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3장 : 1차 전도 여행에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사도행전 계속 나가고 있는데요. 사도행전 13장 말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6절부터 39절까지 사도바울의 긴 복음 메시지입니다. 한번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침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16-39).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45).
여기까지, 사도행전 13장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을 받아서 전도 여행을 세 번 떠나게 되죠. 1차, 2차, 3차, 이 세 번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방 땅에 복음이 증거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로 모이고, 그게 이제 우리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지금 이렇게 교회로 모여 있습니다. 이 동일한 일이 이제 약 2천 년 전에 사도바울에 의해서 지금 1차 전도여행니까, 이게 터키 지역입니다. 성경으로 치면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걸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그가 무슨 복음을 전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기가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원래 있었던 안디옥이 있었고요. 안디옥 교회가 있고 여기는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안디옥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모이고 있는 거죠. 그 회당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의 내용이 뭐였는가? 저희들도 복음을 전하죠. 그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뭔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과 동일한가? 이런 것들을 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내용이, 이게 이제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의 내용 가운데 가장 길게, 사도바울 메시지 가운데 가장 길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전도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도 메시지를 사도 바울이 어떻게 전개시켜 나갔는가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하면 뭐냐?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39절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이게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메시지는 이런 겁니다.
첫 번째,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다." 선언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의 결심으로, 혹은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서 하나님이 의롭다 할 사람이 천하에 없다, 이걸 말한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런데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그런데 의롭다 함을 얻을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을" 이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고 얻을 수 있다.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받으심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함이 가능하다. 그다음에 두 번째, "믿는 자마다" 그런데 그걸로는 충분하고 불충분하고 믿어야 된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누구며 무엇을 하셨는가를 믿을 때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게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성도님 생각에는 저희들 복음과 동일하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리고 반응을 보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45절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반응, "변박하고" 그러니까,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변박했으니까 이것을 반발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말이 되냐 틀렸다, 이렇게 변박하고 그다음에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보통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고 하면 어떤 비난을 하냐면,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그런 소리를 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죠.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는다라고 하면 이러면 이거 이제 무질서해지지 않느냐? 부도덕해지지 않느냐? 라고 하는 비난이 들어갑니다. "아니, 그럼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면 믿음으로면, 행위는 엉망인데, 그냥 믿었다 하면, 그 사람 아주 못된 사람인데 살인자고, 도둑질하고, 이런 아주 악한 사람인데,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의롭다함을 얻으면, 그러면 이 세상의 도덕, 마땅한 질서, 이런 건 다 어디로 가는 거냐?" 이게 이제 비방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대답했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제 진행을 보면 16절에 이제 사도 바울이 이제 강단에 가서 이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제 손짓하고, 우리 같으면 인사하고 이제 이렇게 하는 거죠. 손짓하고, 그다음에 "이제 잘 들어보십시요, 제 말을." 그렇게 이제 16절에서 이제 도입을 하고 17절부터 이제 내용이 나갑니다. 내용이 나갈 때 이제 어떤 걸 말을 하냐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의도는 내가 전한 이 복음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하는 내 이 메시지는 새로운 게 아닙니다. 새로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에 이미 입증된 내용입니다. 이건 구약에 있는 겁니다. 내가 새로운 메시지를 받아서, 이 당시 분들은 전부 이제 구약 성경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겠죠. 유대인이니까, 구약 성경 가지고 열심히 이제 말씀대로 이제 주님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안식일에도 회당에 나온 분들이죠. 그분들에게 나는 구약 성경과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미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사도바울의 첫 번째 의도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세 사건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세 가지 사건을 듭니다. 첫 번째 사건은 17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이게 이제 출애굽해서 가난안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들어갈 때까지, 여기 돼 있죠. 약 450년간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았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지킨 백성이냐? 아닙니다. 이들이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이게 이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20절, 이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면 이제 주의 깊게 듣는 거죠. 자기들 이야기니까, 열심히 듣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이 은혜로 구원받은, 그들의 행위는 엉망이지만 행위로는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 주신 두 번째 시대를 듭니다. 사사 시대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시대를 뜹니다. 21절부터 22절까지 왕을 세운 시대,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은 이제 대표적으로 사울 왕과 다윗 왕을 듭니다. 그래서 왕정 시대, 이 세 시대, 출애굽 시대, 사사시대, 그리고 왕정 시대, 이 이스라엘 역사의 큰 세 시대를 들어서 이 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함으로 구원받았냐?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를 입증합니다.
그럼 다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17절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행 13:17).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출애굽할 때 저희들이, 이제 구약 성경을 보면 출애굽할 때 모세가 이제 하나님 말씀대로 가서 이스라엘 바로왕에게 내 백성 내보내라, 바로가 안 내보내려고 그러죠. 그런데 이제 여기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큰 권능'입니다. 이제 안 내보내려고 하니까, 이제 모세가 바로한테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징계가 10번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이제 장자 죽고 할 수 없이 내주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분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데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내겠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그렇지 않아도 애굽에서 이렇게 종 돼서 맨날 벽돌 만들고 고생했는데, 드디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니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냐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열 재앙 가운데 계속 투덜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저기 이야기하니까 바로가 "이것들이 신체가 편하니까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이제는 지푸라기 주지 말고 벽돌을 만들라고 그래라." 그래서 바로가 더 강퍅해집니다. 바로가 더 강퍅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어떻게 말했냐? "당신이 와서 우리만 더 어려워졌다. 구원은 뭔 구원이냐? 당신 때문에 우리 삶이 더 어려워지지 않았냐?"라고 원망합니다. 그들이 모세를 환영하고, 모세가 바로에게 당신 그러면 예를 들면 메뚜기 재앙으로 한번 온 애굽 땅을 어렵게 만들고 그러면, 바로가 "아이고 안 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보내줄게."하고 나서 다시 회복시켜주면, 또 마음이 강퍅해가지고 막 이와 같은 과정이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 경배드려야지, 이렇게 한 적이 있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큰 권능으로" 하나님이 그 위대한 그 놀라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그들을 건져내셨을 때, 이스라엘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를 반대했었답니다. 그들이 행위로만 보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꺼낼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꺼내셨습니다. 왜요?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의 후손을 가나안 땅에 두고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라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한 겁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이제 잘 아는 것은 그 광야죠. 이제 출애굽 한다음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이게 명백하죠. 출애굽 1세대들이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한 명도 안 빼놓고, 여호수아, 가렛 두 명 빼놓고, 출애굽 했는데, 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는데, 그들이 광야에서 이 놀라운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갔느냐? 아닙니다. 전부 원망하고, 불평하고, 죄 짓고, 그래서 전부 죽인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번도 그들의 행위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 적이 있었느냐? 이스라엘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광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죠.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다 죽고, 가나안 땅 다 와서는 어떻게 못 들어간다, 그래서 또 다 죽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죠. 이걸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에 가나안 땅 들어간 거,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들어갔나요? 아닙니다. 첫 번째 성, 여리고성 그들이 13바퀴 돈 것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간 거죠.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나서 그들이 한 게 뭡니까? 아간이 범죄해서 아이성에서 또 전투 지고 한 거죠.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강하고, 믿음이 있고, 힘이 있어서 가나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사도 바울은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백성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시대는 사사 시대, 사사 시대는 저희들이 너무 명백하죠. 그러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았느냐?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 첫 번째 말씀 뭐죠? 우상을 두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율법 중에 첫 번째 율법이죠. 그럼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서 행복하게 살았냐? 아닙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죠? 전부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했죠? 이방 민족의 침략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사사를 일으키셔서 구원해 주셨죠. 그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이후에 이제 실수했으니까, 다시는 우상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겼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저희들이 이런 이야기, 이렇게 하면 항상 저희들 이야기입니다. 이게 저희들이 구원받았어도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냐? 저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하여간 사사 시대, 계속 엉망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한 번도 그 율법을 순종하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은 적이 있었느냐? 없답니다.
그다음에 이제 넘어갑니다. 사도바울이 계속, 아마 이제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그 회당에 앉아 있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를 쭉 들으면서 느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행위로 봐서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적이 없었구나, 이렇게 인정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왕정 시대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을 세워주십시요, 이렇게 하죠. 이게 합당치 않은 요구였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대한 불만입니다. 사사 시대에 어떻게 돼 있었냐면,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말씀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이방 바로 옆에 있는 민족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십니다. 식민지로 삼아버리죠. 전쟁에서 지는 거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이제 이방 민족 오면 우리도 싸워야 된다. 그래서 우리도 전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군대를 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그걸 뭐라고 그러죠? 그냥 그전에는 다 일반 백성들이에요. 그러다가 전쟁할 일이 있으면 그때 군인으로 모집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죠. 군대의 숫자는 적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하고 전쟁한다 그러면, 전 세계에 이스라엘 청년들이 와서 참전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래서 잠깐 훈련시키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전쟁에서 못 이기는 거예요. 평생 전문적으로 전쟁만 싸울 수 있는 군인을 양성해야 되는 거죠.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거죠. 외국이 전부 그렇게 하고 있었거든요. 하나님 군대를 보유해야 됩니다. 그래야 뭐 안 싸우지, 싸움에서 안 지지, 그냥 평소에 농사 짓다가 갑자기 이제 뭐죠? 기드온이 모여라, 그러니까 그때 가서 이렇게 전쟁하고 했더니 이게 안 되는 거죠. 다윗이 입증을 한 거죠. 전쟁은 무기로 하는 게 아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하죠.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가노니"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맨날 말씀드린 거죠.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한 번도 강해서 이긴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외국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약해서 진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전부 뭐 때문이죠? 순종했을 때 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안 싸웁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싸우지만, 전쟁은 여호와께 있으니, 전쟁의 승패는 무기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전략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시느냐? 믿음으로 살 때 승리 주십니다. 언제 이스라엘을 패배시키지요? 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전쟁에서 이기려면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전쟁은 항상 이깁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할 생각을 안 하고 뭘 했다고요? 군대를 양성해서, 강한 군대 잘 훈련돼 있고 좋은 전략을 쓸 줄 알고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군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왕입니다. 그리고 이 군대를 이제 명령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왕을 두려고 하는 거죠. 이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제 사무엘이 그랬죠. 걱정이 돼서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달라고 하는데요." 하나님 반응이에요. "그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나를 버림이라."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으로 싸우게 하는 이 전쟁 안 하겠다는 거죠. 자기들이 외국보다 더 강한 군대를 보유함으로써 전쟁에서 지지 않겠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이걸 입증하십니다. 이스라엘 너희들이 싸워가지고는 못 이긴다, 라고 하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사울 왕을 세웁니다. 사울 왕을 세우고 그다음에 누구를 내놓죠? 골리앗을 내세웁니다. 사울은 골리앗과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 사울을 보면, 사울은 왜 왕이 됐냐면 전쟁하기 위해서 왕으로 세워진 거거든요. 그런데 그는 적어도 블레셋과의 전쟁은 한 번도 안 합니다. 겁쟁이입니다. 골리앗이 40일간 아침 저녁으로 말합니다. 한 명 나와서 나랑 싸우자.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 어떻게 하죠? 두려워 물러가니라. 누가 골리앗과 싸울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 덩치, 그 훈련 정도, 그 무기, 아무도 못 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입증한 겁니다. 너희들 방법으로는, 너희들이 왕을 세워가지고는, 너희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왕인데,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골리앗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골리앗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하고 못 싸우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세워서 골리앗을 이기게 하셨냐면, 다윗을 세워서, 다윗은 군대에 징집되지도 않은 막내 아들입니다. 위로 이제 8명이 있었는데, 위에 3명의 형이 군대를 갑니다. 징집됐죠. 나머지 4명은 나이가 어리니까 징집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맨 막내니까 양을 칩니다. 그런데 그가 가서 골리앗을 죽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전쟁은 어떻게 하면 이기냐?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냐? 그가 훈련받아서? 그가 무기가 좋아서? 그가 용기가 있어서? 다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로는 전쟁에 못 이긴다. 다윗이 왕이 돼야 이긴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가장 강국을 이룹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가 왜 그렇게 이스라엘이 강성해졌냐? 다윗이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제 왕정이죠. 그런데 이 왕정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이스라엘은 혹은 사울 왕은, 하나님이 세운 왕을 죽이려고 하고 핍박해서 이스라엘 바깥으로 쫓아버립니다. 그래서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아기스로 도망가고 이렇게 되죠. 이게 왕정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은, 출애굽부터 가나안 시대, 사사 시대, 이스라엘 역사를 쭉 훑어온 거죠. 왕정 시대, 여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은 그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의롭다을 얻을 수 없었답니다. 그걸 이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대로 골리앗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다윗, 그를 하나님은 왕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내가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죠. 그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뜻을 그에게서 다 이루겠다. 다윗에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겠다라고 한 거죠.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뭐죠? 그리스도를 오게 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거죠. 그래서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신 거죠. 조금 더 밑으로 가보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 경우가 예수님에게서 그림자처럼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웠는데,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상하죠.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죠. 다윗 때문에 골리앗도 이겼고요. 다윗 때문에 자기 머리에 있는 두통도 해결됐고요. 다윗을 장군으로 세웠더니 전쟁에서 이깁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요? 이유가 딱 하나입니다. 시기심입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이렇게 말했거든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거든요. 사울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원치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돼야 돼요. 그런데 왕도 아닌 것이, 사실은 미래의 왕이죠. 하나님이 택한 왕이죠. 그가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그리고 못 견디는 거죠. 이게 시기심입니다. 이게 지금도 저기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것이고,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것이고, 이게 인간의 기본적인 왜곡된 욕망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상한 거죠. 그래서 이제 사울이 다윗을 핍박했던 것이, 이게 이제 그림자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대목을 잠시 보겠습니다.
26절 보시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훑어오고 그다음에 이제 당대 자기 시대로 이제 이야기를 옮아갑니다.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행 13: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예와" 그다음에 이제 "하나님을 경뢰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이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회당에 와 있는 거죠. 이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셨거늘"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뭐였냐 그러면, 구원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죠. 구원의 말씀을 보내주셨는데 27절, 죽여버렸습니다. "예수를 정죄하여" 예수님을 마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듯이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28절, 죄가 있었냐? 예수님을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죠. 그런데 빌라도에게 죽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의 비극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죄를 지었는데 가장 커다란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를, 그들을 위하여 보내주신 약속했던 그 메시아를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잘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냐? 이 같은 이스라엘은 이제 멸망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혹은, 버려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29절, 이건 다 예언된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아신 것이다. 예언된 것인데 그래서 저들이 죽이고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이렇게 둔 거죠. 그다음에 30절,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 저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 죄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대신 용서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냐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31절, 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두셨습니다. 베드로도 보고, 막달라 마리아도 보고, 이렇게 본 거죠. 엠마오로 가는 제자도 보고, 여러 가지 예수님이 실제로 이들도 원래는 부활을 못 믿었습니다. 부활이 있을 거라고 예상 못 했어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주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래서 주님을 봤어요. 도마도 봤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이렇게 본거죠. 증인들을 주셨어요.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 증인 중에 한 명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거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부활을 통해서 이제 약속을,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부활도 지금 사도바울은 계속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새로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하려고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에 이미 이 복음이 예고돼 있습니다." 한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세 번, 세개의 구약 성경을 듭니다. 이 구약 성경이 뭐냐 그러면, 메시아의 부활을 약속한 구약 성경 3개를 듭니다. 첫 번째입니다. 시편 33절 보면, 시편 2편입니다. 그다음에 34절은, 이사야서 55장 3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밉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다음에 30절에 있는 대로 시편 2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하는 말씀, 그다음에 또 하나 36절,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리라." 시편 16편, 이 세 구약 성경을 듭니다. 시편 2편, 이사야서 55장, 그다음에 시편 16편, 3개를 듭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세개의 말씀을 들어서 메시아고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을 어떻게 말했냐? 첫째, 예수님을 살리셔서 "너는 내 아들이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잠시 보겠습니다. 보통 예수님을 저희들이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 규제에 근거하면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이해할 때는 이렇게 이해하거든요.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아들'을 그런데 이 시편 2편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게 사람이 되셨다가, 이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게 이제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시편 2편에 예언돼 있다 이렇게 한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이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그럼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은혜를 베풀겠다. 다윗에게 은혜로 무엇을 주시겠다고 한 거예요. 그게 뭐냐 그러면, 시편 16편에서 그게 설명이 돼 있는데 썩지 않게 하겠답니다. "썩지 않게 하겠다." 모든 사람은 다 죽으면 썩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썩지 않게 하겠다. 너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실 텐데 썩지 않겠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에게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있죠. 그러니까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하느냐면,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다윗에게 약속한 은혜를 직접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내용은 뭐냐 하면,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부활하신 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분이 부활하심으로,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것을 39절에 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으셨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하는 증거가 뭐죠?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하나님이 기뻐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걸 근거로 39절, 이제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못 했습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안 됐는데 이방인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서 하나님이 의롭다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입증된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주셨는데, 그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믿는 자들이 의롭다함을 얻는 이 방법입니다. 이걸 이제 39절에서 제시한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을 힘입어" 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피를 가지고 오셔서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신 이 예수님 때문에, 그다음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제 몇 가지 복음에서 몇 가지 대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건 이제 한문으로 하면 한 단어로 하면 '칭의' 이렇게 표현합니다. 의롭다고 부르는 겁니다. 우선 첫 번째입니다.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이지, 의롭게 된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불러주세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는 '신분'은 의인이지만 의롭다고 불러주셨지만, 그의 '상태'가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저희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롭다함을 얻고, 그다음에 계속적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이걸 성화라고 합니다. 이 과정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이제 됐다가 아닙니다. 이제 칭의 된 다음에, 성화 과정을 거쳐서, 주님을 만나면 영화롭게 돼야 합니다. 이게 이제 의롭다함을 얻는다에 관한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누가 의롭다 함을 얻었냐 하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십니다. 의롭다 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 문제를 가지고 재판받지 않습니다. 이게 로마서 8장 1절이죠.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나니" 그는 재판받지 않습니다. 그게 이제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그가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 필요하죠. 예수님을 믿는 게 필요한데, 하여간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만 달려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추가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은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얻는다라고 하는 것이 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가겠습니다. 이건 성경을 약간 읽고 오겠습니다. 사도행전 14장 12절부터 읽겠습니다. 이게 이제 지금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 가운데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2-18).
잠시 이해를 위해서 8절을 보겠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행 14:8-10).
13장은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있었던 거고요. 14장은 갈라디아 지역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서 이제 루스드라고 하는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가, 이게 앉은뱅이가 사도행전 3장에도 나오죠.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그 앉은뱅이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러니까 그건 구걸하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제 성전에 이렇게 들어가니까, 그 앞에서 뭔가 돈을 좀 주나 이렇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에게 있는 게 있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그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그분의 능력, 이걸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랬더니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여기는 약간 다릅니다. 여기는 이제 사도 바울 앞에 앉은뱅이가 있었어요.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그 안에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영적으로 본 거죠. 믿음이 있는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발로 일어나라." 이렇게 합니다. 그랬더니 그가 일어납니다. 이걸 보고 당시 그 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이 이건 신이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살아있는 신에게, 사람이 되어 오신 신에게, 이걸 이제 신으로 여기는 거죠. 그래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이건 쓰스다, 이건 뭐 허메다, 그래서 제사 지내려고 막 이제 예물을 가져온 거죠. 그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혹시 하면 안 될까요? 이들이 막 신이라고 생각하니까, 저기 그래 내가 신이 다 맞다. 그리고 내가 신인데 내가 말하는데 복음을 믿어라, 그러면 안 될까요? 그렇게 안 하고 이 헛된 일을 하지 말아라.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 믿어야지, 무슨 제우스가 있는 게 아니고, 저기 쓰스나 허메나 이런 게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다 우상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성경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의롭다고 불러주는 겁니다. 아직 의롭지 못해요. 그래서 상태까지 의롭게 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할 거냐? 이건 이제 배워야 되죠. 구원받고 교회로 들어와서 이걸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었어요. 그 사람은 율법을 어떻게 해야 되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시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은혜로, 믿음으로,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은 뭐냐? 우리를 의롭다 못한 거다, 이것은 죄를 깨닫기 위해서 주어진 거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하고 상관없다. 그래서 무법주의로 가면 안 됩니다. 율법인데 상관없다. 구원 받았는데, 구원받기 전에도 구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라고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금 1차 전도여행 때, 사도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가 뭐라고 복음을 전했는가? 그다음에 그가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가 뭐라고 말하냐? 율법을 지켜야 된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하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게 1차 전도행에서 사도바울이 보이고 있는 복음의 모습들입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16장으로 가시겠습니다. 16장으로 가면 이제 2차 전도여행이 되는데요. 차수를 계산하지 않고 하여간 사도바울이 계속 이방 지역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계속 보겠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행 16:2-3).
그다음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저희들이 뺐는데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15장에서 이제 논쟁을 합니다. 15장에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제 바리새파들하고,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율법을 지켜야 된다. 그리고 율법 중에서 대표적인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이방인에게 가르치자,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도 율법 지키고, 할례도 받게 해야 하자, 라고 말하는 겁니다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이 반대합니다. 이방인은 율법은 누구에게만 주어진 거죠?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도 못 지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방인인 구원받은 성도에게 다시 멍에를 메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안 지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세개를 말을 하죠. 목매어 죽인 것과 피와, 이런 걸 하는 거죠. 이건 구원의 요소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유대인들을 위하여 절제해야 되는 것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건 이제 사도행전 15장에서 나눈 거죠.
그리고 16장에서 놀라운 것은, 사도바울은 15장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한례 주는 걸 반대합니다. 그런데 16장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줍니다. 왜요? 15장에서 막, 15장에서 이 논쟁을 뜨겁게 하거든요. 할례가 뭐냐? 그걸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되냐? 이건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다. 그래서 싸워서 할례 절대 안 된다고, 그런데 디모데에게 할례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복음의 증거에 대해서 원만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렇죠. 우리 생각에는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았으니까, 이 사람들이 산당에서 쓰스니, 앉은뱅이 고쳤다고 막 신이라고 생각할 때, 신이라고 하고 복음 전하지 뭐, 이거 이용해서, 그렇게 안 합니다. 율법의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금하신 것을 따릅니다. 그리고 할례를 통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할례받는 것, 적극 반대합니다. 그래놓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줍니다. 사도바울은 왜 이랬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모순돼 보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알죠. 사도바울이 디도에게는 할례 안 줍니다. 디도는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절대 할례 안 줍니다. 디모데는 왜 줬죠?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음으로 디모데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받은 디모데가 유대인들에게 일하기 위해서, 그 구도자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할례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 그리스도인은 할례 절대로 안 돼, 이렇게 하지 않고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허락하고, 그리고 혹시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절대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저항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율법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가? 그래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율법은 완전히 폐기되어 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1차 전도행에서 사도바울의 삶을 통해서, 또 사역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저희들이 전하고 있는 복음, 사도바울이 1차 전도행에서 전하는 복음과 같은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사람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다음에 실제로 그의 삶에 있어서 행동을 할 때, 그러면 뭐 율법의 첫 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이거 막 무시하고 살았는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하거든요. 이제 앉은뱅이 고치고,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막 제사를 지내려고 해요. 그걸 막아요. 결과가 어떻게 되죠? 막았어요. 그랬더니 결과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그들에게 실망감을 줬는지, 사도바울을 신으로 인정하던 그들이 갑자기 사도바울을, 물론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겠지만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죽습니다. 거의 죽을 뻔합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가 우상의 신 대접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태도가 뭐냐? 그렇게까지 율법을 반대했는데, 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줍니다. 그래서 이걸 겉의 표면적인 논리로만 보면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게 주님의 선하신 뜻인지를 계속 이렇게 분별해 가는 것이 이제 사도바울의 1차 전도 중요한 특징이고요.
제가 저기 설명을 확실하게 잘 못했습니다마는 이 세 가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가 부활한다, 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구절들, 사도바울이 세 개를 들었는데요. 이 구절들을 보면서, 이 구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 부활해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의 중요한 특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자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개념을 여기서 잡을 수 있고요. 그다음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합니다. 내가 너에게 내 뜻을 다 이루게 하겠다라고 하는 게 거룩하고 미쁜 은혜를 주겠답니다. 다윗에게, 그리고 그게 뭐냐 하면 썩지 않게 하겠다는 겁니다. 다윗은 죽어도 썩지 않는다. 그런데 다윗에게 적용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우리 주님에게 그 약속이 성취된다. 이게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을 들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구원, 율법의 행위로는 이스라엘이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적이 없고,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온 민족인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이와 같은 복음의 관점이, 참으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관점이 돼야 되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돼야 되고, 주님께서 이 같은 복음으로 이방 땅을 편만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복음을 정확하게 잘 이해하고, 또 이 복음을 잘 증거하고, 그래서 저희들 가운데 성경적인 구원, 또 구원받은 후에 성도의 삶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 그리고 이게 율법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고 정말 살아있는 생명으로 할례를 누구에게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하고 하는 분별력 있는 삶, 이제 이런 것들이 1차 전도 여행에서 사도바울 사역을 통해서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합당한 지혜를 주시고 또 성경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주님을 말씀대로 이렇게 따라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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