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로마서 성경읽기(요약) 완료

성경읽기 : 로마서 11장 8-11절

박이레 2024. 5. 11. 00:39
성경읽기 : 로마서 11장 8-11절(요약)
 
8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11:8-11, 개역한글)
 
 
- 장승훈 형제님 사회 :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바울 형제님은 아니라는 근거로 자기 자신을 첫번째로 제시했습니다. 두번째 근거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송사하였을때(3절) 하나님께서는 남겨둔 사람들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제쳐진 이러한 상태에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남겨두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자관원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했지만 예수님의 대답이 자기 생각과 다르자 떠나가버렸습니다.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7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박해지고 일부 택하신 자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8절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사29:10, 개역한글)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개역한글)
 
왜 이 두가지 말씀을 인용하셨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1장 8절은 율법(모세)과 선지자(이사야)의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11:9, 개역한글)
 
밥상은 즐거운 시간, 먹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올무와 덮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편말씀 6편 22-23절 말씀을 인용한 것이고 메시아되신 주님의 슬픔과 반대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시편 6편 말씀을 인용하셨는지 다양하게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8-10절까지 교제나눠 주시기를 바랍니다.
 
- 김윤철 형제님 : 8절 말씀은 신명기 말씀과 이사야 말씀을 합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을지라도 그들에게 깨닫는 눈과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사야 말씀에서도 그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모세 시대에도 그러했으며, 이사야 시대에도 다수가 배척하였으며 소수의 남은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 최재홍 형제님 : 8절에서 "기록된 바"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악했던 것 같이 지금도 이스라엘이 완악한 가운데 있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눈" 이는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할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눈이 먼 것은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상실된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4, 개역한글)
 
"듣지 못할 귀" 복음을 들어도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개역한글)
 
"혼미한 심령"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치 마취가 되는 것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영적인 상태가 감각이 무뎌져서 말씀을 받고 있지만 적절한 행동이나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11:17, 개역한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전하신 복음에 그들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많이 보고 경험했지만 그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9장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는데 그들의 실패와 제쳐짐을 당하는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에서의 내용은 하나님 앞에서 완악한 사람들을 제외하신 것을 떼어놓고 볼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높아질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제쳐짐을 당하는 것은 다윗과 모세와 이사야를 통해서 미리 경고하고 예언하고 계셨음을 또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8-10절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는가를 말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도 유대인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희 밥상"이라고 할때 이것은 최대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되고 거치는 것이 보응이 된다고 있습니다. 이 밥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복이 되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11:10, 개역한글)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시69:23, 개역한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들은 얼마나 조롱하였습니까? 그들에 대한 보응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이를 생각할때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히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번 사랑하신 자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으심을 생각하게 됩니다.
 
- 장승훈 형제님 : 8절 말씀이 이사야 말씀과 신명기 말씀을 인용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때에도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순종했을때 그들을 선태하시지만 그 임계점을 넘어갔을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11:8, 개역한글)
 
심판의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그들에게 보고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시험과 기사를 이스라엘이 목도하였으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께서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형제는 이스라엘의 제쳐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신명기 말씀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옛날에도 같은 잘못을 되풀이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잘못하였을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였을때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같이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거부하는 이 상황에 대해서 놀라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시는 것도 놀랄일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소경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신명기 말씀과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11:9, 개역한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밥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게 거치는 것과 올무와 덫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절기와 십계명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뜻과 정 반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11:10, 개역한글)
 
자기들이 볼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은 더더욱 보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빈다. 등이 굽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힘든일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등이 굽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등이 굽는 것은 인생이 가지는 슬픔이나 수고를 나타낸다고 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지만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면 결국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거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완전히 이와같이 모두 다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의 예가 사도바울이며, 제쳐진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결국 지키실 것입니다.
 
11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11:1, 개역한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11:11, 개역한글)
 
이는 10절까지 말씀한 말씀을 사도바울이 다시 정리하고 있습니다. 형제님들께서 11-12절까지 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의석 형제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 율법을 받고 사는것도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긴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거절함으로서 제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 선한 계획을 여전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이 일을 이방인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방인 가운데 룻과 라합과 같은 여인들이 있고 이방인 가운데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객을 위해서 남겨둘 것을 말씀하시고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쳐짐을 당한것 같지만 열두사도는 전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교회로 들어올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회를 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교회의 시대에 각각의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교회로 모여서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각각을 부르심으로도 이렇게 큰 축복이 있는데 민족적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때에는 얼마나 큰 축복일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하만국은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측면에서 봤을때, 이스라엘 측면에서도 저희들의 측면에서도 놀라움을 이 대목을 통해서 생각해 볼수 있겠습니다.
 
- 장승훈 형제님 : 11절에서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라고 물어봅니다. 이는 더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회복될수 없는 상태냐는 질문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실 것이 없고 행하실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형제님은 그럴수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넘어짐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구원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합니다.
여기서의 이스라엘의 시기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의 구원을 보고 이스라엘이 주님과 주님을 통한 복음을 사모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어 자체는 부정적인 단어지만 이스라엘의 시기는 결국에는 긍정적인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획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2절에서 이와같은 일들이 세상에 부요함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상황입니다. 누군가의 실족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요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11-12절이 온전히 교제가 된것 같지 않기에 다음시간에는 12절부터 교제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