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덕언 말씀

덕언 : 합당한 예배 / 강성찬bro

박이레 2024. 4. 26. 15:10

< 덕언 : 합당한 예배 > 강성찬 형제님

요한복음 4장 19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19-24).


여기 이 사마리아의 여자가 이제 주님께 "내가 보니 이제 선지자로소이다."라고 이야기한 후에 이제 갑자기 이제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게 약간 이제 뜬금없어 보이는 이제 말 같습니다. 갑자기 이제 화제를 예배로 이 여자는 이제 돌려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제 이해가 되는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배라는 주제는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제 가장 많은 혼란이 있는 그런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아 이분이 선지자구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 가장 많은 혼란이 있는 그 주제에 대해서 이제 단독 직입적으로 이제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말을 보면 이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여기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게 이 세상에서 예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 혼란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한순간도 예배하지 않고 산 적은 없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제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대로 예배하지 않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상이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가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항상 사람들은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지,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는 모르는 게 이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주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말을 믿으라.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 말을 믿으라. 사실 이 예배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참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정말 예배가 무엇인지, 어떻게 예배를 해야 되는지,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권위를 가지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을 믿으라." 우리는 이 예배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그 유일한 진리, 그 말씀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입술에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예배 대상을 말씀하십니다. 예배의 대상은 아버지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배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엉뚱하게도 대상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장소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디서 예배를 하는지, 그래서 세상에 여행을 하다 보면 멋진 곳에서는 항상 우상들이 있습니다. "정말, 여기 경치 좋다 굉장한데." 딱 그 자리만 딱 있으면 경외감이 드는 그런 장소에 가보면 어김없이 우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장소, 이런 장소는 예배드려야 되는 장소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말레이시아에 저희랑 함께 가신 분들은 알겠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굉장한 동굴이 있습니다. 정말 멋진 동굴인데요. 그냥 놔뒀으면 더 멋졌을 텐데, 그 동굴에 우상을, 신전을 만들어놨더라고요. 정말 동굴 자체로는 굉장히 큰 동굴입니다. 저기 말레이시아에서 오신 형제님이 계셔서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 바토크 케이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여기 놀이터보다도, 놀이터가 한 한 10개는 들어갈 정도 되는 큰 동굴이에요. 높이도 굉장히 크고, 게다가 그 위에는 이제 자연 체광 까지 되어 있어가지고 이렇게 뚫려 있어요. 그래서 빛이 그 안에 들어오는, 동굴인데도 안이 훤한, 이제 그래서 이제 화이트 케이브라고 부르는 이제 그런 동굴입니다. 특이한 동굴이죠. 그런데 그 안에 이제 우상을 만들어 놨는데, 장소는 멋있는데 그 우상을 보면, 참 우상이 코끼리인지, 하여튼 약간 우리가 볼 때는 뭐 조금 이상한 모양으로 만들어 놨어요. 장소는 멋있는데 대상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정말 자기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사람의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참,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이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 아버지시다, 라고 알려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지만 정말로 "너희 아버지"라고 알려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말 우리가 참되게, 우리의 마음을 다해 예배드려야 되는 그 분에 대해서 온전하게 알려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참 우리는 그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그 특권을 이 시대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계속해서 이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22절에서,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예배해야 됩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진정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진리냐? 뭐에 대한 진리냐?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입니다. 여기 보면 그 뒤에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구원'이 성경에 이제 여러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제 구원하시다, 구원하다, 구원받다, 이런 단어가 이제 많이 나오는데요. 이제 같은 이제 어근을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구원이라는 단어가 명사로 쓰인 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명사로 쓰인 게, 주님께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 명사로 쓰인 게 딱 두 번 있는데 그중에 한 번이 여기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그리고 두 번째로 쓰인 곳이 누가복음 19장에서 이제 삭개오에게 "이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렇게 삭개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누가복음 19장에서 나와 있는 그 '구원'이라는 그 명사로 쓰인 단어는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인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변화된, 삭개오처럼 변화된, 어떻게 변화됐냐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두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그 변화된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그리고 첫 번째 이 구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이 부분에서는 그러면 구원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구원하시는 분, 구원자는 유대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분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또한 아브라함의 씨로,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하신 바로 그분, 그분이 구원자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이 구원자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원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에 관한 진리를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일 아침에 모여서 우리 주님에 대해서 기억하고,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씀으로 알게 된 것을 입술의 고백으로 열매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예배입니다.

그리고 23절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22절에서는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이제 여기서 두 가지를 다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이제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령은 영을, 우리의 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그 능력을 주시는 이 성령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 앞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을 읽어볼 때에 13절부터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제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성령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요한복음 7장에서는 또 다시 한 번 성령님에 대해서 이제 물로 상징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7장으로 가셔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그 성령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이제 해석이 39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런데 앞에 성령님과 약간의 하시는 일이 차이가 있습니다. 표현이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우리 배에서 흘러나는 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7장에서는 그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흘러나는 강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그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처럼 흘러나는 것이죠.
앞에서는 솟아나는 샘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 솟구치는 그 샘물처럼 그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위로 올려드리는 그 예배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또한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그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을 힘입어 아버지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참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그분의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힘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날 아침에 이와 같은 예배를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배가 또한 대전 중구에서 계속해서 또한 더욱 새롭게, 신선하게, 또 힘 있게, 아버지께 드려지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