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덕언 말씀

기묘자이신 주님 / 강성찬bro

박이레 2023. 12. 19. 22:27

덕언 : 기묘자이신 주님 / 강성찬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함께 사사기의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13장 17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삿 13:17-20).

여기서 이제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마노아는 우리가 읽은 대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이 의미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올 때에 이제 여러 번 우리 주님을 가르키는 것처럼, 여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마노아에게 사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는 이제 그의 이름을 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특별히 왜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는지, 그리고 그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던 이 시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이제 '기묘'다, 이제 놀랍다, 또는 이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이제 그런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보게 될 때마다 참으로 주님은 놀라운 분임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요한복음 2장에 가서 그런 부분을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주님의 전체 사역의 처음과 끝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우리 주님의 사역의 특징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영혼 가운데서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서는 이제 이 땅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이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몇 구절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9-11).

여기에 이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처음 표적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입니다. 또한 2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행하실 마지막 표적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8-22).

여기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시점에서, 이 표적은 아직 행하신 일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먼저 주님께서 마지막에 행하실 표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처음 표적과 그 마지막 표적을 보게 되면, 공통점은 첫 번째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표적도 그 연회장은 '알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표적도 유대인들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제자들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나중에 알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모두 기묘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기묘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참으로 옳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움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특별히 이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그 시대에 그 삼손의 부모에게 그렇게 대답하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삼손의 시대가 어땠는지를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이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억압을 받고 있던 때입니다. 제가 억압이라고 표현하긴 하였지만, 우리가 삼손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억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과 친하게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던 그런 시대입니다. 블레셋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특별히 홍해를 건너지 않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이라는 뜻 자체가 이제 '이주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홍해를 건너지 않은, 참 유월절 피로 구속받지 않은, 이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스라엘이 들어온 가나안 땅에 함께 거하면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적인 종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형식적인 종교인을 이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은 이 세상적인 종교를 상징하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블레 사람들과의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태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들을 그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제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묘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대로 섬기고 있다면, 그냥 사람들의 수준으로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어. 예수님은 이렇게 이렇게 섬기는 것이야."라고 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이제 세상적인 종교와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제 금방 우리는 세상적인 종교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 유대인들을 보면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유대인들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내 생각에는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 하면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멀리서부터 짐승을 가져오지 않고 이제 돈을 가지고 와서 성전에서 그것을 다른 짐승을 사거나, 성전에 드릴 수 있는 돈으로 바꾸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성경에도 그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돼." 하면서 하다가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였지만 이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 알고 있어, 라고 하면서 자기의 생각대로 계속 진행되 가다 보면 금방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이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 혼인잔치의 일도 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보면 이 가장 기쁨이 있어야 되는 결혼식, 그리고 그 가운데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서 주로 어떻게 행하는지도 보게 됩니다. 연회장이 말한 것처럼 포도주가 항상 부족하니까,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고 이 사람들이 취한 후에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제 안 좋은 포도주를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쁨을 주고자 하지만, 결혼식이니까 이제 기뻐해야 되고 그 삶 가운데 이제 기쁨이 있어야 되겠지만, 사람들의 능력으로 그것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하니까 거짓된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속임수를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도 그렇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이제 자기의 방법대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세상적인 종교로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께서는 기묘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이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에 대한 열성으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주님의 근거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놀라운 주님께 의지해야 됩니다. 이 기묘한 주님께 의지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하면 되겠지.'라고 하는 순간, '포도주를 이렇게 사용하면 되겠지.'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된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면 되겠지.'라고 하는 순간 이제 세상적인 종교에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나는 기묘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이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이 주님에 대해서 계속 놀라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주님에 대해서는 이제 알 만큼 알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온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그분은 기묘자이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묘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셨는지 기묘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주님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을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 그냥 오늘을 어제처럼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우리는 금방 유대인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특별히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께서 신선하게 주님을 기묘자로 기대하면서 계속적으로 섬기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