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번째 폭풍우 : 주님께서 함께하심 > 조나단 블랙 형제님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는 마가복음 4장 말씀을 읽겠습니다. 4장 35절부터 41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35-41).
이 시간에는 세 번째 '마지막 폭풍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후에 더 이상 폭풍우가 없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그 '요나가 폭풍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사도 바울이 폭풍우 속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그 두 개의 폭풍우는 다 피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만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다면 그 폭풍우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 배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조언을 들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폭풍 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게 될 폭풍우는 피할 수 없는 폭풍우입니다. 주님께서 그 제자들을 그 폭풍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그 폭풍우 속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폭풍우는 3일 밤낮을 했던 폭풍우나 몇 달을 했던 폭풍우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게 된 폭풍우는 아마 1시간이나 2시간 정도 지속되었던 폭풍우입니다. 그리고 이 폭풍우는 예상치 못한 폭풍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폭풍우 속에서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은 이제 종 되신 주님에 관한 복음서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종이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만일 여러분들이 종을 고용하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의 아들을 종으로 고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선택하실 때 그분의 아들을 종으로 고용하십니다. 참으로 그분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완벽한 종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기꺼이 자신을 종으로 들리십니다. 참으로 방금 살펴본 대로 이 마가복음은 '종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가복음 1장 1절을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그 주님을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또한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주님을 종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그 맡기신 일들을 완성하는 복음서입니다. 우리는 4개의 복음서가 각각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그 복음서 간에는 또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마가복음 4장은 아주 긴 피곤한 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주님께서 해변가에서 그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작은 배에 오르셔서 그곳에서 가르치십니다. 어두워지고 날이 저물어서 그는 배를 타고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도 동일한 배가 나타납니다. 제가 북아일랜드에서 왔는데요. 그 북아일랜드는 이제 '타이타닉'이라고 하는 배로 아주 유명한 장소입니다. 그것은 벨파스트라는 도시에서 건조가 되었습니다. 그 타이타닉을 만들 때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가라앉게 할 수 없는 배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그 배는 지금 바다 깊숙이 밑바닥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저희들이 한 배를 보게 되는데 이 배는 절대로 가라앉을 수 없는 배입니다. 왜냐하면 그 배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배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기쁩니다. 저희들이 구원받을 때에는 저희들이 주님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 8장에 보면 주님께서 또한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이 폭풍우를 통해서 세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십니다. "우리가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저 다른 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어떤 중요한 단어를 놓칩니다. 그 중요한 단어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그러한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가자."라고,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이제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주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우리는 때때로 폭풍 속에서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가?' 하고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분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 편으로 가자." 그들은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버립니다. 그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 폭풍우 속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항상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이렇게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일한 폭풍 사건이 3개의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서를 때때로 이제 '공관 복음서'라고 불리웁니다. 이제 공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관점'에서 그 복음서를 기술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서를 서로 비교해 가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마태복음과 또한 비교해 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배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그를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데리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들어갔다'고 돼 있습니다. 이제 이 세 개의 구절은 우리에게 다른 교훈을 줍니다.
만일 마태복음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폭풍우가 닥칩니다. 그러나 그때라도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과연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는 곳에 폭풍우가 있는지를 질문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때때로 여기에 성도님들께서 어떤 곳에 갔을 때, 이것이 옳은 곳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때로 영화를 본다든지, 그때 한번 꼭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오겠는가?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오실 때 그분의 마음이 기쁘겠는가?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 앞서 가신다고 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고 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또한 우리 뒤를 따라오시는 주님에 대해서도 생각할 때 참으로 그것은 기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 아주 작은 배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작은 배들이 그냥 함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배들은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아이들을, 소자들을 주님 앞에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배들이 어떤 배들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배들도 주님과 함께 지금 폭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작은 배에 타고 있는 그 사람들도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배는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세상들이 이제 폭풍 속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질병의, 여러 가지 고통 속으로 인생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들의 가족 문제, 가족 간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이제 직장에서도 여러 가지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우리와 다른 점은 그 어려움 속에서, 폭풍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의지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의지할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 폭풍 속에서 드러내십니다. 이 폭풍우 속에서 주님은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분은 또한 '베개를 베시는 주님'에 대해서 나타내십니다. 이제 이 사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주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시는 것이 이 사건의 목적입니다. 여러분들이 마가복음 4장부터 8장까지를 읽어보신다면, 주님께서 그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시는 네 장소에 대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방금 읽은 4장에서는 '창조 세계에 그 능력을 발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5장에서는 그 '악한 영들을 향해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질병에 대해서도 주님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도 주님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참으로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진짜 사람이었다는 것 또한 나타냅니다.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인생의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37절에서 큰 광풍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39절에서는 “아주 잔잔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그 광풍보다도 능력이 있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와 같은 '신성'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하나님이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폭풍우가 그 배에 들이닥쳤을 때 그 배 안에는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신성에 충만히 계시는 주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 안에는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주님의 신성을 매우 강조하는 세개의 장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입니다, 골로새서 1장입니다, 히브리서 1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 주님의 '영원성'에 대해서, 그 '영원한 신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요한복음 1장에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는 이제 주님의 '뛰어나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에서는 주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세개의 각각의 장은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창조자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창조주의 영광'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그분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1장에서는 온 '창조주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첫 맏아들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서는 또한 그분이 '교회의 머리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장에서는 그분은 '온 만물의 기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완벽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 마가복음 4장 38절에서 주님께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걸 통해서 그분의 인성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주무셨다는 유일한 기록이 기록돼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도 이러한 경험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는 결코 잠이 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걱정이 되어서 결코 잠에 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38절에서 우리 주님은 그 폭풍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깊이 잠이 드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 그 배에 들어갔을 때, 그 제자들은 배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주님께서는 이제 쉬시면 됩니다."라고 얘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는 것을 계속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셨으니까 이제는 쉬시고 우리가 배를 운전하겠습니다." 그들은 이 배를 잘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필요한 교훈들을 여기에서도 지금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제자들은 어느 순간에도 항상 주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지금 교훈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태복음에는 이 폭풍에 관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 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그리고 그다음 몇 절 이어져서 23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쫓았더니"라고 하는 그 기록이 있습니다. 이 배 안이 주님께서 머리를 둘 장소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 편안한 베개와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침대는 그 배였습니다. 주님은 아주 피곤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베개에서 주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실 때 제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인성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주무실 때 우리는 '과연 저분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나?'라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부르면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분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참으로 내 인생에 그분을 주님임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지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마르다가 그와 같은 의심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 밑에 있을 때 마르다는 매우 바빴습니다. 주님을 이렇게 섬기느라고 바쁜데 주님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느냐고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돌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주님은 그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얘기하십니다. 이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제자들은 주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깨워서 주님께서 일어났을 때 주님은 그분의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주님께서 그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다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왜 주님은 바람을 꾸짖으셨을까요? 그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통해서 주님은 그 문제의 원인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 바람이 멈췄을 때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왜 그 폭풍우를 불러오셨을까요? 우리는 항상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주님 왜 이러한 문제가 저에게 생겼습니까? 참으로 주님께서 잠잠케 해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만일 그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가 없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자만심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너희들은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왜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내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같이 파도를 잠잠케 하셨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왜냐하면 그가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깁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렇게 맡겼다가 그 짐을 또 내가 다시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나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다 맡겨버리라고 저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염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1시간을 염려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염려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41절에서는 "저희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이 두려움은 폭풍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것은 아주 건강한, 좋은 두려움입니다. 솔로몬이 말했던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잠언 9장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인생을 경험하는 동안 그 인생의 모든 경험의 목적은 '주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가 뉘기에"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어떤 인생의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닥쳐오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배 안에 주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탄 배는 타이타닉과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를 결코 가라앉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탄 배는 막 부딪히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를 데리고 저기까지 가겠다."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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