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7년 여름 수양회

< 사도행전03_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

박이레 2021. 7. 21. 00:48

2017년 7월 22일 토요일_<뉴욕 플러싱 성도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사도행전03_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17-24, 개역한글)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하는 대목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메세지가 실려있습니다. 대부분이 복음 메세지입니다.
오직 이 부분이 사도행전에 성도들을 대상으로 메세지가 실려있는 유일한 대목입니다.

두번째 저희들이 살펴볼수 있는것은,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들어가서 삼년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3년 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낼수 없고 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고 장로들이 세워졌습니다.
장로들이 세워져 있으므로 에베소 교회에 2세대들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로들을 불러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상황과,  우리모임과 유사합니다.
한국에 1960년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1세대들이 세워지고 장로들이 세워지고 2세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들이 주님나라에 가시고 그다음 세대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 메세지에는 사도바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고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가 나타납니다.

사랑에 관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가 오늘의 사도행전 20장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삼년간 에베소에서 주님을 섬겼는가를 네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첫번째, 29절에 보시면 <주님을 섬겼다>라고 표현합니다.
두번째, 20절에 교회에서 <가르쳤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가르치고,

세번째, 21절에는 세상을 향하여 <회개와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게 구도자들에게 한 사역입니다.
네번째, 22절에는 자기 자신에는 희생의 길을 갔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3년간 에베소에서 있었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는 네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심기고 교회를 가르치고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끝냅니다.

"내가 모든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합니다."
이는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을 완수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내용을 하나씩 살피고자 합니다.

첫번째 주님을 섬긴것에 대해서 살피고자 합니다.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저희들이 방금읽은 천거서 에서도 어떤 성도님들을 소개할때 어떤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섬기고 계신, 혹은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계신 형제님이다, 자매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을 섬깁니다. 구원은 섬기기 위해서 구원받은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길때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1.겸손, 2.눈물, 3.시험을 참아내는것 입니다.
이 세가지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저희들이 다 하나님을 지역모임에서 주님을 섬깁니다. 주신 은사를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섬깁니다.
그러면 저희들에게도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겸손과 눈물과 시험입니다.

우선 겸손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항상 우리마음속에 잊지말아야 하는것이 '나같은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이끌어주셨다는 것에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이것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의 역설인데요,구원받고 주님안에서 성장해 나갑니다.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자기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인식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성장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내가 주님을 섬길수 있는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썼던 분이 이런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일이 세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로 놀랄일은 나같은사람이 이 복된곳에 와있다는것에 놀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수록 놀라는 것입니다. 떡과잔을 놓고 감사드릴수 있다는것이 기도할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도저히 누릴수 없는 복된 것임을 잊을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기를 열두사도들과 비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도라 일컬음을 받을수 없는자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떄문입니다.
그런자가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 가면사도바울이 자기를 성도들과 비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성도들 중에 내가 가장 작은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 질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곳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끝난걸까요? 아닙니다. 시기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이 교회에 관한 비밀을 유대인인 사도바울을 통해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이방인 성도들, 교회의 부요와 영광을 누리기로 작정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성도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셨다"

그는 교회를 전할때마다 자기가 전할수 있는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나같은 사람을 불러서 전하게 하셨다는 감격과 이 영광앞에 그는 항상 마음이 겸손해 지는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이말이여> <모든사람이 받을만 하도다>
이 말들이 다섯번 나옵니다. <미쁘다 이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이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들중에 비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다"
그는 자기가 죄인중에 최고 죄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지금 언급한 이 성경은 쓰여진 순서가 똑같습니다.
고린도전서가 먼저고 에베소서가 두번째고 그다음이 디모데전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자기 자신을 낮춰갑니다.
사도중에 비교하다가 성도들중에 비교하다가 죄인중에 비교해도 내가 가장 은혜받은 자격이 없는자다. 내가 주님을 섬길수 있는 자격이 없는자인데 놀랍게 이 자리에 서게 하셨다는 겸손함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해서 그는 이랬을까요?

저희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구원받은 후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간후에 우상을 숭배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교만해지는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잘 섬긴후에 그것을 자기 의로 삼습니다.
다른사람과 비교하거나 원래부터 나에게 이와같은 능력이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시면,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2세대들에게 모압평지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는 고별 메세지가 그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찌어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많은 축복을 누릴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이 모든 재물을 이루었다 말하고 하나님을 잊을까 두려워 하라"

저희들이 하나님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잊어먹습니다.

예레미야 2-3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습니다.
애굽에서 종되었던 그들을, 아브라함의 약속을 근거로 모세를 보내 그 큰 능력으로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축복해주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잊어먹습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어떻게 앗수르에 포로 되었는가를 보고도 같은일을 하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징계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오해 했습니다.

잊어먹은 것은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처녀가 그 패물을 잊을수 있겠느냐, 신부가 고운옷을 잊을수 있겠느냐,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하나님을 잊었도다.>

계시록을 보면 교회도 마찮가지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첫사랑을 잊을수 있을까요? 구원받을때 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 그들은 첫사랑을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고>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주일마다 만찬예배를 주셨습니다. 잊지 않도록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복가운데 있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서서 그 마음이 높아지지 않도록 이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앞에 계속해서 겸손하게 하신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잊지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그는 자기가 훼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십계명의 전반부를 어긴사람입니다.
두번째, 그는 예수님을 믿는사람을 잡아서 그 신앙을 부인하도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을 어긴 자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가 이런일을 하면서도 그 양심속에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자신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죄인중에 괴수라고 말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어먹습니다. 그것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먹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자인지, 그런데 어떤 은혜로 이 자리에 와있는지,
심지어 하나님꼐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대표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놀라운 특권속에 있는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것입니다.

두번째, 눈물입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라고 영어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우셨을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세번우십니다. 첫번째는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십니다. 두번째는 예루살렘 서을 바라보시면서 우십니다. 세번째는 히브리서 2장에 나와 있는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세번 웁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눈물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섬기는 사람의 특권을 압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기도가 있습니다.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에 포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1-3,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웁니다. 그 눈물의 첫번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었을때 경험하게 될 영원한 저주받은 운명에 대해서 그는 압니다.
그래서 구원바지 못한 사람을 보면 그는 울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이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두번째를 보시겠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4,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신약성경으로 저희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입니다.
이를 눈물로 쓴 편지라고 부릅니다. 고린도 전서 후서 사이에 쓴 편지라고 여겨집니다.
사도바울이 울게된 두번째 이유는 육신적인 성도들을 향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향한 눈물, 세월이 지났는데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눈물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많이 말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로 기쁩니다.
한국에는 아이가 없으면 웃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가 없으면 그 집에 웃을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이 복된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자라지 않는다면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눈물입니다.

구원받아놓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않고 여전히 육신적이며 세상의 영향을 받아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성도를 보고 그는 울었습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3:18-1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세번째로 웁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외곡될때 울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외곡하고 훼손할때 그는 울었습니다.

이세가지 눈물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주님을 섬길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물이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또,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세가지가 그의 눈물의 이유였습니다.

더 나아가겠습니다. 세번째는 시험입니다.
구원받으면 바늗시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2-4, 개역한글)

'여기 시험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여러가지 시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모임에서 건강에서 경제적인 문제에서 여러부분에서 시험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이유는 시험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많은분들이 한국에서 부처님오신날에 절에가서 등을 사서 이름을 쓰고 답니다. 거기에 무엇을 썼는지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의 쓴 내용이 비슷합니다.

우리 아버지 사업 잘되고 가족들 병들지 않고 가족들끼리 화목하기를 빕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시험당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려움이 생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구원받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올것입니다. 그리고 시험당할때 이 세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번째, 감정적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두번째, 시험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세번째, 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과해 내서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이 두가지 입니다.
두가지 뿐이겠습니까만은, 가장 중요하게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것이 두가지 입니다.
그 첫번째가 말씀입니다.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양육시키십니다.
중요한 방법이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말씀을 모르면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성장할수 없습니다.
마치 젖먹이 아이가 엄마젖을 먹지않고 어떻게 크겠습니까?

두번째가 시험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성장시키십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날때 하나님이 나를 한단계 성숙시키기 위해서 나에게 이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것은 우리를 어렵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참으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시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사도행전 4-6장은 이 새로 세워진 교회에 대한 사단의 핍박이고 도전입니다.

첫번째 도전은 핍박이고 두번째 도전은 죄 입니다. 세번째 도전은 구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는 이 모든시험을 통과해 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옵니다.

예를들어, 집에 가면 "우리는 대대로 불교집안인데 네가 새로운 종교를 섬겨서야 되겠는냐? 안된다." 혹은, "네가 장손인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너는 조상도 없느냐" 라는 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와같은 시험을 반드시 통과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원으로 인정하지 못할것입니다.
참된것은 주님이 아실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말합니다. 분명하게 믿은자는 그 내적 생명이 겉으로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반드시 통과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날때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성숙 시키고 강화시키고자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성장하게 하고자 하는 놀라운 기회를 주셧음을 알고 기뻐해야 합니다.

저희들이 흔히 농담처럼 시험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만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다른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슬퍼하고 뒤로 물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시험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명이 넘어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햇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매일매일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로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겸손과 눈물과 시험입니다.

두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가르쳤습니다. 저희 입장에서 보면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20절에 보면 유익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무엇이 유익한가요? 성경이 유익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책망과 교훈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모임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첫번째, 그는 공중에서 가르치고 두번째, 각 집에서 가르쳤습니다. 각 집에서는 공중에서 전해진 말씀이 각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전달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가지 입니다. 공적으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이 개인적인 성도에게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가르치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희들이 가르침을 받을때,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충고를 할때 충고하는 사람에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서신을 보면 사도바울은 눈물로 편지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책망합니다. 어떤 사도의 징계를 요구합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가 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도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교제는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로 편지를 씁니다. 사도바울은 어떤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해 냅니다.
그 편지를 디도가 가져갑니다.

그리고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디도가 사도바울의 서신을 전하고 고린도 교회가 순종할것인지를 확인하고 사도바울에게 만나서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드로아에 왔을때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디도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와 사랑 때문에 복음의 문이 열려 있지만 드로아를 더나 디도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디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를 씁니다. 이렇게 그는 씁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그 편지 쓴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입니다.

지적하는 사람은 지적하는 내용에 정당성을 떠나 그 잘잘못을 드러내는데 포인트를 두지않고 그를 교정하는데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받는사람의 입장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때 시므이가 와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가 다윗을 저주할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울집안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너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괜장히 억울한 이야기 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을 후대합니다. 그런데도 시므이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때 옆에 있는 사람이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치고 오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내버려 두라 합니다.
"이 저주 덕분에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시므이에 나를 저주하라고 한 것인지 누가 아느냐?"

이렇게 받아야 합니다.
모임에서 이 가르침이 전해지고 받을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임은 공적으로 가르치고 집에서 가르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교회에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입니다.
복음은 회개와 믿음 두가지 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나에게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섬기고  2. 교회에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고 3.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4. 내 자신의 삶은 희생과 헌신의 길을 가는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때 이렇게 말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제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일을 다했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이렇게 말할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생애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