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7년 여름 수양회

< 사도행전04_그리스도인의 샘플 >

박이레 2021. 7. 21. 00:48

2017년 7월 23일 일요일_<뉴욕 플러싱 성도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사도행전04_그리스도인의 샘플 >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9:3-9, 개역한글)

오늘은 사도바울의 구원받는 장면을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1:16, 개역한글)

사도바울의 구원은 본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들의 샘플로 사도바울이 구원받은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쓰신것은 그의 생애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가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변화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사람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가 전에는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다" 그는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개역한글)

그런데 그는 이렇게 변합니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의 죄에 대한 견해가 변화됩니다.
그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불렀다가 자기가 하나님앞에서 참으로 죄인이라고 변화됩니다.

두번째, 그는 예수님을 범사에 대적해야 될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어버린 예수님입니다. 삽자가는 이방인기 볼때는 사람에게 저주받은것입니다. 로마에게 사형인도를 받고 비참하게 죽은것입니다. 유대인이 보기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것입니다.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했어도 설사 부활이 사실이라 해도 죽어버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예수님을 대적해야 할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됩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사도바울과 경쟁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사도바울을 쓰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없는곳에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들로 교회로 모이게 하는것이 사도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은 사실상 5년째 갇혀 있는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1년, 가이사랴에서 2년, 그리고 로마 감옥에서 2년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사도바울을 사도로 쓰지 않고 우리를 쓴다고 입증하기 위해서 경쟁심으로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 경쟁심으로 하나, 무엇으로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됨으로 내가 기쁘다."
그전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범사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이름이 전파되므로 나는 기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변화입니다.

세번째 변화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체포하고 고문하고 그 입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이 나오도록 강요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가 믿는자들이 집에 문을 닫고 있을때 강제로 열고 들어가서 남녀노소를 붙잡고 끌고올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어제 살펴본 밀레도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헤어지는 장면이 이와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우니라>

과거에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을 이제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변화입니다.

죄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형제들에 대해서 그의 태도가 변화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사도바울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변화가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변화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변화하고 싶어합니다. 믿는사람이건 믿지 않는사람이건 다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항상 실패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희게할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자기의 노력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자하는 모든 노력은 실패합니다.
예레미야서는 또한번 이렇게 말합니다. '비누를 쓸찌라도 양잿물로 씻는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외적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내적으로 속이, 마음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적인 시도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시겠다는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의 제안대로 우리가 변화되어 영광스럽게 달라지는 삶을 살도록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시작은 <예수님이 누군가를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주님께 묻는데서부터 그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대답에서 부터 사도바울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을 알때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때 시작 됩니다.

스데반은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또한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스데반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돌에 맞으면서 자기를 돌로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주님을 본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스데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 있을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인줄 알고 믿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밝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저희들도 저희들의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습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어두운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느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것을 알게 됩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시며, 이천년전에 이세상에 살으셨던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분임을 알때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나와있습니다.
사람은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목숨을 버릴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소수 입니다.
혹, 어머니가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뉴스에서 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서 볼수 있는 참으로 드문 사랑입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연약할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세상에서 볼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나의 죄를 대신한 것을 알때, 이것은 하나님만이 보이시는 사랑임을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사람이 두번째로 질문하는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가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면 내가 무엇을 할지가 나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보이신것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이제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말씀들을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불순종 했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거스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뜻을 순종합니다.
이것이 그의 변화의 두번째 요소입니다.

변화중에서 한가지를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주님을 보고 눈이 멉니다.
해보다 더 밝은, 해에게 빛을 주관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눈이 멉니다. 그리고 그가 삼일동안 먹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것은 눈입니다.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활동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자기속에 에너지가 없습니다. 사람은 에너지를 외부에서 에너지를 취해야 합니다.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는 보지못하고 먹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잘못 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힘으로 움직인것이 아니고 육체의 힘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이제 그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때 눈이 멀고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가지를 배웁니다. 이제 그는 배워야 합니다. 과거에 보였던 것의 가치들로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행해야 함을 배웁니다.

두번째로 그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생명이 그에게 있고>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그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면 주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실때 사십일을 굶으셨습니다.
그때 사단이 찾아와 제안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으십시오."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것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이땅에 사람으로 오시기전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경배했던 천사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루시퍼를 따라 타락했을찌라도 그는 과거 예수님의 영광앞에 경배하던 천사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하나님 아들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셔야 합니다.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루기도전에 굶주려서 주님의 육체가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제안합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드셔서 이 육체가 보존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거절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것을 거절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것을 내야 합니다. 임무이고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것은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나보다 더 원하고 계신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빼버리고 행동하지 않겠다 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땅에 보내신 그 아버지께서 나를 살기를 원하심으로 그분이 나를 살도록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주어질때 내 육체가 유지된다." 이것이 주님의 거절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배워야 합니다.
영적인 일을 영적인 방법으로 하는것입니다. 영적인 일을 육신적으로 하는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런일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사렙다 과부에게 보냅니다. 엘리야의 명령이 없으면 비가 없고 이슬도 없게 됩니다. 그 가뭄이 3년입니다. 사람들이 먹고살수 없었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가서 요구합니다. "그 떡을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라"
잔인한 요구 같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잔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져옵니다. 그리고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 살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삽니까? 말씀으로 삽니다.

"나에게 가져오라" 나에게 죽음을 요구하는것 같은 말씀으로 사는것입니다. 떡이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40년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습니다.
그들을 살리시는것은 참된 만나,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배웁니다.

사도바울은 먹지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잘 압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것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믿음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때 그가 첫번째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첫번째로 해야하는것이 침례를 받는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성도에게 침례를 받습니다. 성경은 이같은 일을 계속 기록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성도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구원받은것을 어떻게 겉으로 드러낼수 있을까요?
그가 죽이려 했던 다메섹 성도들에게 침례를 받는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약간 다릅니다.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죄용서를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왜 순서가 다를까요?
왜 침례가 들어갔을까요? 오순절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유월절에 우리 주님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마음으로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속을 모릅니다. 사람의 행동만을 봅니다.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이루어진 지역모임에서 그가 진정 구원받은사람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의 변화된 행동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침례입니다. 침례는 공개적으로 세상에, 유대인들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침례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 성령을 받는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빌립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와서 안수할때까지 성령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은 4장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 사람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때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그리고 사도요한이 줄을 달았습니다.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음이라>
서로가 상종하지 않고 보면서도 없는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구원이 진짜 구원인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그들이 과거에 그렇게 적대시했던 유대인들의 안수를 받고 성령이 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다메섹 성도의 침례를 받습니다. 그것이 그가 한 행동입니다.

주님은 이런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변화되고 과거와 달라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해서 사도행전이 세번 묘사합니다. 첫번째는 저희들이 읽은 사도행전 9장이 있고 두번째는 사도행전 22장이 있고 세번째는 사도행전 26장이 있습니다.
각각 관점이 다릅니다. 사도행전 22장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 구원간증 한것입니다. 그리고 26장은 아그립바왕-이방인 앞에서- 한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도바울이 직접한 간증이 아니라 누가가 기록했는데 이것은 교회를 위한 간증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지만 다소-지금의 시리아 지역-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저의 예상이지만 아마도 10대때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갑니다. 자기 조상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서 그는 거기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웁니다.
사도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 문하는 가장 엄격한 학파였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율법을 배우고 지킵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주님께서 이땅에 계실때에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후에 주님을 만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의 부활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핍박이 일어나고 사람이 흩어지고 또 흩어진곳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런데 다메섹은 그당시 예루살렘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복음이 특별히 회당을 통해서 확산이 되자 사도바울은 적어도 유대인들의 직접 관할하에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이 전파되는것을 용납할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고 가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그가 주님을 만납니다.

구원받고 그는 첫째로 다메섹 교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가 두번째 소속된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세번째는 안디옥 교회에 들어갑니다. 이 세가지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세 지역모임을 통해서 주님을 배웁니다.
그가 첫번째 다메섹 교회 성도에게 침례를 받고 다메섹 교회에 더해집니다. 다메섹에서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다메섹 왕 아레다가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망갑니다. 그가 도망갈때 성벽과 접해진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도망갑니다.
사도바울의 기질같으면, 핍박을 받으면 죽으면 죽었지 구차하게 도망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교회에서 배웁니다. 그가 광주리를 타고 창문을 열어 도망갑니다.

그는 자기의 자존심, 명예보다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뜻을 우선시 하는것을 배웁니다.
차라리 죽는것이 낫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대결하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도망갑니다.

두번째,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 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잘 압니다. 그가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유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자기 의를 구하려고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도바울은 자기의 간증과 그들의 마음을 살수있는 정확한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가 성전에서 기도할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 보낸다>

우리가 어떤 영혼에게 그를 설득할수 있는, 그가 납득할수 있는 그와같은 복음을 증거하면 그가 구원받을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것은 그 말씀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의 마음을 열것인가 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여기는 베드로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는 나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두번째로 배웁니다. 구원받은 후에 내가 잘하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킨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배운것입니다.

그가 첫번째 그가 다메섹 교회에서 배운것은 나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중요하다는것을 배웠습니다. 우선순위를 바꿀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내가 원하고 잘하고 하고싶은 일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해야합니다.

세번째,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서 주님을 만날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킹제임스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때 사도바울이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뭍습니다. 사도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모순은, 사도바울은 바리세인입니다. 바리세인은 부활과 천사를 모두 믿는사람입니다.
사두개인은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없다 합니다. 선지자도 없고 영도 없다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바리세인들로서 사두개인들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것입니다.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재판을 받을때에 한쪽은 바리세인이고 한쪽은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앞에 "나는 바리세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논란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천사를 보고 하늘에서 그에게 말을 했다 한들 맞는 말이 아닌가?"

바리세인들이 갑자기 사도바울편이 됩니다. 사두개인을은 "그러면 안된다" 하고 반대합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모순 가운데 있었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것을 거부하는 사두개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자기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했을찌라도 사실상 그는 하나님을 믿는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종교적이고 열심이었지만 참으로 구원받은자가 아님을 압니다. 이방인이 차라리 나은것입니다.
그들은 몰라서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지적하면 시인합니다.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기 의가 있기에 그리스도를 전하면 거부합니다.

누가 구원받기 쉽습니까?
평소에 죄가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쉽습니다. 죄인이라고 지적하면 아무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용서해주신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도덕적으로 잘 산사람은 복음을 거절합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누가 더 죄인입니까? 부도덕한 죄인과 도덕적인 죄인중에 누가 더 죄인입니까?
하나님앞에서 똑같습니다만 사도바울은 압니다. 도덕적인 죄인이 부도덕한 죄인보다 나을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을 존중히 여기며 복음을 전할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면 안됩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이 오히려 이방인보다 못하다는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예를 듭니다.
바리세인과 세리가 하나님 앞에 갑니다. 바리세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나는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하며 저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는 기도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한것이 아닙니다. 세리는 눈을들어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십니다.
세리의 기도가 바리세인의 기도보다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들이 자기보다 나음을 압니다. 존중히 여깁니다. 이것을 안디옥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교회의 천거를 배웁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1차 전도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갑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은 마가로 인해서 갈라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이 가운데 누가 옳다는 것보다도 사도바울이 한것은 안디옥 교회의 천거를 받아 갑니다.

그는 교회를 압니다. 성령께서 보내신 길을 갑니다.. 안디옥 교회의 천거를 받아 갑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변화가 진정한 변화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진정한 변화를 지역교회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이와같은 변화가 어떻게 됬는지 저희들과 다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네가지가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도 이 네가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감사입니다. 구원받고나면 항상 우리에게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지옥 뿐만 아니라 이땅에서의 우리 삶도 얼마나 피폐해 졌을까요?
자기만 알고 이세상의 흐름을 쫓아 허무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몸을 보이라."열명의 문둥병자가 그 말을 믿고 갔습니다. 가다가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중에 사마리아 문둥병자 하나만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엎드려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감사를 표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머지 아홉은 육체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한명, 감사드리는 한명은 영혼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몸이 깨끗해진것을 넘어서서 이렇게 말씀으로만 문둥병을 낫게 하신 주님을 알고 엎드리고 감사를 표합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바리세인 시몬의 집에 주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셔서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주님의 사역 초기에 바리세인들과 정면으로 부딧치기 전의 일입니다. 그 바리세인은 주님을 초대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습니다. 한 여자 죄인이 예수님께 와서 눈물로 그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시몬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그 여자가 구원받았다는것을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받은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영원토록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두번째, 그는 이렇게 삽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제가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내가 사는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내가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사람이 모든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죽은것은 이제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않고 자기를 사랑하신 이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

첫번째는 감사고 두번째는 나를 위하여 사는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주님께서 내안에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2. 주님 무엇을 할까요? 그는 이렇게 하면서 두가지를 배웁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에 보면 <내게와서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멍에를 메고 삽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삽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때 우리가 느끼는것은 주님의 멍에가 가볍고 쉽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내가 내맘대로 내가 원하는것을 하고 살면 쉬울것 같은데 주님이 계시니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주님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잡할것 같은데, 주님을 순종하는것이 쉽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가볍고 쉬운길이라는것을 압니다. 이것이 통제받고 규제받는것 같아도 이것만이 참된평안과 자유의 길인것을 압니다. 이것이 세번째 스탭입니다.

네번째, 사도바울은 마땅히 할 바를 한것입니다. 당연히 감사드리고 당연히 주님이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길이 쉽고 편안한 길임을 알 뿐 아니라 이 편한 길을 갔는데, 마땅히 할 일을 했는데 주님께서 놀라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상을 주십니다.

그 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번째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어떤 상입니까? 우리같은 허무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상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인정을 받는 상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행한일에 대해서, 영원하고 가치있는 일을 했다는 상을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심판대에서의 상입니다. 사람이 행한것은 불로 시험받습니다. 다 타버립니다. 그런데 불을 통과하는 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했을때 주님께서 영원한 것으로 보상하십니다. 참된 가치있는것으로 바꿔주십니다. 그것을 아는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도바울은 나의 잠재력이 개발됨을 느낍니다. 어떤분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뇌를 1/10밖에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주님을 예배드리면서 우리의 뇌가 개발됩니다. 우리는 사고방식이 개발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새로운 잠재력들이 개발됩니다. 그것을 영원한 나라에서 쓸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때 우리의 개발된 능력이 사용될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면류관을 아버지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가면 영원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살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를 경험하며 알아야 찬양할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을 더욱 높일수 있게 되었다는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변화입니다.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다음, 순종하는 삶, 그는 이렇게 느낍니다. 이길을 가지 않는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이 쉬운길입니다. 그길을 가지 않으면 스스로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는 영원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것을 상으로 받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더욱 많은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간증입니다.
이같은 간증이 사도바울에게만 있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하나의 샘플입니다.
저희들이 다 이같은 길을 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