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다니 마리아 : 예배 > / 탄쯔웨이 형제님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시간을 내어서 이와같은 말씀집회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태풍이 심한 바람을 불고 왔습니다만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이곳에 오게 됬습니다. 태풍 때문에 우리가 못오지는 않았습니다. 싱가폴 주쳇에 있는 모임과 저희들이 함께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마포모임에서 저희와 함께 늘 교제해 주시고 방문해 주신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싱가폴 주쳇모임을 대신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우리가 해가 지날수록 교제 가운데서 가까워지는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세시간 동안 말씀을 말씀드린다고 하였고요. 세 사람의 마리아에 대해서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고요. 그 마리아의 특징은 순종이라는 특징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시간 많은 측면들을 공부 했습니다만 이와같은 순종, 복종이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리아가 고백했던대로 "주의 말씀을 따라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이것이 참으로 순종하는 모습의 고백 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것은 단순히 순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택하시고 마리아가 그 일을 순종해 나갔을때 참으로 그에게 고난이 닥쳐왔음을 우리가 지난시간에 배웠습니다. 그녀는 오해를 받았고 그의 간증이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가 마리아가 당했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때 또한 우리는 주님이 겪으셨던 십자가의 고난도 생각할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 이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와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리아도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순종할때 고난을 겪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당하는 성도에게 격려 해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리아에 격려를 해준 그 여인은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시는대로 아주 나이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참으로 나이를 초월해서 나이 많은 엘리사벳은 젊은 마리아를 격려하고 서포터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 안에서 여러가지 비슷한 연령끼리 교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여기 계신 젊은 성도님들께서는 나이 많은 성도님과도 가까이 지내시길 바랍니다. 마치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같이 친교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들은 삼개월을 함께 그와같이 지냈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격려를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교제했는데요. 마리아와 그의 아들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아드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리아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은 참으로 마리아보다 더 순종하신 분이었습니다. 마리아 보다도 훨씬 큰 고통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또한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셨던 분입니다. 마리아보다 더 큰 섬김으로 섬기셨던 분입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 두번째 마리아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나사렛에 있는 그 마리아를 통해서 순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오늘은 베다니 마리아에 대해서 배울텐데요.
이 베다니 마리아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것,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두번째 찬송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 참으로 이땅의 모든 자들이 주님께 경배를 드리며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대로 성경에서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세번 나타나는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펴서 살펴보겠습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38-4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2-35).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3-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3-9).
방금 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 발앞에 있는 장면을 세군데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이제 누가복음에 보면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발앞에 있는 세군데 장면을 찾아볼수 있는데요.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마리아와 주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비쳐볼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마리아와 그녀의 눈물, 울음이라는 제목으로 정의할수 있겠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2장과 마가복음 14장에서는 마리와 예배라는 제목으로 저희들이 교제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한테 질문할수 있겠습니다. "왜 마리아아 예배라는 이 제목으로 두군데 말씀(요한복음 12장, 마가복음 14장)을 찾으셨습니까?" 요한복음 12장과 마가복음 14장에서는 마리아가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 마리아는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것들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의 죽으심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과 요한복음 12장이 없으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수 있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했을때에 그러한 사람이 주님께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시간에 이와같은 것들에 대해서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물을 드릴때에 우리는 이와같이 마리아처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것으로 찾아볼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주님을 배울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에 대해서 보고 있습니다. 저는 마르다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싶진 않습니다만 우리는 여기 마르다는 비판하는 사람으로 드러나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마리아는 반대로 칭찬을 얻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41절에서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한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지금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다." 여기 염려하는 단어는 내적으로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근심하다는 단어는 겉으로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아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아주 근심하고 분주한 가운데 있습니다. 겉으로도 이러한 것들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 속에도 아주 마음속에 동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누이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마르다같은 모습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내적이나 외적으로 여러가지 염려하거나 근심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에 대해서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42절 말씀에서, 우리나라 성경과는 조금 다른데요. 주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십니다. "한가지가 너에게 필요하다." 여기 39절에 보면 그 필요한 한가지, 그것은 바로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너에게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우리에게도 필수적인 것이고 꼭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가져서 좋은것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 한가지 입니다. 그 첫번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리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택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택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좋은것,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너에게 요구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결정해야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반드시 이 필요한 것을,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것을 반드시 택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듣고 그분을 더욱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42절에서 세번째로 언급하고 있는것은 그것은 좋은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절대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것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것을 또한 잃기도 합니다. 때때로 부모가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주기도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지냅니다. 그러나 또한 여러분은 그 폰을 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에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절대로 그녀에게서 빼앗을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가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것,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잃어버릴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반드시 이 좋은것을 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싶어 하십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택했다. 이 좋은것을 택했다." 여러분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좋은것이며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들이 잃어버릴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제 요한복음 1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가 울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연구할만한 시간은 부족합니다만 마리아가 슬픔 가운데 있을때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발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불평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천사가 나타났을때 사가랴와 마리아가 약간 다른반응을 했던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가랴는 아주 실족했습니다. 사가랴 같은 경우는 불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질문 했지만 마리아는 단순하게 그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앞에 우리가 읽었던 것에 대해서는 마르다가 주님께 와서 호소했습니다. 참으로 그가 염려하고 분주했던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는 32절에서 그의 눈물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31절을 보면 이제 사람들이 그가 무덤에 가는줄로 생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으로 가던것이 아니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참 구주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와같이 주님께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거기에 계셨더면 나사로를 회복시킬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기서 주님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눈물과 슬픔을 주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주님의 발 앞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의 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꼐서 그녀가 우는것을 보았다." 35절에서도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 우리는 마리아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 마리아의 눈물은 주님도 울게 하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우리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참으로 성도들의 눈물을 담는 병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친구에게 우리의 아픔을 가지고 나아가지만 그들은 우리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눈물을, 우리의 슬픔을 주님앞에 가지고 나아갔을때 주님은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히브리서의 가르침대로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그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물을 가지고 그분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슬픔이 있을때, 고통이 있을때 눈물을 가지고 그분앞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 주님의 앞으로 나아갑니다. 참으로 이와같이 자기 형제가 죽은 이 슬픔을 가지고도 우리는 주님의 발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금 읽어본대로 그가 예배하는 것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번째 마리아와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리아가 드렸던 그 예배에 대해서 세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일곱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마리아가 이와같은 예배를 드렸던 것에 대해서 첫번째 얻을수 있는 교훈은 그 예배가 참으로 시기에 맞는 시기적절한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배를 드린 그 시점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아가기 전 입니다. 그것은 너무 이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주님께서 죽으신 이후에 여러가지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을 생각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너무 늦게 주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과 요한복음 12장에서 볼수있는 마리아의 이 예배는 참으로 시기에 맞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떡을 떼는 이 모임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형제들이 감사하는 것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그 형제들의 그 감사를 들을때마다 참으로 그것은 합당하다. 이 예배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와같이 시기 적적한 것들이 예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예배를 또한 준비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할때를 인도해주시는 것을 또한 기다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지 안드릴지를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배를 준비해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첫번째 요점은 이 예배가 시기 적절한 것이었고, 두번째 포인트는 이 예배가 참으로 희생하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가복음 14장에서도 보면 한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우리나라 성경에 "지극히 비싼 향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근이라고 표현이 있는데요. 로마 단위로 약 12온스정도 되는 양입니다. 이 당시에는 아주 큰 양인 것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와 이것을 비교해볼수 있습니다. 그는 백근이나 되는 것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기 마리아는 한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향유 입니다. 이것은 양으로 봤을때 향유로서는 아주 큰 양인 것입니다. 그 집안이 향유냄새로 가득찰 정도의 양인 것입니다. 그 향유로 그 집안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양으로 봤을때는 아주 큰 양인 것입니다. 그러나 질적인 것을 생각해 볼때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나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아주 희귀한 식물이고 이것은 아주 높은, 고산지대에 나는 식물을 원료로해서 만드는 향유 입니다. 이 나드는 바로 그 식물로부터 추출한 향유 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희귀한 식물이고 추출하기도 아주 힘든 향유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순수하게 농축된 것입니다. 그것은 향유 중에서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향유 입니다. 여러분 백화점에 가서보면 여러가지 종류의 향수를 만나볼수 있습니다. 싼것부터 비싼것까지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드향 같은 경우에는 샘플은 볼수 있지만 실제 상품은 보여주지 않고 파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매우 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것이 비싸다고 표현되어 있을뿐 아니라 매우 귀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 보면 이것이 우리나라 성경에 삼백 데나리온에 팔수 있지 않느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1 데나리온은 하루의 일한 삯을 하루 일한 값으로 계산할수 있스빈다. 따라서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가치는 우리가 일년 내내 일해서 벌수 있는 그러한 금액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앞에 예배를 드릴때에 이러한 것들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년치 월급을 바치라고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가치는 얼마의 가치가 있습니까? 그것은 돈으로 칠수 없는 그러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시간을 드려야만 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시간보다 더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성전에 연보궤에 넣었던 과부를 본적이 있습니다. 단지 두개의 동전을 넣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와같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것은 연보함에 넣었다." 여기 이제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희생이라고 하는것을 어떻게 정의할수 있느냐면 단순히 금액적으로 계산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했다고 하는 것은 그 가치를 내가 표기하는 것으로, 어떤것을 포기했냐로 결정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 그것은 값비싼 예배로 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우리의 시간을 또한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친구를 희생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업적을, 나의 직업을 포기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비싸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관한 세번째 드릴 말씀은 오직 주님께만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할수 있습니다. "그런 당연한 것을 질문하십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나드라고 하는것은 사람의 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자기의 죽은 나사로에게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자기의 오빠인 나사로에게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나드를 주님께 사용하기 위해서 자기 오빠에게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12장 7절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십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마리아는 그것을 주님께 사용하기 위해서 계속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로 주님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이 지극히 비산 향유는 마리아가 주님께만 사용하기 위해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배에 대해서 예비할때 형제님들뿐만 아니라 자매님들께도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를 준비할때, 감사를 준비할때 주님께만 드릴수 있는걸로 예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님들은 또한 공적으로 서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100% 주님께 그것을 드리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마리아는 주님께만 드리기 위해서 향유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제 네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예배를 드릴때 완전하게 드렸던 것입니다. 모든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참으로 이것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두고(보관하고) 있었다고 저희들이 읽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향유를 담은 병을 깨뜨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막혀있는 유리병이 깨뜨려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번 깨뜨려지면 다시는 사용할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뭔가 마개가 있어서 다시 막았다 열었다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고나서 다시 막아둘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마개를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더이상 그것은 사용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배울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것들을 내가 가지고자 합니다. 다시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내것으로 갖지 않고 모든것을 다 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만 다 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 많은 형제님들이 또 30분동안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많은 형제님들이 동일한 기회를 가지고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 예배를 드릴때, 다섯번째로 잠잠히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예배를 드리는 이 모든 장면을 찾아보았을때 마리아가 했던 말은 절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떡 떼는 집회를 할때에 참으로 자매님들은 잠잠히 예배를 드립니다. 참으로 자매님들께서 드리는 그 잠잠한 예배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소리내어 예배드리지 않는다 할찌라도 그것이 형제들이 드리는 예배와 비교해 열등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리아의 예배를 통해서 자매님들이 드리는 예배가 주님께 매우 귀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는대로 참으로 그 잠잠히 드렸던 예배가 그 향기 냄새로 그 집안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자매님들께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잠잠한 예배를 드리지만 귀하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섯번째로 말씀드리는 것은 이 예배를 주님께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참된 왕에게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주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고 드린 예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수 있는 교훈을 모임에서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일때마다 주님의 그 머리되심을 인정하고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의 머리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참으로 머리털로 주님의 그 발을 닦았을때 마리아는 매우 낮은 자세로 참으로 주님께 복종하는 자세로 그와같이 닦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주님께 복종하고 여러분들의 머리를 가리고 또 잠잠히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주님께 귀한 것입니다.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덮는다는 것, 이것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자매님들이 잠잠히 섬긴다는것,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천사들을 인하여 그 머리를 덮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가지를 더 말씀드립니다. 형제님들은 공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머리를 덮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드릴때 형제들이 기도 드리고 모든사람들이 들리게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함으로써 형제님들은 공적으로 주님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믿기로 이 잠잠히 있는다는 것은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이제 우리는 형제들이 인도하는 역할을 맏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공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매님들의 잠잠히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순종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은 무언가를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잠잠히 있는것은 주님을 향한 복종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마리아가 드렸던 예배는 지적인, 뭔가를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 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마리아에게 다른사람은 모르고 있는 무엇인가를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여러분들이 아는대로 나사로의 부활을 위해서 잔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잠잠히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른사람은 모르지만 마리아는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는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미리 장사할 날을 위하여 예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마리아는 주님의 장사되심을 알고 예배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배에 관한 일곱가지 포인트를 배웠습니다. 이제 빠르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했던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그가 네게 했던 일들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는 이와같이 표현 하십니다. "그가 좋은일을 하였느니라." 좋은일이라고 주님께서 인정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리아에게 그가 좋은 것을 택했다고 칭찬해 주신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서는 주님께서 이와같이 칭찬해 주십니다. "네가 나에게 예배드린 그것이 좋은 일이다." 그 좋은일, 바로 주님께 드려진 좋은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 마리아의 노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그녀가 할수있는것을 최선을 다하여 하였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 마리아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섬긴 그것을 인정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마리아에게 "저가 힘을 다하여 했다."고 칭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와같이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주님은 그가 한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제 마가복음 14장 9절에 이와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
참으로 우리가 오늘 교제했던 내용이 이러한 말씀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너희들이 복음을 전할때마다 마리아가 했던 일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모임 가운데서 이와같은 마리아의 했던 일도 함께 기념된다고, 전해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 밤에 행했습니다. 우리는 그 마리아에 대해서 방금 교제 드렸습니다. 이것이 저를 그 마리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인정해 주셨을뿐 아니라 그녀에게 상급을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녀가 행한 모든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몇가지 마지막 말씀드릴것이 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자기의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향유는 냄새가 오래 유지되는 향유 입니다. 제가 믿기로 이 향기로운 향유 냄새가 며칠동안 주님의 몸에서 났을 것입니다. 참으로 니고데모가 많은 향유를 가지고 왔지만 나드 향유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나드를 가지고 왔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그 십자가로 가시는 동안에 그 향유 냄새가 주님의 몸에서 퍼졌을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것들을 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그길까지 주님의 몸에서 그 향유 냄새가 났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 향유 냄새는 또한 마리아에게서도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머리로 향유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 향유가 마리아의 머리에 묻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향기가 났을 것입니다. 그 향유는 주님께만 있었을뿐 아니라 그 향유 냄새는 마리아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 그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는 것도 저희들이 배웠습니다. 참으로 그 집은 우리의 모임을 상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같은 예배가 참으로 그 모임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죄송합니다만 한가지 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한 부부가 아주 가난한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에게는 원달러 팔십센트라는 아주 작은돈밖에 없었습니다. 부인의 이름은 델라였습니다. 자기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헤어샵에 팔고 이십달러를 벌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가난하다고 머리를 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집에 21달러 팔십센트가 그 가정에 생긴 것입니다. 이제 그 돈으로 시계를 위한 케이스를 샀습니다. 자기가 가진 돈으로 시계를 담는 박스와 시계에 붙이는 체인을 샀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머리를 잘라서 남편을 위한 선물을 샀고 저녁식사를 남편을 위해서 준비 했습니다. 오후 7시가 되어서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면 6시가 되면 남편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왔을때 남편은 자기 부인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그 남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기가 부인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네주었습니다. 남편이 준비한 선물을 아내의 긴 머리를 빗기 위한 빗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남편이 받았을 충격을 이해할수 있지 않습니까? 부인을 위해서 빗을 사왔는데 부인은 그 머리카락이 잘려져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남편은 부인이 자기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을 보았습니다. 남편 짐이 시계를 위한 박스와 시계 줄을 보았을때 또한 다시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남편이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 남편은 자기 아내를 위한 빗 선물을 사기 위해서 자기의 시계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이상 그 시계를 위한 상자와 체인이 필요없어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것을 팔아 남편의 선물, 시계박스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의 시계를 팔아 아내의 긴 머리를 위한 빗을 샀던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이 선물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을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이 선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 계속적으로 주님을 위한 선한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그 마지막 날에 그것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말씀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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