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요한일서 성경읽기(요약)진행 중

성경읽기 : 요한일서 3장 1-6절(요약)

박이레 2026. 1. 25. 15:16

성경읽기 : 요한일서 3장 1-6절(요약)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3:1-6, 개역한글)

- 김민원 형제님 사회 : 요한일서 3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일컬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말합니다. 10절까지는 두부류로 나눠서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와 그 안에 있는자로 나눕니다. 11절부터는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도들간에 어떻게 서로 행해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먼저 1-6절까지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윤철 형제님 : 3장 1절에서 사도요한은 감탄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감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을" 이는 어디서 온것인지 알수 없는 전혀 종류가 다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생의 능력이나 노력, 공로가 아닌 전혀 이유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신분의 선언으로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으로 시작되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가 구원받고 그 삶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낯섦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3장이 조금 어려운것 같습니다. 제가 교제전에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Q. 여기 "하나님의 자녀"라고 되어 있습니다. 칠드런과 선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아들이라고 되어있지 않고 자녀라고 되어 있는데요. 그 단어가 어떤것을 의미하는지 교제해주시면 도움을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민원 형제님께서 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그 사랑이 종류가 다른 사랑임을 윤철 형제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이 사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든것을 만족하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사랑을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은 당연히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기에 저희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 저희는 아주 이질적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저희를 깨끗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본이 없었으면 저희가 어떻게 깨끗케 될까요? 주님의 본이 있기 때문에 저희가 주님의 본을 좇아서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함을 추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가 올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다시오실 소망으로 우리가 깨끗게 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더럽혀지는 것은 이것을 놓칠때에 많이 그렇게 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탐욕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텐데 그렇지 않은것처럼 살 때에 탐욕이 올라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이는 우리가 주님과 같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희 몸이 변화되어 저희 육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 없어진 채로 산다는 것을 교훈주신다고 생각하빈다.
저희가 구원받을 때에 칭의 외에 저희의 육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완전 가운데 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상태가 참 축복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주님나라에 간다면 저희가 주님께 칭찬받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다 주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약 가운데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본받을 때에 주님은 그 부분에 대한 축복과 칭찬을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3절)

- 김보영 형제님 : 1절을 조금 보충만 하겠습니다. 형제님들의 교제에 다 동의합니다. 다만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이는 고귀하신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으로 봅니다. 이러한 분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수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속성은 단순히 신분적인 위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때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격을 우리가 닮아가도록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아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은 속성 자체가 아주 거룩하시지만,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주와 같을 줄을 아는고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는 능력적인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옛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지신 인격을 갖게 된다는 부분에서 같아지는 것입니다. 또 주님과 같이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 김윤철 형제님 : 2절 말씀 교제에 동의합니다. 조금 보충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나중에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신분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우리의 신분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장래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의 이 불안의 상태가 "그가 타나내심이 되면"이라고 말씀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고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될 것을 소망적으로 말씀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소망을 얻는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소망 때문에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 때문에 얻어진 결과입니다. 그 신분에서 비롯된 소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정결로 인도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3절)

- 최재홍 형제님 : "하나님의 자녀라" 1절에서 사도는 성도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고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씀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희를 세상이 알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도의 소망이 주님을 뵙는 것임을 2절에서 말씀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깨끗케 할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할수록, 그분을 진실로 다시 뵙기를 소망함에 따라서 자신을 매일 점검하고 돌아볼 것입니다. 저희가 정결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을 때에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결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에대한 본을 그리스도께서 보이셨습니다.
저희가 정결하게 되는 이유는 저희가 과거와 현재, 미래에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뵐 것이기 때문에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 김보영 형제님 : 3절에서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의 원어는 시련을 통해서 점차 성장하고 정결해 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욥이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더욱 훌륭해지는 과정 중에서 그가 시련을 받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23:10, 개역한글)

- 김민원 형제님 : A. 전의석 형제님께서 아까 선과 칠드런과의 차이를 질문하셨는데요. 제가 묵상한 바로는, 칠드런은 아이들이고 부모의 보호아래 있는 어린 아이들의 개념입니다. 아들들은 성인이 되어도 아들입니다. 그래서 1-2절의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으로 생각하게 되고요. 2장에서 본 자녀들도 그렇고요.(12절, 14절) 3장의 10절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의 보호와 권위아래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것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지 않을까 분별해 보았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것은"(2절) 이는 주님의 공중재림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본다는 의미는 눈과 눈을 마주쳐 보는것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서로 교제한다는 의미로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그와같은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장은 성화의 결말인 영화의 개념이 나와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4, 개역한글)

저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실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저희가 부족이 많은 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낭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참으로 귀중한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는데 거룩을 좇지 않고 살던대로 살고 죄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없다면 내가 구원받은 성도가 맞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을 닮는 방법을 알고 그와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3장은 우리가 이와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와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대로 사는것을 방해하는 것이 2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2장 19절 이하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남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도 저희가 닮고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사람의 행하는 것을 주목하고 따라하지 않습니까?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결국에는 주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닮은 것을 발견할수 있을 것입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것은"(2절) 이 부분을 번역하시는 분이 이 부분을 번역하시면서 굉장히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다른쪽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와 같을 줄을 아는것이" 너무나 명확하기에 그대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와 같을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볼때에,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장면이나, 주님의 백보좌 심판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하늘의 예배가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 앞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같다는 것은 그와같이, 주님과 같이 앉아있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 장승훈 형제님 :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이 말씀이 공중에서 주님을 뵈올 때에도 해당하지 않을까요?

- 전의석 형제님 :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장면적인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에 제가 교제드린 장면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 장승훈 형제님 : 4절에서 "죄를 짓는자마다 죄를 행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4절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쉽지 않았습니다. 1-3절은 주님을 닮는것,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요. 갑자기 4절에서 죄를 말씀합니다.
저희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좋은것, 중간, 나쁜것으로 나눌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것이 이분법적으로 나눌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4절 말씀만 뚝 떼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된 주장할수 있습니다. 저희는 죄의 형벌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입니다. 저희들은 실제로 죽지 않았지만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아무리 죄를 지으라고 제 옛 사람에게 말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요구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지 말지 선택할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5절)
그리고 휴거 될 때에 저희 상태는 완전해 집니다. 그러나 죄의 존재는 그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왕국 이후, 백보좌 심판때에 죄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 때에도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총체적으로 주님께서 죄를 없이하려 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해 볼수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죄가 없으시고 주님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없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주안에 있지만 죄를 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심문을 받으실때에 베드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질 때에는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죄를 물으십니다. 이러한 것들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김민원 형제님 : 장승훈 형제님의 교제에 조금 첨언 하겠습니다. "너희가 아나니"(5절) 이는 그 당시의 성도가 현재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주님을 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5절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께는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 죄를 없이하시려고 오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예수님을 보지도 못한 자들이 범죄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4절의 죄를 짓는 자가 불법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 전의석 형제님 : 4절은 죄가 심각한 문제임을 먼저 말씀합니다. 이 죄는 습관적이고 고의적으로 짓는 것이며, 자기 뜻이 분명하게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법임을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주님께서 과거에 우리죄를 없애주시려고 나타나셨고 없애 주셨습니다.
두번째는 영지주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만을 강조하기에 자기들이 어떻게 행하더라도 문제가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행함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사도는 교훈합니다. 영지주의나 많은 거짓 가르침이 그 행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 일침을 주기 위해서 4-6절을 말씀해주는것 같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4절에서 죄를 지으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고 죄라 생각지 않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도 두 무리로 나뉩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깨달았기에 완전함으로 죄에서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 속한 자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임을 강력히 경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