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부활 : 개인적으로 - 여행객, 교사, 식탁에 앉으심 > 탄쯔웨이 형제님
예,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시 이 마포 모임에 여러분을 뵙게 돼서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제가 계산하기로는 5년 반 전에 이 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습니다. 제가 2019년 이후로 여러분과 만날 수 없었지만, 또한 때때로 말레이시아에서 여러 성도님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뵙기를 아주 소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문 기간 동안에 또 여러 성도님들을 다시 뵙고, 또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돼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한 이 자리에 제가 처음 뵈는 분도 있지만, 그런 분들도 이번 기간 동안에 교제를 나누고 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주쳇 모임에서 여러분들에게 안부를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피터 형제님과 또 플로라 자매님께서 또 함께 안부를 전해 주십니다. 그분들은 마포 모임에서 여러분과 함께 좋은 교제를 나누었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나단 블랙 형제님 여기 방문하셔서, 또 강 형제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의복'에 대해서 교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포 모임에서 이제 세 가지 집회에서 다루게 될 주제는 그 주제와 좀 연결돼 있는,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하시는 사역'과 관련된 내용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먼저 읽으면서 말씀 교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13-35).
누가복음 24장에 잠깐 손을 넣으시고,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잠시 읽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우리가 이 15장 3절과 4절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특별히 이 세 가지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분께서 죽으시고, 또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세 가지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이 한국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됐는지 알지 못하지만, 특별히 영어 성경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이 한 단어가 강조돼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that라는, '그것'이라는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먼저 첫 번째 대명사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는지', 그것의 앞에 that이 있고, 두 번째로 그분이 어떻게 장사되었는지, 그 앞에 that이 있으며, 그리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앞에도 이 that라는 단어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5절에 보면 그분이 "보이시고"라는 것 앞에 that 나와 있는 것을 종종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that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성경은 이 네 가지 것이 사실은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사 지내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그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분명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장사됨은 주님께서 분명히 죽으셨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단지 혼수 상태에 잠시 빠져들어간 게 아닌 것을 이 '장사 지냈다는 것'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보이셨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그것을 더욱 확증해 주고 있는 문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아주 분명한 사실로 이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성경이 여러 군데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부분은 누가복음 24장에 그 두 사람에게 나타나신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15장에서 또한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을 포함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보이셨는지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단지 이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열두 제자에게, 또는 그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그 사건을 기록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현재 그분이 어떠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 한 개인적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신 그 사건을 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뜻이면 우리는 내일 다락방에서 열한 제자에게 주님께서 그 그룹에게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이제 무덤가에 있는 두 여인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듯이 '엠마로 가는 두 제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또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어떻게 그들을 도우셨는지를 살펴보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지금도 현제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시는지를 우리는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우리들은 이 부활의 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도 바울의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을 나타내는 이 구절을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리는 것은, 또한 제 자신에게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정말로 경험을, 실제적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이 주님이 부활하셔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그런 모습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면서, 참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한 우리가 모임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분들이 지난 12월달에 코타크무닝의 수양회에 참석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수양에서는 히브리서 1장부터 13장까지 모든 장을 다 다루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6장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수양회에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큰 기쁨 중에 하나는 이런 성경에 대해서 자세하게 연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서신서에서 주님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참으로 그 아들의 위대하심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실중적으로 우리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 배우고, 또한 그때 주님을 기억하면서 많은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서신서에서는 이 아들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4장과 그로부터 시작해서 11장까지 이러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거기서 이제 그 위대하신 아들로부터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주제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제사장에 대한 주제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 방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다 세세하게 살펴볼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시는 그런 모든 부분에 대해서, 그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으신 분이고, 또 아론보다 뛰어나신 분이며,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그 하늘의 성소에서 일하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히브리서 마지막에 가게 됐을 때, 우리는 그분이 또한 위대한 목자장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위대한 아들'로 시작했고, 그리고 중간 부분에는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위대한 목자장'으로 주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귀하게 다뤄야 되는 내용들입니다.
이 '위대한 아들'은 그분의 '인격'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우리가 어떠한 그런 어려움을 겪어야 되는지를 '알고 친히 돕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자신이 그를 돌보는 마음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그림이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위대한 아들이시고, 또한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위대한 목자장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이 집회가 끝나고 여러분이 돌아가면서 이것을 기억하시길 바라면서 저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복음 24장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제목을 특별히 이렇게 정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주님의 뜻이면 내일 이 말씀 집회 시간에는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그들에게 가르치신 그분의 사역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지역 모임의 집회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그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에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특별히 '우선순위'와 관련돼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집회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또한 우리의 모임적으로, 또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여기서 누가복음 24장과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우리의 낙심과 절망에 대해서 다루십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슬픔과 절망과 낙심을 경험하지 않은 분이 없을 것이라,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는 그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모인 제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 가운데 있는 누가 그러한 그 두려움에서 면제된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때때로 이런 두려움은 자주 느끼는 감정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이제 그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 될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있는 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21장 초반부에 "나는 낚시하러,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 장이 끝났을 때는 더 이상 베드로는 '내가 무엇을 하러 가노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 장은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을 우리가 세 말씀 집회에서 다룰 그런 주제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마포 모임이 또한 이런 말씀을 교제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토요일날, 이와 같은 시간을 내셔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시고, 또한 여러 식사로 저희를 대접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이 집회에서 말씀을 최대한 쉽고 또한 단순하게 전하고자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23장 13절부터 32절까지 단락을 이렇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읽은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눠보겠습니다. 13절부터 24절까지는 '여행 중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께서는 지금 그 삶에 먼지가 쌓인 그 길을 함께 다니고 계십니다. 하지만 25절과 27절에서는 주님께서는 단지 여행객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사'로 계십니다. 그리고 28절부터 33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식탁에 함께 앉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행자로 나타나실 때 그 만나는 장소는 '여행 길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25절부터 27절까지 우리 주님께서 교사로 계실 때는 주님께서 길 가운데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십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 속에서 그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식탁에서 말씀하실 때는 그것이 길에서가 아니고, 또한 우리 마음에서가 아니고, '우리의 집 안에서' 계시는 것을 장소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 우리 삶 가운데서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러한 장소들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여행객'으로서 계실 때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처음에 우리 주님께서 여행객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주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타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타내신 그 두 사람의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로 되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면, 그분은 반드시 또한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나타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영적인 수준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공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이든지,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 열한 제자 중에 속해 있는 사람이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촌이라는 것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그런 장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누구인지 상관이 없으며, 여러분이 어디 지방 출신이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주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참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이런 슬픔을 겪으셨는지는 모릅니다. 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기대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엠마오로 가는데 13km 정도 거리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 가운데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그것이 또한 '문의'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라고 또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대화의 방식을 사용하면서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15절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이르셨습니다. 이 15절에 예수께서 이제 "친히"라고 언급이 되어 있는데요. 여러분께서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특별히 "예수께서 '친히' 가까이 이르렀다."라고 '친히'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께서는 특별히 여기에 '친히'라는 단어를 더 추가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히브리서 1장 말씀을 보실 때도 "그분께서 친히 우리 죄를 구속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 자신이"라는 단어를 굳이 넣어서, 그분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것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단지 그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친히 가까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단지 가까이 자신이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뒤에 "저희와 동행하셨다"라고 기록된 것을 봅니다. 제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저희는 가까이 가지 않을 때가 있으며, 또한 계속해서 그와 동행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그래서 가까이 갔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계속적으로 동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이 일어난 일에 모든 된 일을로 인해서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제 자신도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제 영적인 상태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것이 침체될 때가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 장면입니까? 참으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 두 사람이, 참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촌에 사는 이 두 사람에게, 그들이 그 된 일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낙심하고, 침체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그 일어난 일에 그들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아름다운 그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두는 것에서, 이제 주님 자신에게 관심을 두도록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참 우리 삶 가운데서 이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이 어려운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주 그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른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만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 그 이면을 보도록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할 때 그들은 마음이 슬펐고 그들의 상태는 낮아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일어난 일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이 나라를 회복하고 구속할 자라고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이 낙심한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느끼고 있는 그 고통을, 이제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 가운데서 겪으셔야 했던 그 고통으로,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로 그들의 관심을 돌이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저는 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년 전에 저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건 제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그런 영적인 시간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그 고통에 대해서 저는 그것은 설명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제자들이 한 것처럼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문의하고, 그 된 일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본다 할지라도 그것을 저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참 그 가운데 느끼고 있는 고통은 제가 참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그렇게 어두운 순간 가운데서도, 저는 이 말씀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가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그 모든 고난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으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친히 겪으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있는 이 좌절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려움에 대해서 모두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모든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분인 것입니다. 그분은 배신당하는 경험을 겪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부인 당하는 경험을 겪으신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그 육체적인 고난을 겪으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경험을 겪은 분입니다. 참으로 이분이 얼마나 우리에게 합당한 대제사장이 돼십니까? 이 누가복음 24장을 볼 때에 저는 비록 여러분이 어떠한 삶 가운데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지만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확신 가운데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고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목자장이시고,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나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으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가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교사'이신 부분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슬픔을 다루셨습니다. 이제 25절부터 27절까지 있는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교사로서 그들 마음 가운데 있는 '더디 믿는 것'에 대해서, 25절에 나와 있는 그 마음에 더디 믿는 것을 다루십니다. 이 부분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아주 길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제가 잠깐 이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참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주님께 다 펼쳐 보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 앞에 사회자 형제님께서도 이 찬송가를 선택해서 불러주셨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시고 내가 그분을 알기도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하신 분'이라고 찬송가 가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참 우리가 때때로 어느 친구와 함께 카페에 가게 됐을 때, 자기 얘기만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여기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이런 음식과 함께 커피가 제공되는 카페테리아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 많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우리 주님께서 두 사람이 주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서, 중간에 멈추지 아니하시고 계속 그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주님 앞에 토해내도록 그들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제가 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아이들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저는 중간에 그들의 말을 멈추게 하고, "잠깐 이것은, 이걸 어떻게 된 거니?"라고 또 질문하고 대답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참 우리가 이 부분에서 종종 간과하는 부분이,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잘 듣는 분이신지' 그것을 다시 여기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도록 계속해서 인내하고 그 말을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을 다 했을 때, 주님께서는 다시 그분께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십니다.
25절에 "미련하고" 주님께서는 제가 믿기로 아주 부드러운 책망을 그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해했어야 되는 것들을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이해해야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미련하고 그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고 하시는데, 특별히 무엇을 더디 믿냐면,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말한 '모든 것'이 나오고, 27절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 또한 모든 성경에 쓴 바", 그래서 '모든'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왜 이 작은 단어에 강조를 하는지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이 단어가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중요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사실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구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그 천년 왕국을 그 예언과 같이 정확하게 다스리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그 정사가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메인다는 것을,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이스라엘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인 어려움들을 모두 다 제거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부분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편 22편의 말씀 같은 그런 메시아의 고난을 다루는 말씀은 제쳐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사야서 53장과 같은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건너뛰어버렸던 것입니다. 참 그들은 그 유월절 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을 듣고 있을 때, 그것은 문자적으로 사실 유월절 양이지만,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덧붙여서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반드시 받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은 반드시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지만 그전에 또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27절과 같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들이 여행을 시작했다고 믿고 있고, 그리고 이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걸음 거리로는 3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읽기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주님께서 이와 같이 성경을 가르치시는 그런 성경 읽기 시간에 함께 동참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그런 모두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창세기 22장 말씀을 얼마나 그들에게 잘 설명해 주셨을지 그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 이삭이 나오고, 그 이삭이 나에 대한 상징이고, 그림이고, 그가 어떠한 고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말씀을 통해서 유월절 양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난을 받으셔야 되는지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유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 단락에서 그러한 결과의 두 가지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32절에 보면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런데 그 두 사람에 대한 마음인데, 여기서는 그 마음이 '한 마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독단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믿기로는 글로바와 그 이름이 언급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인, 그래서 남편과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분이 '누가'일지 모른다고 또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믿기로는 '글로바'와 '그의 아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두 번째 단락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중심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단지 이것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이 이 구약 관련해서는, 이것은 이 프리즘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프리즘이라는 것을 놔두고 백색 광선이 통과하게 될 때 그 나오는 광선은 어떤 모양입니까? 거기에 이제 7가지 색깔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무지개 색깔과 같이 빨,주,노,초,파,남,보의 그 7가지 색깔이 그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약 성경은 마치 이 프리즘과 같다.' 이 프리즘을 백색 광선을 통과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이제 신약 성경과 같이, 이제 하나의 광선을 통과한다면 여기에 7가지 색깔이 나온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유월절 양을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유월절 양과 관련된 구속과, 그 희생 제사와, 이러한 것들을 구약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여기에 출애굽기 12장뿐만 아니라 13장, 14장,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펼쳐져 보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자매 여러분 이와 같이 성경을 읽기를 격려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이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주 보배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욱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참으로 이들이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순간에 그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된 마음, 그 단수로 표현된 한 마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여러 가지 관계가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하나 된 모습이 있고요. 참으로 이 가정 안에서 그들이 육체적으로 하나 되는 것은 참으로 정결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이 영적으로 하나 된 것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때에 그와 같은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이 여기에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단락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또한 잘 경청해 주고 계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에 이제 '식탁에서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제 28절에서 저희는 그 가는 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께서는 이제 더 계속해서 그 길을 가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3시간 반 동안 너희들한테 가르쳤으니 이걸로 다 됐다." 이렇게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집으로 구주께서 오시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분에게 들어오시라고 초청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여러분의 집으로 초청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계속 가시려는 길로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9절에 그들이 올바르게 반응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강권했던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그 놀라운 성경 읽기, 성경 공부를 한 그들의 반응이 이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행 길 가운데 있을 때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또한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가르치고 계실 때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이러한 표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 집 안에 오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초청한다면 그분은 들어오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께서 우리 집 안에 거하게 하십니까? 우리는 물론 지역교회 집회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기를 좋아합니다. 참 이 지역 모임 집회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 배우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집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앞에 구절을 읽은 것처럼 우리가 그분에게 집으로 초청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모임 안에서는, 교회당에서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집에서는 너무나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그런 삶이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경적인 순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집 안에 먼저 계시고, 또한 우리가 교회당 안에 모였을 때 주님께서 이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집 안으로 초청할 때, 그들은 주님을 손님으로 초청했지만, 30절에 우리가 읽은 것처럼 주님께서는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에게 주시는, 그 자리의 주인으로서 행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나는 이분을 손님으로 초청했는데, 이분은 좀 예의에 어긋나게 본인이 주인으로서 이렇게 행동하고 계신가?' 이렇게 생각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가정으로 초청하시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에게 부탁한 것 이상의 것을 그분으로부터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손님으로 초청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가정 안에서 단지 손님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이제 그로 인해서 두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 안으로 초청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로부터 기쁨을 누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그들은 이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단지 두 군데에서만 주님께서 이와 같이 네 가지 행동을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저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2장에 나와 있는 주님의 만찬을 재정하실 때 행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그 누가복음 22장 주님의 만찬을 재정하실 때 바로 여기 나와 있는 글로바와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다른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장면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주님께서 5천 명을 그 떡으로 먹이신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이시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그 장면을 통해서 이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그분께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주님의 행동이 기존에 했던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이 네 가지 행동을 하실 때,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이 두 사람은 주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여러분이 어떠한 견해를 택하시든지 간에 저는 이것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부분이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제 주님께서 이와 같이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여러분에게 격려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가정으로 주님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구한 것 이상을 그 가운데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두 사람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그 가정 안에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저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봅니다. 참으로 이러한 순간은 놀라운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31절에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순간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나 쇼를 보게 될 때 만약에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된다면, 여기가 가장 그 이야기의 정점이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절정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이제 이 절정의 순간에서 그들이 계속 행복하게 같이 교제를 나누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끝나야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는 저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이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가 그분께서 이제 떠나셨다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성경 구절이 말하는 것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만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바이며,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까?' 이제 주님께서는 며칠 후면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함께 있을 시간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시간이 이제 곧 끝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그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그분이 남기실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랍고 놀라운 일은 이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여행은 그 여행 길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런 가운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 그 두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제 한 집에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때 나타내시고 그들은 그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 똑같이 그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단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분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참으로 이 그리스도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분에 비해 버림당한 그런 경험을 하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외침을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떠나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이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그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 그 길 가운데서 동일하게,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위치에서,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통치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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