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0일 목요일_<뉴욕 플러싱 성도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사도행전 01_고난 가운데의 하나님의 섭리 >
사도행전과 관련된 말씀을 네번에 거쳐 교제하려고 합니다.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6-10, 개역한글)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16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행18:12-16, 개역한글)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행18:27-28, 개역한글)
고린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사도행전 18장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메세지입니다.
여러사람이 믿자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복음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회당에서 쫒겨납니다.
그래서 믿는유대인과 이방인과 같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위치는 회당 바로 옆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모임에 갈때마다 회당을 보게됩니다.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회당과 모임이 바로 옆에 있으면서 분리된것은 세상으로부터 간증을 잃는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회당이나 교회나 같은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로 갈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이 많이 아팠을것입니다.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교회가 모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는 이방인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멸망으로 갈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서 참되신, 빛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세운것입니다.
유스도는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도 신이 있지만 그 신들을 버리고 유대인의 하나님께 찾아온, 참되신 하나님께 찾아온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놀라운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메시아가 나타날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을 통치할뿐 아니라 이방인도 통치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예언된것입니다.
그래서 유스도가 구약 성경을 따라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제대로 기능하고 성경이 제대로 기능한 것입니다.
그가 회당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바울이 나타나서 구약성경을 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유스도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쫓아내고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만해도 친절하게 성경을 가르쳐주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나자 돌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섰습니다.
이제 회당옆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만찬을 하고 모이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다가 가는 길이 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고린도에서 이같은 고통을 주시는지 사도바울은 생각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고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배척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이같은 일을 할까요?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어떠한 벌을 결과로 받게 될까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에 있던 고통입니다.
그가 전도여행을 하고 다시 고린도를 방문했을때 그가 로마서를 씁니다. 로마서는 9-11장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리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가 로마서 9-11장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이 회당과 교회가 나뉘게 된 고통이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놀랍게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누가 하나님의 길을 측량할수 있겠는가.>
그는 이 고통스런 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그는 찬양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을때 왜 배척했을까요?
그것이 세상에 대한 간증을 잃어버리고 유스도라는 사람을 실족케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측량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그가 왜 이런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물었을때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가운데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9-11장을 쓸수 있었던 계기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를 대적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하나님은 고린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내 백성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쓰였는지 사도바울은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호세아에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음란한 여자입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입니다.
이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불순종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것은 그들을 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내 백성이 될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아닌곳에서 내 백성으로 불러낼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로암미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호세아서의 내용이 나옵니다.
15장은 안디옥 교회에 율법을 지켜야 함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만 받는것을 토론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이름을 둔 백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 자리에 사도바울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이방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서를 보면 고린도가 얼마나 타락한 도시인지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지않음으로 이방인에게 은혜가 오고 이스라엘이 이를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축복이 있겠는가 하는것이 로마서 9-11장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회당과 교회가 갈리는 고통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해하게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회당을 떠나며 강력한 표현을 합니다.
"나는 너희가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이방인에게로 간다. 그리고 너희 피가 너희 머리에 돌아갈것이다."
언듯 들으면 이것은 복음을 듣지않은자에 대한 저주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런뜻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책임을 다했습니다. 더이상 할수 없도록 유대인들이 그를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모임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로 갑니다.
2차전도여행의 마지막이 사실 고린도가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 연속됩니다. 아볼로가 구원받고 에베소에 있는 아볼로를 고린도로 보냅니다.
아볼로가 와서 두가지를 합니다.
그는 갓 세워진 연약한 고린도를 아볼로가 물을 줍니다. 다시 구약성경을 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것을 입증합니다.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압도적으로 입증해 냅니다.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아볼로는 다시 회당에 들어가서 에수님이 그리스도인것을 다시 제시합니다.
사도바울에 의해서 <너희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하였지만, 아볼로는 다시 성경을 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것을 증거합니다. 은혜위의 은혜입니다.
아볼로는 구원받기 전에 침례요한까지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예수님을 아볼로에게 제시하고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회당에서 침례요한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그 주간에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무슨권세로 이러한 일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대답을 하기전에 먼저 한가지를 물으십니다.
<침례요한의 침례가 어디로 부터냐>
침례요한의 권세가 어디에서 온 권세인지 대답하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은 둘 중 하나를 말해야 합니다. 침례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일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마음을 미리 준비케 한것입니다.
그가 회개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했기에 침례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침례요한의 침례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하면 자기들이 믿지 않았기에 왜 믿지 않았느냐 라는 질문을 받게 될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왔다고 하면 모든 백성들이 침례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므로 백성들의 비난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는지 말하지 않겟다>
침례요한을 넘어와야 주님을 만납니다. 아볼로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침례요한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아닙니다. 회개했는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죄를 시인했는가의 양심문제입니다.
갈리오총독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있을때 유대인들이 교회를 비난합니다. 세상법정에 고소합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종교 단체가 새로운 단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로마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던 종교입니다. 그 유대교가 새로운 기독교를 법정에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오 총독은 이를 거부합니다.
세상 법정은 어떤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분별한 능력도 없고 분별할 의도도 없습니다.
갈리오는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갈리워질것입니다.
유대교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는지 아니면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었는지 갈리워 질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세워집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사도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함께 동역하고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고린도로 온 이유가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 사회를 혼란케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을 다 떠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후에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다시 로마에 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한 활동이 제한처럼 보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사람이 과격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혹은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었는가?' 싶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더이상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수 없게 되었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고린도에서 내 백성을 불러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글라우디오는 곧 죽습니다. 황제가 죽자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다시 로마로 갑니다.
하늘법정에서 가리워질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장막을 만드 기술을 배우는것도, 사도바울이 어릴적에 장막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것도 그들이 고린도에서 만난것도,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분별할수 없습니다.
하늘법정에서, 하나님게서 브리스길라 부부 사도바울, 디도 유스도 이들을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것을 입증 할것입니다.
말씀을 마쳐가겠습니다.
고린도에서 사도바울은 고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 바로 옆에서 모여야 할때에 고통속에 있었을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에 간증을 보이지 못하는것을 고통스러워 하고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해서 괴로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로마서 9-11장을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해보겟씁니다.
우리들의 만족은 어디서 오는것일까요?
저희들이 사도행전 18장에서 알수 있듯이 고통이 없는것에서 오지않습니다. 갈등이 없는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족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물을 마시면 다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만족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무언가 부족한 것입니다.
만족은 어디서 오겠습니까.
첫번째, 구원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완벽하고 영원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잠깐의 만족이 아닙니다. 영원히 안전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하나 들면 압살롬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형 암논을 죽여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암논은 이미 죽었기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압살롬에게 마음이가 그를 그리워 했습니다.
요압이 그것을 알고 압살롬을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집으로 보냅니다.
이런 구원은 결국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분명하게 죄를 처리하지 않고 분명하게 만족이 되지 않는 이 관계의 회복은 반드시 반역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의 첫번째는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받아들여져 있다. 이감각이 있어야 영적인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 9-11장을 써야 했습니다.
두번째,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다 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할찌라도 한걸음 한걸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확신은 거룩을 향한 영적인 써움을 싸우고 있을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수 있는 수단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충분히 주셨다는것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따라 싸우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자 이시고 우리가 승리할수 있는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싸우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 말씀입니다. 알고 여기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다는것을 아는 확신이 우리를 만족스럽게 합니다.
세번째, 지금현재 하나님이 무슨일을 하고 계신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무슨역사를 일으키시는지 알고 그 현장에 있거나 같이 동역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때, 골리앗이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와 대결해서 싸울수 있는사람 하나를 내보내라. 일기토를 하자"
그러나 이스라엘 중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이 말을 40일동안 외칩니다. 그래도 나오지 않자 결국에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형들을 면회간 어린 다윗이 그 소리를 듣고 골리앗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기에 다윗은 그가 살아남을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고 살아남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것을 말립니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자에게 왕이 무슨 상을 약속했는지 묻습니다.
사울왕이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 자기 딸을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일국의 왕의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이 두려워 싸우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왜 싸웁니까,
그는 하나님이 무슨일을 하는지 압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듣고 계시고, 교만한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압니다.
하나님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고 그 현장에 있거나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것을 아는 사람은 만족합니다.
세가지 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영원히 안전하게 받아들여져 있다는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안다, 이 세가지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 만족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세가지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고통중에 있을찌라도 그는 이세가지를 확보했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이 고린도에서 무슨일을 하고 계신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이 세가지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만족한 사람으로 삽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8장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앞에 서서 고통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참된 만족을 얻는 세가지로 우리를 인도하실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에 우리를 위로하고 피차 격려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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