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7년 여름 수양회

< 사도행전02_믿음의 삶과 사단의 공격 >

박이레 2021. 7. 21. 00:47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_<뉴욕 플러싱 성도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사도행전02_믿음의 삶과 사단의 공격 >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19:8-10, 개역한글)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19:18-20, 개역한글)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시 동안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찌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19:23-41, 개역한글)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29-32, 개역한글)

저희가 오늘 에베소에서 있었던 사건을 살피고자 합니다.
에베소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과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분내어 강력하게 반대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이를 살피고자 합니다.
성경이 믿지않는, 혹은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의 일을 기록한것에는 이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사람들이 구원받고 믿는사람들이 교회로 모여 교제하는 이 일이 성도들에게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감사와 감격이 있을뿐 아니라 이 일이 믿지 않는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성경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시아는 로마의 '주' 이름입니다. 로마는 유럽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애굽-를 점령하고 아시아를 점령합니다.
이 아시아는 지금의 소 아시아 입니다. 그 아시아의 수도가 에베소 입니다.
이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표현은 사도행전 5장에도 나옵니다.

열두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바리세인과 대제사장들 이 사도들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교로 복음을 증거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가 너희교를 예루살렘에 충만하게 전하니 이는 우리를 정죄하는것이 아니냐?"

예루살렘에서 열두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증거합니다.
<너희들의 교리를 온 이스라엘에 충만하게 하지 않았느냐>

에베소에서도 나옵니다. 아시아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에게 전하지 않았느냐>

이 구절을 살피면서 저희들이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뉴욕에 있는, 플러싱에 있는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또한 한국에 있는, 서울에 있는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렇게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반드시 사단도 일합니다.

사단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사용해서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저희들은 참 구원받은 성도들의 순교를 압니다. 참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켜냈는가를 카톨릭에서 이단이라고 화형시켰던 사람들의 핍박 목록을 보며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켜냈는가를 저희들이 읽어냅니다.

저희들이 지역교회로 모입니다. 그 지역의 등불입니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전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회로 모이고 반대받는일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살피려고 합니다.

먼저 살피고자 하는것은 폭동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폭동이 해결되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그전에 우선 어떻게 해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이라는 헌신된 한사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하나님의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그 때문입니다.
그는 삼년밤낮 눈물로  에베소를 떠나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통해 아시아의 일곱교회가 세워집니다.

사도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방문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서머나도 방문하지 않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에베소에서 전했던 이 말씀이 아시아의 모든사람들에게 증거됩니다.
이는 그가 에베소 지역모임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헌신된 한사람입니다.

두번째는 깨끗한(정결한) 교회입니다.
그 성도들이 과거에 했던 습관, 마술하는 책을 가져와 태워버립니다. 그 책을 돈으로 계산하니 은 오만입니다.

세번째는 변화된 삶입니다.
그들은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유명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칠대 불가사의라고 알려진 수많은 관광객이 모이고 있는곳입니다. 그 우상 아데미에 대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번도 헤코지를 한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가끔 그런 우스게소리가 들려옵니다.
교회사람이 절에가서 우상이 있으니 그것을 훼손시키고 돌을 쌓을것을 훼손시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 헌신된 한사람
2. 정결한 교회
3. 변화된 삶 입니다.

에베소 교회성도들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들과 대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삶으로 다른 태도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들을 긍휼을 여깁니다. 그들을 위하여 오히려 울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세가지가 합쳐졌을때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기도하는지, 저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되는지요. 가장 필요한것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불쌍한것은 가난한것이 아닙니다. 병든것도 불쌍한것이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에서 이년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헌신된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모든 말씀과 어긋나는것을 없앤 정결한 교회, 그리고 교회에서 배운대로 내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변화된 삶을 살았던 성도들의 삶의 간증으로 인해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 지역이나 한 국가를 변화시키고 싶으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세상이 변화됩니다.

술집이 문을 닫고 카지노가 문을 닫을것입니다. 그럼 그와같은것에서 이익을 얻는사람들이 반발할것입니다.
데메드리오가 이처럼 일어납니다.

그는 첫번째로 돈을 가지고 호소합니다.
그가 은장색의 일을 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갔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가르침,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것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하므로 자기 장사가 되지 않으므로 경제에 호소 합니다.

두번째, 그는 종교심에 호소합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아데미 신전도 소홀히 될까 두렵다"

세번째, 애국심(민족주의)에 호소합니다.
"아시아와 온 세계가 인정하는 아데미의 에베소가 경홀히 여김을 받지 않겠는가"

복음은 이 세가지에 대해서 도전합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수 없습니다.
주님은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사란들은 돈을 위해서 삽니다. 돈이 하나님과 경쟁할수 있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시대, 물질주의 시대에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것을 성경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돈을 버는가, 왜 돈을 버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일 돈을 벌기위해서 어떤 직업을 갖는다면 그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돈때문에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실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분이 하물며 우리를 먹이지 않겠습니까.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답게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는것은 그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의 댓가로 돈을 받는것입니다.
돈을 벌기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에 대해서 분명하게 도전하고 직업에 대해서 도전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수익을 올리는 직업을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직업,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직업, 많은사람에게 접촉하여 복음을 전할수 있는 직업을 오히려 성경이 추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이 직업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을 사람이 아닌 주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복음은 경제문제에 대해서 도전합니다.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관심은 안타깝게도 줄어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땅이 행복하니 주님 어서오시옵소서 라는 소망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가난할때, 집회를 하려해도 돈이 없어서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때에 오히려 영적일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는 가진것이 많아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해낼수 있습니다.

더 많은영적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두번째, 종교에 대해서 성경은 도전합니다. 가짜를 폭로합니다. 참되지 않은것들 말씀과 어긋나는 것들을 도전합니다.

아데미가 참신이라면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신은 믿는자들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세번째 민족주의 입니다.
아시아 사람 에베소 사람, 구원 받으면 혈통이 아니라 진정한 주세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차별없이 모든사람을 은혜로 받으신 그안의 형제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이 세가지를 가지고 에베소 사람들이 데모할수 있는동기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에베소 폭동의 원인입니다.
어떤방식으로 폭동이 일어나는지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군중심리가 작용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왜 분노합니까, 왜냐하면 모독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모독 당했다고 생각할까요. 그들이 틀렸다고 복음이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를 폭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때 사람은 두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자기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를 인정치 않고 복음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때, 그들이 귀를 막고 옷을 벗어둡니다. 스데반을 죽일때 사도바울이 옷을 맡아 둡니다. 그들의 분노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려쳐 죽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형방식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죽일때 더 힘있게 돌을 던지기 위해서 겉옷을 벗었습니다. 그사람을 죽이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분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스데반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강력히 이를갈며 분노햇습니다.
그들은 생각지 않고 자기 마음과 감정을 따라 본능으로 행했습니다.

극장에서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인줄 알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폭동의 방식입니다.

이 일은 결국 에베소 시장이 나옴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는 세가지를 지적합니다.

"너희들의 신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로 아데미 신전을 지어놨는데 전도자 몇이 복음을 전한다면 그 말로 흔들릴 신이 아니지 않느냐?"

"지금 수많은 관광객이 와있다.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야지 대모를 하면 이익이 떨어지지 않겠느냐 이성적으로 행동하라"

"복음을 전하는자가 행동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법으로 해결하라. 그러니 불법집회를 해산하라"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말들을 통해서, 믿지않는 이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간접적으로 증언을 듣는것입니다.
간접적인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이방인들도 인정하는 간증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잠깐 비교해 보겠습니다.
아데미 신전과 그리고 아데미 신전에 다니는 사람들과 우리 주님, 그리고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차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데미 신은 보통 숲의 신으로 알려져 이습니다. 숲에는 많은 동물들이 삽니다. 그 동물들을 보호해주는 여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저희들이 알수 있는것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연의 어떤 동물을 늘 신으로 섬기기 시작하면 사람은 동물만도 못하게 됩니다.

짐승들은 본능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신이 됩니다.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존재가 공격을 받았다고 느낄때 분노하는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래서 아데미 사람들이 아데미신전이 공격당했다고 여겨서 반발하고 모이는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 분노를 표출해내는 방식이 그들이 믿는 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짐승을 숭배합니다.그들은 당연히 본능적으로 행합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아데미 여신은 자기 숲의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냥꾼을 죽이고 숲의 동물을 보호하는 신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와 아데미 신을 믿는 사람의 성품이 다른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며 이렇게 예측합니다. 그가 떠나면 이 교회가 밖에서 들어오는 이리로부터 공격받을것입니다.

그 이리로부터 교회를 방어 해야 합니다.
아데미 신전의 사람들은 아데미신전이 공격당했다고 느꼈을때 분노를 표하고 폭력적으로 바뀝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어떻게 본을 보였는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방어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주님의 임재입니다.

<주와 말씀께 부탁하노니>

두가지 방어수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모일때마다 있는 주님의 임재입니다. 교회가 모일때마다 약속대로 계시는 주님이 교회를 보호할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연약이 있을찌라도 우리에게 잘못이 있을찌라도 우리에게 조건을 찾지않고 구원해주시고 세우신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보호할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른사람들이 막지만 올라갑니다.

아데미 신전에서.. 태반이나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갈때 무슨일이 이러날지 압니다. 자기가 죽을수 있다는것을 압니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를,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피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아데미 신전을 섬기는 자들에게 소중한것은 자기들의 이익이요, 명예이며 돈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른사람을 희생 시킬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기를 희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지옥에 가 마땅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데미 신은 숲에있는 자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사람들을 죽이는 신입니다.
하나님이 다릅니다. 믿음이 다릅니다. 믿음의 표출 방식이 다릅니다.
이 다름이 아시아에 있는 모든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이와같은 폭동에 부딧치게 하였습니다.

교회는 핍박속에서 성장해 옵니다.
교회를 어렵게 하는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번성입니다. 안일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길이 아니라 세상과 대결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큰 틀로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1-15장까지는 복음이 유대교와 싸워서 승리할수 있는가를 입증합니다.
그 당시 유대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많은 형식과 의식을 가진 기존 종교입니다.
그 가운데 이단이라고 불리우는 복음을 들고 새로운 교회가 탄생합니다. 싸워서 누가 이길까요. 유대교의 모든 핍박과 거짓된 가르침을 이기고 복음이 승리해가는 과정을 적은것이 1-15장입니다.

두번째로 복음이 이제는 이방종교와 믿지 않는사람과 싸워서 이길수 있을까요?
그들 가운데 복음이 증거되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 그리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교회로 모일수 있을까요.
그것이 16-20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복음이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승리했습니까. 말씀 때문입니다.

2년간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제자를 만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들어본적이 없다" 다시 물어봅니다. "침례는 받았느냐?" 이렇게 대답합니다. "침례요한의 침례만을 받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침례요한의 침례로부터 주님을 제시하고 침례를 주고 성령을 받습니다.

한가지 생각해볼수 있는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은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다고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답지 않은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말만 믿는다고 하고 영적인 변화가 없고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느냐고 물어보니 구원받은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나와서 두란노서원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그는 말씀의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영적이지 않은것은 주님의 말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침례요한까지 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2년을 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복음이 이방종교와 싸울수 이길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정치권력과 싸워서 이길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도행전 28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가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되 금하는 자가 없더라>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정치권력을 복음이 이길수 있습니다. 복음의 승리를 말하는 책입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가이오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체포되어 연극장에 잡혀 들어갑니다. 복음의 승리를 말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리고 가이오 아리스다고가 연극장에 잡혀들어 갔다는 소식을 사도바울이 듣고 자기가 연극장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말려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들어가려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고 생각합니다.
형제는 형제의 고난을 보고 어려움을 보고 함께 돕습니다.
이같은 마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에베소에 있었던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이와같은 삶을 통해서 저희가 도전을 받고 저희들이 살고있는 가정과 직장과 지역사회가 주님앞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