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덕언 말씀

덕언 : 주님의 나타나심 / 강성찬bro

박이레 2024. 9. 5. 16:22

< 덕언 : 주님의 나타나님(초림) > 강성찬 형제님

디모데후서 1장 7절부터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7-12).

여기서 오늘 특별히 주목해서 보고자 하는 표현은 '나타나다'입니다. 이 디모데후서 1장에서 10절에 보면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또한 그 뒤에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또한 이어서 마지막 부분에 "드러내신지라" 이제 나타나다는 의미를 가진 이 세 개의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첫 번째 나온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이라고 되어 있을 때 이 나타나심이라는 것은 보통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의 재림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제 영광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사용되는 단어가 이 나타나심입니다. 이제 헬라어 원어로는 '에피 카네니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문맥을 통해서 알다시피 이 10절에서는 우리 주님의 재림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초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에 그 가난한 집에 그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었을 때, 이제 그때를 또한 이 단어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 대부분의 신약 성경에서 우리 주님의 이제 재림을 나타내고 있는 이 '나타나심'이라는 단어가 왜 여기서만 독특하게 왜 초림에 사용이 되었을까? 이 '나타나다'라는 단어는 이제 눈부시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재림을 표현할 때에 적당한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그분께서 임하실 때 이제 그것에 대해서 이 단어를 사용해서 주님의 오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이제 초림에 있어서도 그때는 주님께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그 영광 가운데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지만, 정말 사람들 눈에 보기에 그냥 한 아기로, 그 가난한 동네에 사간에 누일 곳이 없어서 이제 구유에 누였지만 그 주님의 초림에 있어서도 밝게 빛을 비추는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것을 주님께서 밝게 빛을 비추셨냐면 이제 9절에 나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두 가지가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 여기서 이제 "오직 자기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9절에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이미 시간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 뜻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그것은 희미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아로 말미암아 베푸실 그 구원의 은혜, 이것은 여러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희미한 상태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그 눈부신 빛을 비추시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사실상 아직 흐릿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 가운데 그 베들레헴에 나섰을 때 이제 그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참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태어나실 때에 빛을 밝게 그 나타나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다시 한 번 보자면, 이제는 예전에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희미하게 있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그 빛을 비추심으로 말미암아 그 뜻과 은혜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망을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사망을 폐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도 이제 빛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사망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사망은 어두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망의 그림자'라는 표현을 하죠. '사망의 그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망은 이제 그 자체도 두려운 것이지만, 사망이라는 것은 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망의 두려움 가운데서 종노릇하며 살도록 그 그림자를 그 그늘을 모든 사람에게 다 드리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그 사망을 두려워하면서 그 얼굴에 그늘이 져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두려움에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그렇게 사망이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빛으로 오셨을 때 그 사망의 그늘을 싹 없애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한 번 죽으셨을 때, 이제 다시 부활하시고 사망 그를 주장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또한 역시 사망이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망은 더 이상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우지는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망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더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의 폐해진 것입니다. 참으로 그 빛을 밝게 비추시는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상황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참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생명인지 어떤 것이 썩지 않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정말 무엇이 생명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물론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 그게 바로 그게 생명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사람들이 누리기 원했던 그 생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 태초부터 계신 영생의 말씀이신 우리 주님을 볼 때에, 그분에 대해서 그분을 듣고 우리가 보고 눈으로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봤을 때, 참으로 그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어떠한 영생의 교제를 누리고 있었는지를 보았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이게 생명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게 썩지 않는, 부패하지 않는 생명이구나. 정말 하나님 아버지와 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아들의 모습 가운데서 이게 바로 영생이구나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처럼 육신을 가지고 임하셨을 때, 그 빛 가운데서 분명하게 알게 된 그런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특별히 여기에 성경은 "복음으로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지라"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할 수 있다는 그 암시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망을 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십자가에서 그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그 사망을 폐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오직 우리 주님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함으로, 우리가 또한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의탁한 것이고, 또한 사도가 디모데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또한 이제 우리에게도 맡겨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래서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고, 정말 이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행했으며 또한 디모데에게 그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일하게도 우리도 이제 그와 같은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명하게 나타내야 될 것을 당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눈에 안 띄게 하는 것입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모르기에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의 반대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빛 가운데서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뭐가 생명인지, 뭐가 썩지 않는 것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 때 정말 눈이 부신 그 빛을, 그 생명이 무엇인지,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낼 그 빛을 비춰야 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들어올 때 눈이 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화려하게 치장을 해서 눈이 부시게 입장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눈이 부신 정말 빛을 나타내는 그러한 존재는 이제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그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 참 우리 모두가 이제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눈부신 빛을 나타내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이제 그와 같은 빛을 또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