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언 : 주님의 고통의 먼 거리, 찬송의 큰 거리 > 탄쯔웨이 형제님
예, 안녕하십니까? 오늘 성경 본문 두 군데 말씀을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03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여기에 한국어 성경에서 이것이 어떻게 표현됐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표현에 주목해 보기를 바랍니다. "먼 것 같이", '아주 멀다', 이게 강조되어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여기서 22편 1절에서도 "멀리하여"라는 표현이 다시 한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군데 말씀을 통해서 '거리와 관련된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나온 이 거리는 우리의 '죄'와 관련된 거리였습니다. 이제 그것은 103편에 나온 거리였고, 이제 우리가 시편 22편에 오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구주의 거리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두 주체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거리가 있었고, 또한 구주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십자가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103편에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가를 멀리 옮기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형제 자매님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그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아주 멀리 옮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5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 참으로 우리의 죄를 아주 멀리 옮기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이 시간 아직 이 죄로 말미암아 아직 마음의 정죄를, 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참으로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믿는 자들의 죄는 아주 멀리 옮겨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동에서 서에서 먼 것 같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측정할 수 없는 거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싱가폴은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싱가폴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그 거리를 재본다면 아마도 50km 정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여기서 측량할 수 없는 길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했을 때, 이 동은 절대로 서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아무리 그 수평선으로 멀리 쳐다본다 할지라도, 또한 서쪽으로 아무리 우리가 멀리 쳐다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거리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시편 기자는 그 지리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와 같이 만날 수 없는 먼 거리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단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주 멀리 멀리 옮겨지고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편 22편을 보게 될 때에, 그리고 또한 우리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멀리 옮겨졌는지를 이해하고 감사드리기 위해서, 또한 우리는 22편을 봐야 됩니다. 우리의 죄가 그같이 멀리 옮겨진 이유는 20편 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는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우리는 여기 복음서를 살펴보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질문하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이삭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저녁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삭이 이제 모리아산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이삭은 단 한 가지 질문만 하게 됩니다.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이 한 가지 질문에서도 우리 주님이 겪으셔야 하는 그 고난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그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와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먼저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가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신 기도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내신 것은 이 십자가로 나아가심으로써 그분이 하나님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게 되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 기도에 이렇게 덧붙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이 모두 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7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말한 7가지 말씀 중에 가운데에 위치한 말씀입니다. 그 7가지 말씀 중에 가장 중심에 위치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오직 하나님께 주님이 드리신 유일한 한 가지 질문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그분이 행하신 유일한 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가 2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보게 될 때, 어떤 분들은 2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이 왜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리셨는지에 대한 응답이라고 이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그런 이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응답이 아니라 왜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시는지, 이것을 말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그 조상들이 하나님께 의뢰하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5절에서도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께 의뢰하여서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될 때에, 참 그 역사는 오직 불순종과 죄로 점철된 그런 역사 아닙니까? 그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죄를, 우상숭배를 하고, 여러 가지 도덕적인 타락과 모든 종류의 죄를 지은 그러한 나라였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계속해서 불순종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습니까? 제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까? 제가 우상숭배를 하였습니까? 그래서 8절에 보면,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9절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또 10절에,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그들은 계속해서 불순종하였지만,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이 후반부의 말씀은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셨으나 '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께 버림 당한 이유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그렇게 멀리 옮겨졌으며,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이 우리 주님이 이와 같은, 그분이 당하지 않았어야 되는 고난을 받으신 결과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 형제님들께서 일어나셔서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형제님들께서 기도하시는 내용을 이해하기를 정말 바랐습니다. 참으로 여러분께서 기도하시는 가운데에 참 그러한 실행에 대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기도하는 가운데에 우리 모두는 또한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주에 주일에 나와서 이와 같이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그와 같은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는 엠마로 가는 두 제자 어제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된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항상 다시 이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22장에 대해서 이제 짧게 요약하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거리'를 보았습니다. 1절에 보면 "멀리하여", 그리고 11절에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19절에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19절, 우리가 1절부터 5절까지는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22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부터 18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까지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절부터 21절은 우리 주님께서 '사단의 그 힘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왜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게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런데 21절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될 때에, 21절에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그래서 첫 번째 1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먼 거리에 놓이게 됐던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21절에 가게 되면 주님께서 응답을 받게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역을 완성하셨을 때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전반부 1절부터 21절은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31절 20편의 후반부는 '주님의 찬송'에 대해서,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찬송과 영광이 먼 거리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22편이 히브리서에서 인용돼서 사용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인용구를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찬송을 이제 교회와 관련돼서 말씀을 하였고, 22절에 그 회중, '교회'라고 언급된 것에서 23절에 "여호와의 모든 자손"으로 그는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7절에서 "열방의 모든 족속이", "땅의 모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것, 그리고 열방의 모든 족속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족속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다스리실 때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다스리실 때에, 그분에 대한 찬송은 그 거리를 측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서 그와 같은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2편은 그 '고통의 먼 거리'에 대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이제 그 '찬송의 그 큰 거리'에 대해서도 마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보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것을 고대하게 됩니다. 참으로 그분을 기억하면서 계속해서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격려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욱 합당하게 예배를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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