 한번 자세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성령님을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영이신 분이고, 그것과 대응되게 우리는 영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속 사람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그 안에 있는, 우리의 내적인 영으로부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외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겉모습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적인, 우리 안에 진실된 우리의 속 사람, 그 영이 드리는 것입니다.
잠깐 여러분에게 아마도 흥미 있을 영어 수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sincere'라는 영어 단어는 두 개의 라틴어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앞에 나와 있는 이 'sin'이라는 것은 '외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cere'는 '왁스'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제 '위드 아웃'이라는 것이 이제 밖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런 것이 없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sincere'라는 것은 이 '진정한'이라는 것은, '왁스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 고대의 동전들을 보면 이 동전이 정말로 그거에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그 은으로 순수하게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껍질을 벗겨 보았습니다. 그 동전 내부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왁스를 채워놓고 덮어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화를 빛에 비추어 보면 거기 안에 구멍이 뚫려 가지고 왁스로 채워져 있는지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순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은전은 그 안에 왁스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진정함'이 그 단어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거짓이 없는, 순전한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순전한 내적인 '영'으로, 그리고 또한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계시한 이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이 성령의 은사 중에 세 가지, '방언'과 '예언'과 그리고 '기적 행함'을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이제 세 가지 관점이 있는데요.
첫 번째로는 '그것이 계속되는 거다'라고 주장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여기 신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도 사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참 그것을 표면적으로는 듣기에 성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성경적인 거라면 우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문맥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약 시대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기적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 시대에 이제 어떤 사람들은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걸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날도 그와 같은 기적을 보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계속 당신이 기도하라고 격려합니다. "당신이 기도를 열심히 하면 당신은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들은 이와 같은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놀라운 일들이, 기적들이 함께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점은 그들은 이것에 대해서 약간 주의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또한 '개방적인 내용'을 말합니다. 오늘날 그 은사주의 운동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살펴보게 될 때에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지금 그런 은사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비상식적인 일들이 말이 안 되고 성경적이지 않다고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없는 걸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태도를 봤을 때는 아주 겸손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역시 이 교리적인 잘못을 그들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다른 점을 존중해야 되지만 우리는 성경적인 교리를 굳게 붙들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특별히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배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두 번째 의견은 많은 폐해를 주고 있는 그런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관점은 중단된다, '어떤 은사들은 멈춘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지하다', '그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참 저는 이 단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에 있어서 이러한 말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말 자체는 굉장히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장려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제 부정적으로 이제 막는 그런 느낌을 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제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그것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단되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성령께서는 그 놀라운 은사들을 다 주셨고 역사하게 하셨지만, 이제 그 기초가 다 닦여진 후에 아마도 첫 번째 1세기나 늦어도 2세기까지 그것은 다 사용이 되었고 이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중단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기적적인 은사', 이 '표적의 은사',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 이런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깐 아마도 제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저는 마지막에 이 성령의 은사, 기적적인 은사가 중단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저에게 이 앞에 두 가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메튜씨, 당신은 성령님을 당신의 생각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당신은 너무 모르고 있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러면 성령께서는 지금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이 시대에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50년 전에 캐나다의 수양에서 만났던 한 유능한 교사 형제님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복음 사역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중요하게 명심해야 되는 것은 바로 '이 성령님의 역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어느 지역에 방문하든지 간에 이 오순절파, '은사주의'의 그 악한 결과는 어디에서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조심해야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사에 중단된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이제 사도행전에서 몇 군데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입니다. 여기서 몇 군데의 말씀을 읽을 텐데요. 특별히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사도', '사도들'이라는 표현에 집중해서 표시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8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것은 사도행전의 목적에 대해서 아주 잘 요약해 주는 한 말씀입니다. 이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어디까지 전파되는지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는 그 땅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은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가택 연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가 읽은 이 1장 말씀을 실제적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2장 41절과 43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1-43).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 5:12).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침례를 받으니"(행 8:5-12).
특별히 여기에 이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전하는 복음과 함께 많은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9장을 가겠습니다. 19장 11절과 12절에 또 다른 한 예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1-12).
이건 참으로 놀라운 그런 기적이 행해진 것입니다. 제가 손수건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놀라운 것은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주 중요한 우리의 본문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19-20).
우리는 여기서 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지금 당장 말하는 그들이 직접 받는 계시를 더 중요시하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그들이 지금도 예언을 직접 받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이 성경이 완성돼 있고, 이 성경이 충분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완성된, 이 전경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래서 이제 사도들이 모두 그 사역을 마칠 때, 이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완성되었고 참으로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의 계시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은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계시를 받아서 "지금 바로 당신에게 필요한 특별한 말씀이 이것이다."라고 거짓되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그 특별한 시점에, 그 특별한 상황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이제 둘째 되는 그런 가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가 캐나다 헬리팩스로 이사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근데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나타나서 이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이 지금 어떻게 해야 되는지 분명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람이 당신에게 나와서 "이제 당신은 누구와 결혼해야 되는지 나는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업을 해야 되는지 내가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들은 우리의 육신에게 있어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이것을 성경을 둘째 자리로 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믿음의 원리'로 우리의 모든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또한 현대에 있는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한다는 그런 활동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러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는 그 믿음의 원리를 등한시하고 이제 그들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표적과 기사를 찾고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부분에서 누가복음 16장에서 말하고 있는 그 기록은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 죽은 부자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서 내 형제들에게 보내주십시요."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요구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참 그 기록된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참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말을 전해주는 것보다 더 합당한 말씀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동시에 명확하게 오해의 소지가 없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분명히 이 초월적인 능력이 지금도 역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참 이 세상을 초월하는 그 놀라운 능력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방식이 병을 고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 어떠한 분명한 계획을, 프로그램을 가지고 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할 수 있지만 항상 그것을 행하고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 부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그 부활이 "각각 그 순서대로 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개인에 대해서 기도하고 그들은 놀랍게 병이 낫기도 합니다. 참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병을 낫게 하신 것인지, 또는 어떤 의료 치료를 통해서 그가 나은 것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어떤 사람을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이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낫게 하거나 사도바울의 손수건을 가지고 두고 병을 낫게 하거나, 이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도 놀라운 능력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가졌던 그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이와 같은 기적의 은사가 지금 역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분명하게 또한 이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놀라운 기적은 우리의 삶에서 매일과 같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메튜 당신은 그렇다면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매일과 같이 가장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다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것은, 참으로 지금도 매일과 같이 온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참으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이제 다시 영적인 삶을 찾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가장 놀라운 능력이고 역사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분명히 행하십니다. 하지만 이 기적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사가 중단되었다'라고 말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요소는 그러면 그 '은사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그와 같은 기적적인 은사가 중단됐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성경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들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냥 어떤 신학 책이 아닙니다. 그냥 1번, '이렇게 됐다'라고 기술하고 2번, '이렇게 됐다'라고 기술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것을 그 지혜를 탐구하면서 성경이 전체적으로 말하는 바를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이 은사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 '은사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정부에서 이제 5월 1일부로 더 이상 서울 시내에서 기름을 사용하는 엔진을 달린 차는 운행할 수 없고, 오직 전기 차량만 운행할 수 있다라는 법을 발표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기름을 사용하는 차는 그 전까지는 잠시 운행할 수 있지만 더 이상 5월 1일부터는 운행하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유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모든 주유소는 곧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이제 주유소는 문을 닫아야 된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도로에 그 기름차가 달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주유소를 운행하고자 하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목적이 없는 것이고, 더 이상 기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예언'과 그 '방언'과 그 '사도'라는 '은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목적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분명하게 읽은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시대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가 닦여진 것'입니다. 이 '터'라는 것은 한 번 닦으면 이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터를 닦고, 그 위에 또 터를 닦고, 그 위에 또 터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도와 선지자들은 그들의 목적은 교회의 터를 닦는 것이고, 그것이 놓였다면 이제 그 목적이 완수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터가 닦였다면 그와 같은 은사들의 모든 목적은 다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와 같은 기적적인 은사, 또한 사도들의 은사의 목적은 이 새로운 메시지에 '승인'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다'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성경 전체적으로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동반된 그런 기적이 일어난 목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기적들은 한꺼번에 모아져서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 거기에는 이와 같은 기적들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주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많은 기적들이 그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도자를 세우셨고, 이제 그 기적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에서도 많은 기적들이 그들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특별한 사역을 완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많은 기적들을 행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은 새로운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이제 그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 기간이 모두 다 '70년'이라는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들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왔을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또 말씀하신 것을 "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니 너는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참된 것'으로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이라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증거하기 위해서 택하신 그룹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사도들의 행함'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것은 적절한 제목이지만 그것을 조금 더 적당하게 바꾼다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행한 것'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 사도들은 특별히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본 자들로서, 볼 자들로 선택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그와 같이 직접 그런 주님을 본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제 그들의 실제로 처음 목격자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에 모든 하나님의 뜻이 완성돼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런 이적들을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대인들은 구약에서부터 많은 의식들을 가지고 행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중단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전에 오랜 기간 동안 그 의식들을 행하게 하시고 그들이 그럼으로써 다른 이방 민족과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모세의 의식을 행한 유대인들에게 이제 믿음으로 이방인들도 구원받고 유대인들도 더 이상 그런 의식을 행할 필요가 없고, 그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이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도록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그러한 기적 중의 하나가 '방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것과 관련된 말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참으로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바라는 것은, 방언을 지금 이 시대에 그 잘못 행하고 있는, 이제 지어낸 방언을 하는 분들이 참 이 말씀을 정직하게 읽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깨닫기를 바라게 됩니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1-22).
참 이 말씀은 이사야서 28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참 신약 성경에 기록자들은 구약 성경을 그냥 마음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문맥을 보면 여기에 나와 있는 문맥과 타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서 2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그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임박한 심판의 증거는 그들 도시 안으로 들어온 그 이방 민족들이 이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잠깐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이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제가 말하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임박한 심판이 지금 임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심판이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그와 같은 문맥을 가지고 이제 사도는 이 방언이라는 것은, 이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한다'고 되어 있는데 "방언은 그친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방언이 그친 것은 특별히 기원 후 70년에 그 예루살렘 성이 훼파될 때에 이와 같은 방언이 그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의 예배를 더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이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더 능력 있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것도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때때로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오해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오늘도 그와 같이 방언을 사용해야 된다고 잘못 말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방언을 말했을 때, 이제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시선을 모으게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일어나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방언'은 특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또 다른 점이 있는데요.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말씀을 받고 그리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가운데 특별히 이 증거가 필요했던 것은 그것을 보고 있는 '다른 유대인 신자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이제 이방인들을 그들 가운데로 영접하기 위해서 그 증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다는 것을 보고 이제 화를 내고 그것을 물어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가라고 하셨고, 그리고 내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이제 입을 다물고 "이제 하나님께서도 이방인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 구원을 주셨다."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방언을 말하는 그 이방인들을 보고 그 이방인들을 이제 자신의 교회 가운데로, 함께 지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에서도 다시 한 번 유대인과 관련돼서 그 방언이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그 은사의 목적이 다 완수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은사는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계속 지금도 존재한다고 말하는 주장은 사실 그 자체로 '모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길게 영어 단어로 '컨티뉴어니즘'이라고 했는데요. 사실 이것은 굉장히 참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은사들이 계속 오늘도 지금 지속돼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사도의 은사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인정합니다. "아니, 모든 은사가 다 지금도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왜 사도의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겠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하기를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정경이 지금 다 완성되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통해 말하는 그 말씀도 또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서로 모순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느 한편으로는 완성됐다고 말하면서 어느 한편으로는 또 지금도 말씀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그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 주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시대의 후반부에 기록된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표적 은사들이 강조돼서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 은사가 멈춘 것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는 아마도 기원 후 55년도에 기록됐을 서신서입니다. 아마도 사도행전 18장에 나와 있는 그런 사건들 후대에 기록됐을 그 서신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서신서가 사도행전 19장 후에 유일하게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서신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서신서가 다루고 있는 것은 방언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교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기록된 이제 '옥중 서신'이라든지, '목회 서신'에는 더 이상 방언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그 후반부에 있는 서신서에서는 '아픈 사람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디모데전후서를 보게 될 때에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떠남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를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서신서에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디모데가 계속해서 이 말씀에 착념하고, 그리고 읽고, 그리고 가르치는 것을 힘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결코 방언을 계속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디모데 전후서에 '예언'이라는 것이 한 번 언급되는데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디모데에게 그 은사를 확정하는, 그러한 광경 가운데 있었던 내용입니다. 이제 사도의 시대가 끝나가고, 이제 그 후에 후 사도 시대를 인도해야 되는 디모데에게 가장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함', 그것의 충분함을 그것의 '권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로 이미 상당 부분 앞에서 말씀을 드린 건데요. 그것은 이 '병을 고치는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 굉장히 '제한적'으로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그 사도 시대에 그 특별한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 오늘날의 일반적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용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이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은사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은사주의 주장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행해지는 많은 그 병을 고쳐준다는 집회에 가보면, 굉장히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이제 감정적으로 그들을 휩쓸려 가는 이제 그러한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 그러한 것들은 결코 신약 시대가 말하고 있는 그런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러한 것은 이제 가난한 나라에서 더욱 유행을 하게 되는데요. 그들에게 특별히 복을 준다는, 그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은 또한 돈을 받거나, 또는 병 고칠 기대를 하면서 그런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은 이 신약 교회가 말하고 있는 그런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혼돈의, 참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런 집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2장 3절과 4절 말씀을 보게 될 때, 그리고 에베소서 2장 20절 말씀을 보게 될 때에,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제가 오늘날 그 표적 은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유이며 또한 동시에 분명히 성령님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다시 이것을 말씀을 드리자면, 참 우리 지역 교회가 필요한 것은 그런 표적과 기적의 은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입은 그 '형제'와 '자매'가 이 지역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 형제 자매가 필요한 것이고, 참으로 이 말씀을 순종하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맥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바로 주님의 그런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과 대조되게 "술 취하지 말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는 사람은 성령의 영향력 아래,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령 침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은사주의 오순절파는 당신이 성령 충만을 받으면 아주 놀라운 기적을 행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령 충만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피차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평안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들이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고 성령께서만 할 수 있는 굉장히 기적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것들을 조금 분주하게 살펴보았는데요. 이제 마치면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을 위하여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4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에서는 이제 은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이라고 '성령'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젊은 성도님들은 그와 같은 은사 중에서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은사 목록 줄을 가운데서 거기에 내가 어떤 하나가 있는 것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한 분들에게 조금 더 나은 방법을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성령의 은사 목록들 가운데서 "아, 이게 내가 이건가? 내가 저건가?" 이렇게 살펴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그러면 과연 성령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활동하시는지, 그것에 더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께서는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것에 더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그분이 목적으로 하는 그 일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고 여러분은 그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고, 어떤 유익을 줄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 시간에는 이런 영어 요약 단어로서 '스캔'이라는 단어를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아바'라는 단어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아바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셨죠.
첫 번째 'a'는 '능력'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만약에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능력을 주셨다면 그 능력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맛있는 간식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그와 같이 해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방문객에게 쉽게 다가가서 또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능력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와 같은 강대상 앞에 나와 있을 때는 참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는 참 그들에게 흥미를 끌고 재미있게 말을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러한 특별한 재능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 'b'에 해당하는 것은 '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일에 대해서 내 마음이 계속 쓰인다면, 어떤 것에 대해서 내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쪽으로 일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대해서 특별히 마음이 쓰여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그렇게 큰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 일을 하도록 지금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 사람이 지금 굉장히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쉽게 알고 있는데, 다른 어떤 사람들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 그 사람을 방문해서 도와줘야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와 있는 'b'에 해당하는 단어는 '축복'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제 그와 같은 일을 실제로 했을 때에 그 가운데에서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면, 성도들이 정말 유익을 얻고 기쁨을 누린다면, 참 그 축복은 여러분이 그 일에 은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 'a'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 일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자세가 돼야 됩니다. 그 일에 '가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아직 젊었을 때는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은사를 주시고 어떤 일을 하라고 맡기셨는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여러 가지 일들에 내가 기꺼이 나설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붙어 있으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제 하나님의 성도들 가까이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 모임의 여러 가지 일들에 참여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끔찍한 예를 들어서 죄송한데요. 만약에 제 발이 잘려져서 제 몸과 떨어져서 벽에 걸려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은 떨어져 있어서 그 몸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으십시요. 여러분이 그 몸을 돕고 싶다면 그 몸에 붙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바'라는 단어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릴 때 사용하신 그분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단어는 다섯 번째 필요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 첫 번째로 한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참으로 이러한 기도의 마음으로 항상 여러분이 행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묻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며, 이 지역 모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오늘 이 시간에 기적을 하나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많은 분량의 내용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오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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