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메튜 카인 형제님

성경에 나온 40과 주님

박이레 2026. 4. 24. 17:02

< 성경에 나온 40과 주님> 메튜 카인 형제님 / 26년 4월 10일

예, 다시 한 번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도행전 1장 말씀을 펴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경에는 '40'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번 집회 기간 동안에 우리는 특별히 40이라는 숫자가 두 번에 걸쳐서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성경에 40이라는 숫자가 두 번에 걸쳐서 나온 인물이 오직 3명이 있습니다.
'노아'는 그와 같은 40과 관련된 첫 번째 인물입니다. 그에 있어서 40은 '하나님의 보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세'의 경우에 있어서는 40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내산에서 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40일간 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40이라는 숫자가 자주 '증명'하는 데 그 필요한 기간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40에 담겨 있는 의미는 오늘 이 시간 다룰 주제에 있어서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과 관련돼서 40일은 주님께서 '진정한 사람'이시며, 또한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장 1절부터 3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1-3).

그리고 6절부터 11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6-11).

우리가 다시 3절 말씀을 주목해서 보면 여기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성령께서는 50일 후에, 유월절로부터 50일 후에 내려오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유월절 후에 사흘이 지나서 부활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제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일주일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이제 교회가 탄생되게 됩니다.
이 의사 누가는 그가 두 권의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그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이제 그의 첫 번째 책인 누가 복음으로 가서 3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쌔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눅 3:21-23).

그리고 이러한 족보는 계속 이어져서 이제 3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그리고 4장 1절부터 14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14).

우리는 이 각 집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이 40일 동안 경험하였던, 그리고 그 경험 가운데서 배웠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가 한 가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 각각의 성경들이 아주 흥미롭게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에 그는 마치 새로운 아담과 같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아의 성격은 특별히 신약에 있어서 베드로가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요일 밤 시내산에서 성소와 관련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어서 그 하나님과의 먼 거리가 신약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는 것을 대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이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우리가 그 성경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와 같이 조화롭게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그분에 대해서 더욱 경배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과 관련된 첫 번째 40일을 살펴보게 될 때에 이제 성령께서는 아주 흥미롭게도 구약의 말씀과 이 시점을 연결 짓고 있습니다.

1. 우선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물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그는 이상적인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40일간 금식한 가운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도 역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언약의 그 원리'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예로 마태복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그와 같은 시험이 끝난 후에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부터 산상수훈으로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면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새로운 모세'라고 불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주님은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입니다.

2. 그리고 이 40일간의 광야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이스라엘'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사야서 49장에서 우리 주님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서 49장에서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여호와의 종으로 너는 이스라엘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야말로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그 민족적인 그 나라에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는 여전히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언급을 드립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서 49장이 또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9장에서 그 종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로 세워질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혁주의파의 분들은 이렇게 잘못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은 다 주님께 성취된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따로 없다.'라고 잘못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49장에서는 그 종 이스라엘이 한 나라로 다시 세워질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주께서 참 이스라엘이시고,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약속대로 한 나라로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광야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성공적으로 승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참된 종이시며, 참 이스라엘이시며, 이스라엘 나라가 실패한 것을 이제 온전하게 회복하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 굶주림에 시험에서 실패하였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세워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그 동일한 시험을 그대로 통과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신명기 8장 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 8:2).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그 시험 가운데 첫 번째로 인용하신 말씀은 바로 이 같은 장, 신명기 8장 3절에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으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성경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이스라엘이 실패한 지점, 바로 그 지점에 자신이 동일하게 시험을 받고 있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면서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했던 그 시험을 머릿속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험을 통과할 때 보였던 그런 마음들을 이제 하나님의 온전하신 아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와 같은 실패를 결코 찾아보실 수 없었습니다.

3. 그리고 또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시험에서 실패하기 전에, 또 그로부터 몇천 년 전에 첫 번째 사람 아담도 동일하게 그 시험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인 온전한 사람'이시며, 또한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새로운 아담이었지만 그에게도 흠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더 나은 아담, 온전한 아담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더 나은 아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은 그분에 대해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히 마태복음에 있는 그 시험의 기록이 아니라 누가 복음에 있는 기록을 선택한 것이, 누가 복음에서는 이 시험의 내용을 특별히 아담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그 보좌에 앉을 권리가 있는 분으로, '왕으로 제시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우리 주님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모든 '인류의 대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역시 인류의 대표였지만 그는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대표로서 여기서 성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에, "모든 사람이 다 침례를 받으신 후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대표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 침례를 받으셨을 때"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그 족보를 처음부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어떤 가계의 족보를 기록할 때 가장 조상부터 내려오면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복음에서는 그 족보를 복음서에 맨 첫 번째 두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바로 그 '시험 직전'에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은 우리 주님의 시험을 기록하기 전에 그 바로 앞에 족보를 기록함으로써 바로 이분은 진정한 사람이며, 그리고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그 시험을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며 그리고 다윗을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 보좌에 앉을 권리가 있는 분이며 또한 그 땅에 권리가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젊은 형제 자매님들에게 숙제로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윗이 살기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다윗을 먼저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순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보다 다윗을 더 먼저 마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제 내려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루어지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누가 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이제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단지 아브라함까지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담까지 언급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대표이며, 그리고 그 아담과 같은 자격으로서 참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그 시험의 순서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시험의 순서가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는 '시간적'으로 그 시험의 순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떡에 관련된 것, 그다음에 성전과 관련된 것, 그리고 세상과 관련된 것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제 창세기 3장 6절에 나와 있는 그 하와가 미혹된 그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 시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담이 실패했던 시험을 비교'해서 우리 '주님의 시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다시 한 번 아담과 대조해서 바로 이분이 온전한 사람으로서, 그 인류의 대표로서 이기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분은 '진정한 인간'이며 또한 '진정한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그 참된 사람이 또한 그 참된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과 같은 분에게 시험이 의미가 있을까?"라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시험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첫 번째로 어떤 한 시험이 '외부에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외부의 환경에서 다가오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또 두 번째로는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시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그 죄악된 성품이 밖에 있는 환경의 유혹에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제 앞에 어떤 조개라든지, 굴이라든지, 그런 것을 앞에 두고 저에게 한 번 맛있게 요리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제 마음속에는 전혀 그것을 반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조개 요리에 대해서 알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한국식 불고기 요리를 제 앞에 갖다 둔다면 저는 아마도 그것을 이제 먹고 싶다고 반응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외부에서 오는 시험은 아주 분명하게 진정한 그런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안에는 그런 죄의 유혹에 반응하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제시한 그 유혹은 실제적인, 그 진짜로 된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안에서는 그 사단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그 어떤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옳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광야로 그 시험으로 보내신 것은 그 아들이 죄를 짓나 안 짓나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분은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죄가 그 안에 없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40일간의 시험은 바로 이분께서 얼마나 온전하고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증명'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인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인성은 또한 죄가 없으시고 그래서 우리의 인성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성'에 대해서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참 그분을 단지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실제로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죄 있는 육신으로 보내셨다'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볼 때 우리는 우리와 같은 동일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분의 인성은 우리와 동일한 것이지만, 또한 그분의 죄 없음으로 인해서 우리와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시험하여 그가 첫 번째 사람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를 넘어뜨리고 타락시킨 것처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께도 하고자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중에 좋은 것은 바로 우리에게 위대한 구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완벽하신 구주를 담대하게 전할 그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한 토요일 아침에 제가 사는 집에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당신은 성경을 읽은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 "지금 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제가 이 거리에서 오늘 이 시간에 성경을 읽은 두 번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참 기뻤는데요. 제가 사는 같은 거리에 또 저의 지역 교회에 다른 장로 형제님이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과의 짧은 대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비슷한 구주를 원치 않습니까?" 저는 참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와 같은 사람임을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동시에 그 구주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저의 구주가 우리와 같이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라면 그분에게 경배를 드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그분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시험이 쉬웠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에게 있어서는 그 시험의 환경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온전한 환경 가운데서 그에게 주어진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계십니다. 노아는 40일 동안 이제 방주라는 그 보호막 아래서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들짐승에게 둘러싸여 있는 채로 지금 시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그의 40일은 그 영광의 구름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시험을 받는 이 40일은 마귀에게 둘러싸여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 40의 시험 후에 이제 사단은 전략을 바꿔서 이제 그에게 떡으로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저 서구에서는 아마도 이러한 다시 재활을 돕는 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나 이제 그런 사람들이 갱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구호 활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환경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대할 때에 조심해야 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줄인 말로 'halt'라고 하는데, 첫 번째는 배고픔이고, 그리고 화를 내는 것이고, 그리고 고독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피곤할 때입니다. 우리가 배고프거나, 화가 나 있는 상태거나, 외로운 상태거나, 그리고 피곤한 상태, 이때는 특별히 우리가 유혹에 약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어떤 영향을 받을 때에 그것은 즉시로 우리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처해 있을 때에 이제 그러한 것을 돕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한 조심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어떠한 외부의 도움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굶주려 있으실 때에 마귀가 그를 시험하는 것은 진정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그런 유혹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전혀 시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그분의 온전하신 인성 가운데서 완벽하게 대응을 하십니다. 우리가 특별히 이 부분을 다룰 때에 조심해서 다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신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그러한 부분들을 기록하는 방식은 이러한 것입니다. 여기 진정으로 한 인간이 진정한 시험에 맞서서 이제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 의지하면서' 그 시험을 이기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슈퍼파워를 가지고 단번에 그 사단을 제압해 버린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그 시험을 이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우리들도 이 마귀의 시험 가운데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우리는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단지 한 의지하는 인간으로서 그 시험을 이기셨다면, 또한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이 연약한 피조물도 우리 주님을 본받아서, 참 의지하는 한 인간으로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험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험이 반드시 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때가 악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서는 그 "악한 날"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표현들을 살펴볼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모두 '악한 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에게 특별하게 시험이 닥치는 그 '악한 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마귀를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계략과 또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악한 날에 어떻게 서서 그 마귀의 시험을 이기실 것인지를 의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5. 이제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그 세 가지 시험을 살펴보면서 각각으로부터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떡'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계속 충성하실 것인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광야에 우리 주님께서 들어오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분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님을 그 장소로 들여보내셨지만 그곳에는 어떠한 식량이 그분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굶주림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식량을, 음식을 먹고자 하는 그 욕구는 당연한 것이었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굶주림 가운데, 그 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 이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시험의 때를 겪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광야로 넣으시고 이제 그 가운데서 고난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이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에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강한 가운데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낫고 강한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여기 이 '시험'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증명해 내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또 어떤 '유혹'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를 짓도록 유혹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험이라는 것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서' 그 시험이라는 것 안에 '유혹'이라는 것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택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가 십계명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이제 우상 신전에 들어가거나 그와 같은 것들을 행한다면, 그와 같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어떠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피할 길"을 13절에서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시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번째로 이 "피할 길"의 의미는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그 어려움을 통과하는 것을 면제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피할 길"이라는 것은 오히려 그 고난을 통과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을 피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유혹이라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을 말씀을 드리면서, 그리고 그러한 시험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본'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이 시험의 길을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마귀는 간계하게도 이와 같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 도망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 어려운 가운데로 들여보내셨는데, 지금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40일이라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이미 충분히 견뎌왔지 않느냐? 이제 다른 길은 없으니, 이제 너의 힘을 사용해서 여기서 나오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환경을 만드셨는데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필요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한 상황 가운데 그 굶주림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런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상황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그 상황을 벗어나는 그 죄된 길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계속 인내하는 하나님의 뜻 아래에 있는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 가운데 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이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입니다.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길로 갈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인데 그렇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 아래에 있는 길을 택할 것인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나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저도 마침 좀 덥다고 느껴졌는데요. 혹시 가능하시면 뒤에 창문 조금 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고 있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 중에 '해결책'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기꺼이 순종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음행을 피하고 그리고 거룩하게 존귀하게 자기의 아내 취할 것을 알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그 욕구를 따라 행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분명하게도 이제 다른 남편, 다른 아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는 그런 여자들의 모습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가 내가 반려자로 결혼 대상자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제 우리 주님의 이 육체의 욕구를 공격하는 그 떡을 구하는 것을 공격하는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시험에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참으로 영적인 공급을 받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 주님께서 충성하는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시험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분명하게 나타내 보셨습니다.

6. 이제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순서를 따라서 두 번째 시험으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하는 시험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가'에 대한 그런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단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제 첫 번째 시험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 우리 주님의 충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 시험은 그 충성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이 겪어야 되는 그 무게 가운데서 그는 '계속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나은 길임을, 그것이 더 좋은 것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단은 그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도 성경을 인용해서'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주님께서 첫 번째 시험에서 성경을 인용하시자, 사단도 '아, 나도 그거 할 수 있다.'라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신명기 8장을 인용하셔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자, 이제 사단은 역시 그도 성경을 들어서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단이 91편 11절을 인용해서 말씀을 인용할 때에 그는 91편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시편 91편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91편 1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그래서 이 91편 1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주님의 모습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사단은 아주 간교한 자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신 주님에 대하여 "그렇다면 한번 이렇게 해 봐라!"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하여 이제 사단은 특별한 장소로 그를 데리고 갑니다. 이제 성전 꼭대기로 주님을 데려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특별히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특별한 장소에 대해서 참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 장소로 그분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 시험을 아주 강도 높게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보통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좋아합니다. 참 단순하게, 참 믿음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사단은 그 반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단은 더욱 강렬하게 이 시험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 신자가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신앙생활은 굉장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서 다른 형제 자매를 돕는 것은 굉장히 가치 있는 삶입니다. 참 이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교회를 건강하게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또 자녀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엄청난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항상 여기서 아주 특별한, 뭔가 특이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주 놀라운 정말 특별한 것을 해보라."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91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놀라운 일을 해서 증명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시험에 대해서 현명하게 대처하십니다.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어떤 게임을 벌이거나, 우리가 그분을 압박해서 뭘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신뢰'라는 것은 참으로 잠잠하게 기다리면서, 조용하게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7. 이제 세 번째 시험은 '왕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나는 이 모든 왕국을 너에게 주리라." 어떤 사람들은 사단이 이런 제시를 한 것 자체가 이게 맞는 소리인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그가 그와 같은 왕국들을 줄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있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또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하기로는 사단은 아담이 실패했을 때, 이제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그 권리를 사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사단은 지금 공중에 권세 잡은 자로서 그가 이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합법적으로는 이 만국이 자신의 것이지만, 그것을 알고 계셨지만, 우리 주님의 길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 그 보좌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지금 고난을 받으며, 그리고 미래에 그 왕국의 보좌를 차지할 것이다."
참 이와 같은 영광, 부, 그리고 사람들의 인기, 참 이런 것들이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고 또 좋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디모데전서는 분명히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에 대해서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참 내 교만한 마음이 이 세상에 엘리트의 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연결되는 건 아닌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참 이 세상적인 것, 세속적인 것은 사실상 내 마음이 원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일 때를 종종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에 가장 많이 나의 시간과 나의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까?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단지 지나가 버리는 것에, 결국 무의미해지는 것에 너무나 많이 우리의 시간을 쏟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단이 이와 같은 만국의 영광을 순식간에 보여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너무나 짧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제 그러한 지나가 버리는 것과 대조돼서 영원히 계속된 것이 영원한 영광이 무엇인지를 저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시대가 너무나 소비를 자극하는,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 그런 욕구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서, 참 영원한 영광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구해야 되는 것이 필요할 때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단이 우리 주님께 '왕국들'의 영광을 그 '복수'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그 왕국은 복수의 왕국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한 왕국'을 그 마음속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지금 시대는 많은 왕국으로 세상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생각하고 있는 그 왕국은 그 모든 왕국의 왕권을 우리 주님께서 가지시고, 하나의 왕국으로서 통치하시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서는 "세상 나라가"를 '단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신, 이제 40일간 그분의 사신 것을 나타내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 '하나의 왕국'입니다.

8.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사도행전 1장에 나와 있는 우리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1장 3절에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분명하게 사심을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첫 번째 나온 40일 동안에는, 그 광야의 시험에 40일 간에서는 금식하심으로, 먹지 않으심으로 그분의 온전하신 인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온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활하신 후에 40일은 그분이 식사를 하심으로써, 그분이 정말로 사람임을 증명하시는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살펴본 '노아'와 그리고 '모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 인물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노아의 경우에 있어서 말하자면 '침례'를 받은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는 침례의 모습을 방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아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고요. 또한 '모세'도 동일하게 이제 '홍해를 건너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 속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받은 '침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의 받을 침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받은 침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례를 받으신 후에 주님도 역시 이제 새 언약을 제정하십니다. '노아'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은 이제 '새로운 땅'과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은 이제 '어떤 특정한 지역에, 그곳에 살고 있는 특정한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피로 맺으신 언약은 이제 새로운 땅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맺은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참으로 노아보다 위대하신 분이며,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며,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이 그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둘째 사람'이며, '마지막 아담'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분은 분명히 '부활하신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몸으로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이제 그 고난은 다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주님의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어떤 분들은 정말 실제적인 고난을 지금 겪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완수하신 것처럼, 이제 여러분에게도 그 고난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5장 8절부터 11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벧전 5:8-11).

10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잠깐 고난을 받은 후에"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고대하는 그 '왕국'은 '영원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부활이 그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분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온전하신 구주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실제 한 사람이시며 또한 승리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셨으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신 우리의 '본'이 되시는 '한 인간'이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