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모임의 상징들 : 정결한 처녀 >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2일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참 여러분께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집회를 잘 들으실 수 있는지 지금 테스트하는 것 같습니다. 참 이 대전 중구 모임에서 이와 같이 집회를 할 수 있게 돼서 참으로 감사 말씀드리겠습니다. 또한 방문해 주신 또 여러 지역 모임의 성도님들에게도 감사 말씀드립니다. 저는 살면서 제 구두를 신지 않은 채로 만찬 예배에 참여한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또한 그 특별한 경험을 오늘 할 수 있게 돼서 감사가 됩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1장을 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번 집회 기간 동안에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지역 모임에 대해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런 표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등대'에서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있는 그 빛을 나타내는 곳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과 함께 우리는 지역 모임 간의 '교제'와 또 지역 모임의 '독립성'에 대해서 또 '균형'을 잡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등대로서 그 가운데에 계신 우리 '그리스도께 우리의 빛을 비추는 책임'을 다하고 있어야 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모습은 바로 이 금등대가 말하고 있는 '금'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건축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에 우리는 그 건축물의 '토대'와 똑같이 그 '같은 성격'으로 건물을 세워 가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이 지옥 교회를 훼손하는 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분쟁'으로 '훼손'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운 이 지역 교회를 우리가 더욱 아름답게 세워가야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이 지역 교회는 '한 정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께 중매된 처녀로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서 먼저 '배경'을 살펴보자면, 이 고린도후서에서는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교회가 사도 바울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그 위험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그 위험성을 보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들은 단지 바울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그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건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이 다른 거짓말을 가르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의 몇 구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1-6).
우리는 11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이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도 지금 하나님이 그 교회에 가지고 계신 동일한 감정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역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나도 동일한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대한 아주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 지옥 교회에 가지고 계신 그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질투'라는 것은 우리가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어에서는 이제 이 '질투'와 관련된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엠비'라는 단어이고 하나는 이제 '젤러시'라는 단어입니다. 때때로 이 첫 번째 써져 있는 젤러시라는, 즉 질투라는 단어가 엠비라는 것과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지만은 사실 이 두 가지 단어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엠비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이 뭔가를 가지고 있고 내가 지금 그것을 갖고자 할 때 그 '부러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탐심'을 말하는 것이고,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주 멋진 차를 가지고 있을 때 나도 저 차를 가지고 싶은데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타입의 부러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갖지 못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7장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것도 사람에게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투'라는 것은, '젤러시'라는 단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보호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합법적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뺏어가지 않을까 그를 '보호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 또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이 받아야 되는 '예배에 대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 대해서' 질투하시고, 그분의 안전을 열심을 가지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을 지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을 경배하는 것에 있어서 그분을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두고 우상에게 경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내가 바로 그 예배를 원한다. 그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분께서 우리들을 열심으로 지키시는 것은 또한 타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법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똑같은 그 하나님의 질투로 열심으로 그들을 지키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 많은 선생이 있으나 아비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아비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 고린도 교회에 그와 같은 특별한 애정과 질투로 대한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그와 같은 열심과 애정으로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을 위해서 지역 교회가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서 보존되도록 기도하고 애쓰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대해서 어떠한 강렬함으로 그 애정으로 열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이 교회에 대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과 그리고 '돌봄'에 대해서, '걱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이 교회를 중매된, 이제 혼인 언약을 맺은 한 '정결한 처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5장에 나와 있는 내용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심과 같이 사랑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바로 이와 같은 진리를 이 지역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랑이고, 또 이 교회가 신부로서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제 그 신랑과 신부는 연합될 것입니다. 참 신랑과 신부가 만나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이 교회와 연합되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인식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리스도께서는 정말로 이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하늘나라 대신에 내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서 내 자신에게만 몰두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보듯이, 이제 내가 있는 그 영광 가운데 우리도 있게 하기를 기다리면서 또한 기도하신 우리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이제 고린도후서에서 나타난 사도바울의 염려는 그날까지 지역 교회가 정결한 처녀로 보존될 것인가, 입니다.
특별히 이 비유는 유대의 그 고대 풍습을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아버지가 그 결혼을 정하였습니다. 또한 여기 한국에서도 과거에 부모들이 그 결혼을 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젊은 여성분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건 위험한 일인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제 "중매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신부의 아빠가 마치 이제 언약을 딱 맺고 그 아버지의 책임 하에 그 딸을 신랑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그 합당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을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은 이기적인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합당한 그 신부인 지역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인도해 드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결한 처녀는 사도바울과 정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합당한 신부를 얻는 것에 대해서 기쁨과 또한 충성함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침례 요한과 같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이렇게 주님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리고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신랑이고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사도 바울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신랑이고 나는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합당한 신부이신 하나님의 교회를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교회는 대전 중구에 있는 지역교회와 또한 마포에 있는 지역교회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등대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모든 그 목적과 그 모든 생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건축물에 있어서도 그 건축물의 토대는 그리스도이고,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은 토대와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 그분께서 큰 음성으로 부르실 때, 우리는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냐면, 거짓 교사가 뱀처럼 몰래 들어와서 이와를 미혹케 한 것처럼 그들을 속일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다른 길로 인도할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이제 사도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거짓 사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를 전파하였고 다른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내가 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나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타협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아직 여기 대전에는 그와 같이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는 그러한 위험은 없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려해야 될 이런 점들이 있습니다. 사단이 그 하와를 미혹케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사단이 고린도 교회를 공격한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이 지역 교회를 지금도 공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지금과 같은 강대상에서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위험보다도 이제 여러분이 온라인에서 잘못된 교리를 접할 그런 위험이 많아진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이 사도가 가르친 것을 더욱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듣게 될 때에 여러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서 확인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된 형제님들에게 물어보고, 또 앞선 교사들에게 물어보고, 여러분은 확인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는 지역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지역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그 가르침은 굉장히 중요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위협에 대해서 도덕적인 잘못보다도 이제 '잘못된 교리'에 대한 '위험'을 강조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다른 교리'를 받아들일지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래서 이것은 '그들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패할까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는지, 무엇을 경험하는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지가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삶을, 내 행동들을 돌아본다면,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어떤 한 사람의 행동들을 관찰한다면 그가 뭘 믿고 있는지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것을 먹는지가 우리의 건강을 좌우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제가 행동은 저녁 시간에 그냥 감자칩 스낵 네 봉지를 먹고, 그런 불량 식품을 먹는다면 저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보고 제가 실제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은 내가 진실로 내가 뭘 믿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마포에서 어떤 형제님에게 "저는 달리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2주간 아직 달리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한 말이 사실일지 이제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린다면, 저의 모든 행동에서 그것이 나타나고 있어야 됩니다. 제가 믿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좌우합니다. 또한 이 교회가 믿고 있는 것이 그 교회가 행동하는 모습과 교회 분위기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너희들이 어떠한 가르침을 삼키는지에 따라서, 그것에 따라서 너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보일 수도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여인이 어떤 한 남자와 정혼을 해놓고 그 남자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그 정원한 남자라면 그와 같이 잘못된 행동하는 그 여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여기시겠습니까? 그 교회가 다른 복음을 쫓아간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감정을 느끼시겠습니까? 참 그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구원하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동일한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오전에 떡과 잔을 둘러싸서 앉아서 우리는 주님을 기억한 것은 아주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특별히 형제님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배우고 알고 있는지 그들은 기도로 표현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님이 뭔가 잘못된 것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기도 가운데 드러나게 될 것이고 이제 듣는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고 그것을 믿고 있다면 기도 가운데 그것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모든 교회에 건강하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리에 대해서 오염되지 않고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 지역 교회의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의 건강을 위해서 중요한 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건전한 교리'가 가르쳐지도록 계속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모임과 또 저희 모임은 참 감사하게도 이 건전한 교리에 대해서 아주 많은 그런 유산들을 전 세대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제 뒷짐 지고 물러나서 이제 이미 건전한 교리들이 다 밝혀져 있으니 우리는 다른 것을 할 것이 없다라고 그런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배우고, 또한 가르치고, 그것을 순종하고, 확신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동일한 건전한 교리를 더욱 신선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필요에 맞게 계속해서 가르쳐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 교회에서 이 '건전한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에 시간을 쏟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매우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가 그렇게 조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건전한 교리를 지키기 위한 다른 지름길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경건한 책들을 시간을 내서 읽는 것이 그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이 지역 교회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제 장인어른께서는 이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캐나다에서 북아일랜드로 건너가신 분입니다. 그는 아주 여러분이 아는 것 같은 그런 알려진 선교사는 아니지만 그분은 충성된 복음 전도자로서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저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그 모임의 첫 번째 형제님이시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형제님이 아주 잘하신 일이었는데 그 결과로 이제 제가 그분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제가 복음을 전할 때에 제가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책을 들고 일어서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작은 책에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중요한 요소는 바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진리를 그 양식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메시지를 나의 생각에서나,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서나,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진리를 택해서, 그것이 우리 메시지의 중심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이 복음을 전하는 원리는 성경 말씀에서 진리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분명하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역을 통해서 전한다는 것은 이런 것에 약간 장애가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 현재 좋은 통역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러분의 언어로 말씀을 전할 때에 우리는 항상 이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분명한 표현과 언어로 전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했을 때 그 사람들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제가 계속해서 강조해 드리는 것처럼 제 메시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첫 번째로 중요했고, '명확함'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세 번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어떤 카리스마 있는 태도로 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심을 담아 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이 먼저 감동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먼저 감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 말씀을 통해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준비할 때, 하나님께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기도하며, 또 우리 말씀에 이 말씀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고린도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진리, 그리고 명확함, 이 열정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네 번째 것은 그 작은 책에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이 고린도후서 11장의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집중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좋은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께 헌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르침이 이 교회에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장의 문맥에서 한 가지 더 경고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것은 '더 좋은 교사를 원하는 그러한 위험성'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의 '문화'와 관련돼 있는 그런 위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고린도에 전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이 그곳에 도착하여서 그들은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좀 더 듣기 좋은 말을 하였고, 그들에게는 뭔가 좋아 보이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성경에서 아주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이 말하는 기술이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에는 기술이 부족할지 몰라도 그는 이 하나님의 진리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거나, 우리에게 먼저 뭔가 세련돼 보인다거나, 그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추구하는 위험성을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교회는 어떤 놀라운 전도자를 가운데 두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능한 설교자를 가운데 두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께로 모이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또한 디모데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을 누렸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 에베소 교회가 이 교리의 지식에 있어서는 칭찬을 받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 그런 교회가 그리스도는 정작 잘못된 위치에 두고 있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등대는 그리스도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사를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지역 교회는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된 자입니다. 다른 유능한 교사에게 중매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교사를 존중하는 마음이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마음을 넘어서는 그런 형태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와 같이 계속해서 말씀을 드려서 강조하는 것은 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그리고 교회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가운데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그 가사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어떤 성경보다도 찬송과 가사를 인용하는 것을 더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어떤 멜로디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기가 더 좋은 것입니다. 또한 골로새서 3장에서는 우리가 서로 피차 가르치는데 시편과 또 찬송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가에 담겨 있는 가사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찬송가 가사가 이 하나님 말씀의 합당하고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또한 찬송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교회는 강대상에서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 강대상에서 계속 우리를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가르침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참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여러분이 계속 건강하고, 또 그리스도께 헌신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 교회로 계속 세워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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